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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변호사를 찾아서, '사람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
안녕하십니까,
민주시민 여러분, 해리부선 회원여러분!
한 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날씨입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고, 세상의 한 곳에선 여전히 우리의 이웃들이
다치고, 아파하고,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긴 말 필요없이 이 곳에 모인 모든 회원님들은 김부선씨의 소송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모두 같이 마음 속 깊이 그녀의 승소와 웃음을 희망합니다.
하지만, 아직 현실은 우리의 간절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429 위헌기각, 712 항소기각처럼 '사회의 정의'는 제대로 세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확신하는 김부선씨의 무죄와 '대마비범죄화'의 정당함은
사법부의 보수성, 기회주의적 태도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삶의 기록인 '역사'가 보여주듯,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한계를
넘어 결국 '정의의 물결'은 그 줄기가 가늘 수 있어도, 결국 여러 곳에서 모인
작은 물결과 합쳐지면서 '대양'을 이루고 만다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낱 직업법조인들의 '밥그릇 장난'에 지나지 않는 판결문에 우리가
기죽을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보고, 당장 할 일을 찾고 할 수 있는 바를 미루지 말고
실천하는 일이 우리 앞에 있을 뿐입니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며, 김부선은 역사재판에서 이미 승소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 정확히 말해 '김부선 소송'이 처한 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무엇보다 '대마비범죄화' 주장이 담긴 소송인 '현행 마약류관리에 대한 법률(이하 마약법)의
대마관련법규 중 단순흡연부분에 대한 처벌규정이 지나친 형벌조치이다'는 요지의
'위헌법률심판신청제청'(이하 위헌신청)이 지난 429 수원지법 담당판사에 의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인 "대마초 처벌 법 조항은 형벌을 가함으로써 신청인의 행복추구권을 제한하고 있지만 대마의 오남용을 방지해 국민보건 향상이라는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이므로 헌법에 합치된다"
는 논리로 기각되면서 6월 2일 헌법재판소에 '위헌신청의 연장이자 최종심으로서의' 헌법소원(이는
일반적 헌법소원과는 다릅니다.)이 신청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난 712날의 '개인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같은 담당판사는
“피고인은 대마초 흡연과 소지를 처벌하는 법률이 위헌이라며 항소했으나
관련 법 조항은 피고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았고 평등의 원칙에도 위반되지 않으므로 피고인의 주장은 이유없다”
는 사실상 '위헌기각'의 사유와 같은 이유로 1심 판결인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에 추징금 2만3000원 선고를 동일하게 유지하는 판결을 냈고, 이에 대해 지난 7월 15일자로 대법원 상고를 신청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현재 부선씨는 대단히 안타깝게도 담당 변호사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간단히 줄입니다.
지금껏 부선씨의 재판을 이끌었던 담당변호사에 대해 지난 후회나 아쉬움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정말 한 마디만 감추지 않고 말하자면, '인권변호사'란 그 자체 '동어반복'이란 말씀입니다.
변호사는 무릇 의사와 함께 사회와 개인의 건강을 지키는 의무를 가진 직업인이며, 의사가 구체적인 환자의 신체질환을 당연히 최선을 다해 고쳐야 할 의무가 있다면, 변호사는 사회적 병질환인 사회적 약자와 특히 심하게 '사법처우'당하면서 상처받은 사람을 당연히 '건강한 사회인'으로 낫게할 의무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의 부선씨 담당변호사가 보여준 노력은 당사자인 부선씨가 만족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할 치료법이었을 뿐 아니라, 이미 두 번에 걸쳐 맥없이 제대로 '수술도 못해본 채' '사회적 환자'인 부선씨의 '형벌상처'를 낫게 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제 그렇다면 정말로 부선씨의 상처를 낫게 하고, 이 '치료'가 성공한다면 다른 모든 '단순대마관련인권상처'를 가진 분들에게로 '의료혜택'이 가게할 '용한 인권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정말로, 우리 모두의 도저히 씼을 수 없는 '인권상처'인 '대마관련범죄'라는 부당한 상처와 그 흉터를 지워버릴 진정한 '인권변호사'를 찾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요즘처럼 "'황금만능주의', '금전지상주의' 세상에서 어떻게 '돈도 없이 제대로된 인권변호사를 찾느냐고"
그럴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께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법조계가 갖는 보수성, 기회주의를 고려할 때, 도대체 '대마비범죄화', 아니 '김부선 무죄'를 받기 위한
비용은 얼마냐고."
그 소송을 이기게 해줄 그 유능한 변호사는 도대체 얼마를 지불하면 찾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대법원과 함께 사법부를 움직이는 헌법재판소의 재판장이 최고재벌로부터 높은 보수를 받고 일한 경력이 있고, 그럼에도 그 재벌의 '헌법소원'을 다루는 책임을 갖는 상황에서 무엇이든 돈만 있으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그럼, 정말 우린 '많은 돈을 모아, 그 재벌들이 쓰는 그 천문학적인 돈을 모으면' 대마비범을 이루고, 김부선 무죄를 입증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 모두의 자랑이자 사랑인 부선씨의 소송에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지난 해 10월에 시작한 항소심과 동시에 신청한 '위헌신청'에 대해 공동적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같이 변호사를 찾고, 같이 소송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월초 문제제기와 토론을 걸쳐 민주적으로 조직된 해리부선 까페 내 '비대위'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소송을 구체적으로 준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생각보다 효율적으로 소송을 지원하지도, 그 준비과정에 참가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소송을 '대미비범죄화'라는 당당한 '인권과제'이자 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 변호사의 수동적 자세때문이었습니다.
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난 총 14 주에 걸쳐, 매주 토요일 11시부터 약 4시간 이상식 이루어졌던 '비대위초론회'에 담당변호사는 단 1회에 걸쳐 약 10분 참가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 김부선 소송과 개인 팬까페인 '해리부선'에 담당변호사가 상세하거나 분명히 소송진행과정이나 일정이나, 변론전략이나, 그 외의 모든 지지자들의 참가를 유도할 어떠한 설명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소송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공판참가자께 '행동주의' 말씀(즉, 너무 판사 앞에서 밉보이는 행동을 삼가해라는 식의 규율학습 류: 지난 3월8일 공판을 하루 앞둔 글)나 아니면, 갑자기 '내가 일정을 잘못 알았고, 이 번 공판이 대마비범관련 마지막 공판이다'는 급보(지난 419 공판을 1주일 앞둔 상황에서 올린 알림 글)이나, 아니면, '429위헌기각' 후 아무런 설명이나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공지가 없었고, 또한 갑자기 올린 '헌법소원신청서'에서 '항소이유서'와 동일한 원고를 이 곳에 올렸을 뿐입니다.
628개인항소심 공판이나 712 선고공판을 앞두고, 얼마나 부선씨가 당황했는지, 힘들어 했는지 환기할 이유가 있을까요? 공판에 참가하신 회원님들의 관찰처럼 너무나 짧은 20초 남짓의 변론과 우물거려 들리지 않는 목소리, 사실상 '모든 것을 각오하고 마치 사형대'에 오르는 기분으로 혼자 임한 선고공판 등, 단지 지지자인 우리들이 바라본 바에 의해도 담당변호사의 노력은 너무나 미흡했고, 수동적이었습니다.
한 번 정면으로 만나 담당변호사께 제대로 여쭙고 싶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김부선 소송이 단지 한 개인의 소송이 아니라, 수많은 대마관련인권피해자들에게 초유의 관심인 '대리소송'인 것을 모르고 그랬습니까?
우리들이 모두 잘못된 사회적 통념대로 '마약쟁이'고, '삼류시민'이어서 그랬습니까? 아니면, 솔직히 말해 '소송비'가 작아서 그랬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김부선이란 여배우가 재벌급 스타가 아닌 현재는 '그저그런 한물간 40대 여배우'여서 그랬습니까?"
어찌 되었던 지금 생각해도 치솟는 분노를 참기 힘듭니다.
왜 김부선 소송을 맡았는지 궁금할 뿐 아니라, 왜 그렇게도 우리들 지지자들을 무시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냉정하게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미비범죄화' 주장의 처절한 인권과제로서의 의미를 확신하고, 부선씨가 지난 20여년의 세월을 통해 부당하게 당한 '사회적 폭력'을 제대로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대로 변론할 '인권변호사' 아니 '진짜 변호사'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모든 이유에서 아직도 마음 속에 살아 있고, '진짜변호사'가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준 한 분을 다시 되새기고자 합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는 위대한 변호사였습니다.
변호사가 가장 중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가장 위대한 변호사' 중 한 분이었다는 사실은 제 자신 온몸으로 느낍니다.
이 '빈곤한 인권바겐세일'의 시대에 그 분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향수'가 아니라, 그의 정신을 이어 받은 제2, 제 3의 '조영래'를 기다리고 찾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확인하자면, 전 86년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을 기억하고, 그 사건이 오늘 날의 김부선 사건과 구체적으로 '똑같은 사건'은 아니라고'사실관계구분'하지만, 사실상 그 자체 지난 20년의 시대의 변화를 감안할 때, 실은 '똑같은 인권사건'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이도 비슷할 뿐 아니라(김부선 61년생, 권인숙 64년생), 두 분다 실은 '여성'으로서 갖는 '성차별'과 '성착취'와 관련된 피해자십니다.
권인숙씨가 구체적으로 당시의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전국민적 민주항쟁 속에서 공권력 형사에 의해 '성고문'을 당했다면, 김부선씨는 같은 시대에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로' '에로배우'가 되고, 간주되고 지난 20여년의 긴 영화인생을 '강요된 거짓퇴폐이미지'에 의해 '영화 속의 화냥년'을 모두 맡아야 했습니다.
부선씨의 '당당한 아름다움'은 사회적 폭압의 공기 속에서 '에로티즘'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시대의 '그때 그사람들'은 '그녀의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가장 저질스럽게 농락하며, '마약쟁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도 그 잔인무도한 가해자들은 권력자이고, 재력가란 이유로 아무런 피해없이
여전히 건재하고, 사회적 관심 속에 결혼도 하고, 가정도 유지하고, 재력도 유지합니다.
그리고 공권력은 역시 부선씨가 그 숨막히는 군사독재의 유일하거나 몇 개 않되는 탈출구였던 '당시 시대의 연인 애마부인'이었다는 이유로, 근거없고, 인권말살적인 처벌우선주의 약물정책인 '약물복용자 일괄처벌' 조치에 따라, 또 '그녀의 아름다움이 갖는 위험한 매력'에 따라 '마약퇴치 공식 홍보모델'처럼 다루고, 그녀의 모든 인권과 사생활을 짓밟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시대 속에선 '아름다운 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그건 퇴폐적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꿈꾸게 하고, 건전한 군사독재의 폭압성을 고발하니까 말입니다.'
지난 해말 발표되어 아직까지 세상의 화제인 '딴지인터뷰 김부선편'처럼,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삶이 어려워도 검찰의 표적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마흡연자이며, 항상 감시 당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저로 하여금, 역시 학벌중심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서울대출신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부활하고, 지금은 어엿한 대학교수가 된 권인숙씨에 대해 김부선씨가 어쩌면 더 심하게 '고문'받고 있다고 믿게 합니다.
토요일이 되는 새벽이고, 제가 쉬는 시간이어서 말이 너무 길어 졌습니다.
그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린 정말로 '권인숙양 사건'처럼 진실로 인권을 대변해주던 바로 그 '조영래' 변호사의 열정을 이어받고, 그 진정한 '정의사회실현'(이는 어처구니 없이 80년 광주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국민살인을 저질렀던 쿠데타전범이 만든 정당 '민주정의당'과 그 정권의 슬로건이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배운 '진짜변호사'를 필요로 합니다.
현재 돈도 바닥났고, 외동딸 어렵게 키우는 근거인 그녀의 생업 'Nikita'까페도 영업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이 땅의 '진짜변호사'님들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시어, 이 시대의 '권인숙' 인 '김부선'씨의 소송을 제대로 맡아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 사례는 무엇보다 우리들 민주시민, 대마비범주의자들의 지지이며, 평생 잊지 않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소송에 필요한 최소비용에 대해선 '소송비용모금'을 통해서라도 충분히 마련할 것이니, 이 글에 담지 못한 그 수많은 한맺힌 사연을 알고 싶고, 아직 그 상처가 두렵고, 아파서 앞에 나서지 못하는 수많은 대마인권피해자님들의 절규를 듣고 싶으시다면, 당장 망설이지 말고, '해리부선'까페에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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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조금 '취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하 고 조영래변호사에 대한 간단한 약력과 설명을 싣습니다.
출처: 마인자이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mindzeye/120007083703
"당신이 많이 많이 그립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대구 출생. 196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중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한 이유로 정학처분을 당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밀수 규탄, 6·8부정선거 규탄, 3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년 6개월간의 복역 후 만기출소하였으나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하여 6년 여 동안 수배를 받으며 피신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민주화운동에 전력을 다하면서, 전태일(全泰壹) 정신의 계승을 위하여 3년 여의 각고끝에 《전태일평전》(부제: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였다.
1980년 3월 수배가 해제되면서 복권되어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하여 1982년 수료하자 변호사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1984년 망원동 수재사건의 집단소송, 1986년 이경숙사건(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1987년 박길래사건(상봉동 진폐증사건), 장미숙사건,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및 ‘보도지침’사건 등을 변론하면서 노동·빈민·공해·학생관련사건 등 인권변호에 진력하였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및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도 역임하였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가 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관여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그 당시 주류 판검사 또는 고위직 검찰, 법관에 종사했던 자들이 누구였던가?...
현재 딴나라의 전신인 민정당을 옹호하고 관습헌법이라 뭐라해서 헌정질서를 교란하며 설치는 작자들... 바로 군사독재의 시녀들이 아니었던가?
[경향신문 2004-09-19 18:00]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가.”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변호사 조영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론 요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권인숙 사건의 변호인단 199명을 대표해 며칠간 밤을 새워 쓴 글이었다. 흰 한복 수의를 입은 피고인석의 권인숙도, 변호인석의 변호인들도, 방청석의 민가협 어머니들도 모두 함께 울었다. 그날 검찰은 그녀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정녕 무엇이었던가.
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은 경기 부천시 소재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라는 친지의 이름으로 취업한다. 이른바 위장취업이다. 이듬해 6월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된다. 관련 사실을 거리낌없이 시인했으므로 그 다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6일 새벽과 7일 심야 두번에 걸쳐 조사계 형사 문귀동은 뜻밖에도 5·3인천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추궁하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행과 고문을 자행했다. 자신의 성기를 고문의 도구로 쓰면서 뒷수갑이 채워진 저항불능 상태의 여성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협박했던 것이다.
권인숙은 극한적인 수치심과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며칠간 고통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던 권인숙은 드디어 다시는 이 땅에 추악한 공권력으로부터 희생당하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중대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조영래·홍성우·이상수 등 변호사들이 접견을 하러 찾아왔다. 권인숙은 젊은 미혼 여성으로서의 수치심과 앞으로 받게 될지 모를 엄청난 수난을 각오해야 했다.
공권력의 추악한 타락상은 조영래 등이 작성한 고발장에 의해 삽시간에 전국에 알려졌다(그녀는 사건 진상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이름 없이 ‘권양’으로만 불렸다). 7월3일 권인숙은 문귀동을 고소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바로 이날 그녀는 공·사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다. 문귀동은 이를 틈타 곧바로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권인숙을 맞고소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검찰은 7월16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권인숙이 성적불량자, 가출자이며 급진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다. 아울러 고소·고발장에 나타난 문귀동의 혐의는 인정되지 않아 기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국의 보도지침에 따라 각 신문의 1면은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폭행만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에 변호인단은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도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한편 야당과 재야가 연대해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는 토요일인 7월19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개최했다. 명동은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몸싸움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다. 7월27일 서울 성공회 집회를 시작으로 청주·이리(익산)·부산·대전·광주로 이어졌다.
8월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하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낸다. 이 재정신청을 심리한 서울고법은 10월31일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발장의 범죄내용 대부분을 인정했지만,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라는 권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조영래 등은 재정신청 사건과는 별개로 9월1일 권인숙의 변호를 위해 199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릴 준비에 임한다. 12월1일 인천지법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다. 이날 선고가 끝나자 부천경찰서 성고문공동대책위는 “싸움은 이제부터다. 성을 도구화한 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라 군사독재와 그 하수인임이 드러났다”며 방청객과 함께 어용 재판부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87년 2월 항소심 법정에서 분노는 폭발했다. 민가협 회원 이중주(민정당사 점거사건로 구속된 서울대생 이기정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권인숙의 진술을 도중에 막는 것을 보고 격분,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고 고성으로 항의했다. 법원 정리에게 끌려나가던 중 그녀는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외쳤다.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
이틀 후 그녀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신성한 법정을 모독한 죄였다. 구치소에 입감되는 순간, 그녀는 외쳤다.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이 엄마가 너희 곁으로 왔다. 권인숙 재판부 하고 싸우다 들어왔다. 엄마가 왔으니 같이 더욱 힘내서 싸우자.” 복도 양쪽 방에서 함성과 환영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변론 요지서)
대법원은 6월 항쟁 이후인 88년 2월9일 끝내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은 89년 6월 사건 발생 3년 만에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22살 처녀가 폭력적인 정치권력과 정면으로 대결해 결국 승리한 사건이었다. 군사정권의 총체적 부도덕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국내외에 알린 지극히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권력의 수족으로 전락한 검찰과 경찰, 이들을 원격조종하는 정체불명의 공안당국, 당근에 길들여진 언론, 불의한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한 사법부 등등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민족모순이 먼저냐, 계급모순이 먼저냐는 운동론으로 분열돼 있던 진보진영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여성문제는 격렬한 정치투쟁에 가려져 있었으나, 이 사건은 이후에 활발한 페미니즘 담론을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묻노니, 치욕스런 정권의 하수인이 된 관련자들 중에 스스로 반성한 이가 있는가.
.....................
끝
첫댓글 마르코님 잘 읽었습니다 부선님에게 큰 힘이 될 변호사가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그간 알게 모르게 당해왔던 대한민국 독재식민문화를 깨 나가는데 아주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드렸으면 합니다.
조영래 변호사가 그립습니다...한여름 밤. 꿈같은 일이 제게도 생겼으면 좋겠습니다...마르코님 고맙습니다 ^^ 구치소에 입감되는 순간, 그녀는 외쳤다.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이 엄마가 너희 곁으로 왔다. 권인숙 재판부 하고 싸우다 들어왔다. 엄마가 왔으니 같이 더욱 힘내서 싸우자.” 그,엄마가 보고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