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신문 ♤ 시가 있는 공간] 동지(冬至) 색종이 / 심상숙
심상숙 추천
동지(冬至) 색종이
심 상 숙
노란 색종이 오려 도화지에 척 붙였더니 애기 동지였어
상현달 반으로 접혀 팔랑이고
발목에 목양말이 내려오는데
동치미 항아리 벌써 바닥을 보이지
무 대가리도
길가는 청년 종아리 같아서
간이 맞아야 웃어
눈썹 짙은 눈사람 하나 골목 귀에 세워두고
마당에 짚단거적 들추지
눈석임물 같은 동치밋국 양푼 가득 퍼낼 때면
올차게 당기는 땅 냄새
선사시대 움막 아낙이 되고
동굴 속 수렵도 이지러져야
동치미 국물맛 우묵해지는 거야
사과 배를 동치미 독 밑에 접어 두는 건 귀신도 몰라
삭힌 고추에 청갓 얹어 소래기 여며두면
쏟아져 내리는 싸락눈도 맛으로 우러나지
잠자던 사내아이 잿간에 오줌 누다가
눈감은 채 숨 쉬는 냄새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적
행주치마에 생강 쪽파 향
행랑 할멈 김칫독 그러안고 꾸는 꿈
밤새 들락거리고
연탄 골에 쓰러진 이에게 새도록
동치밋국 동이 째 퍼다 먹이더라는 동장군 이야기
큰바람에 가랑잎 숨고 대문 경첩 헐거워지면
동지팥죽 새알 그릇 나란히
이집 저집 고사 떡판에
동치미 무 두툼, 쪽 달 떠 오르지
색종이를 오리는 동안 동지(冬至)는 가고,
정월 보름 대추찰밥이 더 달아지는 동치미 무쪽
보소! 동장군이 한달음에 언덕배기로 줄행랑을 놓더라고
설 지난 동치미는 벌써 본마음이 아닌 거지
무 대가리도 때가 맞아야 웃어
동지 지나 설, 대보름을 다 쇠고 나면
발목에 목양말이 흘러내리는데
내 안에 색종이 달 환히 여물어 둥싯, 나이 한 살 더
살이 오르지
(심상숙시집, 『슬픔이 세상에서 하는 일』 108쪽, 천년의 시작, 2024)
(심상숙전자시집 『겨울밤 미스터리』 6부, KOLAA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2024)
[작가소개]
심상숙, 추계예대문예창작과졸업(2018), 『시와소금』 으로 등단,
《광남일보》신춘문예, 여성조선문학상, 목포문학상, 김장생문학상, 김포문학상,
문예바다 공모시, 매일시니어문학상, 예성천문예대전입선,
올해의좋은시500 「돌배나무가 건넨 목간 」( 2022),
올해의좋은시500 「아미蛾眉, 붉은등을 켜야 할 것이어서」( 2024)
김포문인협회회원, 시쓰는사람들 동인, 시포넷 동인
[시작 노트]
겨울밤은 깊어가고 미명의 바람 소리 휘돌아간다. 누군가는 춥고 깜깜한 한데서 일을 끝내지 못했거나 들어가 누울 마땅한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다. 등을 눕힐 포근한 자리 가까이 넉넉했으면 좋겠다.
따끈한 한 모금의 미음을 넘겨드려야 할 노인도 있겠다. 추워지는 날씨에 가족과 오순도순 둘러앉는 저녁이면 좋겠다.
어렸을 적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굴뚝같은, 대바늘뜨기 벙어리장갑 털실 뭉치 같은, 골덴바지 주머니 속 손바닥에 비비던 호두 알 같은, 어두운 골목에 찹쌀떡 소년의 발소리 같은, 정다운 것들이 살아나는 동지 冬至를 앞둔 겨울 저녁이다.
오늘에서야 필자도 동치미를 담근다. 동치미는 해마다 초겨울에 담그었는데 사는 게 달음박질 같다. 사흘 전 씻어 소금 절여 둔 동치미 무 항아리에 사과 배 귤, 생강 마늘, 쪽파 생배추포기를 씻어 넣고 청갓을 얹어 수석으로 눌러두었다.
윗 소금으로 천일염을 한 줌 뿌려 두고 소주 한 병을 끼얹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움켜 간을 보니 간간하다. 날이 추워져 더디 익겠지만, 병폐 없이 잘 익을 것이다. 구정까지의 식량이다.
며칠 후 삭힌 고추를 띄워 살얼음 동동 띄워 내면, 식탁은 어머니 손맛, 할머니 손맛, 풍미 있는 옛이야기로 꽃 피우겠다.
글 : 심상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