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이 울었습니다. 김수현작가의 개인적인 걱정도 보였고, 하고 싶은 말도 들었고, 그런데도 한없이 작은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울어야 했습니다.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건 책을 보건 통째로 모든 내용이 남지는 않지요. 절절하게 감동으로 전해지는 한마디, 혹은 한 구절이 그 드라마나 책을 두고두고 기억하게 하는데, 천일의 약속 또한 그러합니다. 아무리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작가의 글이라고 해도 모든 대사들이 가슴을 울리거나 남지는 않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11회를 보면서 김수현 작가의 개인적인 걱정과 바람, 그리고 강수정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말을 보고 배웠는데요, 노작가에게 결례가 되는 생각일 지는 모르겠지만, 서연 고모부의 대사를 통해 잠시 김수현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 약한 모습과 바람까지도 본 듯해서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서연의 고모부는 3년전에 암수술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번회 아들 장재민(이상우)와 정기검진에 관한 대화를 나눴지요. "2년 남았어. 얼른 5년이 지났으면 좋겠어". 대부분 암은 발병후 5년 이내에 재발되지 않으면, 완치가 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기에 고모부의 말을 듣는 순간, 김수현작가의 바람을 고모부를 통해 말한 것은 아닌가 싶더군요. 2008년 유방암 수술을 받았던 김수현 작가, 조기발견이었고 간단한 수술이었기에 예후도 좋다고 김수현 작가가 직접 밝히면서, 김수현 작가의 유방암 수술소식이 큰뉴스가 되었던 것이 생각나서 말이지요. 수술 후 '엄마가 뿔났다'를 집필을 하고, 이후 '인생은 아름다워'에 이어 '천일의 사랑'까지 노작가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는데, 모쪼록 재발되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또 다른 작품도 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출판사 직원들과의 회식자리를 뒤로하고 먼저 나온 서연, 옷속을 파고드는 추위가 몸을 움추리게 합니다. 시도때도없이 떠오르는 지형과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서연을 더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섭게 만들지요. 운전중 서연은 길을 잃고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지요.
처음 보는 듯한 도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방향감각을 잃은 서연은 빵빵거리는 크락션 소리에 차를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지요. 생각나는 것은 그 사람의 전화번호뿐, 머리를 쥐어박아도 그 사람의 번호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서연이었지요.
서연의 전화를 받은 지형은 급히 택시를 타고 서연을 찾아오고, 눈물로 범벅이 되어 멍해져 있는 서연을 보지요. 겨우 진정된 서연은 긴장감을 풀고 차에서 그대로 잠이들고, 그런 서연을 바라보는 지형의 가슴은 아파옵니다.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까지 모든 것을 사랑하고픈 이 여자, 가슴을 꽁꽁 싸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이 여자는 지형의 모든 것입니다. 행복이고, 기쁨이고, 아픔이고, 고통이고, 과거이고, 오늘이고, 내일입니다.
"부탁한다 서연아, 니 인생에 들어가게 해줘". 서연은 지형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요. "왜 꼭 거부해야해? 나 때문에 결혼도 깨버린 사람인데...각오도 벌써 끝낸 사람인데. 그냥 기대버리자"고, 마음 속에서는 지형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지형의 어머니에게 걱정하는 것처럼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차마 약속을 깰 수 없다고 고백하지요.
"넌 내 엄마가 아니야. 넌 내 여자만 하면 돼", 지형의 확고한 말에 무너지는 서연입니다. "나도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죽을 힘을 다해 사랑하고 싶어". 오늘보다 내일을 더 사랑한다고 날마다 약속해달라며 지형을 꼭 끌어안는 서연, 이제는 이 사람을 놓지 않을 겁니다. 놓아달라고 해도 놓지 않을 겁니다. 도망갈 기회를 줬는데도 가지 않았던 것은 이 사람입니다. 그렇게 서연은 그 누군가를 향해 용서를 구하고, 밀어내려던 자기 자신을 설득합니다.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어줘. 날 맡아줘. 날 지켜줘".
지형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 서연은 밝아졌지요. 다가올 미래따위는 걱정하지 않고 싶은 서연입니다. 알츠하이머 그 놈은 그 놈대로 서연은 서연대로 자기 방식대로 살다 가겠노라고, 가는 날까지 주어진 시간 내내 행복하게만 살겠노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시간도 모자라는 서연,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조금은 뻔뻔하게 욕심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덜 허락된 시간이니 그 정도는 봐달라는 듯 말입니다.
차안에서 겁에 질려 당황해 하고, 길을 잃은 상태에서 오직 그 사람만 생각나는 자신을 쥐어박는 모습은,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는 이서연이라는 인물의 내면심리를 잘 표현한 장면이었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서연이 그 순간 얼마나 공포심을 느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 오더군요.
마치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듯한 자동차들처럼, 서연의 뇌세포를 갉아먹는 알츠하이머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서연의 기억들을 삼켜버리고 있는 듯한 공포심과 놓을 수 없는 지형에 대한 감정, 의지하고 싶은 마음까지 잘 전달되었지요. 그래서 지형에게 자신을 맡아달라고, 지켜달라고 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수현 작가가 정통멜로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노작가의 인간심리를 꿰뚫어 보는 깊이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이 이 대사를 통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주길 바라는 인간적인 바람이, 지금 서연이의 상태에서 더 간절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지형에게 함께 있어달라고, 지켜달라고 우는 서연과 그런 서연의 흔들리지 않는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박지형의 모습이, 아름답다기 보다는 참 아프고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앞으로 두 사람이 견여야 할 난관들이 산더미같은데, 그 가시밭길이 너무 뻔히 보여서 말이지요. 부모의 반대, 향기네 집의 반응,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심지어는 멍청한 선택이라는 비웃음까지 지형이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지형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들이 아닐 거예요. 하루가 천금같은 시간, 서연의 죽음이 하루하루 앞당겨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연이 지워져가는 기억과 함께 죽어간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아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는 어머니는 세상천지에 없겠지요. 그런데 김수현 작가는 말합니다. 없을 것같은 세상이지만, 또 없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강수정이라는 인물은 드라마속에서 창조된 비현실적인 인물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입니다. 김수현 작가는 전작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동성애자 아들을 끌어안는 부모를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그 시선이 얼마나 따뜻하고 뭉클했었는지,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 이성애자들과는 다를 뿐이라고, 다른 구조를 가졌을 뿐이라고 말했었지요.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말은 성적소수자를 보는 사회의 시선 모두를 바꾸지는 못했겠지만, 그러나 조금은 달라지게 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연과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한 지형, 인력으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정은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지요. 엄마의 마음이 어떻든 상관없는 것이냐고 물어도, 지형의 대답은 죄송하다는 말뿐입니다. 거품물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대도 지형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는 강수정, 아들 지형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이미 수정도 각오했던 일입니다.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강수정이지요.
"어쩌겠니, 널 쇠사슬에 묶어 토굴에 가둬둘 수도 없고...".
강수정은 침착하고 담담하게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말했지만, 모든 어머니의 결론이었을 겁니다. 앞길 창창한 서른밖에 안된 여자가 치매라니....서연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난 후 강수정은 인간적인 마음과 엄마의 마음 두 가지 속에서 싸우고 또 싸웠노라고 고백하지요. "그 아이가 내 딸이라면, 어느 집 아들이 지금 너처럼 내 자식 맡아준다고 나서면 얼마나 고마울까. 백번 천번 절할 일이지. 그런데 결국 결론은 남의 아들은 몰라도 내 아들은 안된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참 싫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강수정은 말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명치끝가 아려오는 것이, 그냥 먹먹해지면서도 고맙고, 드라마 속 캐릭터지만 존경스럽고 그러더군요. 결혼식은 2~3개월 후에 하겠다는 지형에게 하는 강수정의 말이 믿기지가 않더군요. 그동안 달라질 게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강수정은 결혼을 빨리하라고 하지요.
"그 아이의 하루는 건강한 사람 하루와 달라. 시간 낭비하지마". 쿵! 하고 뭔가가 가슴을 치며 올라오는데, 이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복잡한 감정들이 제 안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김수현 작가에게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조금은 밀고 당기고, 속된 말로 지지고 볶고 울고 싸우고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간단하게 강수정이 결론을 내려버리더군요. "그 아이의 하루는 건강한 사람 하루와 달라, 시간 낭비하지마"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강수정을 보면서 가슴이 복잡하게 엉켜버린 이유는 김수현 작가의 통속의 틀을 깨는 사랑의 깊이때문이었어요. 사실 강수정은 아들 지형의 사랑에 두손 두발 든게 아니었어요. 여전히 그녀는 아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해는 하지만, 마음을 열고 응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바꾼 것은 이서연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그리고 꾾임없이 자신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이기심에 대한 양심고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라도 더 서연이 사랑받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생각에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작가는 강수정을 아들 지형이 아닌 서연의 짧은 삶을 두고 더 많은 고민을 하게 합니다. 그 진실된 사랑에 감동해 두손들었다 어쩌고 저쩌고가 아니고 말이지요. 그래서 두 남녀의 사랑의 힘보다는 강수정이라는 인물이 서연을 배려하고 보듬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낭비하지마"에 생략된 강수정의 마음은 '짧은 시간밖에 허락되지 않은 이서연을 더 많이 사랑해주고 아껴주라'는 것이었지요. 순간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면서, 끝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고 말았네요.
욕실에서 혼자 앉아 오열하는 강수정처럼, 자식을 둔 어머니라면 어머니로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렇게 울었을 듯합니다. 강수정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다 이해시키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도, 강수정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반문하게 합니다. 그리고 한없이 작은 제 모습을 발견하게도 합니다.
강수정을 보면서 내 아들이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 아니 그러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던 것도 그 때문인 듯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김수현 작가의 힘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동성애자의 사랑에 대해 마음의 벽을 쉽게 허물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드라마를 보며 김해숙의 연기에 매번 감동을 하면서도, 강수정이라는 인물을 자꾸 제자신과 대입시켜 보는 습관이 생겨버렸습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큰 소망을 품으면서 말입니다. 드라마 속 강수정이라는 인물은 작은 바람만으로는 따라하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지요. 그런데도 마음은 아닌데, 머리로는 정답이다를 외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김해숙이라는 배우의 명연기와 함께, 남녀간의 사랑을 넘어 보편적인 인간의 사랑에 대한 던지는 작가의 화두가 가슴을 움직이기 때문일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