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기의 뿌리를 안다는 것이다.
자기의 뿌리를 알아야 훌륭하신 조상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고,
잘 못한 조상이 계셨으면 그 직계 후손으로서 그 잘못을 씻어 드리는 심정으로 더욱 자숙하며
이웃과 화합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한 역사를 바로 알아야 다른 사람과, 다른 나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서 함께 행복한 삶을 이어 갈 수있으리라 생각이 되니 우리는 바르게 역사를 알고 이어가야 합니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 단체나 기업체나 국가나 다 적용되는 말이 될겝니다..
지금 우리 문중에서 세보 발간 업무를 진행함도 이에 준한다고 볼수 있지요.
하니 역사의 진실에 투철한 인쇄가 된 세보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개인의 정실이나 짧은 생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세보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친일한 자가 독립열사의 반열에 오르는 오류라던지, 대한의 자유를 수호하고 반공을 외치다가 괴뢰의 총탄에 쓰러진 혼이 잊혀져 가며 오히려 간첩활동하여 형벌을 받은 사람이나,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국군에 대항하던 빨치산 출신이 복권을 해야 한다든지, 국가 유공자라며 포상을 요구하는 작금의 세태에 울분을 삼킴니다.
이러한 지금의 사태는 개인이나 사회 단체나 국가나 모두 자기의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니 정당한 역사가 수모를 당하는 꼴입니다.
우리 풍양조씨 문중에 우리의 자긍심을 높혀 주는 훌륭한 조상님이 많습니다.
멀리는 서기 1592년 임진 왜란이 발발하자 호군공(護軍公)후손이신 검간공(黔澗公) 휘 정(靖)께서는 몸소 창의군(昌義軍 : 7월 30일 황령사에서 결성)에 가담하여 좌막과 장서를 겸하여 의병 활동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 장자 초은공(樵隱公 諱 基遠, 19세)과 중자 유담공(儒潭公 諱 榮遠, 17세)을 도체찰사(都體察使 西厓 柳成龍) 진(陣)에 보내어 표하병(標下兵)으로 종군케 하셨으니 3부자가 국가의 안위를 위해 공헌하신바가 지대하신 분이셨습니다.
가까이는 호군공(護軍公)의 종손이신 휘 東錫선생이 계셨습니다. 독립운동에 가담하셨으니 그 가족이 핍박을 당함이 처절하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였으며, 그 자손들은 공부도 못하였으니 해방후 에도 떳떳이 좋은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지요. 그 당시에는 그들을 도와주면 그들과 연루되었다하여 갖은 핍박을 당하니 같은 혈족간에도 돕지도 못하고 지낸 세월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서름이었습니다.
우천(藕泉 諱 琬九)선생님도 그런 경우였으나 뜻을 더욱 굳게하시어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셨지요.
1910년 한일 합방-일본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행위-이후 국권회복과 조국광복을 위해 한국의 임시정부에서 재정부장을 역임하시며 항일 투쟁을 하셨고, 1945년 해방이후 귀국하시어 풍양조씨 화수회-대종회 전신-초대 회장을 역임 하신 분이시고, 그 공적을 기려 현성암(見聖菴)아래 춘향제단 앞에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여기에 또 한 분 유정(나무木변에 머무를 留字 亭. 휘 東祜(호)1892~1954)선생이 계셨으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신 29인 중 한 분이셨으며, 독립신문, 동아일보, 조선 중앙일보에서 언론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는 등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셨습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조상님이 계셨으니 그분들의 뜻을 받들어 풍양 조씨 문중의 청사에 남을 족보를 만들어야 선조와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겠거늘 어찌하여 무후 무남에 명확한 근거도 없고 심의도 거치지 아니한 계대를 하고, 무오보에 기재된 조상의 벼슬을 더 높혀 써 넣는다든지, 합법성과 목적성이 결여된 인쇄 계약 등 진실의 왜곡과 투명한 재정이 아닌 족보가 되어 갑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엄정한 검증을 마다하고, 자기들-대종회 집행부- 부류의 검증 요원들로 구성한 팀으로 검정을 하였다고 강변하며 종람시키고 막무가내로 인쇄를 서두릅니까? 그러한 일련의 모든 행위는 자랑스러운 조상을 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한 소치이기 때문입니다. 조상에게 누가 됨을 모르는 우둔한 처사입니다.
지금이라도 아직 늦지 않았으니 족보 인쇄를 중단하고 철저한 검증을 하여 진실한 족보를 만들것을 종용합니다. 그것만이 조상님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은 떳떳한 후손이 되는 길입니다.
2006년 10월 31일
청도공 16세손 斗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