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때 거란침입과 조선 인조때 병자호란을 비교하면서 고려는 거란침입을 방어했는데 조선은 청에 굴복한것을 보고 조선이 고려시대보다 군사력이 후퇴했다느니 하는 평가를 하는 시각들이 흔한데 과연 그런식으로 비교할 사안인가에 대해서 연구해보아야 할것입니다.
우선 고려의 군사력이 병자호란당시 조선군사력보다 강했슬것이라고 판단하는 수치적 근거를 들라면 고려군 병력이 30만이었다라던가 2차입입시의 거란군대병력이 40만이라던가 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기록은 병자호란당시 기록에 비하면 사료가 부족한 점이 많아서 과연 고려 거란전쟁 당시 총 합70만 대군이 맞붙었는지가 매우 의문입니다.
우선 동원 가능한 인구수를 보더라도 당시 조선시대 인구가 6백여년전의 고려때 인구보다는 당연히 많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동원을 하기 위한 호적제도를 비롯한 국가행정력을 보더라도 당연히 6백년후의 조선시대가 더 성숙할수밖에 없죠.
그 다음 청나라 군사력을 살펴본다면 고려침략시의 요나라 군사력과 비교하면 더 강했슬지 그보다는 못했슬지를 따저보아야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요나라의 당시 영토가 이미 중국대륙 화북지역을 점령했고 서쪽으로도 멀러 신강성까지도 진출했기에 병자호란당시 요서지역정도까지만 진출한 청나라보다 영토가 훨씬 커서 요나라의 군사력이 더 강했다라고 인식하기가 쉽상일것입니다.
하지만 두 시대간 특성과 두나라 민족의 생활상 특성의 차이를 무시할수가 없습니다.
시대간 특성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기술적 측면에서 병자호란때는 화포가 발달되어 있었스므로 단순히 기병만으로 위협을 가할수 있는 고거전쟁과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당시 거란군의 기병을 매우 공포스러운 전력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청나라군대의 화포병력중에서 당시 첨단무기인 홍이포의 위력과 비교하면 기병은 그다지 공포스러운 존재도 아닐것입니다. 홍이포로 인한 조선측 피해는 임진왜란당시 조총과는 완전 차원이 다른 수준이죠.
그 다음에 생활상의 문제인데 요나라는 다른계절에 일반병사들이 생업에 종사하므로 군대를 크게 일으키기가 어렵다라는 식으로 드라마에서 묘사가 되었고 물론 이점은 농경문화국가인 고려/조선 및 중국 송/명역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나 요나라 거란족은 유목생활 특성상 고착생활을 하지 않는데 따른 동원체제상 허점이 존재할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청나라 여진족은 유목적 성향도 존재하지만 거란족에 비하면 농경의 성향이 매우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즉 동원체제상 청나라가 요나라보다는 유리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징집되는 일반병사가 아닌 전문직업군인인 장교/부사관층의 병력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두시대 다 제대로 살필만한 기록이 아직은 전무합니다.
다만 청나라 팔기군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징집일반병사가 아닌 전문적으로 숙련된 장교/부사관 직업군인층은 청나라가 더 많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설령 요나라의 고려2차침입시 병력수가 병자호란때 동원된 청나라병력수보다 많다고 해도 일반징집병사가 아닌 전문 직업군인의 병력수는 청나라가 많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만큼 군대의 질적측면을 보면 청나라의 군사력이 요나라보다 더 막강하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당시의 조선은 6백여년전의 고려시대보다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국력면에서 도무지 후퇴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조정권의 무능한 관리로 인해서 치욕을 당한것입니다.
만일 인조가 잡히지 않고 피난을 가서 전쟁을 좀더 오래 끌었다면 양상이 달라졌슬것이라는 설들이 많습니다.
인조정권의 무능한 점들중에서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방방어선 붕괴를 드는데 만일 이런문제점들이 없었다면 결코 병자호란때 그런식의 치욕을 없슬것이 분명합니다.
첫댓글 요나라도 단순히 유목형 하나로만 경제를 운용한게 아니라 농경도 같이 병행하여 경제를 이끌어갈 정도였지요 정복활동으로 자국에 편입된 한인 발해인들의 농업 경작권을 보장해주어 그걸 자국의 경제적 기반으로 마련한게 요나라이지요 요나라의 수도 상경 임황부가 수많은 도시로 건설된 것을 보면 정주형 국가시스템을 갖춘게 요나라입니다 과거 건국 이전의 유목으로 집단을 꾸려나갔던 시절은 지났지요
그리고 인조 정권의 무능한 관리가 직접적으로 호란의 치욕을 작용했지만 그러나 인조 정권이 아니라도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하여 후금의 상대가 되기 어려웠던게 당시 조선의 현실이라 광해군이 왜란으로 피폐한 자국의 사정을 고려해서 중립외교 후금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