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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와 작명 이야기...
[출처; 고령신문 2016. 4. 6/수필가 최필동]
이름은 누구에게나 있다. 족보에는 대개 본명을 포함해서 아명 자 호 등이 있어 네댓 개가 되기 일쑤이다. 우선 나이가 들면 백두(白頭·조선시대 중인이거나 벼슬하지 않으면 백두라 불렀다.)이더라도 자(字)를 짓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불경스러울 때 자를 쓰며 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면 아호가 붙는다. 현대에 와서는 이른바 명사가 되면 아호를 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호는 그 사람의 특징적인 것이나 특별히 선호하는 것이 있어 동료들 사이에서 부르다 보면 호가 되고 본인이 지어 놓고 불러달라는 경우, 심취하는 학문이나 사상에 따라 짓거나, 문도(門徒)들이 스승을 숭앙하며 짓는 경우, 출신지명 등 실로 다양하다.
나의 10대 선조(崔恒慶)의 아호는 죽헌(竹軒)이시다. 입신보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학문궁구에 뜻을 두어 대나무같이 의의(依倚)함과 세한에도 변치 않는 학자적 절개를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해 죽헌이라 자호했다. 작은 정자 지어 하늘과 별을 보고 처마 끝 일렁이는 대나무 잎새 소리와 베갯머리에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초동급부(樵童汲夫)의 소리 책상 가까이 들리고, 한가로운 구름과 시서경을 벗함이 삼공불환(三公不換)이라 했으니 이 아니 고결한 인품이 아닐 것인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남산 우수현(雩水峴) 남쪽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우남이 호가 되었다. 이승만에게는, 송죽 같이 변함없이 충성을 다 하겠다는 인사가 있었으니 이기붕이었고, 그의 호는 이승만의 晩자에 소나무 같이 변하지 않겠다고 松자를 붙여 만송이 됐던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지금도 우리 국민 모두가 추앙하고 있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생전 본인 호에 대해서는 아주 겸손한 뜻의 白자와 범부의 凡자를 땄 다는 것은 다 아는 얘기이다.
현대에 와서 한 때 한국을 움직였던 정치인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영문이니셜 YS·DJ·JP가 호가 되는 시대 변천의 한 단면을 보게도 한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달·산·흙·들찔레 등 대자연이 시어의 주류가 돼 본명 영종을 두고 木月이라 스스로 불렀다 한다. 걸음걸이 모습이 좀 남다르다고 해서 횡보(橫步)가 호가 된 소설가 염상섭이 있고, 문인 김동환은 눈이 파랗다고 해서 서양인이라고 부르다 보니 파인(巴人)이 호가 됐고, 시인 오상순은 줄담배 즉 체인 스모커였기로 ‘꽁초’로 부르다 보니 공초(空超)가 됐고, 모윤숙은 연인과 관련해 고갯마루에 흘러가는 구름이 되겠다고 해 영운(嶺雲)이 됐다는 작호의 뒷얘기가 있다.
넓게 보면 이름 짓는 것도 호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근현대의 대선승 성철스님이 입산수도 중일 때 속가의 부인이 절손이나 면하려 성철스님을 찾았지만 완강히 거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끈질기게도 세 번째는, 스님이 산꼭대기로 피하며 돌덩이를 아래로 굴렸지만 그래도 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애원하니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어난 분이 불필(不必)스님이다. 불필요한 것은 출생 그 자체인지, 세속의 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작명의 뒷얘기는 어쩐지 좀 애연하다.
신라 때 거문고의 명수 백결선생은 너무 가난해 옷을 백번이나 기워 입었다고 해서 이름이 백결선생이었으며 섣달 그믐날도 떡을 만들 수 없었다. 아내가 남들 떡방아 찧는 소리를 부러워하자 떡방아 대신에 들려준 ‘떡방아 소리’ 대악(碓樂·떡방아 찧는 소리)은 지금 전하지는 않지만 유명했다 한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5세에 대학·중용을 통달하니 논어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의 시습을 집현전 학사인 최치운이 이름으로 지어 주었다 한다. 아예 ‘5세’라는 이름도 있었다고도 한다. 그의 자는 불역열호의 구절에서 ‘기쁘다’의 뜻으로 쓰인 ‘說’과 뜻이 같은 ‘悅’을 써서 열경(悅卿)이라고 쓰고 호는, 방랑 끝에 금오산실을 짓고 살았는데 매화나무에 달이 떠오르는 집이라는 뜻으로 매월당(梅月堂)이 호가 되었다.
조선시대 화가 하면 혜원 신윤복과 단원 김홍도를 든다. 그런데 비슷한 시대의 화원 장승업은, 내가 두 원(혜원·단원)보다 못한 게 있느냐, ‘나도 원이다’라고 자칭하게 되니 오원(吾園)이 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또 활동한 시대와 그 사람의 지명도에 따라 여러 개가 있는 겨우도 있다. 바로 명필이요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는 완당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등 모두 200여 개가 있다. 묵소거사는 침묵을 지켜야 할 때는 잠자코 있고 웃어야 할 때는 웃는다는 그의 자호의 하나이다.
가문·문벌마다 이른바 ‘천재’가 있다. 법률가인 변영만, 정치인 변영태, 신시(新詩)의 선구자인 변영로 이 삼형제들도 그들의 족적이 말하듯 천재라고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지인들이 변영태 앞에서 편의상 구분하느라 영만을 대변, 영로를 소변이라 했더니 듣고만 있던 영태가 “그럼 난 물똥(中卞)이란 말이냐?”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작명도 작호와 다르지 않다. 조선조 충절의 표상 성삼문은 출생 시 ‘낳았느냐?’라는 소리가 공중에서 세 번 들렸다고 해 삼문(三問)이 됐다함은 세상이 다 아는 얘기다. 본명 정지윤보다 포의시객(布衣詩客)으로 더 알려진 정수동은 출생 시 손바닥에 수(壽)자의 문신이 있었는데, 본명 지윤의 芝자가 한서에 지생동지(芝生銅池)로 있다 해 수동이란 별호를 썼다 한다. 그는 또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이 깊었다.
맹사성은 고불(古佛)이 호인데 최영 장군의 손서이고 청백리이다. 말년에 음률을 좋아해 고불(옛 부처·나이 많고 덕망 높은 늙은이)과 같은 여생을 보냈다 한다. 어느 날 소를 타고 남의 동네 앞을 지나게 됐는데 그게 눈에 거슬렸든지 힐책을 당했다. 그러자 그는 ‘맹꼬불이 지 소 지 타고 간다고 일러라’ 라고 일갈하니 모두들 머리 숙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월산대군은 동생 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보신(保身)하느라 여색도 멀리하고 풍류를 즐겨 사죽관현(絲竹管絃·악기)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호를 풍월주라 했다. 이덕무는 문장에 독특한 창의성이 있어 문명이 높았지만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라 자호했다.
시인 서정주는 영원한 소년으로 남고 싶어 아직 덜 된 사람이라는 뜻의 미당이 호이다. 조선시대 서예가인 정철조는 돌만 봐도 먹을 생각하고 갈았다는 뜻에서 석치(石痴)라고 했고, 현대의 서예가 이재무는 먹이 곧 친구라며 호를 우현(友玄)이라 했다. 이황은 토계라는 곳으로 낙향했다고 해 퇴계 혹은 퇴도가 호가 됐으며, 조선시대 화가 김명국은 이름 난 호주가였으므로 취옹(醉翁)이 호가 되었다. 수필가 피천득은 거문고 타는 아이라는 뜻의 금아(琴兒)가 호이다.
‘조선의 고흐’란 화가 최북은 붓 한 자루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생관(毫生館)이 그의 호이다. 그에겐 일화도 많고 기행도 많다.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도 실험했고, 어떤 세도가가 그림이 맘에 안 든다고 하니, ‘남이 나를 버리기 전에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고 해 한쪽 눈을 스스로 찔러 평생 외눈으로 살았고, 이름 北을 반으로 가르면 七七이 된다는 이름 얘기도 전한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강원도 단양의 삼봉을 지나다 만난 무속인이 10년 후 다시 이곳에 와서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가질 것이라 했다. 그래서 자식을 낳았는데 ‘길에서 말을 들었다’고 해 도전으로 했고 호는 삼봉으로 지었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아버지 정운경이 큰 도(道·개국공신)를 깨우쳐 이를 전하라는 뜻으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소설가 이청준은 노모가 하얗게 센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벌써 이렇게 세었구나!’ 하니 아직은 희지 않다는 의미의 미백(未白)이 호가 됐다. 무진장 스님은 모자 목도리 사찰 돈 등 7가지가 없는 스님으로 유명했는데, 은사인 동산 스님이 재주가 너무 많으니 ‘무진장이로구나!’ 해 얻은 이름이 무진장이라 한다. 독립운동가 안재홍은 민중의 세상이 와야 된다고 해 민세(民世)가 호가 되었고 신민주주의라는 저서도 있다. 임정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은 본명은 지대형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가 탈출해 신분 위장 때문에 지청천이 됐고 ‘청천’은 새파란 하늘을 보고 지었으며 백두산의 다른 이름 백산(白山)이 호가 되었다. 이청천의 ‘이’는 어머니 성을 땄다는 설도 있다.
독립운동가요 유교의 거봉인 김창숙의 호는 심산(心山)이지만 일제 강점기 때 포악한 왜경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됐다고 해서 벽옹(躄翁)으로 자호했다는 가슴 쓰린 얘기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교수이며 해동경사연구소장인 성백효의 호가 한송(寒松)인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따왔다 한다. 시인 김현승은 얼마나 차를 좋아했기에 호가 다형이 되었다. 술보다 차를 더 좋아했고 차 음미하는 다심으로 쓴 시가 다향을 날린다고 동료·후학들이 썼다. 또 시인 조지훈은 아는 것이 너무 많아 동료·후학들이 지다(知多)라 불렀는데 성조(聲調)를 붙여 부르니 어감이 좋지 않아 지훈으로 했다.
토정 이지함은 기인으로 유명하다. 쇠로 만든 솥을 모자로 쓰다가 그 모자를 벗어 밥을 지어 먹었다. 현 서울 마포강변에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 아래 굴을 판 뒤 위쪽에 정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토정이 호가 되었다. 연암 박지원이 쓴 예덕선생전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 엄행수이다. 그의 직업은 분뇨를 퍼서 논밭에 내다 파는 사람인데 비록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향기로운 일을 한다고 해 더러울 예(穢)자에다 큰 덕(德)자를 붙여 예덕선생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남계우는 조선의 화가인데 특히 나비그림에 뛰어 나 ‘남나비’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이철경은 교육자요 서예가이다. 우리 한글을 낮춰 부르던 ‘언문’을 ‘서예’의 경지로 격상시켰으며 궁체(宮體)를 갈고 다듬어 그의 호를 따서 ‘갈물체’라 했고 이의 보급·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갈물은 ‘가을물’이라는 뜻이라 한다. 호가 오리인 이원익은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했어도 청빈했으므로 인조가 눈에 보이는 것만큼 땅을 하사하겠다고 하니 바늘구멍만큼만 달라고 해서 지은 집이 관감당(觀感堂)이라는 일화가 전한다. 그것도 몇 번이고 고사하다가 받았다 했으니 오늘에는 왜 이런 인물이 없을까?
호가 많기로 유명한 근대의 화가 허백련은 예술원 종신회원이지만 한 때 겸양하는 뜻으로 어리고 어리석다는 의미로 소치(小癡)라 자호했다. 세계 100대 기업에든 삼성 창업자 이병철은 성공에는 세 가지요체가 있으니, 즉 운·둔·근(運鈍根)이라 했다.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까지 버텨 나가는 끈기 같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시 거인의 모습이다. 이중근은 현재 확장 일로에 있는 부영그룹 회장인데 본명이 중근이고 우정(宇庭)이 아호이다.
30대에 우주로 나아간다고 해 우진으로 창업했지만 부도를 맞고 다시 재기해 그룹명은 역시 부영(富榮)으로 쓰고 있다. 근년에 타계한 화가 권옥연은 인간은 원래 벌거벗고 왔다가 벌거벗고 가는 것이라며 아호를 무의자(無衣子)라 했다. 독립운동가인 신규식은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총리 대리까지 지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가족의 만류로 생명은 보존했지만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해 사물을 볼 때 흘겨본다고 해 예관(睨觀)이 호가 됐다. 독립운동의 의열단원이었던 이경희는 아호를 지오(池吾)로 지었는데 ‘못’과 ‘나’이니 스스로 ‘못나’라고 했다. ‘나라 잃은 못난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다.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미국 유학길에 하와이 섬을 지나며 ‘섬’과 ‘뫼’를 보고 감격해 민족의 영원한 산봉우리가 되자는 굳은 각오로 지은 호가 도산이라 한다. 강의를 나갈 때면 ‘대한의 남자야, 대한의 여자야 너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일갈했다 한다. 박은식은 을사늑약 이후 망한 나라에 구차하게 살아가는 노예라고 자책하면서 무치생(無恥生) 또는 태백광노(太白狂奴)라 자칭했다 한다. 시인 이활은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돼 복역할 때 수인번호가 64번이어서 이후 호를 육사(陸史)로 했고 본명 이활보다 이육사로 더 알려져 있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의 만덕산에 차가 많이 생산됐기 때문에 다산이 호가 됐으며, 당호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여(與)와 猶(유)라는 글귀에서 따왔다 한다. 또 어릴 때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눈썹에 남아 있어 삼미(三眉)라는 별호도 있다. 난해 시 오감도(烏瞰圖)를 쓴 이상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인데 경성공고 재학시절 공사장에 감리감독을 나갔다가 인부들이 그의 성을 잘 몰라 일본식으로 ‘리상(李樣)!’으로 부르다 보니 이상(李箱)이 이름이 됐다.
조선시대 소설가 허균의 호는 교룡(蛟龍·용과 비슷한 상상의 동물)인데 바위를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강릉 앞바다 바위에 얽힌 전설에서 따왔다. 조선의 시인 조수삼은 문장과 시에 천재적 소질이 있어 6번이나 중국을 왕래하며 명성을 날렸다. 83세에 초시에 합격했을 때 고령 운운하니, 60년 전에 23세라 했다 한다. 나도 50세 되던 해에 그게 싫어 내 막내아이에게, 누가 네 아버지 나이가 몇이냐고 묻거든 ‘10년 전에 40이었다’라고 말하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 여류시인이었던 노천명은 5세 때 홍역으로 사경을 넘겼다 해 본명인 기선을 천명(天命)을 개명했다 한다.
현대인 이성원은 조선의 문관 이현보의 17대 종손인데 결혼 전까진 외항선원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유가의 도를 이으라는 뜻으로 자를 계도(繼道)로 지어주었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승려 포대화상은 본명이 계차(契此)이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자루를 둘러메고 다니며 소용되는 물건을 그 속에 넣고 다니기 때문에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화상은 수행을 많이 하거나 덕이 높은 승려를 말한다. 재미있고 그럴싸한 작명과 작호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아는 대로 좀 많이 적었다. 그 순서는 특별한 이유도 없고 그냥 입수한 자료 순서대로이니 달리 의미를 부여할 것이 없음을 밝혀 둔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어디 한둘일까만 호에도 예외는 없다.
이 지음은 아주 일괄적으로 지어 도반(道伴)이나 동호인들끼리 부르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나마도 없다. 구태여 찾는다면 궁탈(弓脫)이라는 호 비슷한 게 있긴 있다. 하긴 호가 별것인가? 남이 희롱조이거나 애칭으로 부르다보면 그게 바로 호가되는, 이른바 별명이 호가 된다. 궁계탈의복상수금금수송송출(弓鷄脫衣腹上水金金水松松出)이 바로 그것이다. 내 지인들이 ‘궁계탈의’ 하다 보니 ‘궁탈’이 된 것이다. 음담패설인지 이두식 표현인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꼭 해득할 이유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으니 그냥 웃음으로 넘기든지, 아니면 실없다 힐책해도 괘념치 않으리라. 또 있다. 중국 황하가 아무리 굴절이 많아도 필경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고사성어를 죽헌선조 문집에서 읽었다. 그래서 ‘만절’로 한다고 했더니 몇몇 지인들이 불러주고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