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애인/ 문모근
81세 된 할머니가 호계장 칼국수 집 아주머니에게 조심조심 낮은 목소리로 넥타이 가게를 묻는다
할매, 영감님 안계시잖소 넥타이 가게는 신천에 가믄 있는데요 할매는 힘들어 못가요 다음 장에 사소 근데 누 줄라꼬예? 말하지 마라 애인 줄끼요? 어허, 말하지 말라카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문을 나선다
가을 하늘이 파랗다
- 시집『새벽비』(이웃, 2010) ........................................................... 도회에서 사회생활 하는 남자는 신체의 두 곳을 묶고 산다. 혁대로 허리를 묶고 넥타이로 목을 묶는다. 혁대는 남자로 하여금 허리띠를 조여 가며 가족을 부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고단한 삶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론 삶에 대한 자세를 다잡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는 뜻도 있다. 넥타이는 화이트컬러의 징표이고 남성의 품위로 기능하지만, 이것을 선물할 때에는 또 다른 의미로 그 뜻이 확장된다.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넥타이는 그 순간 사랑의 상징물이 된다. 오래전 백악관 스캔들의 르윈스키가 넥타이를 클린턴에게 선물하면서 “당신이 이 넥타이를 매고 있는 동안은 내가 당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려고 넥타이 파는 가게를 묻는 할머니, 재래시장 칼국수 집 아주머니로서는 충분히 놀려 먹을 만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백세 운운하는 시대에 이제 ‘겨우’ 80줄에 들어선 할머니인데 연애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 감정 밭의 지력이 쇠해서 연정의 풀 한포기 돋지 않을 것이라 여기지만 마음만은 청춘인 어르신들이다. 마음만이 아니라 온기 남은 그 밭에 청춘의 영롱한 씨앗이 숨어있어서 싹을 틔울 기회만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수두룩하게 계신다. 어쨌거나 몸은 늙어도 사랑의 감정은 마르지 않아, 이는 곧 사람에게 있어 희망이자 고통이라 하겠다. 가능만 하다면야 양로원 휠체어에서 고랑고랑 홀로 살다 죽는 것 보다 얼마나 벅찬 희망인가. 황혼의 연애감정을 다룬 <마른 꽃>이라는 박완서의 단편소설이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주인공이 우연히 고속버스에서 한 노신사와 나란히 앉게 된다. 두 사람은 흘러간 영화, 좋아하는 배우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년배로서의 진한 연대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대화가 통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싹트고, 여성은 남자 앞에서 소녀처럼 들떠 재잘거리며 깔깔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여성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흑백화면 같던 여성의 삶은 총천연색시네마스코프로 빛나고 마른 꽃 같았던 여성의 존재에는 생기가 넘친다. 신중년이라 일컫는 60대 남성들에게 가장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로 꼽힌 탤런트 박정수는 정을영 PD와 10년째 공개 열애중이다. 고령화 시대에 사별이나 이별 후 홀로 사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홀로 사는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긴 세월 하루하루 살아갈 뿐인 삶에 이런 연애감정이 찾아온다면 일약 활기를 띄고 생기가 돌 것은 명약관화한 이치다. 황혼의 연애는 단순히 외로움을 덜어주는 이상의 효과가 있다. 넥타이를 고르면서 어떤 색이 어울릴까 가슴 두근거리는 행복감은 분명 뇌에서 좋은 화학물질을 분비시켜 신체기능도 향상시킬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의 넥타이를 맬 주인공은 ‘늙은 애인’이 아니라 첫 출근하는 젊은 손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반응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할머니의 마음 밭은 가을하늘처럼 파랗다. 권순진 Sunset one The Hills - Andante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