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한다(自言) 2-學而
어릴 적 초등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5리 남짓한 면 소재지에 있었는데 산길 신작로라서 어린아이로서 다니기가 무척 힘들었다.
한 학년이라야 겨우 한 반인 시골 학교에서 늘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성적표에는 “수”만 표시되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언젠가 무슨 과목에 “우”가 나와서 칼로 긁은 후 “수”라고 써 집에 가져가서 보여줬다가 형에게 호되게 맞은 기억이 난다.
그래도 공부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 애는 어떻게든 날 이겨보려고 열심히 해보았지만 6년 동안 결국 2등 만 한 채 졸업을 했다. 그 애는 얼굴이 엄청 얽었었다. 중학교는 서울에 있는 형에게 가서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 가서 학위를 받고 마침내 UN의 은행 책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력과 의지로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한 장한 친구라고 자랑스럽다. 몇 년 전 잠시 귀국하였다가 날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해 온 적이 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만나지 못했다. 세상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람이 세상을 만드는 것도 사실이구나 생각한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고향마을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밤마다 등잔 불을 켜고 살았는데 양초를 사용하려면 돈이 제법 들기 때문이었다. 밤에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보면 콧구멍이 새까맣게 변한 듯한 기분이 들고 목이 칼칼했었다. 나중에 전깃불에서 생활하게 되니 전기가 바로 문명이구나 깨달았다.
읍내 중학교에 들어가니 학생 수도 3반이나 되고 새로운 과목도 배우게 되어 재미있을 것 같았으나 통학하기가 참 어려웠다. 마을에서 학교까지가 자갈길인 신작로로 이십여 리가 되었고 매일 걸어서 오가기가 정말 짜증이 났었다.
새벽밥을 먹고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밤이 되었다. 첫 시험을 치렀는데 동급생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알고 보니 시골에서도 더 시골에서 온 내가 전 과목에서 단연 1등을 했을뿐더러 성적이 거의 만점이라는 것이었다. 선생님들도 칭찬을 많이 하셨고 아이들도 날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난 별로 공부한 것도 없는데 그러니 이상하기도 했다. 1학년 마칠 때까지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2학년이 되고부터였다. 학교에 가기 싫어진 것이다. 자갈길인 이십리 산길 신작로를 매일 걸어 다니기가 정말 지겹고 힘들었다. 슬슬 학교를 결석하기 시작했다. 그게 버릇이 되었지만 학교에선 그렇게 야단도 치진 않았던 것 같았다. 성적은 놀아도 언제나 1등이었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자 학교를 거의 가지 않았다. 시골학교라 거의 전부가 같은 읍내 고등학교로 진학하든가 아니면 집의 농사꾼이 되어버리는 실정이었다. 면학 분위기라곤 거의 찾아보기도 어려웠고 나는 먼 길 통학하기가 싫어서 집에서 빈둥거리며 틈틈이 책을 보았다. 학교를 거의 안 갔으나 어이 된 일인지 유급은 면했지만 학교 성적은 끝에서 몇 등을 한 모양이었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경북대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나도 고등학교 입학에 대해 정보가 거의 없었지만 집에서나 주위에선 은근히 나중에 내가 교사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장래 무엇이 되겠다든가 무엇을 특별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학교를 다녔다. 촌놈이었지만 그래도 공부는 좀 한다고 자부했는데 영어, 수학, 국어를 제외하고는 동료들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학교 공부보다 소설이나 시 등 문학작품을 읽는 데 정신을 잃은 데 있었다. 밤늦게까지 소설을 읽고 낮에는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해버렸다. 아마 학년 성적은 중간을 겨우 맴돌았지 싶다.
초등학교 때는 신동이었고 중학교 때는 천재였고 고등학교 때는 둔재가 되어 있었고 사회인이 되자 변방인이 되었다.
그러나 살다 보니 내 같은 둔재는 흔하지만 정말 특별한 천재도 있었다.
두산 김문수 군은 영조 몇 년, 인조 몇 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연대를 다 알아서 내가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방법을 가르쳐 줬는데 배우고서도 금방 잊어버렸다.
외우 김문수가 어느 날 얘기 중에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이 모두 머리는 좋았잖나. 다만 그 기간에 제 길로 열심히 공부만 한 친구와 딴 데 열중한 친구로 나누어져 나중에 어느 대학으로 갔는가로 되었을 뿐이지”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기회란 ‘바로 그때’를 일컬음이다. 나는 고등학생으로서, 입시생으로서의 공부에서 일탈하여 음악과 문학과 철학에 빠져 학교 공부는 점점 더 등한하기 일쑤였다.
길을 잃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그 어떠한 것도 발견할 수 없다. 이 말이 나로 하여금 옆길로 움직이게 한 기폭제였다.
나의 이러한 방황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과 「Unterm Rad」를 읽은 데서 시작된다. 모든 것이 고루하고 규격적이며 위선적인 것만 같고 진정한 나의 삶의 방향을 찾아보려는 것이 실제론 방황이며 일탈이었다.
예술가들의 역할은 미국 흑인 시인 제임스 발드윈James Baldwin이 말한 것처럼,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가져다주는 불운과 행운을 깨닫게 만든다.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고독과 불행의 늪에서 나의 학창 시절을 흘려 보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도 모두 훌륭하셨고, 학교 친구들은 모두 모범생으로 착하고 얌전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성교육면에서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참 명문학교였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김정두 선생님이셨는데 매우 인자하시고 훌륭하셨다. 자주 아픈 관계로 학교 결석이 잦다 보니 선생님께서 내 하숙집에 가끔씩 방문을 하셨는데 오실 때마다 꼭 꾀병처럼 멀쩡하게 되어 아마 선생님께선 이런 나쁜 놈이 있나 하고 괘씸하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주 아픈 탓으로 학교에 며칠 결석하고 학교 가면 그동안 각 과목의 진도가 훨씬 나가서 공백을 채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예 화학이나 물리 등 기타 과목은 책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영, 수, 국 등은 독학으로 공부한 셈이다.
3학년 1학기 가을에 우리 집이 파산해 버렸다. 하숙비도 제때 송금 받지를 못했다. 당장에 자고 먹기가 힘든데 대학에 들어가 봤자 무슨 돈으로 다니겠냐는 절망감으로 더욱 공부와 담을 쌓았다.
결국 대학 입시에도 실패하고 나는 유랑객이 되어 버렸다.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친구와 친척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이젠 성년이 되었다고 담배도 즐겼다. 혼자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 수중에 돈이 거의 없으니 무전여행이라고 해야 맞을 말이다.
그중에서도 수중에는 소설책은 늘 지니고 다녔다. 늙어서 생각해 보니 그 책들의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책을 읽는 열정은 대단했다고 기억한다.
대구 시내에 떠돌던 때 낮에는 거의 음악 감상실에서 지냈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하이마트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는데 클래식 음악만 LP 판으로 틀어주는 곳이었다. 나는 돈이 모자라서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입장료를 내어 들어가 공짜로 주는 커피 한 잔으로 하루 해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니 배를 채우는 것보다 음악이 보약이었으니 내 정신사에 정말 알찬 나날이었다.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 서울대는 낙방하고 영남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경제관념에 너무 재빠르게 적응했는지 나중에 경제학과로 옮겼다.
그때 대학에서 〈영대 문화상〉을 처음 제정해서 학생 작품들을 모집했는데 내 습작 소설이 뽑혀서 그 상금으로 친구들과 호기롭게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르바이트로 독일어 번역을 거들어 드렸던 이재선 교수가 책을 마감하고 나와 술한잔을 하면서 얘기했다.
“학문을 하는 것은 이성적 작업이고 글짓기는 감성적 작업이라는 통념이 있다. 그런데 조 군은 아마도 후자인 경우인 것 같다.”
수업을 듣는 것보다 빼먹는 날이 훨씬 많았고, 저녁이면 향촌동 선술집에 개근하다시피 모였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매일 술에 취해 인생과 철학과 문학을 어설프게 떠들어댔다.
군 제대를 하고 나서 척추 질환으로 또 휴학을 하였고 늦깎이 복학생이 되었다.
행정고시를 치르겠다고 마음먹고 학교와 사찰의 암자를 오가며 공부했는데, 공부는커녕 솔직히 청풍명월에 놀기만 하다가 졸업 시기가 다가왔다. 갑자기 사회인이 되어 자신의 경제를 꾸려가야 한다는 위기감으로 급히 학교에 가서 기업의 지원서를 요청하니 ㈜럭키화학(지금의 LG화학)으로 지망하게 되어, 그 후 16년이나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교수님 중에 한 분께서 나에게 학교에 남아서 나중에 내 과목을 맡도록 해 주마고 고마운 말을 하셨지만, 나는 기약 없이 가난이란 질곡을 짊어질 의지와 용기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철없고 방종하고 무책임한 학창생활을 보냈고 후회도 되지만, 후회란 늙었다는 말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총명하기는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聰明難, 糊塗難). 중국 청(淸) 나라의 화가 겸 서예가로 유명한 板橋 鄭燮(1693~1765)의 글귀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언제나 흔들리며 걸어온 나의 길이다.
첫댓글 후산!
젊을 때는 다들 방황이라는 홍역을
한번쯤 앓아 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걸쎄!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훌륭한
삶으로 보이네!
사람이 꼭 고관대작을 해야만
출세 하는것은 아니라고 보네.
우째던가 노년에는 건강한 삶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늘 건안하기를 기원하네!
후산, 여러가지 아깝고 안타갑네. 세상을 호령했을 인재를 모르고 이렇게 세월이 무심히 흘려가고 있다니, 인생 백세라 구순까지 활동할 수 있다생각하면 아직 십수년이 있지않는가?
어느분야든 못다한 꿈울 피어보시길 권면해본다.
단념하기엔 너무 아깝고 시기상조라 너무 많은 세월이 남아 있지않나. 하고싶은 그 일을 하다가 하늘나라가면 좋지않을까?
말이 나왔으니 김정두선생님, 정말 훌륭한 분이였다.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매년 한번씩 찾이뵌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