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차라리 말이 없었던 시절이 나았다. 물이 물이 아니고 당신이 당신이 아니었던 그때가 있었다. 나무도 물도 태양도 매일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시간이 있었다. 시간마저 선이 그어지지 않아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시간들!!!
늑대와 함께 벼랑 끝에 서서 푸른 보름달의 슬픔에 울어주고 일생 일처일부제인 곤줄박이랑 돌림노래를 부르고 문란한 원앙새랑 불륜을 속닥이고 물결의 일렁임에 같이 춤춰주고 해오라기의 목이 길어진 슬픈 사연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으리라. 바람의 종착역을 알고도 침묵하는 천년 넘게 무릎 꿇어 본 적이 없는 은행나무의 절개에 대해 말할 수 있었으리라.
사랑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더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기억의 저편으로 가고 싶다.
모시나비가 젖은 삼베옷을 말리려 숨은 동굴속 비내리는 밤, 우리만의 던전을 크로커스, 바람꽃, 금낭화로 장식하고 풀잎으로 가득 채운 잠자리를 당신이 만들어 주었던 날, 부부라는 법적 단어가 없어도 우린 영원히 하나임을 알았다. 그 모든 순간들이 사라진 날, 말라죽은 선인장을 보며 난 도대체 잘하는 게 뭘까 의심스러웠다. 내 청춘은 경망스럽고 경박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알았다. 내 달력엔 삶보다 죽음이 더 많이 들어있었다.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날아갔던 날, 어미혹등고래가 해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해변에서 굉음을 내고 폭발하던 날, 박쥐들이 몰려와 동굴벽에 부딪치던 날밤, 난 빅뱅을 보았다.
난 우주를 몰라 멀리 간다. 죽어도 우주를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아니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자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블랙홀과 아직 존재조차 증명되지 않은 화이트홀을 그리고 또 다른 세계로 연결된다는 우주의 지름길인 Wormhole을 통행권 없이 지나다닌다. 과학자는 갈 수 없는 길을 시인은 갈 수 있다 는 진리를 알고 있다. 물리를 몰라서 물리학자가 되지 못하지만 물리학자가 아니어서 더 먼 우주를 상상할 수 있다. 우주의 한계를 넘어섰다. 웜홀이라는 수백광년 이상의 먼 거리를 연결하는 은밀한 다리를 건넌다. 가상의 통로를 넘어서면 보고 싶지만 이제는 잊고 싶은 얼굴들이 있을까?
왕관병(코로나)은 참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받고 싶지 않았던 왕관을 받음으로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현시대의 학살의 또 다른 명명법이었다. 그 어떤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때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이들은 어디에 가 있을까? 죽어도 싸다는 말을 던졌던 죽음의 가격표를 달아주던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아있는 자들은 이제 다 잊었다. 철심 같은 흰머리의 왕관병담당여신인 정여사는 여전히 침묵 중이시다. 분명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오늘도 난 저울을 꺼내 누가 옳고 그른지를 달아본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신봉했던 정의와 지혜의 여신인 마트의 깃털로 무게를 잰다.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가 판결을 내린다. 내 심장은 몇 근이나 나가길래 이다지도 아픈 걸까? 심장의 배신이 쓰다.
심장이 무거울 경우 이승에서 많은 죄를 지은 거라 생각해 괴물 암무트가 심장을 먹어버린다. 심장이 없는 자는 이승을 떠돈다. 이집트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형벌이다. 현세에서 선행을 쌓지 않으면 내세에 갈 수 없다는 글을 파피루스에 새겨 관에 넣었다. 그들은 친절했다. 죽은 자에게 사후세계의 안내서를 함께 동봉했다.
어느 날 심장이 다 타버렸다. 스스로 발화했다. 난 이제 현세도 내세도 없이 떠돌리라.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난 오늘도 공부를 한다.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