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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중심리 연구사의 중요한 고전 《여론과 군중》을 오늘날 다시 만나다.
「지성의 향연」제1권『여론과 군중』. 이 책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의 저작 《여론과 군중》을 번역한 것이다. 《여론과 군중》은 귀스타브 르 본의 《군중 심리학》과 더불어 대중심리 연구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전이다. 출간된 지 110여년이 지난 이 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타르드가 공중이라는 개념을 동원해 근대를 공중의 시대라고 부른 문제의식이다. 이것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통찰이며 오늘날 SNS의 역할에 대해 흥미롭게 해명될 수 있다.
저자소개
저자 : 가브리엘 타르드
저자 가브리엘 타르드는 뒤르켐과 더불어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계를 대표한 인물 중 하나였지만 뒤르켐과 그 추종자들에게 철저히 ‘짓밟힌’ ‘비운의 사회학자’. 그러나 지금 프랑스에서는 ‘타르드 르네상스’가 한창이다. 고질적 눈병 탓에 툴루즈 대학 법학과를 중퇴한 뒤 독학하여 파리 사회학회 초대학장을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뒤르켐-타르드 논쟁은 당대 사회학계를 흔든 사건 가운데 하나였는데, 뒤르켐은 자신의 ‘유일한 경쟁자’ 타르드가 베르그송을 제치고 콜레주 드 프랑스 근대철학 교수직에 선출되어 강좌명을 사회학으로 바꿔달라 요청한 뒤 거절당하자 조카 마르셀 모스에게 ‘안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뒤르켐 학파에 의해 ‘각주 속의 학자’로 ‘매장’되어 있던 그를 질 들뢰즈가 부활시켰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가브리엘 타르드의 철학은 최근의 위대한 자연철학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타르드는 《여론과 군중》, 《모방의 법칙》, 《형사철학》, 《경제심리학》, 《사회법칙》, 《모나돌로지와 사회학》외 다수의 책과 논문들을 썼다.
역자 : 이상률
역자 이상률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니스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주요 번역서로 가브리엘 타르드의 《여론과 군중》, 《사회법칙》, 《모방의 법칙》, 프로이트의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막스 베버의 《유교와 도교》, 《직업으로서의 학문》, 칼 뢰비트의 《베버와 마르크스》, 에드가 모랭의 《스타》,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 피터 버거의 《사회학에의 초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허버트 스펜서의 《개인 대 국가》 등이 있으며, 편역서로 《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가 있다.
저자의 다른 책
- 모나돌로지와 사회학
(모나돌로지에... - 2015.01
- 사회법칙 (모방과 발
명의 사회학) - 2013.07
- 모방의 법칙 (사회는
모방이며 모방은... - 2012.10
- 여론과 군중 (SNS는
군중의 세계인가... - 2012.04
목차
옮긴이의 말
서문
제1장 공중과 군중
제2장 여론과 대화
제3장 범죄군중과 범죄분파
해설 가브리엘 타르드 : 군중에서 공중으로
출판사 서평
“가브리엘 타르드에게 경의를. 오랫동안 잊혀졌던 그의 작업은 미국 미시-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현재적 현실성을 획득했다. 타르드는 뒤르켐과 뒤르켐 학파에 의해 짓밟혔었다.”
_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짓밟힌 것’은 집합표상을 중시하는 거시사회학자 뒤르켐과 뒤르켐 학파가 각주 속에 매장시킨 타르드의 미시사회학만이 아니다. 99%도 1%에 짓밟혀왔다. 사회제도 같은 거시적 집합표상을 걷어낸 자리에 ‘활성단층’을 청진하는 타르드의 미시사회학이 있다.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본문’에 편입되지 못한 ‘각주 속의 잉여들’, 표상 이하의 차원에서 복수적 개인들 간에 암시, 전염, 모방되는 미시세계의 다질적 ‘흐름들’을 알아야 한다. 언표되지 않는 회색지대를 간과하는 여론조사는 늘 빗나갈 수밖에 없다. 100년 전의 타르드 사회학은 ‘신문 이후의 사태’로서 ‘복수적 개인들의 무한 확장된 사적 대화’인 SNS를 외삽하고 있다.
사적 대화-신문-공중-다수 사람들의 대화-여론의 연쇄가 여론형성 과정이다. 여론의 ‘보이지 않는 작은 원천’인 ‘신문 이전’의 사적 대화가 ‘신문 이후’의 무한확장된 사태로 귀환한 것이 SNS라는 사실이 100년 전 책인 <여론과 군중>에서 흥미롭게 해명된다.
가브리엘 타르드는 누구인가?
일자에서 다자로의 이동!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 일련의 혁명과 반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대중봉기와 노동자 파업은 지식인들에게 ‘다수의 위협’을 증대시켰다. 타르드는 이 시기에 다수의 위협을 고민했던 지식인들 중 한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다수’를 범죄군중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 다수를 긍정하는 쪽으로 바뀐다. 드레퓌스 사건이 그 계기다. 그는 ‘논적’ 뒤르켐처럼 드레퓌스파에 동참한다. 그러나 뒤르켐과는 맥락이 달랐다. 타르드가 드레퓌스 진영에 가담한 것은 반드레퓌스파의 ‘효모’가 반(反)유대주의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사건’이 신문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주제가 군중에서 공중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우리 시대가 군중의 시대라는 르 봉 박사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 시대는 공중의 시대다.”
군중에서 공중으로
동물의 군집에 가까운 물질적 집합체로서의 군중은 육체접촉에 의한 심리적 전염의 기제로 작동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공중은 육체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결합되어 있는 집합체다. 공중은 ‘멀리서의 암시’ ‘비접촉 전염’의 기제로 작동하는 ‘분산된 군중’이다. 정신적인 공중은 물질적인 군중보다 위계가 높다. 생명의 위계가 높을수록 보다 정신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타르드의 철학은 라이프니츠를 계승하고 있다.”(《차이와 반복》)고 말하기도 하거니와(그 직접적인 예는 《모나돌로지와 사회학》이다), 이는 생명의 계보를 연속적 위계로 파악한 라이프니츠의 사유에 기반한 인식이다. 책에 라이프니츠가 한번도 언급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질도 생명의 한 경우(라이프니츠)이긴 하나, 군중은 물질성을 털어내지 못한 저급한 ‘생명체’다. 군중이 계절이나 날씨의 변덕 같은 외적 요인이나 자연의 힘에 지배받는 반면, 물질을 털어낸 공중이 보다 ‘자율적’이고 ‘내재적’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연의 힘이나 ‘외적’ 지도와 무관한 무한확장적 ‘SNS 공중’은 더욱 높은 단계의 ‘정신적인’ 집단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군중을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공중 또한 저널리스트-지도자의 ‘외적’ 지도에 영향받고 조종될 수 있다. 이는 ‘공중 이후의 군중’ ‘군중화된 공중’일 수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관점에 따라 ‘촛불군중’이랄 수도 있고, ‘촛불공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광장에 모여 육체접촉을 가졌으나 인터넷을 통한 ‘멀리서의 암시’에서 비롯됐고, 외적 지도 없는 ‘자발적 참여’라는 점에서 ‘공중화된 군중’ ‘공중을 각인하고 있는 군중’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중과 공중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공중의 탄생과 근대적 의미의 여론형성
공중 탄생은 16세기 인쇄술 발명에 의한 신문의 등장과 맞물린다. 넓은 영토에 분산되어 살지만 열정이나 관념을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순간에 공유하고 있다는 의식을 지닌 공중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 것이라 믿는 신문을 읽다가 어제 것이라는 걸 알면 흥미를 읽는다. 읽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래된 사실도 현재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는 ‘시사성을 느낀다’.
근대적 의미의 여론형성은 공중 탄생과 한몸이다. 신문과 함께 출현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론장에서 형성된 공공정신으로서의 여론의 원천은 “절대권력의 해독제”이자 “정부에 대한 유일한 제동기”로서의 대화다. 일방향의 엄숙한 명령이 통속화, 상호화되면서 대화가 되었다. 사적 대화-신문-공중-다수의 대화-여론이라는 연쇄가 여론형성과정이다. 여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원천”으로서의 “대화가 편지로 연장된 끝에 신문은 개인적 의견을 국민적 의견이나 세계적 의견으로 공공정신의 장대한 통합을 끝마쳤다. 신문은 독자들에게 국민의식과 국가라는 공동체 관념을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베네딕트 앤더스의 ‘상상의 공동체’와도 접맥된다. 타르드는 신문에, 앤더슨은 신문을 포함한 인쇄물 전체에 주안점을 둔다는 점이 약간 다를 뿐이다. 여론은 “현재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같은 나라, 같은 시대, 같은 사회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사본들로 복제되어 있는 판단들을 일시적으로 또 다소 논리적으로 모은 것”이다. 나라에 새 분위기를 진작시키는 것은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 의견인 시대가 되었다. 이는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함축한다.
여론의 위험성과 공중의 위험성
공론장은 전통, 이성, 여론이라는 세 공공정신의 치열한 각축장이다. 여론이 이성을 통속화해 전통으로 확고히 만드는 것에 만족하면 모든 일은 잘 풀린다. 오늘의 이성이 내일의 여론이 되고 모레는 전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과 이성은 갈등관계인 경우가 많고, 가장 신속히 커지는 여론은 다른 둘을 희생시키며 풍선처럼 부풀기 일쑤다. 여론이 꼭 이성적인 논의를 거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널리즘에 휘둘린 드레퓌스 사건이 좋은 예다. “독자는 자신의 신문을 선택했고 신문도 그의 독자를 추려냈다.” 신문기자는 ‘상호선택과 상호적응’을 통해 자신이 잘 조종할 수 있는 동질 집단을 만들어 더욱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신문기자는 독자와의 ‘이중적 상호작용’을 통해 여론을 조종하는 ‘지도자다. 일부 “추악한 기자들은 자신의 공중을 갖고 있었다.” “옆에서 술잔을 따라주는 저 유해한 자들은 그 공중들에게 공허하고 난폭한 말의 독주를 매일 부었다.” 공중 이후의 군중, “공중의 혹”으로서의 군중, 이것이 바로 공중의 위험성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왜 타르드에 주목하는가?
타르드는 역사적 격변기에 정치영역으로 들어온 ‘다수’의 범죄군중을 공중으로 격상시킨 학자다. 외부의 힘이 가해져야 운동하는 관성적, 물질적 군중이 아니라 외부의 지도자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기의식을 지닌 정신적 공중이 되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르드의 사회학은 “집합정신, 사회의식, 우리 등이 개인들의 정신 밖이나 그 위에 존재한다”(《여론과 군중》서문)는 뒤르켐의 사회학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초월적 메타공간인 뒤르켐의 집합표상을 걷어낸 자리에 타르드의 “정신간(情神間, inter-spirituelles) 심리학”이 있다. 표상 이하 단계인 거기에서는 ‘다수’의 인민들 간에 미세한 암시, 전염, 모방 같은 복수적 상호작용만이 사회적 구성원리로 작동한다. 타르드는 이 상호작용을 “흐르는 물”에 비유한다. 군중과 공중은 “오히려 그 흐르는 상태가 잘 정해져 있지 않은 물 흐름들”이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말을 들어보자.
뒤르켐은…덧코드화된 거대한 집단적 표상들 속에서 특권화된 대상들을 찾았기 때문이다.…그[타르드]는 오히려 세부적인 세계 또는 무한소의 세계, 즉 표상 아래 단계의 질료를 이루는 모방들, 대립들, 발명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미시-모방은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이러한 미시-모방은 개인이 아니라 흐름이나 파동과 관련되어 있다. 모방이란 흐름의 파급이다. 대립이란 흐름의 이항화, 이항 구조화이다. 발명이란 다양한 흐름의 결합 또는 연결접속이다.
_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416-417쪽
저널리스트 같은 초월적 지도자 혹은 하나의 통일적 코드’를 제거한 n-1 차원(“표상 아래 단계”)에 설 때, 공중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모방들, 대립들, 발명들 같은 ‘물흐름’들은 복수적이고 내재적으로 운동한다. 그람시가 마키아벨리의 ‘군주’에게서 ‘집단의지’를 읽어내듯이, 타르드에게는 초월적 주체나 지도자조차도 그런 복수적, 내재적 운동의 장(場)이다. “왕의 자아는 그 지역적인 관심들이 상호침투하는 유일한 장(場)”이라거나, “각각의 대의원의 뇌 속에서 그 여론들이 만나 서로 비슷한지 다른지를 알았다”는 진술이 그 증거이다.
타르드는 《여론과 군중》에서 “집단은 지성과 창조적인 상상력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가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집단지성’은 천재적 개인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초월적 주체로서의 천재적 개인의 능력이 외부에서 도래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에서는 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열역학 제1법칙이 암시하듯, 그것은 이미“알려져 있는 지각과 이미지로 새로운 조합을 하는 것”이거나,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하면 ‘다양한 흐름의 결합 또는 연결접속이다.’ 다만 그 조합의 차원이 위계적으로 높아 평범한 지능이 따라갈 수 없을 뿐이다. 군중과 공중의 관계가 그렇듯이, 발명도 결국은 차원높은 모방이자 반복이다. 그러나 발명은 반복(혹은 모방)이되 차이 있는 반복(혹은 모방)이며, 대립은 “차이가 분배되는 형태에 불과하다.”(《차이와 반복》183쪽) 결국 “차이는 사물들의 최종적인 목표”이고 “반복은 두 가지 차이 사이에 있”(같은 곳)게 된다. 모방-대립-발명의 영원회귀적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차이를 생성해내며 ‘차이 자체’를 지향하는 타르드의 차이와 반복이, 차이가 동일성 속으로 포섭되는 헤겔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변증법”(같은 책)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변증법’은 ‘인민주권’ 시대, 곧 오늘날의 ‘SNS 시대’와 접맥된다. “문명화의 증대 덕분에 피소유자는 점차 소유자가 되며 소유자는 피소유자가 된다. 법의 평등성에 의해서, 인민주권에 의해서, 서비스의 공정한 교환에 의해서 고대 노예제가 상호화되고 보편화되며 각각의 시민이 다른 시민들의 주인인 동시에 하인이 될 때까지 말이다.”(《모나돌로지와 사회학》중에서. 《여론과 군중》역자해설 참조)
“왕의 자아는 그 지역적인 관심들이 상호침투하는 유일한 장(場)”에서 ‘지역적인 관심들’이라는 ‘여럿’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적 맥락에서 보자면 ‘왕의 자아’라는 주체/주어 속에 들어 있는 술어들이다. 주어는 실사(實辭)요 술어는 허사(虛辭)다. 그런데 ‘왕의 자아’라는 주체는 이미 ‘지역적 관심들’이라는 허사(술어)의 기능/함수다. 그러므로 타르드의 이 진술은 그 자체로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정우, 《천 하나의 고원》26쪽), 다시 말해 일종의 집단지성이다. 그는 천재를 평범한 사람과 절대적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그 천재조차도 실상은 집단지성의 기능/함수이다. 타르드는 격변기에 등장한 ‘다수의 인민’을 공중으로 개념화하여 결국엔 집단지성으로 격상시킨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공중은 때로 폭도로 전락하는 ‘잠재적 군중’일 수 있다. “군중은 저 공중의 혹이거나 사악한 분출”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가브리엘 타르드, 혹은 진중권의 전쟁
좌우파를 막론하고 대중의 ‘비합리적 집단열광’과 대중에 영합하는 지식인들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비판하는 진중권은 말한다. “촛불집회의 그 대중은 황우석 때, 〈디워〉때 그 대중이다. 대중은 굉장히 파시스트적인 군중이 될 수 있고 상당히 자율주의적인 다중이 될 수도 있다.” ‘독특한 진보주의자’로서의 진중권의 이 말은 “독특한 보수주의자”를 자임하는 타르드의 입장과 통하는 말이다(이는 마키아벨리-그람시, 칼 슈미트-아감벤 등에서처럼 독특한 ‘이동효과’를 산출한다) 다자를 일자로 통합하는 초월적 코드의 해체 이후 사태인 다자로서의 군중은 물론, 그 군중의 진화형태인 공중도 또다른 초월적 주체에게 귀속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황(우석)빠’ ‘심(형래)빠’ 등 이른바 미시파시스트들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추천사
타르드가 신문에 대해 말한 것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적용된다. 그가 말한 것은 그 후 미디어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이 쓴 모든 것의 맹아가 들어 있다.
_ 세르주 모스코비치
타르드는 여론에 대한 분석을 적절하게 행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_위르겐 하버마스
타르드는 반복에서 지극히 프랑스적인 이념을 보았다. 키에르케고르는 반복에서 지극히 마크적인 것을 보았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반복이 헤겔의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변증법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가브리엘 타르드의 철학은 최근의 위대한 자연철학들 중 하나다.
_질 들뢰즈
타르드의 저작들은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일종의 르네상스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영향 아래 프랑스 탈현대 사상의 전조로서 재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_위키피디아
프로이트의 이론은 르 봉을 반박하면서 타르드의 이론과의 주목할 만한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타르드가 모방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프로이트는 동일시라고 불렀으며, 많은 점에서 프로이트의 사상은 정신분석학적 개념들로 번역된 타르드의 사상인 것 같았다.
_ H. F.엘렌 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