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정끝별 시집 <모래는뭐래> 김세영
두레문학. 제35호 2024년 상반기
-서평-
정끝별 시집 『모래는 뭐래』
- 활어活語를 조련하여 시를 채굴하다
김세영(시인,문학평론가)
서평을 할 시집을 선정하면서, 나름대로 정한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시인을 찾아보았다. 최근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최근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독창적 시 세계를 구현해서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인을 검색해 보았다. 정끝별 시인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이번 서평의 대상으로 정한 정 시인의 시집이, 2023 박인환 상을 수상한『모래는 뭐래』이다. 천진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과 뛰어난 언어 감각으로 창의적인 시 세계를 추구해 온 정끝별 시인의 신작 시집이다. 지난해 등단 35년을 맞이한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이다. 또한 2021년 현대시 작품상의 수상 작품이기도 한「이 시는 세개의 새 시입니다」를 포함해서 52편의 시가 실려있다. 현대시 작품상 심사위원단은 “정끝별의 시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어두운 심연을 통과해서 솟아나는 희망의 비전을 경쾌한 언어 감각으로 표현한다. 정끝별의 시는 이러한 언어적 조율을 통해 일상의 삶, 평범한 사람, 퇴색한 사물의 이면에서 숨은 비밀을 발견하고, 그것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준다.”라고, 선정 사유를 밝혔다.
이 시집에서 절묘한 애너그램(Anagram) 기법을 활용한 독창적인 시들을 선보이고 있다. 단어의 문자를 재배열하여 다른 뜻을 가지는 단어로 바꾸는 기법이다. 기발한 언어 감각으로 기본적인 조사들을 재조합해서, 조사 하나의 차이만으로도 문장 전체에 엄청난 뉘앙스의 차를 마치 나비 효과처럼 불러일으킨다.
정 시인이 펴낸 시집들의 제목을 열거해 보면, 이번의 『모래는 뭐래』를 비롯하여『자작나무 내 인생』『삼천갑자 복사빛』『와락』『은는이가』『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 구사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활달하고 천진함을 느낄 수 있다.
시집에 수록된 「언니야 우리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인은 페미니즘 시를 많이 쓰고 있다. 시인은 이화여대에 입학한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페미니즘에 눈을 떴다고 한다. 딸, 애인, 아내, 엄마, 여성 시인, 여성 평론가, 여성 연구자, 여성 교수로 살면서 늘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조건들과 싸워야 하는, 타자화된 주체라는 자각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 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모래는 뭐래?」 전문
시집의 표제 시이다. 호기심 가득한, 천진함으로 가득한, 재미있게 읽히는 동시 같은 시이다. 바닷가나 사막에 있는, 하늘의 별보다 많을 것 같은 수많은 모래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몸체, 저 미물에 시인은 궁금증과 애정을 가지고, “그니까 모래는 뭘까?”“모래는 뭐래?”하며, 질문을 계속 던진다. 그러나 모래는 자신의 형상에서 그들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며,“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묵비로 시종일관한다. 종국에는 우주의 인질, 우주의 티끌 같은 너가,“설마 모래가 너일까?“ 라는 존재론적 인식에 다다른다.
시선을 별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별아 부르자 별안간 달려와 별 하나에 다섯 발톱이 돋아나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달은 빛나는 별의 발톱을 감싸려 둥근 내부를 만들었까?//
밤하늘이 긁히겠는걸. 별의 발톱이 밤마다 바짝바짝 자랐고 그때마다 오랜 긍휼의 성단이 반짝반짝 빛났다.///
모름지기 은하란 내 전부가 무수한 네 편이 되려는 꾸준함으로 서로를 잇고 끌어당기는 것이라서, 그러니 빨려드는 것들을 격렬히 사랑할밖에, 이 길고 긴 시간을 ///
그렇게 우주는 138억 년을 팽창 중이고 /
뻥이요! 오늘도 별들은 튀밥처럼 튀는 중이다/
-「 이 시는 다섯 발톱의 별 시입니다」 부분
동심적이고 환상적인 우주시이다. 필자도 십여 년 전부터 우주를 소재로 한 시를 써 왔기 때문에 이 시를 더욱 관심 있게 읽었다. 별의 빛남을 다섯 발톱이 돋아난 고양이로 형상화한 것이 흥미로왔다. ”은하란 무수한 네 편이 되려는 꾸준함으로 서로를 잇고 끌어당기는 것이라서, 빨려드는 것들을 격렬히 사랑할밖에“ 라고 묘파하며, 시인은 우주의 중력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랑의 힘으로 여기고 있다.
시의 감옥에 갇힌 종신 미탈옥수가 되어 너는 노래한다 파란만장 영혼 탈출기를//
매일이 전쟁이라서 너는 늘 끝을 산다 끝나지 않는 희망이 시라서 시는 너에게 종교다 시를 쓸 때 너는 네가 그리워하는 너에게 기꺼이 가까워진다//
몇몇 시는 정말로 다른 너가 되게 하고 결국은 너를 너이게 한다 그런 시는 멀리 도망갈수록 기어이 돌아오게 하는 지도와 같아서 너는 가장 촘촘한 등고선에 너의 지금을 던진다 //
봄눈처럼 녹아드는 지금이라는 묘혈에 앉아 어제라는 망각과 계절이라는 인과를 발굴하며 너는 시를 살고자 한다 한 문장만이라도 초록초록하게!//
부정되지 않는 문장은 없다 잊히지 않는 기억도 없다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부정의 문장마저 삭제될 때까지 가엾게도 네 시는 감옥이겠구나, 가엾게도/
-「어느 시인의 인터뷰에서」전문
시인론을 설파한 시이다. 시인은‘시의 감옥에 갇힌 종신 미탈옥수’이라고 한다. 천업의 굴레로부터의‘파란만장 영혼 탈출기’가 시이다 라고 한다. 끝나지 않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시이기에, 시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노동하는 육신을 다스리는 항성이 해이고, 어둠 속의 영혼을 다스리는 항성이 별이다. 그래서 시인은‘별의 시간을 믿는다.’
정 시인은 평론집 『파이의 시학』에서, ”우리 삶에서 시가 차지하는 역할이 딱 π만큼을 곱해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시가 늘 우리 삶을 3.14배 더 길고 더 넓고 더 깊게 해주었으면 좋겠고, 시학이든 시론이든 시 비평이든 그것들이 우리 시를 3.14배 더 길고 더 넓고 더 깊게 해주었으면 더 좋겠다.“라고 역설한다.
오전의 조언과 호우 사이에 쌓이는//
정교한 적요, 우직한 궁지에 몰린 염소의 소명으로
속도의 독소를 겨눈 감정이라는 장검//
무한한 하문, 억새에게 어색하게 개성을 묻는
초록 골초의 분명한 명분이랄까//
살벌한 발설, 고통의 옥토에서 응전하는 증언과
제어되지 않는 어제를 향한 사설의 설사//
악기의 기강, 날숨의 산물로 빚은 은밀한 늘임
환호하는 화혼, 그건 해방이야 방해야?//
미망과 마임, 밤골의 갈봄과 말복의 곰발과 목발의 발목이
미숙한 묵시처럼 라임의 마일을 달리는//
절윤과 전율, 하얀 가독을 부르는 야한 각도로
오늘의 노을에게 자두를 주다니!//
이견의 연기로 떠도는 집시의 시집 같은//
이게 다 시라면, 이제 시는 다 다다 시야?//
- 「시다 시, 다 시다!」전문
에너그램 기법에 의해서, ”무한한 하문, 살벌한 발설, 악기의 기강, 미망의 마임, 절윤의 전율“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단어의 재조합으로 시어들이 활어가 되어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같다. ‘우직한 궁지에 몰린 염소의 소명’,‘고통의 옥토에서 응전하는 증언’,‘제어되지 않는 어제를 향한 사설의 설사’,‘밤골의 갈봄과 말복의 곰발과 목발의 발목’,‘시는 다 다다(dadaism) 시야?’ 등에서 보듯 참신한 시적 비유와 형상화로 효과적인 시적 표현들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
해초인 줄 알고 어미 새가 삼킨/ 찢어진 그물을 아기 새가 받아먹고//
토해내지 못하고// 물고기인줄 알고 어미 새가 삼킨/
라이터와 병따개를 아기 새가 받아먹고//소화하지 못하고//
오징어인 줄 알고 어미 새가 삼킨/하얀 비닐봉지를 아기 새가 받아먹고//
일용할 양식으로 일용한 죽음의 배식// 빙하 조각처럼 유유히 해안에 도착한/
거대한 스티로폼 더미에 갇혀//깃털 하나 펴지 못하고//
쓰레기로 꽉 찬 페기물이 되었다/ 찍찍 스티로폼 소리를 내며//
죽어서도 썩지 못하고//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후예」전문
기후환경 대책과 탄소중립 운동이 범세계적으로 이슈화가 된 지금 더욱 주목받는 시이다. 인간이 버린 폐기물을 먹고 고래들과 새들이‘죽어서도 썩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그리고 있다.
조나단 리빙스턴, 1970년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미국의 소설가인 리차드 바크 (Richard Bach)의 『갈매기의 꿈』이란 우화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주인공 갈매기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파국을 경고하였다.
정 시인은“생태와 환경은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고요. 생명, 돌봄, 살림, 공생 등의 가치가 이론이 아닌 일상이자 생존의 문제라서 자연스럽게 삶 속에 스며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최근 수십 년간 지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 스트레스가 종국에는, 탄소를 저장하고, 냉각 역할을 하는 아마존의 생태계 시스템을 무너뜨릴 것이란 경고를 과학자들은 꾸준하게 제기하고 있다.
어쨌던 새는 게 실패가 아니다/가장 뜨거운 눈물 아래로는 겹겹의 파도가 있고/
파도와 파도 너머로는 한 줄 실선이 있다//
방파제에 이른 눈물의 실선이 지평이다 새의 시작이다//
아직 내겐 두 발로 써야 할 길의 역사가 있고 타들어 가면서도 마주해야 할 빛의 역사가 있어요. 바닥이 없으면 길이 없고 그림자라는 빛의 뒷배가 없으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저녁 무렵일 때 새는 가장 낮게 날고 가장 향기롭다 /밤이 오면 크나큰 그림자를 가진 날개가 나를 덮어줄 것이다/
-「이 시는 세개의 새 시입니다」부분
수평선처럼 흔들리며 지치고, 꿈을 잃고 좌절한 새들에게, 사회적 약자를 표상하는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시이다. 그들에게는‘길의 역사’가 있고,‘빛의 역사’가 있으며,‘크나큰 그림자를 가진 날개’가 있음을 거듭거듭 상기시켜 준다. 정 시인은 “1980년대의 지향점이 여성해방 양성평등이었다면, 21세기의 지향점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성소수자 해방, 성평등이라고 본다. 페미니즘을 넘어 퀴어에 대한 관심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합니다”라고 진취적이고 전향적인 소신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