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3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마태오 21,23-27
당신이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예수님도 당신을 대하신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
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유튜브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이런 일이 거의 있을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긴 이야기인데 짧게 정리하면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큰 회사의 회장이 은퇴하고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집에서만 있기가 무료한 회장은 아들의 회사에서 주차관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회장은 그렇게 회사를 위해 작은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회장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회사에 늦게 도착하고는 차 열쇠를 던지며 주차해달라고 하고 열쇠를 다시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그것은 저희가 할 일이 아닌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직원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며 화를 내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회장은 꾹 참고 그 사람이 일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자신이 사장과 아는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잘라버리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장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어쩐 일이시냐며 인사를 했습니다.
비로소 사장의 아버지, 곧 회장님이라는 사실을 안 그 직원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낮은 곳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절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되려면 나의 세속-육신-마귀는 죽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돈 있고 권력 있는 많은 사람에게 무시당하기에 십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주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갚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과 친하다고 하면서 그분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엔 사장 친구의 꼴이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된 이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소속-육신-마귀가 그리스도로 향하는 길의 걸림돌이기에 자신이 몸소 가난하고 정결하고 겸손해진 이들을 존중하고 본받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도 그렇게 대해주십니다.
그분은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은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케이트라는 애인을 떠나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잭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13년 뒤 큰 투자기업의 사장이 되어있는 그는 성탄절도 즐기지 못하고 일합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들 둘을 데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남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가난한 삶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아내 아내와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이 주는 행복에 젖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쯤 눈을 뜹니다.
그는 회사의 중요한 일도 집어치우고 성공을 위해 버렸던 자신을 떠나 비행기를 타려는 한 여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행복은 욕심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이가 케이트입니다.
케이트에게 대하는 대로 행복도 잭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대신 돈이 행복이라는 마약으로 순간적인 쾌락은 허락합니다.
하지만 케이트를 잠시만이라도 받아들이면 욕심이 없는 행복을 맛봅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사랑과 행복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림과 행복이 그렇듯, 요한과 예수님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를 가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고 절제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꼭 붙드십시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곧 사랑이요, 행복이요,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하늘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너도 내 딸이다”라며 맞아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3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마태오 21,23-27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특강과 판공성사 시즌을 맞아, 한동안 바쁜 순간을 지내다가, 이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팬데믹 시대 점점 위축되어가는 신앙생활 앞에 힘겨워하시는 교우들의 눈망울을 보며 큰 안타까움과 함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갈 때마다 크게 느끼는 바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나 교우들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 고백성사의 내용과 올해 내용이 거의 똑같다는 것입니다.
늘 같은 죄, 같은 고민을 평생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회 입회 때 안고 있었던 고민을 아직도 안고 있습니다.
거의 매번 고백하는 죄의 내용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지도 신부님께도 부끄럽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니...
그러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신앙에도 성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성장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각고의 노력, 그야말로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부는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이른 봄에 묘목들만 딱 꽂아놓으면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고 나서는 즉시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넉넉한 퇴비도 필수입니다.
강풍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도 세워줘야 합니다.
때로 병충해 예방약에 성장촉진제도 투여합니다.
그래야 묘목이 무럭무럭 성장하고, 몇 년 뒤에는 꿈에 그리던 품질좋은 과일을 풍성히 수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멋진 묘목을 본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반드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각자 각자에게 주어지는 아주 중차대한 의무가 있는데, 각자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을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세례받은 후 40년, 5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조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세례 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얼마나 딱하게 여기실까, 걱정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성전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을 따지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메시아로 자신들의 목전까지 다가오신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몰라본 것까지는 좋은데, 철저하게도 메시아를 거부하고 배척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매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명품 신앙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매일의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많이도말고 딱 두 가지,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영적 계획을 한번 세워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2월 1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낯선 지역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펼쳐놓고서 어떻게 가장 빠른 길로 갈 수 있는지를 공부했지만, 이제는 전혀 공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목적지로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느 신부의 차를 탔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안내하는 대로 운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즉, 막히는 곳으로만 안내한다면서 아는 길의 경우는 내비게이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믿어야 내비게이션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믿어야, 하늘 나라에 가는 길을 잘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이틀 동안 성전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이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로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은 곧 성전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율법 학자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생활 방법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관, 율법 학자, 원로들은 이 교도권 문제를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질문하시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그들 자신이 세례자 요한을 배척했으니 하느님께 불충한 자가 되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모두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터에 자신들이 법적으로 처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거짓 예언자는 돌로 쳐 죽여야 했고, 참 예언자를 거부하는 행위도 같은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믿음이 없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오늘의 명언: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콩도르세).
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법
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를 떠올린 다음, 그 친구와 나를 비교합니다. 특히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친구는 가졌지만, 나는 갖지 못해 부러운 것.”
60초 안에 내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남과의 비교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면서 우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만 하지 않아도 행복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나도 나만의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절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비교는 남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족한 부분의 나와 이를 채워 나가는 나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더 이상 불행의 단어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