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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오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불일암(佛日庵)으로 가는 ‘무소유길’에 접어들었다. ‘무소유’ 정신을 주창한 법정 스님이 평소에 다녔던 오솔길이다. 느린 걸음으로도 30~40분이면 불일암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갈림길 초입에 이정표 노릇을 하는 경구판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 그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라. 그래서 당신의 인생을 환하게 꽃피우라.’(법정 스님 ‘오두막 편지’ 가운데)
사람들은 모두 인생을 환하게 꽃피우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비록 ‘무소유길’처럼 좁고 고독하다 해도 전심전력하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을 것 같다. 오르막이다 보니 내딛는 발걸음이 더디고, 차가운 바람에도 땀이 솟는다.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스님의 말씀이 담긴 작고 귀여운 경구판이 길을 안내한다.
추모 분위기 고조
‘명상은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끓는 번뇌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무심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깃들게 된다.’(‘오두막 편지’ 가운데)
2월 19일은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다. 2010년 3월 11일(음력 1월 26일) 돌아가셨지만 불가에서는 음력으로 기일을 따지기 때문에 이날을 맞이해 조촐한 추모법회가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열린다. 올해는 여느 때보다 추모 분위기가 더 일고 있다. 스님을 기리는 책도 잇따라 출간됐고, 무소유 어린이 글짓기 대회, 음악회(3월 8일, 길상사), 사진전(2월 18일~3월 11일, 길상사) 등 여러 행사도 계획돼 있다.
서점에선 법정 스님의 재가 제자인 정찬주 소설가가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사상이 드러난 구절들을 뽑고 명상한 ‘법정 스님의 인생응원가’(다연), 스님의 여러 산문 중 행복·자연·책·나눔이란 주제로 글을 가려 뽑아 만든 ‘스스로 행복하라’(샘터)가 우선 눈에 띈다. 1960년대 불교신문에 게재된 법정 스님의 글을 모은 ‘낡은 옷을 벗어라’는 거칠지만 젊은 스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스님이 생전에 펴낸 책은 모두 절판됐다. 스님이 유언장에 “그동안 풀어놓은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의 정신을 따르려는 이들은 스님의 뜻을 기리는 더 많은 관련 출판물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듯 중고 장터에서도 스님의 책들이 꾸준히 거래된다. 교보문고 중고장터에서는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1996년 초판본(7000원)과 ‘산방한담’ 1983년 초판본(3500원)이 5만5000원에 나와 있다.
불일암으로 출발하기 전날인 2월 2일 일요일 오후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 들렀다. 스님이 회주(會主)로 있던 곳이다.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절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길상사 제일 안쪽 건물인 진영각에는 스님의 진영과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다. 10주기를 맞이해 이곳에 스님의 누더기 옷과 바루, 1967년도에 사용한 세숫대야, 첫 삭발을 기념하는 거울과 삭도기, 친필 원고도 새롭게 전시된다. 담벽 아래 양지바른 곳엔 스님의 유골도 모셔져 있어 특별한 기운이 서린 공간이다. 마루 한쪽엔 ‘스님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은 두꺼운 노트가 놓여 있고, 그 안엔 법정 스님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의 글이 가득했다.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했던 분
‘스님, 말과 글과 행동이 모두 일치하시는 분. 존경하고 마냥 그리워했는데, 요즈음은 매주 한번 (길상사에) 나와서 스님의 책을 통해서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2020년 1월 21일, 합장)
‘비우고 싶어 왔는데, 더 얻어가는 기분입니다. 엄마와 함께 좋은 시간 보내고 갑니다.’(1월 18일, 제주에서 온 모녀)
‘스님을 항상 뵙고 싶습니다. 여기에 다녀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항상 그리워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1월 18일, 모씨)
열반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법정 스님의 정신적 유산은 이렇듯 그를 따르는 대중의 마음속에 가득하다. 이들은 스님의 자취를 찾아 길상사뿐 아니라 1970년대 초 머문 강남구 봉은사, 전남 순천 불일암, 해남 우수영 생가, 수행자로 첫발을 내디뎠던 미래사 효봉암 등으로 순례길에 나선다. 갈 수만 있다면 강원도 오대산의 오두막과 미국 로스앤젤레스 고려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길상사는 백석 시인의 연인으로 알려진 길상화(본명 김영한) 보살이 내놓은 성북동 대원각 터에 1997년 창건됐다. 길상화 보살은 평소 법정 스님이 강조하고 실천한 무소유 사상에 감동해 1000억 원대 땅을 스님에게 시주했다.
불일암은 원래 고려 시대 16국사의 한 명이던 7대 자정국사가 세운 자정암 자리에 법정 스님이 1975년 중건한 곳이다. 스님은 이곳에 17년간 머물렀다. 1992년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오두막으로 옮겼다. 거처를 옮긴다고 선언하자 불일암 방문객이 줄어들었고, 이후 스님은 겨울이면 추운 강원도를 떠나 따뜻한 불일암에 들러 잠시 머물다 가곤 했다. 그래서 불일암은 법정 스님의 자취가 가장 많이 배어 있는 곳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법정 스님의 속가 외사촌 누님이자 현장 스님의 어머니가 “스님 돌아가시고 나면 이제 어디로 가서 스님을 뵐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법정 스님은 “제가 보고 싶으면 불일암으로 가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생전에 스님을 뵌 적이 없는 기자가 불일암을 찾아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무소유는 불필요한 것 갖지 않는 것
20여 분 오솔길을 오르자 작은 대숲이 나타났다. 이 길의 이름이 왜 무소유길인지 알려주는 경구판이 보인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산에는 꽃이 피네’ 가운데)
대숲 너머가 불일암이다. 가파른 벼랑길 한 쪽에 쉬었다 가라고 나무의자가 놓여 있다. 초록의 동백잎 사이로 피어난 동백꽃 한 송이가 봄소식 같다. 일주문 같은 대숲 터널을 지나자 불일암 경내가 보였다. 채마밭은 벌써 봄맞이 고랑을 만들어뒀다. 낮은 나무 밑동에 박새가 와서 머물다 객을 보고 날아간다. 돌계단을 올라서자 본채 마당엔 낙엽 하나 없이 깨끗하다. 법정스님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헌칠한 후박나무(향목련)가 잎을 다 떨군 채 우뚝 서 있다. 스님의 유골은 이 후박나무 곁에도 모셔져 있다. 누군가 스님에게 바친 정갈한 프리지아 꽃다발이 향기를 내뿜고 있다.
지금 불일암을 지키는 이는 맏상좌 덕조 스님이다. 덕조 스님은 1983년 송광사에서 출가해 행자 시절 법정 스님을 시봉하며 계를 받았다.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창건되면서 12년간 주지를 맡기도 했다. 3년 전에는 ‘마음꽃을 줍다’란 책을 펴냈다.
법정 스님은 두 가지 유언장을 남겼다. 하나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에, 다른 하나는 상좌들에게 남기는 유언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덕조 스님에게 내리는 유언이 있었다.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 덕조 스님은 유언이 있기 1년 전 불일암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로부터 11년째 불일암을 지키고 있다. 이제 법정 스님의 유언대로 맏상좌로서 사제들을 잘 이끄는 일만 남았다.
법정 스님은 다른 사제들(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에게도 당부했다.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속가 모친상에도 가지 않아불일암 본채에 법정 스님이 손님을 맞이하던 다실(茶室)이 딸려 있다. 한 평(3.3㎡)이 될까 말까 한 이곳을 스님은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라고 불렀다. 물 흐르고 꽃 피는 방이라는 뜻이다. 그 앞에 스님이 굴참나무로 손수 만든 ‘빠삐용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 등받이 위에는 ‘묵언! 방문시간 오전 8시~오후 4시’라고 적힌 나무 현판이 벽 쪽으로 기대어 있다. 의자에는 길상사에 있는 것과 비슷한 방명록에 수많은 사연들이 적혀 있다.
오후 1시 어름, 덕조 스님은 객들을 수류화개실에서 맞이했다. 법정 스님의 꼿꼿한 자태가 담긴 사진 액자가 벽에 걸려 있고, 그 아래 법정 스님이 쓴 ‘명선(茗禪)’이라고 적힌 목판이 다기판 위에 세워져 있었다. 명선은 ‘차와 선은 같다’(茶禪一如)는 뜻이다. 덕조 스님이 덕담을 건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동안거 중에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여기는 안거해제가 없어요. 1년 내 똑같아요. 송광사 같은 대중(大衆·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살림에선 서로가 지키지만, 여기는 해제가 없어요. 똑같아요.”
-1년 내내 안거라고요?
“그렇지요. 큰절에서는 해제되면 석 달 동안 배낭(걸망) 메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자유가 없어요.”
덕조 스님은 손님에게 차 대접을 하기 위해 물을 끓였다. 찻잔과 받침대를 사람 숫자에 맞게 배열하고, 끓은 물을 찻주전자에 붓고 찻잎을 띄웠다.
“우리 큰스님(법정 은사스님) 계실 때만 해도 안거 기간에는 지켜야 할 것들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그러다 보니 당신의 속가 모친이 돌아가셨는데도, ‘결제 중인데 내가 어떻게 나가나’라며 나가지 않으셨어요. 지금은 많은 대중이 그런 정신을 본받으려고 하면서 사는 거지, 그렇게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아요. 안거 중에 법회에도 나가고, 불자들도 만나고 하거든요.”
-불일암을 오르는 길이 두 갈래이던데, 일부러 오솔길 쪽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길이 참 좋지요?”
-네,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넓어졌지요. 이전엔 그야말로 오솔길이었어요. 큰스님 계실 때만 해도 그야말로 좁은 길이었어요. 큰스님 가신 뒤에야 길이 좀 넓어졌어요. 지난 10년 사이에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생명 중심 사상과 맑고 향기롭게 정신-길이 좁을 때는 짐을 지고 다니기는 어려웠겠어요.
“큰스님께서 멀리 출타하셨다가 돌아오신다는 전갈을 받으면 그 오솔길을 빗자루로 다 쓸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큰스님을 모셨어요. 그래서 빗자루질 하는데 도사가 다 됐답니다. 어느 처사님이 저에게 ‘시청에서 근무했어요?’라고 하시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속가에서 청소부였느냐고 농담을 하셨던 겁니다, 하하.”
-법정 스님의 글과 정신이 사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스님의 글을 읽고 지금 시대를 반추해 보면 다 울림이 있어요. 돌아가는 현상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 똑같으니까요. 사상은 유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상을 감싸는 외피는 유행이 있을지 모르지만, 알맹이는 유행이 없어요. 스님께서 감성이나 당시 유행한 흐름만 탔다면 지금 맞지 않을 겁니다. 스님의 모든 사상은 부처님 가르침에 기반하고 있고, 그것을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대중화·현대화한 것입니다.”
열반 10주기를 맞이해 법정 스님의 사상을 특히 재조명하자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바로 정찬주 소설가다. 그는 20여 년 전 법정 스님을 뵌 자리에서 “독자들이 스님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스님만의 시적인 감성이나 현실을 바라보는 예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며 “(스님의 글에는) 인간은 물론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등 유·무정물의 생명의 가치가 같다는 생명 중심 사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법정 스님은 “무염거사, 새로울 것은 없어요. 서양이 인간 중심이라면 동양의 불교는 생명 중심의 진리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 작가가 최근 펴낸 ‘법정 스님의 인생응원가’에 나오는 일화다.
팔만대장경과 빨래판 사건-덕조 스님은 큰스님의 사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큰스님의 핵심 사상이 생명 중심 사상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실천적 차원에서는 무엇보다 ‘맑고 향기롭게’ 정신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자연·세상·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자는 정신인데요. 큰스님은 수경 스님이 환경운동할 때 적극 지지하셨고, 불일암의 본사인 송광사의 큰 불사도 자연이 훼손된다는 생각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셨으며, 1970년대 봉은사의 개발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종단과 갈등도 빚었습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 살기 때문에 자연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기 위해 이웃과 나누며 살자고 했지요. 길상사가 무료급식을 아주 일찍부터 했어요. 그리고 갖고 싶은 것 다 가진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마음이 공허해지기 시작하므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있다. 1993년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이유로 독립기념관, 창덕궁 부용정 연못의 연꽃을 모두 제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법정 스님은 이런 삭막한 현실에서 푸근하고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우자며 ‘맑고 향기롭게’라는 순수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1994년 3월 발족 이후 ‘맑고 향기롭게’는 서울, 대구, 경남, 부산, 광주 모임을 두고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려운 사상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게 굉장한 기술인데, 법정 스님의 글은 참 편안하게 읽힙니다.
“스님께서는 경전의 말씀에서도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다 풀어서 설명했어요. 그 점이 특히 남다른 점이었지요. 절집의 용어를 자제하고, 거사님과 보살님들이(불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을 썼어요. 전통적으로 불가에서 한자 투가 많이 쓰였는데, 스님이 언어혁명을 일으킨 거라고 생각해요.”
법정 스님이 이처럼 대중적 글쓰기에 나선 계기가 있다. 1960년대 해인사에 머물 때였다. 어느 날 시골 아주머니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을 지나치면서 법정 스님에게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서 “방금 보고 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자 “아, 그 빨래판같이 생긴 것 말인가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경판은 한문을 나무판에 양각해 뒀으니 글을 모르면 그것이 빨래판과 비슷해 보일 법도 했던 것이다.
“거기서 충격을 받은 겁니다. 아무리 좋은 얘기라 한들 알아듣지 못하면 그게 빨래판과 다르지 않다는 거지요. 우리는 대장경판을 엄청난 보물로 여기지만, 그 내용을 모르면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지요. 법정 스님은 이 일을 계기로 경전의 한글 번역이 절실하고, 쉬운 글쓰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해요. 알아들어야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에서 상당히 깨어 있었던 겁니다.”
-티베트에서는 글을 몰라도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은 경통)를 돌린다고 합니다. 한 번 돌리면 그 안에 담긴 경전을 읽은 것과 같고, 그 법음(부처님 말씀)이 세상에 퍼진다고 믿는다던데요.
“그것은 그 나라의 정신이지요. 티베트의 판공초(남초) 호수에 갔더니 경이 새겨진 잔을 물에 담가요. 왜 그러느냐고 묻자 물고기에게 경전을 읽어준다는 의미라고 해요, 하하. 깃대에 경전을 새긴 깃발을 다는데, 바람이 불어오면 부처님 말씀이 바람에 날아가 세상에 퍼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있고 없음이 나뉩니다. 해탈은 요즘말로 하면 행복입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왔다 갔다 하는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 해탈이지요.”
유언 이후 장례법 간소화-법정 스님의 시각으로 보면 전통을 고집하는 불교계도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강요하는 말씀은 없었어요. 부처님의 말씀도 사실 그렇고요. 불교계 어른인 큰스님이 불자를 향해서도 보편타당한 말씀을 했지, ‘이것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요의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사실 불교계 내부에서도 그처럼 영향력 있는 분이 강력하게 발언해주기를 바랐을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 실천할 뿐, 강요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정말 소탈하신 분이었지요. 가실 때도 허례허식 없애라고 당부하셨잖아요. 관도 없이 평소 입으시던 가사 하나 걸치고 가신 겁니다. 큰스님 열반한 뒤 절집 장례법이 아주 간소하게 달라졌어요. 그것이 출가 수행자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이 문학 공부를 많이 했나요.
“큰스님은 아름다운 용어를 많이 쓰고, 언어 감각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문학 공부 덕분이었지요. 출가한 뒤에도 책에 대한 집착이 많아서 효봉 은사스님으로부터 야단도 맞았다고 합니다. 출가한 뒤에 사촌동생에게 책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큰스님들은 제가 행자이던 시절 방에 경전 외에 다른 책이 있으면 불태우라고 했어요. 출가해서 왜 필요 없는 바깥 책을 보느냐는 거였지요. 그런데 당신은 독서를 고집하셨단 말입니다, 하하. 지적인 탐구심이 엄청나게 강하신 분이었어요.”
-큰스님께서 특히 어떤 장르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예술가적 재능이 뛰어나셔서 영화뿐 아니라 미술, 음악, 사진 등에 관심이 많았어요. 음악을 좋아하니 누군가 오디오를 선물했어요. 평소엔 사람들이 들락거려서 잘 들을 수 없고, 혼자 계실 때 가끔 들었는데요. 암자를 찾는 이 없는 비 오는 어느 한낮에 제가 송광사에서 올라오던 중이었는데 불일암에 가까이 오니까 ‘빠바방’ 하고 커다란 음악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제가 나타나니까 스님은 조금 겸연쩍으셨는지, ‘비 오는 날이 가장 좋아, 빗소리에 맞춰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음악에 굉장히 조예가 깊으셨어요. 그러다 조금 지나자 오래 갖고 있으면 집착하게 된다며 오디오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습니다. 소리에 워낙 예민하시다 보니, 법회에 가서 음향이 안 좋으면 두 번 다시 그 절에는 안 가십니다. 그래서 제가 길상사에서 (주지)소임을 볼 때 음향에 엄청 신경을 썼습니다. 스님은 자유로운 영혼을 좋아해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도 좋아하셨지요.”
마음에 사무치는 큰스님의 겸손-큰스님 떠나신 자리에, 10년 동안 머물고 있는 것이 부담되지는 않는지요.
“저는 큰스님이 가셨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10년이 지나도 지금 이곳에 계신 듯해요. 영정을 모시고 매일 예불하고, 스님이 계셨던 이 공간에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물론 빈 공간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스님이 이곳에 계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요.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안 계신다고 느낀다면 제 마음대로 하겠지만, 계신다고 생각하니 항상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럽습니다.”
요즘 불일암이 법정 스님이 계실 때와는 다른 정갈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큰스님의 정신을 찾아서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은 다 책에서 읽은 느낌과 그림만 머릿속에 넣어 갖고 옵니다. 큰스님의 글을 보면 깔끔하거든요. 그런 분위기가 지금 이곳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면 결국 큰스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은사스님께 누가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도량을 가꾸고 있습니다. 제게는 큰스님이 아직 살아계신 겁니다.”
-10여 년 불일암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음이랄까, 마음에 사무친 것이 있었다면 무엇인지요.
“저에겐 아직 깨달음이 없고요. 마음에 사무치게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큰스님의 겸손함입니다. 큰스님은 박학다식해서 모르는 부분이 거의 없었지만, 자만하지 않으셨어요. 남들은 깨달았다고 표현하지만, 당신은 절대 그런 말 하지 않으셨어요. 물론 깨달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니까, 또 말로 한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그 경지에 갔을 때에야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뿐이지요. 다른 여러 어른 스님을 많이 친견했지만, 큰스님만 한 분을 뵙지 못했어요.”
-겸손이 큰 가르침이었군요.
“겸손함이 일상에 배어 있었어요. 법회를 다니다 보면 스님께 즉석 법문을 청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큰스님은 겸손해하며 마다했어요. 준비되지 않은 법문은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법문 내용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바늘 하나로 다 꿸 수 있어요. 철두철미하게 준비합니다. 그리고 강연을 하고 나면 원고를 다 태웁니다.”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에세이도 항상 수미상관, 정확한데요.
“스님의 (원고지에 쓴) 원고를 보면 깨끗한 게 없어요. 고치고 또 고칩니다. 탈고하기까지 수많은 교정과 수정을 통해 완성본을 만듭니다. 활자화되면 살아 있는 글이기 때문에 잡지 못한다고 표현하셨어요.”
불가에서는 겸손을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인다는 뜻의 하심(下心)이라고도 한다.
“제가 아는 한 큰스님은 남을 무시하거나 당신이 잘났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어서는 매우 괴각(괴짜)이셨다고 해요. 특히 해인사 시절 큰스님들 얘기 들어보니, 상상이 안 될 정도였더군요. 그래서 당시 별명이 ‘가야산 억새풀’이었다고 합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일 정도로 날카로웠다는 겁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매우 부드러운 분으로 바뀌셨지요.”
-10주년이라고 방문객이 많아졌나요.
“이곳에서 행사를 하는 건 아니어서, 특별히 많아진 것 같지는 않고요.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옵니다.”
-그사이에 후박나무는 많이 자랐는지요.
“지난 10년 동안 나무만 울창해진 것 같습니다, 하하. 우리는 그에 반에 반도 자라지 못했는데, 나무들은 정말 많이 자랐지요. 스님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우시니까 꽃을 좋아하셨고요.”
정찬주 소설가에 따르면 법정 스님은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을 수 있겠는데,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기는 힘들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성정이 매우 섬세하셨어요. 출타하실 때는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물으시고, 여행 다녀오실 때는 꼭 선물도 사 오셨어요. 대중을 향해서는 매우 냉정하게 말씀하시지만, 개인적으로는 농담도 잘 하시고, 위트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스님이 법문에서 ‘가장 좋은 절은 길상사가 아니라 친절’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뭔가를 진지하게 갈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절했어요. 당신이 밥까지 지어서 같이 먹자고 하기도 했고요.”
독서노트와 강연 원고 최초 공개불일암에는 시자가 없이 법정 스님 혼자 거처했고, 시자는 송광사에서 불일암까지 왔다 갔다 하며 시봉했다. 법정 스님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자 일부러 신발을 감추고 방에서 인기척 없이 지내기도 했다. 송광사에서 불일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불일암’을 뜻하는 ‘ㅂ’자 하나만 표시해 둔 안내판을 만든 것도 법정 스님이다.
-개인적으로 법정 스님의 자취를 기억할 만한 것이 있는지요.
“스님께서는 글을 많이 쓰셨지만, 출판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태워서 없앴어요. 그런데 제가 시봉할 때, 저에게 불태우라고 한 원고 가운데 제가 태우지 않고 갖고 있는 것들이 조금 있는데요. 제게는 그것들이 너무 소중해 보였고, 이런 것마저 없다면 나중에 스님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당신의 훌륭한 습관은 메모하는 것인데요. 독서한 뒤 책 내용을 요약한 독서노트(해설기사 309쪽)를 만들었어요. 그것을 한 권 갖고 있고요. 강연 원고도 몇 개 갖고 있습니다.”
실물을 보고 싶다고 하자 덕조 스님은 인법당으로 갔다가 원고 한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언론에는 최초로 공개하는 원본 육필 원고였다. A4 절반 크기의 독서노트는 색이 노랗게 변해 겉면에 적힌 글자도 지워져 있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진실에 대하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와 ‘러브’ 등에 대한 서평은 스님이 공감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제목의 강연 원고도 눈에 띄었다. 법정 스님은 1988년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내용을 발표했고, 이후 이 내용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수상록 ‘텅 빈 충만’에 실었다.
-덕조 스님도 길상사 주지를 맡고 있을 때는 아주 직선적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많이 젊을 때였어요. 소임 볼 때 주로 스님의 말씀에 따라 일을 했는데, 잘 안될 때도 있었고요. 스님의 정신을 펼치기 위해 앞만 바라보고 갔지요. 일을 벌여놓았는데, 마지막에 그만두라고 하실 때도 있었어요. 어떤 일을 벌이면 관계들이 얽혀 있는데, 그만두라고 하시니 정말 막막했어요. 그래도 스님의 의견을 존중했지요. 큰스님께서는 현실과 이상 가운데 주로 크고 이상적인 말씀들을 하셨어요. 예컨대 스님은 돈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저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지로서 절을 운영해야 하니까 직원 급여나 행사 비용 같은 것을 따져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사찰 재정에 도움이 될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해서 진행 중이었는데, 갑자기 중단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유는 ‘절에 돈이 많아지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였어요, 하하. 그게 스님의 정신입니다.”
일곱 상좌의 그리움-무소유 정신과 일치하네요.
“불일암에 오신 분들이 무소유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그리고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말씀하시면서 왜 차(소형차 SM3)를 운전하고 다니시는지 묻는 분들도 있었어요.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말자는 게 아니라 과도한 것을 소유하지 말고, 가진 것을 나누자는 정신임을 알면 좋겠습니다. 큰스님은 무소유가 곧 나눔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상좌들 모두에게 10주기는 특별할 듯합니다.
“우리 식구(상좌)가 모두 7명입니다. 각자가 큰스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같을 겁니다. 그런데 큰스님을 받들고 생각하는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큰스님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은 각자의 생각이고, 맞다, 틀리다는 것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요. 누구는 그리워서 울고, 죄송한 마음에 울고, 가르침을 새기며 울고 하겠지요.”
-법정 스님은 ‘(사)맑고 향기롭게’에 남기는 말의 첫 부분에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돌아가시면서까지 참회하겠다는 말씀에 겸허해집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참회는 삼종참회입니다. 우리가 알고 짓는 죄, 모르고 짓는 죄, 의도하지 않게 남을 시켜서 짓는 죄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그런 마음으로 참회합니다. 큰스님께서도 당신 모르게 상처받은 사람이 있으면 용서해다오 하는 마음 아니었을까요. 큰스님께서 무슨 큰 죄를 지었겠어요. 그 또한 겸손의 말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열린 종교관과 화합정신갑자기 문 밖이 시끄러워져 다실 문을 열자 수십 명이 불일암을 둘러보고 있었다. 참배객들은 덕조 스님을 찾았다. 하루에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를 들러 예불을 드리는 불자들이라고 했다. 송광사에 들렀다가 불일암까지 올라온 것이다.
법정 스님을 찾는 이들은 비단 불자만은 아니다. 스님은 평소 “히말라야로 오르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며 다른 종교도 존중했기 때문에 비불교 신자도 많다. 어떤 이는 방명록에 “불교와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스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깨우침을 받았다”고 적기도 했다. 스님은 열린 종교의 현장에 있었다.
“1998년 2월 24일 서울 명동성당 강론하는 곳에는 가톨릭 신부가 아닌 승복을 입은 분이 서 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그것은 1997년 12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이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사해주신 답례의 성격으로 명동성당이 세워진 지 100년을 기념하고자 마련한 강론 자리였다. 스님의 사상과 철학을 듣기 위해 성당을 가득 채운 신부와 수녀, 가톨릭 신도들이 귀를 기울였다. 강론 주제는 경제위기 극복과 청빈의 삶이었다.”(‘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중에서)
법정 스님의 화합 정신을 본받아 종교뿐 아니라 이념, 지역, 빈부 갈등이 우리 사회에서 눈 녹듯 사라지길 기원해 본다. 불일암에서 내려가는 오솔길에 양명한 햇살이 공평하게 뿌려졌다. 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