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멘은 석유, 천연가스 채취산업이 조직본부이며, 송유관이 도시를 거쳐 가로질러간다. 기계제작업, 금속가공업, 목재가공업, 화학공업, 경공업, 식료품공업이 주요산업분야이다.
즈나멘스키 사원
°투멘의 볼만한 관광지
투멘의 북쪽에는 트로이츠키 남자수도원(Троицкий мужский монастырь, 1616), 수도원안에는 트로이츠키사원(Троицкий собор, 1709-1715), 페트로파블롭스카야 교회(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церковь, 1755, 현재 도시역사 박물관), 2층짜리 수도원장실(1739), 거대한 석재벽(1741), 즈나멘스키사원(Знаменский собор, 1786), 미하일 마레인교회(церковь Михаила Малеина, 18세기말)등이 있다.
공공건축물 중 과거 상업학교 건물(1910-1914), 가스찌니 드보르(1835-1838), 도시참사회(19세기 초, 현재 주립 지지학 박물관), 우체국(1800년)등이 뛰어난다.
°투멘의 역사
도시는 “투라”강가(Река Тура)에 위치하며, 강의 오른쪽엔 “투멘카”강(Река Тюменка)이 위치한다. 1580년대 말에 이 강 사이에 쐐기모양의 육지가 생겼고, 이 곳에 러시아 요새가 생겼다. 요새 건너에는 타타르도시의 흔적이 있는 쟈료보 유적지(Царёво городище)가 있다. 투멘은 요새로부터 남동쪽, 투라강가와 투멘카, 시베리아 대로를 따라 발생되었다.
투멘은 시베리아지역의 첫 러시아도시이다. 이곳은 군사령관인 И. 먀시니(Мясиный), В. Б. 수킨니(Сукиный)에 의해서 1586년에 마치 요새도시처럼 건설되었고, 투멘카강이 흐르는 지역에 14세기 따따르인들의 도시인 침기-투라(Чимги-Тура)에 세워졌다. 17세기에는 시베리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통로였으며, 중요한 수공업중심지였다. 19세기 초, 투멘은 서시베리아의 가공공업중심지였고, 피혁산업이 유명하다. 1838년 시베리아로 가는 수로를 개항하고, 1885년 예카쩨린부르그에서 투멘의 철도를 건설하면서 투멘은 경제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는 조선업, 임업, 수산업의 높은 발전이 있었다. 투멘은 서시베리아지역의 큰 상업, 재정중심지였다. 투멘의 산업발전은 19세기, 도시교통의 발전은 20세기에 시작되었다.
역사상 녹둔도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최초로 나타나기는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여기에 공주를 거쳐 동류해 25리에 이르면 사차마도에 도달하고 여기서 강물이 나누어져 5리쯤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하고 있다.
세조 원년(1455년) 8월에는 이전까지 사차침도, 사차마도라 하던 것이 녹둔도 또는 녹도로 명명된다.
그리고 세조는 함길도 도절제사인 양정과 도사 강효문에게 조산구자(造山口子) 녹둔도 농민이 들에서 일할 때 야인들이 배를 타고 침입, 약탈할 것이 우려되므로 진장(鎭將)과 만호들에게 엄중히 방비하라는 밀유(密諭)를 내렸는데 여기에서 조산구자라 함은 녹둔도와 조산포와의 지리적 근접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녹둔도에 상당한 경작지가 있었음과 아울러 국왕이 직접 이 섬의 방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녹둔도의 지명 및 위치에 대해 경흥도호부지도 세종실록지리지와 마찬가지로 두만강 물이 공주(孔州)를 거쳐 동쪽으로 흘러 23리 가량 다다르면 사차침도에 도달하는데 여기에서 강물이 갈라져 5리쯤 흘러가다 동해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라고 하고 있다.
또한 경흥의 옛 지명이 공주(孔州), 광성(匡城)이며 사차마도(沙次麻島)가 녹둔도를 지칭함을 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경흥도호부 관방조(關防條)에 녹둔도는 육진개척 이래 변방의 전초기지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경흥관하의 무이보와 조산보에 관방소가 있고 무이보는 경흥부에서 북으로 26리 지점에, 조산포영은 경흥부에서 동쪽으로 35리이고 수군 만호 1인을 두고 있다.
녹둔도는 조산보와 10여리로 조산만호 소할이었고 본포(本浦)수군이 세종조에는 90명이 방수하고 있었다.
이밖에 경흥부 56리 지점에 토성이 있는데 둘레가 1247척, 높이 6척으로 두만강에서 동해 바다로 들어가는 조산포와는 20리 지점인데 병선을 두고 있었다.
이곳은 조산만호 소관으로 여름이면 조산포의 수군이 이곳을 방비하였다.
조선조 성종 17년(1486) 2월에는 영안도(永安道:함경도를 말함) 경차관(敬差官)으로 다녀온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인 정성근(鄭誠謹)이 녹둔도에 대해 보고하는 가운데 조산군민들이 봄에 녹둔도에 들어가서 경작하고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본보로 돌아오는바 내왕할 때 반드시 삿대를 저어 배를 움직이는데(이러한 배를 주즙(舟楫)이라 함) 농민들이 심히 괴로워하며 군민 모두가 유거방술(留居防戌)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섬의 토질이 차지지 않아 흙벽을 바를 경우 모래와 풀을 섞어서 쓰고 있어 비바람이 한번 스쳐 가면 곧 무너져 남는 것이 없으며 만일 적이 쳐들어오면 무엇으로 막아낼 것이며 큰물이 밀어닥치면 섬 전체가 침몰할 듯 하니 농민들이 여기에 상주하는 것 또한 두려워하고 있다고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실정을 아뢰고 있다.
중종 5년(1510년) 3월 庚申造에 좌의정 유순정(柳順汀)은 녹둔도에 적의 침로는 물이 깊고 왕래하기는 어려우나 우리 백성들의 경작로는 물길이 얕아 다니기 쉬우니 조산만호로 하여금 설보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중종 9년(1514년)10월 임인조에 지중추부사 안윤덕(安潤德)이 비변대책을 임금께 올리는 말미 가운데 녹둔도 방비에 관한 항목이 들어 있으며 동왕 37년(1542년) 5월 기사 가운데는 봄철 농사를 지을 때면 조산보의 군민이 녹둔도로 들어감으로 본보가 빌 정도라고 하고 있다.
이후 선조 때 정언신(鄭彦信)은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자 하였고 백두산 정계비 건립시 접반사 직무를 수행하고 병조참판을 지낸 박권도 그의 북로기략 경흥부 녹둔도조에 "경원에 야인의 소란이 있은 후 군량미 저축이 긴요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 부사로 하여금 경작에 힘쓰나 경작력이 점점 떨어져 어렵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선조 17년 정월 녹둔도에 둔전을 두었으나 북방지사(北方之事)라 어렵다고 하였고 동왕 19년에는 조정에서 선전관을 파견하고, 둔전관을 두어 설책 하였고 농기구와 농우를 들여보내 농민과 군이 경작에 힘쓰도록 하였다.
선조 20년(1587년) 조정에서는 오랑캐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녹둔도가 오랑캐 땅 인근에 있어 방어에 적절한 인물을 엄선해 보내야 한다고 하면서 이해 8월에 이순신을 조산만호로 발령하고 둔전관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은 3년상을 마치고 사복시 주지(司僕侍 住持)로 임명되어 공고를 치른지 겨우 보름이 지날 정도이었다.
공이 현지에 부임하여 보니 턱없이 부족한 병사로 인해 북병사에게 병력의 충원을 여러 차례에 걸쳐 요청하였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하고 충원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몹시 근심하던 차 추수기를 맞은 9월 24일 야인의 내침이 있었다.
야인들은 경계 울타리를 에워싸고 붉은 전포를 입은 자들이 앞으로 달려들어 옴에 공은 활을 당겨 이들을 백발백중 명중 시켰다.
이에 놀라 적들이 도망감에 휘하의 이운룡과 함께 사로잡힌 아군 60여명을 되찾아 왔다.
이 전투에서 공은 오랑캐의 무리들이 쏜 화살이 왼편 다리에 맞았으나 부하들이 놀랠까봐 물래 혼자서 화살을 뽑아 버렸다.
이 당시 우리측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는데 잡혀간 농민이 100여명, 군 전사자 10명, 15필의 우마를 약탈당하는 참화를 입었다.
이러한 참화가 조정에 보고되자 병조판서 정언신은 자신의 건의로 군량미 조달을 위해 둔전을 설치한 죄과라 하며 처벌받기를 자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임금께 아뢰었다.
눅둔도 경작건은 신의 발의인바 보고에 의하면 야인이 침입하여 인축의 참화에 약탈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이는 신의 잘못이오니 청컨대 신을 다스려 조야에 사과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 임금은 녹둔도는 변경에 있어 야인의 침범이 자주 있었으며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않는가, 이 섬은 역대이래 농보(農堡)로 군량미 조달이 어려워 섬에 들어가 경작케 한 것인데 어찌 병판의 실책이라 하겠는가 하고 사의를 물리쳤다.
이상과 같은 물의와 참황에 대해 북병사 이일은 녹둔도 함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북병사 이일(李鎰)은 공을 죽여 입막음을 하고 자기 죄를 면하려 이순신을 구속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때 북병사의 군관 선거이(宣居怡)가 공의 인품을 잘 알고 친히 지냈던 관계로 공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술이나 한잔 마시고 가는 것이 좋겠소 하니 생사가 천명에 달려 있는데 술을 마셔 무엇하오 하며 사양하였다.
그러면 물이라도 마시라고 함에 목이 마르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물을 마시겠소 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북병사 이일이 굳이 패군한 심문서를 받아내려 하자 의연하게 거절하기를 "내가 병력이 부족함을 누차에 걸쳐 병사에게 건의, 충원을 요청하였으나 병사가 이를 들어 주지 않았소. 그 공문이 고스란히 내게 있소.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죄가 내게 있지 않을 것이오”라고 응대하였다.
무엇보다 공이 힘껏 싸워 적을 격퇴, 추격해 붙잡혀 간 아측인 60여명을 탈환시켜왔음에 패군으로 맞이하려는 것은 천부당하다고 함에 대꾸를 잃고 공을 가두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백의종군 입공자속(立功自贖)하도록 하였다.
1588년 1월 14일 제1차 야인정벌이 있은 지 4개월이 지난 후 북병사 이일은 김우추 등과 4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인들의 집결지인 추도(楸島)를 습격 적 33명 사살하고 길주 이북의 여러 진영과 중앙의 장수들과 합세하여 2500여기의 군대로 출정하였다.
회령부사 변언수, 온성부사 양대수, 부령부사 이지시 등을 각각 선봉장으로 하여 여진족 4개 부락을 향해 삼갱(三更)에 두만강을 건너 다음날인 15일 미명에 기습을 감행 여진부락 200여호를 불태우고 적 380여명을 사살, 우마 29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에 백의종군한 이경록과 이순신은 큰 전공을 세워 사면을 받았다. 이후로도 녹둔도 둔전 문제 부활에 대해 조정의 논의가 분분했으나 계속 반대에 부딪쳤다.
실례로 선조 21년 함경감사 권징(權徵)은 임금을 알현하고 진언하기를 북도에는 일식一息(경작의 단위를 말함) 또는 이식(二息)의 공한지가 많이 있는데 하필이면 녹둔도에 둔전을 두려 하는지요 라고 하면서 공한지(空閑地)를 개간, 둔전을 두러 2천여 석을 거둘 땅이 있으니 녹둔도에 둔전 설치는 불필요하다는 반대의견을 내 놓았다.
이처럼 육진개척 이래 녹둔도 경략관리는 지속되었음은 물론 세조 이후로 경작과 변방방어기지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www.dokdocenter.org/ -한국의 영토관리 정책에 관한 연구- 양태진 님의 글 중 일부 인용
첫댓글 너무 파격적입니다
저도 저의 넘 큰 방구소리에...스스로 경악하고 있답니다... 0 . . 0
제정러시아 말기, 소련, 현 러시아 등이 지명왜곡 등 조작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투멘=두만은 발음부터가 너무 비슷하군요.
컴터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기분입니다. 국경과 인종, 민족 폴더별로 찢어진 화일들을 강력한 cpu로 끌어당기는군요.
원래 정복자들은...흥분에 들떠...조작을 그리 정교하게 하질 않습니다....영원히 지배가 계속 될 것이기에...자연히 있혀 지겠지란 심리 때문이져...일본이 역사외곡엔 정교했으나...상당부분은 대충 섞어논 식이고...그저 분서갱유만이 수단였을 겁니다...중국과 몽골등의 공산당들도여...
유럽은 거기에 비하면 더 허접한 외곡입니다...한나두 않 고치고...그냥 지네들 거였답니다...출처를 물으면...그저 동북쪽에서 왔는디...누군지덜은 모른답니다의 모르쇠 작전 뿐입니다...ㅡ. .ㅡ
유럽의 역사 조작은...그저 화토패를 마구 뒤섞어...파토내기 정도일 뿐입니다...특히 북유럽...지대로 섞이지도 않아...패가 쉽게 겹칩니다...유다...얘들이 아주 철저하게 섞었습니다...유다인들의 베레모...틀림없는 단군님의 특허입니다.
허..단군 영정에 그 납작한 모자? 전혀 생각치 못했는데.. 줄을 끌어 올리니까 유태가 드러나는건가? 걔네들과 세계역사의 조작은 현 국제정세로만 봐도 밀접한 관계가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