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탄식
김 재 성 목사
(한신대 교수/ 민들레성서마을지기)
ㅡ롬 8:22-27
피조물의 신음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22절).
바울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환경오염이나 멸종의 위협도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같은 인간의 죄로 인해 자연이 황폐해지는 것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가운데서도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듣는 감수성이 있었다.
며칠 전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산에 있는 어느 개 사육장을 관청에서 강제로 옮기는 바람에 개 주인은 항의의 뜻으로 개에게 사료를 주지 않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개들이 병들어가고 시체가 즐비하였다. 너무 배가 고프니까 서로 물어뜯고, 심지어는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는 모습까지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었다. 개장수는 자기도 1억대의 손해를 본 피해자라고만 하고, 대책도 없이 강제로 개를 이동시킨 관청도 나 몰라라 하고 발뺌만 했다. 그들에게는 돈이나 행정처리 외에, 개들의 신음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또 얼마 전에는 어린아이가 도사견에게 물려 죽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도사견들의 실태를 취재했는데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도사견은 원래 일본산 투견이고 절대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명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사견의 잡종이 덩치가 크고 육질이 좋다는 이유로 보신탕용으로 철망 안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대개 좁은 철망 안에서 살만 찌도록 하기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극대화 되어 행여 풀려나오면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철망 안에서 끙끙거리는 그 신음소리와 그 처량한 눈빛을 본 뒤로, 난 다시는 보신탕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어디 개뿐이겠는가. 닭도 소도... 양어장의 물고기들도... 인간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돈을 벌게 해 주기 위해 신음하고 있다.
우리의 신음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23절)
바울은 피조물의 신음소리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다. 이번 목요강좌에서 바울서신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바울은 참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를 느끼고, 절망하기도 하면서 탄식을 한다. 오늘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태연하게 사람들 앞에서 재연을 하고 별 죄의식도 없는 듯이 담담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죄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렸다.
대학원생들의 신앙수련회에 문동환 교수가 오셨는데, 자신이 나온 대학을 소개하면서 일본, 미국, 한국, 만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대학은 한국의 감옥이었다고 고백했다. <아리랑고개의 교육>이라는 책에서 보면, 그는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된 날, 밤마다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하는 애처로운 탄식 소리를 들으면서 이전에 학교에서는 깨닫지 못하던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그는 그런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이 땅의 민중들의 신음소리를 듣게 되었고, “하나님, 왜 이러해야 합니까?”하고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성서를 다시 정독해 봤더니 거기에서 그렇게 한이 맺힌 무리들의 끊임없는 외침이 있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편에서 그들을 깨우치시고 이끄시어 역사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나가시는 분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바울처럼 민감한 감수성으로 민중의 신음소리를 듣는 가운데, 불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고,“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왕상 19:12)을 만난 것이다.
다음 글은 한 자매가, 교회 근처에서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의 폭력을 보고 쓴 글이다.
지친 몸으로 무심히 길을 오르던 중 ‘저기요! 살려주세요.’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작은 소리 탓에 잘못 듣지 않았는지 주위를 살펴보니 옆에 식당에서 나는 소리 같았습니다. 열려진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식당 안에는 남녀가 뒤엉켜 있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남자는 충혈된 눈이 악의로 번뜩이며 여자의 머리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들어선 교회.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노란 불빛 속에 반짝이는 아늑함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신고하러 파출소로 뛰기도 하고 겨우 일을 수습하고 교회로 온 그 자매는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그 식당집 여주인의 비명과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런 가정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교회가 할 일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이런 감수성이 너무나 무디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도 아직도 남자가 여자를 구타하고 어른이 아동을 학대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60년대 영화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별 것도 아닌 일로 남자가 여자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다. 여자는 항의도 하지 않고 눈물지으며 쓰러지거나 흐느끼며 도망을 가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영화에서 아이(김정훈)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니까 아버지(신영균)가 사정없이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있어서 정말 기가 막혔다. 그래서 우리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도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이 많았고, 자녀의 따귀를 때리는 아버지가 많았나 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우리 교회만 벗어나면 이 세상은 그렇게 폭력이 난무하고 신음소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말할 때 아내가 남편과 사별한 후에 남편으로부터 해방되는 경우와 같다고 했다. 전에는 그저 법적으로 자유롭게 되어 재혼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만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율법처럼 사람을 꼼짝 못하게 구속하는 예로 남편을 든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오늘날도 남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여자들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혼자 산다고 한다. 그만큼 남편들이 아내에게 의존하고 또 아내를 부려먹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정말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나 남편으로부터 해방이 동의어가 될 정도로 그렇게 심각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이런 글은 2천 년 전의 여성들의 신음소리를 들려주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의미가 뭘까. 아까 그 자매가 교회 안을 포근하게 느낀 것처럼,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서로 감싸주는 포근한 가족을 이루고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약한 사람들, 여자들과 아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행복이 이 안에서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저렇게 폭력에 시달리는 신음하는 사람들에게로 우리가 다가가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의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음을 선포해야 한다.
성령의 탄식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26절).
바울의 영적 감수성은 여기서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신음을 들을 뿐 아니라 성령의 탄식을 듣고 있다.
우리는 성령은 우리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의 음성은 어떤 신비한 경험 속에서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보았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어떤 거룩하고 신비한 일을 할 때 성령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너무나 약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를 때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을 느낀다.
바울은 죄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 율법은 그에게 죄를 자각하게 해 주었다. 그는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절망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하고 탄식을 하였다. 그 순간 그는 두 손을 드는 것이다. 탄식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할 말도 없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탄식하며 한숨짓는 이가 우리들 자신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임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음식점 여주인이 맞는 것을 보고 그 자매가 속으로 탄식한 것은 사실은 자매의 속에 있는 성령께서 탄식하신 것이다. 우리가 마음이 아프고 딱하게 느끼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오는 것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내 속의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나 자신의 일로 내가 힘들 때도 있다. 세상은 온통 술수와 모략만 있는 것 같고, 사는 게 힘들어지고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그때도 내 속에 있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탄식하면서 위로하고 계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함으로 심장을 움직이고 숨을 쉰다면 우리는 피곤해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손발을 움직이고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 의식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몸 자체가 정한 규칙에 따라서 움직여 준다. 그것이 고장날 때 사람은 병에 걸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생을 우리 자신이 주관하는 줄 알지만 많은 부분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내게 일어나고, 내가 상상도 못한 용기와 능력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런 걸 안다.
난 개인적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그걸 느낀다. 늘 난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 때로 걱정도 하고 그러지만 늘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근원으로부터 주제와 영감을 받는 것을 고백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고 우리 영을 맑고 행복하게 해 주고 우리의 삶을 운영, 경영해 주는 분이 있으니 그가 곧 성령이시다.
우리는 바로 이 성령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고백하고, 주의 기도를 드리고, 사도신조를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므로, 예배드리고 싶고, 주님께 고백하고 싶고,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열정이 생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교우들이지만 서로에 대해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진심으로 형제자매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과 같은 영적 감수성을 지녀야겠다.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겠다. 나의 한숨과 탄식 속에서 성령의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을 들을 수 있어야겠다.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에도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이 계심을 믿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가운데 믿음의 삶을 살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