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계묘년(癸卯年)으로 토끼의 해라고 합니다. 소위 동물이라는 동물 가운데 가장 연약해 보이는 동물이 토끼입니다. 토끼는 날카로운 이빨도 사나운 뿔도 없어서 오로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 유일한 무기라면 무기입니다. 그래서 토끼에게 필요한 세 개가 있는데 큰 눈과 큰 귀 그리고 잘 뛸 수 있는 튼튼한 다리입니다. 천적이 나타날 때 잘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고 숨어서 접근하는 맹수를 알아차릴 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다리가 요구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자기 스스로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나 어린 새끼들까지 지키기는 어렵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토끼는 굴을 팔 때 세 개를 파 놓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고 하지요. 이 말은 집을 따로 세 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출입구를 세 개를 만들어서 한쪽으로 천적이 침입하면 다른 곳으로 파 놓은 굴 입구로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토끼에게 굴은 갇히는 곳이 아니라 열린 굴인 셈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교토삼굴 곧 열린 굴을 파는 사람입니다. 교토삼굴은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 맹상군 열전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제나라의 재상이요 왕족이었던 맹산군의 식객 가운데 풍환이라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맹상군의 신뢰를 얻어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재치를 설명하면서 나온 단어입니다.
맹상군은 설 이라는 곳에 일만 호의 식읍을 가지고 있어서 그곳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로 자신의 식객들을 부양했는데 돈을 빌려 간 주민들이 그 돈을 잘 갚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풍환은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나선 것입니다. 아무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고민하던 맹상군에게는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풍환에게 전권을 맡겨서 설로 보냈는데 풍환이 떠나면서 “돈을 다 받으면 무엇을 사 올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맹상군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자네가 알아서 우리 집에 없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사오게”라고 대답했습니다.
설에 도착한 풍환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맹상군에게 진 빚을 대조하게 한 후에 이자만 10만 전이 넘는 돈을 거두는 성과를 거둡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돈으로 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술과 고기를 대접하면서 맹산군이 남은 빚도 다 탕감해 주기로 했다며 보는 가운데 빚 문서를 모두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맹상군을 칭찬하며 그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풍환에게 맹상군은 놀라면서 그래 빚을 다 받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맹상군은 다시 그러면 무엇을 사 왔냐고 묻자 풍환이 대답하기를 “주군께 부족한 것은 은혜와 의리입니다. 백성들의 빚 문서를 불태워 주군을 위해 은혜와 의리를 사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맹상군은 언짢았지만 풍환이 설 백성들이 주군을 크게 칭송하며 그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고 하자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후일에 맹산군이 재상에서 잘려서 낙향하게 되었을 때 설의 백성 남녀노소가 백 리까지 나와서 맹상군을 환영하면서 반기었다고 합니다. 그때 맹상군은 풍환의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를 깨닫고 고마워했습니다. 미래의 위기를 지혜롭게 대처하는 풍환의 처세술에서 결국 교토삼굴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흔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주인에게 진 빚을 자신의 직분이 잘리기 전에 깎아 주어서 다음에 직분을 잃게 될 때를 대비한 청지기의 지혜를 주인이 칭찬한 것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가 있고 들어갈 때가 있으면 나올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때를 위해 인생의 굴을 팔 때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닫힌 굴이 아니라 더불어 나누어 주는 열린 굴을 파야 할 것입니다. 교토삼굴의 진정한 의미는 교활하게 머리를 써서 꾀를 부리라는 나쁜 의미보다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를 위해서 있을 때 넉넉하게 베풀면서 살아가라는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계묘년에 여러분은 굴을 몇 개나 파실 계획이십니까? 미래의 위기에 대하여 근심하고 염려하는 대신에 오히려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며 은덕을 베푸는 것이 인생의 굴을 파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