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14
7월10일[연중 제1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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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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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1Df-z_-bCns
[서울대교구 김한솔 도미니코(문래동본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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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 하고 외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직접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하면서, 당신 가까이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해봅니다. 그분으로부터 선택받은 제자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예였겠습니까?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종신서원때, 사제수품식때,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나 수도원 양성 책임자는 회중들 앞에서 저희의 이름을 크게 부릅니다. 잔뜩 긴장해있던 저희는 이름이 불려지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일어나 주교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물과 죄 투성이인 저를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요.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나,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나,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를 불러주신 그분께 백 번 천 번 감사드리면서, 또 다시 그분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십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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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2ZhJ01t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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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해가 성사가 아니라 상담이 되어가는 이유>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악한 영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할 힘을 주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누구에게는 주시고 누구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파견 받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 혹은 하늘 나라의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자녀를 탄생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녀는 세례 때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죄란 그리스도처럼 하지 못하는 게 죄입니다.
아기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아이가 때가 되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를 못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아이는 부모처럼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옹알이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 2천 번을 넘어진다고 합니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왜 넘어졌느냐고 하며 상담해 주는 일이 아니라 양식을 주며 다시 한번 노력해 보라고 하는 역할입니다.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2천 번씩 그냥 용서하고 보아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으면 결국 이 세상에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역할을 하라고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같은 죄를 계속 짓느냐고 뭐라 하고 또 그러한 죄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고해하는 이를 지나치게 불편하게 하는 것은 더는 그러한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사제가 고해 성사 할 때 그냥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 야단을 치거나 반복해서 짓는 죄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어 마치 상담가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 안에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스스로 무언가 더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고 이것이 신자도 힘들게 하고 사제 자신도 힘들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를 믿기 위해서는 외적인 표징을 자신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하루에도 몇 개씩의 그림을 그렸고 자신도 분명 그림을 잘 그릴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잃게 되었고 결국 그림 그리는 의미를 잃고 자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믿는 표징은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하느님께서 주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중풍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마치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특정 사제에게만 주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에서 한 아기의 머리에 입맞춤 했을 때 뇌종양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당신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봅니다. 그러니 다른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당신도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때 경찰이 심문하듯이 물어보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그냥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제가 악령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시도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사제 자신의 믿음도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마치 임금이 암행어사에게 주는 마패와 같습니다. 마패를 잃어버렸다면 암행어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암행어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은 모든 사제에게 악령을 쫓아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믿고 아프면 무조건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서로가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제가 자기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성령께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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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과 비교하면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비교’로 이행 시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었습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내가 남과 비교하는 이유는 우월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등감 때문에 우월해지려고 남과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사람은 어차피 비교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살아서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나 뉴에이지와 같은 쪽에서는 남과 비교하는 것조차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달리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스님들도 자신이 부처처럼 되기 위해 달리는 것이고 누가 더 앞서가는지 뒤처지는지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입니다. 다만 방향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부러운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수천억의 자산가입니다.
이탈리아의 ‘잔루카 바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수천억의 재산과 초호화 보트, 개인 제트 비행기, 수영장 딸린 저택은 기본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거의 할아버지인데도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젊은 최고의 미녀들을 바꾸어가며 삽니다. 그의 저택에는 잡지에나 나올법한 미녀들이 몇 명씩 함께 삽니다.
그는 SNS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세계 많은 이들과 공유합니다. 부러움을 사기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홍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자랑은 부족한 행복을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하루하루를 부러워하며 그의 부족한 행복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홍콩의 ‘주윤발’ 씨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의 재산 ‘8천억 원’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아내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저렴한 식사를 하고 싸구려 시계와 옷을 입습니다. 건전하고 겸손한 생활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두 사람의 인생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물으시면 어떤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바키를 선택하시는 분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고, 주윤발 씨를 택하는 분은 그것보다는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결국,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단순한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방향으로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달리는 방향을 바꾼다면 이전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마치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신다는 말은 ‘소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삶의 방향이고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지를 지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삶의 이유이고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들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그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소명대로 사는 사람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소명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남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비교 대상은 나 자신이고 나의 주위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은 또한 내 협조자들이고 나의 위로자들이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비교 대상이 없는 사람이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기력에 빠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보다 목적지를 향해 눈이라도 돌리는 사람이 더 활기차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합니다. 비참해져도, 교만해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도 부러워함 없이 함께 뛰는 사람들을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주님의 소명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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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재형 [umbrella] 2024-07-09 ㅣNo.174071
27대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였던 26대 사목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에 온 지도 5개월이 되었습니다. 27대 사목회 회장단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서 요셉, 박 에드워드, 김 다윗, 홍 고스마” 본당에는 회장단과 더불어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전례, 구역, 친교, 선교, 새 신자, 청소년, 교육, 홍보, 정보기술, 여성, 사회 사목 분과가 있습니다. 세대별 모임도 있고, 주일학교와 한국학교 담당자도 있습니다. 사목회와 함께 종신 부제, 수도자, 성직자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27대 사목회가 해야 할 사명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겁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더러운 영’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욕망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이웃의 의견을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입니다. 나보다 못한 이를 도와주지 못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더러운 영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을 꼴찌가 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했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지만, 부자는 지옥에 있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이고,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자라서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아쉬운 것이 없다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에게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여인 중에 복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겨 바다로 넣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면, 희생의 마음을 지닌다면, 가난한 마음을 지닌다면, 굳건한 믿음의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는 능히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병자와 허약한 이를 고쳐 줄 수 있습니다. 27대 사목회가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분명 갈등과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27대 사목회가 성과와 결실을 먼저 얻으려고 하면 시련과 고통이라는 장애물을 만날 것입니다. 27대 사목회가 더러운 영을 먼저 물리칠 수 있다면 겸손과 희생 그리고 가난과 믿음의 마음으로 무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함께하실 겁니다. 주님! 27대 사목회를 축복해 주시고,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되게 하소서.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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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도 치유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해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사도를 부르신다.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 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절)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분부는 또한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절)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있었다. 결국은 유다인들이 부름을 받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여 다른 민족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이는 다른 민족들이 더 큰 은총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변화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므로 복음이 전해지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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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첫자리에 두셨을까요?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하느님께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의 역사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 말씀에도 익숙하였고, 회개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라는 요한 복음서의 말씀처럼,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나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나요? 아니면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또한 그분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 더 익숙하지는 않나요? 익숙하거나 매우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함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주 먼 관계일 수 있음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들음’이 사라진 관계를 하느님과 맺지 마십시오. 들음이 끊긴 삶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서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자신이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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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정의 복음화’가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1-7)
1) 열두 사도의 명단에 대해서, “복음서 저자들은 왜, 배반자 유다의 이름을 기록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의 이름을 지우고 ‘마티아’를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순전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세속의 역사 기록에서는 부끄러운 일들을 그런 식으로 감추고 덮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렇게 감추고 덮어버린 것들을 후세의 학자들이 다시 찾아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한 책이고,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라고 복음서 저자들에게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만일에 부끄럽다고 해서 감추고 덮어버렸다면, 그래서 성경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하나라도 들어 있다면, 바로 그 하나 때문에 성경 전체가 권위와 신뢰를 잃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간문에,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사도로 뽑으신 제자들 가운데에서 배반자가 생긴 것은 사실이고, 유다는 영원히 ‘배반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는지, 그가 배반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뽑으셨는지, 모르셔서 뽑으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만일에 아시면서도 뽑으셨다면, 유다에게 배반의 책임을 묻기가 어렵게 되고, 모르셔서 뽑으셨다면 주님의 ‘전지전능’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 문제는 세상 종말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4-25) 이 기도는, 주님께서 유다에게 사도 직무를 맡기신 일은 취소되지 않았지만, 그 직무는 유다 자신이 ‘내버림으로써’ 마티아에게로 넘어갔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려 주신 은총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은 사람 쪽에서 그 은총 속에서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내버린다면, 그 사람은 은총을 잃게 되고, 그 은총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2)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그 ‘나중’은 ‘성령 강림 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ㄱ), 또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그냥 ‘유대인들’이라는 뜻입니다.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앞의 9장 36절에 있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가는 것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유대인들에게만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그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뽑으셨습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만’ 뽑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먼저 뽑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2) 사도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는 믿음과 용기로 가득 차서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지만, 성령 강림 전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3) 이방인들 쪽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선 먼저 하느님부터 믿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예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지는 않고 예수님의 복음부터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명령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여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놓아두고, 즉 자기 가족을 놓아두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인데, 우선 먼저 자기 가족부터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정의 복음화’가 세상의 복음화보다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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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의 눈에 놀랍고 특별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분의 선포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적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눈앞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예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왔다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열두 명의 제자는 예수님에게 권한을 받아 치유의 기적을 이어 갑니다. 마치 구약 성경에서 열두 부족이 하느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듯이,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전하는 셈입니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도록 권한을 주시는 것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선포는 그분의 업적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모든 신앙인에게 옮아갑니다. 모두가 예수님과 같은 권한을 가질 수는 없지만, 신앙인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 나라가 우리 안에 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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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선택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의 자긍심은 그들의 교만과 우상 숭배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윗 왕조의 참된 후계라고 서로 맞서면서 세속적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었고, 결국 북 이스라엘은 화려한 성전과 제단과는 달리 위선과 거짓으로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상대로 호세아 예언자는,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라고 외쳤지만, 북 이스라엘은 물론, 뒤에 남 유다도 이민족에 의해 멸망의 비운을 맞을 때까지 예언자의 회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였기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통하여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아 새 계약을 맺으시고 새 백성으로 일으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름받은 첫 제자들이 유다 사회의 뛰어난 지식층이나 엘리트는 아니었습니다. 바다에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하는 어부들, 이민족에 빌붙어 먹고 살던 세리, 혁명을 꿈꾸던 사람, 셈에 밝았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신한 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아픔을 겪고 사는 이들과 함께 지내시며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하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심으로써 새 계약을 맺으시고, 하느님의 구원의 능력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하십니다.
세속을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을 찾고 수도원 공동체를 세워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자 했던 베네딕토 성인의 열정이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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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가까이”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삶에 더 깊이 참여하라는 뜻이며,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더러운 영들이 쫓겨나고 병자와 허약한 이가 치유받는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승리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열두 제자의 이름이 “사도”라는 호칭으로 소개됩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이미 익숙한 이름들이기도 하지만 그 명단에 자신 또는 친밀한 이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본당에서 봉사자를 선발하여 명단을 발표하여도 교우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그 명단에 올릴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찌 신자들뿐이겠습니까? 사제품을 받으며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야 예언서 6,8)라고 바쳤던 기도가 점차 “쟤가 있지 않습니까? 쟤를 보내십시오.”라는 기도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계속 이루십니다. 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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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0,6~7)
어제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풀이 죽은 듯 보이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9,36~38) 예수님께서 언급한 ‘수확할 일꾼’이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시작해서 농사지어 놓으셨고, 다만 수확할 것을 거두어 드릴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확할 것을 거두어 드릴 일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일꾼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해놓으신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하시고 이루신 일은 곧 사람을 살리는 일 곧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강생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요19, 30)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루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승할 일꾼들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완성해 놓으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할 열두 사도들을 뽑으셔서 삶을 통해 가르치시고 파견하셨습니다. 구원 사업에 부르심받은 이들은 많지만, 예수님이 하신 방법대로 수확할 일꾼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분명 일꾼으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말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고 했지, 예수님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는 일꾼은 오직 예수님께서 선택한 소수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였지만, 정말 믿을만할 예수님의 일꾼은 많지 않았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꾼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먼저 홀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시고,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아버지의 뜻을 지속해서 실천할 사도들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 뽑으셨습니다.(10,2~4) 제자들이 예수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요한 15,16 참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라는 점입니다. 즉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점은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과 몸과 마음이 함께 머물면서 삶을 통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육은 이념적 교육이 아니라 스승이신 주님과 함께 삶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터득되고 내면화되어 가는 삶의 교육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삶의 교육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처럼 군중들을 가엾은 마음에서 대하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엾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영과 마음으로 충만할 때 수확할 힘을 길러내고, 수확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고 양성시키신 다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6)하고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의 명단(10,2~4)을 유심히 살펴보면, 가장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점은 이들 선택된 제자들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정말 하찮은 사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부르심 받고 선택받은 것은 우리 역시도 제자들과 마찬가지 혹 어쩌면 더 부족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분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코린 1,26.29)라고 설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그들이 부르심 받기 이전의 출신 성분, 교육 정도, 성격, 직업의 상태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에 ‘그 무엇이 될 가능성’을 꿰뚫어 보시고 또한 하느님의 은총에 얼마나 순응하고 조화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부르심 받은 이들은 이미 완성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차츰차츰 변화되고 성숙 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런 양성 과정을 통해 사도들은 자신들의 지식, 능력 그리고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10,6.7)라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갈 단순하고 순박한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사람, 복음 선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사람 곧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과 함께 머물고, 머물면서 체험한 바를 삶을 통해 하늘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존재가 되어가도록 노력하며 살아갑시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 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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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보잉에서 30년 넘게 일하던 멀덜리는 포드모터컴퍼니 설립자의 증손자인 빌 포드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위기에 있는 포드모터컴퍼니 대표를 맡아 사회 회생 작업을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2006년에 멀덜리가 포드를 맡았을 때, 그 해에만 20조 가까운 손실을 예상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처음 최고위 임원들과 사업 계획 검토를 위한 주간 회의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각 임원이 맡고 있는 주요 프로젝트 5개씩을 3가지 색깔로 표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녹색은 프로젝트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고, 노란색은 일부 문제가 있으나 해결책을 찾아 작업중이라는 뜻이고, 빨간색은 문제가 생겼고 해결책도 찾지 못한 상황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 회의에서 임원들의 프로젝트 보고에서 제일 많은 색깔은 무슨 색이었을까요? 그 해만 20조 가까운 손실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모두 빨간색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색깔이 녹색이었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잘못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임원들은 문제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임 대표에게 잘못 보이면 안 된다는 임원들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를 찾아야지만 해결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자체를 숨기려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직장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나의 옳음만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문제를 발견한 사람만이 빨간색을 녹색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수도자 성소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새영세자의 숫자보다 냉담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이를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파견하는 모습에서 방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악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관심사는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따랐고 성공적으로 전교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과연 어디에 있어야 우리 교회가 더 주님께서 원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의 편에 서야 하고, 세상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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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불러주신 분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한 이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뽑아서 능력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자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보면 죄인으로 낙인찍힌 마태오라는 사람도 있고, 급진적인 열성 당원인 시몬도 있으며 요한 세례자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회개하고 성령의 불을 받게 됨으로써 죽음을 불사하는 증거자들이 되었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습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우리가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를 알아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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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사람이고 싶으니>
마태오 10,1-7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당신의 사람이고 싶으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마태 10,5)
당신의
사람이고
싶으니
당신이
될 수 있는
데까지
가까이
더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당신의
사람이고
싶으니
당신을
나눌 수 없는
데까지
멀리
더 멀리
아득히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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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우리는 어제까지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드러내준 기적 이야기들을 들어왔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듣게 되는 말씀은 제 10장의 “파견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르심 받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또 다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로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일을 하는데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십니다.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해 주시는 동시에, 그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은 신적권위와 능력, 곧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은 메시아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이처럼, “사도”란 “파견 받은 자”이기에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한 분의 뜻을 전파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파견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파견 받은 자의 재능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파견 받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러 가야할 곳을 말씀해주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5-6)
이러한 전도의 대상 지역을 이스라엘로 제한시키는 것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곧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의 우선순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로 뽑으시면서 “먼저” 사도에 합당한 당신의 권위와 힘을 주셨다는 사실로, 이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이곳에 모여 살기에 합당한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직무나 소임을 받았다면, 이미 그에 합당한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재능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또 하나>는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먼저” 그 복음전파의 대상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부터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먼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선포되고,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흘러넘쳐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 그분의 지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요 사도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동시에, 우선순위를 분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시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파견하신 예수님이요, 우리는 그분의 제자요, 사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김없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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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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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언제나 주님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ㄴ.4ㄴ)
오늘 화답송 시편 두 구절이 참 멋지고 은혜로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오늘 지금이 바로 주님을 찾아 만날 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을 때 기쁨이요 우리 믿는 이들이 언제나 찾을 바 주님의 얼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목말라 주님을 찾게 되고 주님을 만날 때, 샘솟는 희망에 기쁨입니다.
내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은 제 사제서품 35주년이 되는 날이네요. 수도사제 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강조해온 삶의 중심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며,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임을 참으로 많이 강조했습니다. 이 넷은 우리 삶의 필수 요소입니다.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없이 어떻게 광야 인생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또 하느님 대신 이 자리에 누구를, 무엇을 놓을 수 있을런지요! 살아갈수록 사람됨에 얼마나 본질적이요 필수적 네 요소인지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삶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겸손과 진실, 안정과 평화, 위로와 치유, 희망과 기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참된 삶이요 두려움과 불안도 점차 약화됩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좋습니다.
“어른의 사과는 품위에 손상을 주는 것이 아닌 품격을 높이는 것이다.”<다산>
이런 겸손한 어른이야 말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정주의 삶입니다. 이래야 뿌리 없이, 중심 없이 방황하거나 표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뿌리 없이, 중심 없이 표류, 방황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자랑이자 축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과 더불어 삶의 질서입니다. 이래야 안정과 평화요 건강한 심신에 영육의 삶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일과표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하는 미사가 하루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기도와 노동, 독서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수도생활이 아니더라도 건강한 영성생활을 위해서 나름대로 균형과 조화의 일과표에 따른 삶을 권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기 위한 삶의 세 요소를 많이 강조합니다.
1.기도하라.
2.일하라.
3.공부하라.
여기에 하나를 첨가한다면,
4.걸어라.
‘걸어라.’ 운동역시 필수이며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입니다. 운동이자 동시에 기도가 될 수 있는 걷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생활화하는데 필수적 4대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사도로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원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안으로는 배우고 관상하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파견되어 선교 활동하는 주님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사도로 파견하셨듯이 주님은 날마다 당신 제자로 뽑으신 우리를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이자 사도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죄와 병으로 얼룩진 삶의 현실이기에 더러운 영들의 축출과 병과 허약함의 치유는 필수요 교회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르신 열두 사도의 면면이 독특합니다. 혼자만의 제자요 사도가 아니라 더불어 교회공동체에 속한 제자요 사도의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획일성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 교회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당시 주님의 제자들이자 사도들에게 주신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가서 길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이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듯 우리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그대로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 됩니다. 저절로 복음 선포의 선교요 길잃은 이들도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이끌게 됩니다. 예나 이제나 길을 잃고, 희망과 꿈을, 빛을 잃고 절망의 어둠중에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의 제자요 사도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하늘 나라 꿈의 실현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었을 때 우상숭배로 인한 그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그대로 정의의 예언자 호세아가 전하는 하느님의 심판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사마리아는 망하리라. 그 임금은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들 위까지 올라가리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떠날 때 내외적 비참한 상황을 상징합니다.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무질서하고 혼란한 삶인지요! 하느님이 아닌 스스로 하느님 중심을 잃어 자초한 심판 현실이요, 우리에게는 회개의 촉구가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호세아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희망을 북돋아 주시며 우리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십니다.
참사람의 원형이요 예수님의 예표같은 호세아가 참 멋집니다. 참으로 멋진 하느님에, 멋진 호세아 예언자입니다. 정의와 심판의 예언자이지만 동시에 희망과 위로의 예언자 호세아의 반갑고도 고마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그대로 회개 실천의 구체적 내용이 참 아름답습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호세 10,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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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소(聖召)와 소명(召命)>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제자에서 사도가 됩니다. 제자가 자기가 스승을 선택한 측면이 있다면 사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선택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제가 결론처럼 말씀드리면 우리도 제자에서 사도가 되어야 하고, 성소를 받아 소명을 살아가는 사도가 돼야 한다는 것이 오늘 저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왜 이것을 강조하여 얘기합니까?
제가 이러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전히 이러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잘 살려면 성소부터 잘 받아야 합니다. 부르심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이고, 소명을 잘살지 못한다면 이 첫걸음을 잘못 떼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머리에서 성소를 받아들이고, 중요한 때 성소로 받아들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늘 성소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아직도 완성을 향해 현재진행 중입니다.
저의 경우 처음엔 내가 주님을 스승으로 선택했다가 스승을 포기한 뒤에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내가 주님을 선택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그때 주님은 진정 나의 주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진정한 종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진정 나의 주님이라면,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의 종이라면 성소 의식뿐 아니라 소명 의식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주인이 종을 옆에 끼고 살려고 부릅니까? 일을 시키려고 부르지! 옆에 끼고 사는 것은 제자이거나 애인이지 종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를 당신께 가까이 부르신 것은 왕비처럼 애지중지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키기 위해 곧 소명을 주기 위해 부르신 것이고, 가까이 두고 가르치신 것도 사도로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주님께 가르침도 받고 소명까지 받은 종을 일컬어 사도라고 하는데 받은 소명이 뭐냐 하면 길 잃은 주님의 양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고, 여기저기 흩어진 주님의 양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와 달리 사도란 이런 존재입니다.
주님께 갔다가 이웃에게 가는 존재이고, 주님께 받아서 이웃에게 주는 존재이며, 주님께 받은 가르침을 이웃에게 나눠주는 존재이고, 자기가 받은 가르침을 이웃도 주님께 받으라고 이웃을 모으는 존재입니다.
이제 관건은 이것입니다.
제자입니까? 사도입니까?
내게 소명은 무엇입니까?
영광입니까? 부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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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10,6)
<회개 선포의 사명!>
오늘 복음(마태10,1-7)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시면서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ㄴ-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민족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자신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을 자자손손에게 전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떠난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며, 이 회개 선포의 사명이 열두 사도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 선포의 사명'은 또한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사도들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느님을 믿다가 잠시 떠나있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과 행동으로' 회개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 '회개의 메시지'는 요즘 우리가 독서로 듣고 있는 '호세아 예언서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북왕국인 이스라엘의 말기에 사마리아를 무대로 활동했던 예언자인데, 그는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심판을 선포하면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회개하고, 너에게도 회개를 선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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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LiwlN_f4h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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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 6)
우리의 사명은
다름 아닌
길 잃은
양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가야 한다는
사명이 우리를
살립니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길 잃은
양들입니다.
길을
잃어
본 적이 있기에
다시 깨어나는
길의
소중함입니다.
길을 잃었기에
그만큼 길이
중요합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길 잃은
사람들 속에서
길을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길을
다시 얻을
자격이 있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을 잃었기에
길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다시금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서
우리의
길도 달라집니다.
가야할 곳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다하시는
모습에서
참된 구원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삶도
길이 되시는
주님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삶 속에서
깨어나는
길입니다.
주님을 바로
보게 하는
우리의 사명은
다름 아닌
길을 찾아주는
봉사입니다.
봉사의 방향이
깨어남의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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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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