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blog.naver.com/viking999/40095083734
[불교입문 18] 반야심경에 대하여 / 정병조
반야사상의 정수 법보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대승불교와 관련된 부분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불교전통 자체가 대승불교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역시 대승불교의 사상이 오늘날 이데올로기적인 갈등, 종교간 대립, 심화되고 있는 도덕성 회복의 문제 등에 관해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사성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반야사상의 철학적인 근거, 그리고 반야사상이 용수보살을 중심으로 해서 어떻게 중관철학으로 이어지는 지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제 반야사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반야바라밀다심경>, 흔히 줄여서 <반야심경>이라고 말하는 이 경이 담고 있는 철학적인 대의, 그리고 그 사상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 불교인들은 집에서나 절에서 조석으로 이 <반야심 경>을 봉독한다. 그러나 그 뜻을 모르고 있는 불자들이 예상 외로 많음에 매우 놀란 적이 있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지 독송하는 공덕이 얼마나 지대한가하는 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와 내포된 철 학성을 생각하면서 조석으로 외우는 경우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를 나누어 상상해 보면, 어느 쪽이 훨씬 더 보람 있는 일이고, 공덕을 쌓는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목은 인도말로는 '프라즈냐파라미타흐리다야수트라'이 다. 그 가운데서 '흐리다야'만 '심('u)'이라고 옮겼을 뿐 프라즈냐'는 '반야', '파라미타'는 '바라밀다'로 그대로 음사한 것이다.
반야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반야에 대해서 세속적이고 분별적이며 피상적인 인식을 초월하는 절대 완전한 인식이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이 반야에 의거해서 열반을 증득하였고, 또 우리들 중생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근거가 되는 것도 반야이다. 파라미타는 인도 원어의 문법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어이다. 다만 대체적으로 번역하자면 파라'란 '언덕, 피안'을 가리키고, '미타'란 '그러한 언덕에 도달한다. 도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파라미타란 인도말을 간혹 중국의 번역가들이 '도피안'이라고 번역하는 예가 있다. 즉, 부처님이 가르쳤던 열반의 언덕에 도달한다는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흐리다야는 유일하게 그 뜻을 취하여 '심'이라고 번역하였다. 이 마음이라는 말에는 매우 다의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선 흐리다야에는 '심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는 '중심 '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기둥'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래서 중국말로 이 세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를 찾아서 '심'을 쓰게 된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고 했을 때 앞의 '마하'자를 붙일 수도 있고, 붙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산스 크리트 원본의 <대본반야심경>에는 붙어 있고, <소본반 야심경>은 '마하'자가 안 붙어 있다. 그래서 중국 번역가 들이 '마하'를 넣기도 하고 안 넣는 경우도 있다. '마하'란 '매우 크다'라는 의미인데 광대무변하다는 뜻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그래서 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이라는 제목 전체를 우리말로 옮겨서 번역을 해보면 크고 광대무변한, 절대 완전한 지혜의 힘에 의해서 열반 이라는 피안에 도달한, 그와 같은 상태를 가르친 부처님 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현재 이 <반야심경>의 인도말 원본을 토대로 하여 한문으로 번역된 것에는 일곱 종류가 있다. 통상 불자들이 조석으로 외우는 '관자재보살행심...' 이라고 시작하여 '아제아제.......모지사바하'로 끝나는 것이 현장스님의 번역본이다. 그 번역외에 구마라집 등에 의한 여러 번역본이 있다. 그중에서 동남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제일 많이 읽혀지는 것이 바로 현장스님의 번역본이다.
현장스님은 7세기 초반에 중국에서 태어났던 매우 위대한 불교사상가 이다. 그는 630년경, 나이 30세 되던 해에 중국의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로 건너갔다. 그 당시 세계 최대의 불교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나란다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장스님은 지금도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는 천산남로의 험준한 길을 따라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들어갔다. 대략, 지금 우리들이 판단하기에는 편도로 가는 길이 2년반~3년반이 걸렸으리라고 추측한다. 그 옛날, 걸어서 돈황을 지나 고비 산맥을 가로지르고, 천산남로, 천산북로 가운데 천산 산맥을 뚫고 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또 카라코람 연봉을 넘고 인도 대륙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가 귀국하면서 쓴 책이 바로 <대당서역기>인데, 우리에게는 손오공에 얽힌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더욱 친숙하다. 그 책은 7세기 중반의 인도 불교의 상황을 알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사료적인 가치가 많으나 연대적으로 보아 현장스님의 책이 약 2백여 년 빠르기 때문에 두 문헌을 통해 그 시대적 추이를 짐작 할 수 있다. 그가 중국에서 인도로 갔다 온 것은 역경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현장스님 이전에는 인도 출신 스님들이 중국에 와서 중 국말을 배워서 불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현장스님부터는 거꾸로 중국 사람들이 인도에 가서 인도말을 배워서 경전을 번역하게 되었던 것이다. 통상 인도사람들이 번역하던 것을 구역이라 하고, 현장스님을 분기점으로 하여 신역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현장스님은 역경의 역사에 있어서 신역의 태두라고 불리운다.
현장스님은 그 번역의 태도가 냉정하고 밀하였다. 대체로 번역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축자역이라 하여 직역을 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의역이다. 대표적인 역경승인 구마라집은 주로 의역을 하였다. 그는 원의를 조금 손상할지라도 아주 아름답고 뜻이 통하는 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그렇지가 않다. 조금 원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 자, 한 획 도 바꿀 수 없다는 직역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제목에서도 보듯이 도저히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에는 직역을 시도하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