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건복지부가 아주대병원에 <전문 응급의료센터 건립案> 보고서 작성을 의뢰했다. 병원 측
에서는 이국종에게 보고서 작성을 맡겼다. 그는 희망을 가지고 몇 달 밤샘작업 끝에 보고서 작성을
마쳤다. 12월 말경, 이국종은 보고서 50부를 들고 과천에 있는 보건복지부 청사를 찾아갔다. 날은 추
웠고 짐은 무거웠다. 어렵사리 사무실을 찾아가니 담당 사무관이 턱짓으로 구석자리를 가리키며 거
기 두고 가라고 했다. 혼자서 카트에 싣고 온 보고서를 한 뭉치씩 옮기는 동안 사무관은 사적인 전화
를 하며 히히덕거리고 앉아 있었다. 응급의료센터 설립에 관해 지니고 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싶었다. 역시나! 보건복지부에서는 놀고먹기 눈치 보여 시늉만 냈을 뿐 전국적으로 전문 응급의료
센터를 건립할 의지도 계획도 없었다. 보건복지부에서 그 보고서를 끝까지 읽은 자조차 아무도 없을
터였다. 차라리 바쁜 사람 부려먹지나 말고 복지부동이나 할 것이지.
대학병원에서도 인품이 뛰어나고 실력이 출중한 교수일수록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된다. 특히 실력
있는 외과의사들이 남먼저 대학 및 병원 조직에서 괴리되어 하나둘 병원을 떠난다. 성형외과 정재호
교수가 병원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이국종은 그를 찾아갔다. 정 교수는 미국에서 제대로 연수를 받
기 위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미국 의사자격까지 취득한 의지의 지성인이었다. 그는 안악면 수술
법을 익혀온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성형외과 의사였다.
“국종아. 너는 의과대학 교수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니?”
“교육, 연구, 진료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나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어. 첫째, 교육에 대해
서는 1990년대 중반에 성형외과가 국가고시 과목에서 제외되어 외과에 통합됐어. 성형외과가 인기과
목이라고는 하지만 의과대학 교수로서 독립적인 과목으로 가르칠 수 없는데 올바른 교육이 되겠니?
그러니까 성형외과 개업의들이 교수들보다 실력이 낫다는 얘기가 나오는거야. 연구에 대해서도 나는
지금 미국에서 공부한 상처 치유기전에 대해서 연구를 전혀 못하고 있어. 연구 여건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지. 사정이 이런데 진료가 제대로 되겠니? 내가 대학에 안주하면서 오히려 후배들
에게 짐이 되고 있지 않나 싶은거야.”
모든 외과의사들이 국내 최고 수준의 성형외과 수술을 한다고 인정하는 정재호 교수는 그렇게 아주
대병원을 떠났다.
2006년으로 접어들자 이국종을 내보내자는 연판장이 돌았다. 직접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 실
체도 밝혀지지 않았다. 윗선에서도 소문을 들었을테지만 이국종을 자르지도 않았고 감싸주지도 않았
다. 알아서 사직서를 내라는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병원 안에 나도는 연판장을 몇 장 주어 들고
존경하는 선배인 췌담도외과 김욱환 교수를 찾아갔다.
“그건 네가 알아서 극복해야 하는 문제야.”
두 사람 다 상대방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국종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지하 2층에 있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비만 오면 사방에서 물이
줄줄 새서 여름이면 곰팡이가 시퍼렇게 피는 한 평 남짓한 방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열악한
공간조차 이국종에게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임인경 학장이 이국종을 불렀다. 학부 때는 생화학을 배웠고 대학원 석‧박사 과정 때는 이
국종을 지도해준 은인이었다.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더러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넣어주기도
하던 분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임 교수는 지나는 말처럼 얘기했다.
“국종아. 사람 살아가는 조직이라는 데가 말이야, 책에서 배운 대로 똑바로 굴러가지를 않아. 내가 교
회 장로이면서도 꼴보기 싫은 놈들하고 어울려 매주 서너 번씩 술자리를 같이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
각하니? 세상은 그런 곳이야. 나도 네 문제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어. 네가 알아서 극복해야 돼. 너도
연수 대상자라고 알고 있어. 앞으로 2주 남았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국종은 화들짝 놀라 학장실을 물러나왔다. 이국종은 고된 일과 틈틈이 짬을 내어 백방으로 뛰어다
녔다. 가장 시급한 건 초청장이었다. 각국 대학병원에 지원서류를 내면 그쪽에서 초청장을 보내줘야
심사대상이 되는데, 과연 2주 안에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다행히 마감을 이틀 앞두고 영국 로열런던
병원 외상센터에서 초청장이 왔다. 우리나라처럼 연줄이나 뇌물이 아니라 순전히 이국종의 경력과
지원동기만 보고 그쪽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아주대병원 외상외과에는 이국종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
백이 생기겠지만 그건 병원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더구나 이국종 내보내라고 연판장까지 돌았으
니 병원 측으로서는 이국종의 연수 신청이 불감청이로되 고소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2007년 봄, 이국종에게 배정된 로열런던병원 외상센터의 연구실은 햇빛이 잘 드는 1층에 있었다. 비
도 새지 않았고 안에는 샤워기가 설치된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용변을 보자면 1층까지 올라가
야 하는 아주대병원의 지하 2층 연구실과는 5성급 호텔과 여인숙 차이였다. 손을 씻고 거울을 들여다
보니 잘 생긴 청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열런던병원 외상센터에는 전용 에어 앰뷸런
스가 있었다. 헬리콥터 안에서 수술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시설과 장비가 갖춰져 있는 이동 외과병원
이었다. 이국종은 그 헬리콥터를 타고 출동하여 직접 응급수술을 하면서 연수를 받았다. 2019년 현재
까지 한국에는 없는 시스템이다.
에어 앰뷸런스는 하루 평균 5~6회씩 중증외상 환자를 실어 나르며 기내에서 응급수술을 실시했다.
에어 앰뷸런스를 도입하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요건은 이착륙장이었다. 인구 850만의 런던에
그런 거점 외상센터가 네 곳이나 설치되어 있었다. 모든 의료인들은 철저하게 분업화된 매뉴얼에 따
라 한 치 빈틈없이 움직였다. 골든아워를 놓쳐서 아까운 목숨을 잃는 환자는 발생할 수가 없었다. 병
원과 의료인들이 주종관계로 얽혀 있지도 않았고 철저하게 서열화된 선후배관계도 없었다. 의료인들
에게나 환자들에게나 로열런던병원 외상센터는 천국이었다. 이후에도 응급수술 및 집중치료 시스템
에 관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소개는 생략한다.
1년 만에 돌아온 다음날, 한 보직교수가 이국종을 불렀다. 몇 페이지에 걸쳐 설명해놓은 말을 요약하
면 여기는 영국이 아니고 한국이니 빨리 돈도 안 되는 외상외과 일을 접으라는 강압이었다. 보직교수
는 제자들에게도 잘하고 환자들에게도 호평을 받는 호인이었지만 그도 병원 측의 압력을 버텨낼 재
간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국종이 없는 사이에 아주대병원은 개점휴업 상태로 외상외과를 놀리고
있었다. 연수를 떠나기 전에도 전공의는 이국종 혼자뿐이었다. 그는 다른 과 의사들이나 의과대학 실
습생들의 조력을 받아 중증외상 환자들을 수술해오고 있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인지라 이국종
은 선선히 보직교수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서 각중에 떠오르는 궁금증, 이국종은 보수도 더 많고
처우도 훨씬 더 좋은 천국을 두고 왜 1년 만에 지옥으로 돌아왔을까?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현대자동차 중국 베이징 공장이 폐쇄한다는 기사, 경쟁력이 떨어진 이유라고는 하지만 반기업적 정부의 홀대 와 귀족노조에 더이상 견디지 못한 탓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치열한 살아남기가 국가경쟁력인데 10년전 여배우의 자살 원인을 다시 조사하는게 큰일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