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eter IV. 마음의 상처 없애기(Wiping Out Psychological Hurt)
지금까지 우리는 일상의 관계를 통해서 본 우리의 생각과 기억, 지식, 경험 등의 본질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또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저변의 파괴적인 성질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의 일종인 지식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행위들은 살아가는 데 분명 필요한 것들입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분들이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분과 저 모두가 정말 진지하다면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이야기의 진행상 우리가 지금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모든 일상을 ‘생각’을 통해서, 그리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삶, 즉 제가 ‘표면적(superficial)’ 이라고 부르는 그런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 여러분이 이 문제 속으로 들어가셨다면,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 전반에 걸쳐 생각(thought)이 둥지를 틀고 있는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식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부분들,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곳들, 교육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환경과 사회에 찌든 면면들이 얼마나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깊이 찌들었으며, 이른바 ‘문명(civilization)’이라는 것으로 그 오염된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마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요?
자유는 오직 생각에 관한 모든 의문들에 대해 통찰력을 갖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저는, 우리의 마음이 생각에 의해 얼마나 크게 조작되고 있으며,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가 얼마나 견고하게 그 생각들을 다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생각이란 항상 주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론이나 공론(空論)에, 또는 개념 같은 것들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갖가지 형태의 문화와 사회, 환경적 영향으로 조작되고 다듬어진 우리의 마음을 과연 “정화(cleansed)” 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같이 탐구하고, 서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의 내용물들을 모두 수면 위로 드러내서 스스로의 마음을 아주 분명하게 보게 되고 진정 자유로워 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실제로,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한 어떤 것도 말로 포장하고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여러분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만약 말로만 알고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위선자이거나,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나 결론, 그리고 그들의 환상을 좇는 꼴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들은 권위자가 되고 우린 단지 따르는 것 밖에 안 되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모든 외부의 권위와 지식을 배제하고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파고들면서, 직접 스스로 무언가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정말로 솔직하게 행동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는 일단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깊이 들어왔는지에 대해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엔 우리가 다른 사람들 말에 얼마나 혹하고 이를 그럴싸하게 되뇌는지, 또한 얼마나 쉽고 익숙하게 남의 말에 반응하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찾아 나설 것은, 마음, 여러분 마음도 있고, 모든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있죠. 이 마음이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지, 또한 그럼으로써 완전한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 공존할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즉 사회, 강연자는 사회를 곧 문화라고 보는데요, 우리는 그 속에 수없이 나뉘어 있는 경제적 계층들과 갖가지 사회 활동들에 대해 각각의 이미지(image)들을 창출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여러분, 강연자의 말을 무엇이든 받아들이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 누구의 말이라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측면의 이야기를 하는 강연자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연자를 무슨 권위자로 받아들이지 말고, 여러분이 직접 스스로 보아야만 그것이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 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화 말입니다. 경제 상황, 종교의 분열이나 학교에서의 경쟁, 갖가지 복종과 모방의 형태들은 그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형성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건 마치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죠?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대여섯 개 쯤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어떻게 우리의 존재 속으로 침투했습니까? 누가 그런 이미지들을 만들었나요? 명백하게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갖가지 문화들과 그 영향들에 의한 것입니다. 종교적인 영향을 비롯해서 정신적, 교육적, 환경적, 경제적 여건들이 인간의 마음에 침투하여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특정한 문화를 가진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나는 태생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내 인생의 나머지는 가톨릭 신자로서, 기독교 신자로서, 혹은 힌두교도, 공산주의자, 또 뭐 민족주의자 등등으로 결정이 나는 겁니다. 이런 이미지들은 마음 속 깊이 둥지를 틀고, 장차 삶의 공식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나’라는 것이 바로 그 삶의 공식인 겁니다. 이 사실을 잘 관찰해 보십시오. 제가 그렇게 표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지 여러분이 보십시오. 표현 자체는 실체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산을 묘사한다고 해서, 그 묘사가 산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미지들이 모여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전체를 이룹니다. 이미지가 곧 의식이 되는 것이죠. 곧 이미지라는 의식들이 모여 자기 내부의 큰 의식을 형성하는 겁니다. 공감하고 있나요? 오늘, 아주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밖으로 나가서 짙게 드리운 그림자와 아름다운 산, 흐르는 냇물과 촉촉한 나무들의 향기를, 그것들만의 아름다움을 지켜보고 싶군요.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모여서, 매우 진지해 지려고 하고 있고, 또 정말로 진지해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문명이나, 우리가 존재해왔던 양식으로서의 인간과는, 아주,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추종자가 아닌, 크리슈나(krishna : 힌두교의 일종) 교도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그러나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 즉 스스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 너머로 갈 수 있는 인간을 말입니다.
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종종 우리의 ‘생각(thought)’ 으로 드러나기도 하지요. 표면적으로,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내면에는 아주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깊이 뿌리박힌 채 우리를 조직하는 이미지들을, 드러내고, 이해하고,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제가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외부로는 매우 적게 드러냅니다. 빙산의 일각처럼요. 10%는 바깥에 드러나 있지만 90%는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지요. 의식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속에 숨겨진, 그 비밀스러운 미지의 곳에 있는 것들이 완전히 노출이 되고, 그럼으로 인해 외부와 내부의 충돌이 사라지고, 완전한 앎(awareness)과 완전한 통찰을 가지게 되고, 조각나고 깨져버린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자유롭고 온전하게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제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도 이런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보아 주십시오. 어떻게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 또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절실함과 여러분의 관심, 여러분의 에너지와 그 생명력에 달려 있습니다.
머릿속의 이미지들, 단정 지은 결론들은 갖가지 상징을 만들고 거기에다 제각기 이름을 붙이지만, 그것들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지(image)’와 ‘결론(conclusion)’이라는 두 단어를 계속 사용할 것입니다. 이미지는 자신 외부와 내부에서 느낀 모든 것들에 끊임없이 대입됩니다. 친구 관계에서 내뱉은 말, 아니면 화가 나서 내뱉은 말, 이 말들에 쓰인 모든 단어들은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 되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미지라는 것은 어린 시절 각인된 마음의 상처들입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면서 삽니다. 사회, 그리고 생각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남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오만해지도록 부추기기도 합니다. 결국 항상 상처 받고, 저항하고, 자신의 주변에 벽을 쌓으며 지내게 되지요. 몸에 상처가 나면 금방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건 쉽죠.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인간의 마음에 생긴 깊은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고, 흉터조차 남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모두는 상처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아빠가, 선생님이, 고모가, 뭐 또 다른 사람이, “너보다 네 형이 낫다.”, “넌 똑똑하지 않구나.”, “너 못생겼구나.”, “넌 꼭 그 심술쟁이 네 고모처럼 생겼구나.” 여러분 모두 이런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는 어떤 기준들에 의해 다른 아이들과 비교를 당하고, 그로 인해 대단히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것은, 곧 그 아이를 파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쨌든 이 상처들은 계속 남아 있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폭력성이나 걱정, 근심 등으로 발현됩니다. 상처로부터 도피하려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도피라는 것은 또 하나의 환상으로 빠지는 착각이라는 겁니다. “나는 이제 안전해, 더 상처받지 않는 안전한 곳에 있어.”라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거죠. 소위 ‘신경증(neuroticism - 현실이 아닌 것에 계속 집착하고 있는 상태. - 주석이 필요할 것 같아 넣었습니다. 수정 부탁드립니다!)’ 상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보세요. 강연자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들은 사실 여러분을 비추고 있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겁니다. 그 상처들이 완전히 치유되고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어서, 이미 치유된 마음의 부분들이나 자신이 충분히 이해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상처받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상처 없는 마음이란 곧 ‘순수(innocence)’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순수하다는 것은 상처를 입지도, 상처를 주지도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양(lamb)들의 비유에 나오는 순수 같은 것들이 아니라, 상처를 입을 수 없는 마음,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없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 이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 ‘순수’가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평생 상처 받으며 살아왔고, 아주 예민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역시 상처가 무엇인지 알며, 한 인간이 받는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며, 그게 그 사람의 인생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상처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고통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뭘 해야 할지 아는 것이죠. 저항하기도 하고, 내 주변에 벽을 쌓기도 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피해를 입지 않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음의 껍질을 두껍게 단련할 수도 있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 안쪽에는 여전히 깊은 상처들이 남아있습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그냥 상처와 함께 그대로 놔두는 겁니다. 상처 입은 마음이라는 것은, 애초에 상처 같은 건 입을 수 없는, 그야말로 단지 마음이기 때문이죠. 제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봄철의 나뭇잎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난 후, 새 잎사귀가 밝고 따뜻한 햇살을 머금고 돋아나옵니다. 그 잎사귀는 아주 부드럽고, 활기에 넘치고, 바람은 잎에 전혀 상처를 주지 않는 채 나뭇잎을 훑으며 같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와 함께 그대로 놔두는 마음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표면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의식적 차원에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합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어떻게 모든 상처들이 다 없어질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즉, 무의식에 남아 있는 상처들, 이 깊이 뿌리박힌 상처가 어떻게 지워질 수 있겠느냐는 거죠. 이걸 분석(analysis)한다고 될까요? 주의를 기울여 잘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한 진실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이후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옳은 일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많은 상처들이 분석한다고 없어질까요? 분석(analysis)이라는 단어의 본래 ‘해체(break up)’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분석을 통해 대상을 해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체 누가 분석의 주체입니까? 이 분석의 주체 역시 생각이 아니던가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나’라는 전체 속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다시 말해서 조각난 어떤 생각이 다른 조각난 생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죠. 이건 또 다른 조각내기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사실을 분명히 보고 여기에 대해 통찰을 가질 수 있다면, 절대로 ‘분석’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얘기한 부분에 대해 안목이 생겼나요?
분석(analysis)이란 곧 분석자(analyzer), 시간(time) 등을 의미하고,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완성되어야만 하는 성격의 것이죠. 만약 이 분석 안에 포함되지 않은 잔여물들이 존재한다면, 다음 날은 또 이들이 포함되어 다시 분석되어야만 합니다. 즉, 우리들은 항상 그 잔여물들을 분석에 끌어들이며, (언제나 새로운 잔여물들이 생성되므로) 항상 끝을 낼 수 없죠. 또한 분석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께서 이 문제의 진실과 위험을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형태의 분석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이 사실을 전제로 계속 이야기를 풀어 나가도 될까요? 여러분은 이제 모여서든, 혼자서든, 아니면 전문가를 통해서든, ‘분석’하기를 끝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분석이란 이렇게 비밀스럽고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상처를 드러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것에 접근하게 될 테니, 지금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분석하지 않을 것이고, 분석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습니다. 강연자가 말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보아야만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비밀스럽고 깊은 상처들을 어떻게 끄집어낼까요? 그 상처들이 꿈에 등장할까요? 꿈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합니까? 전문 분석가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여러분이 반드시 꿈을 꾸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꿈이란 일상의 연속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우리가 하는 일들,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반응과 처신들에 항상 깨어있고, 보고 있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잘 보고 있다면, 잠자리에 들 때 꿈이 꼭 필요하겠습니까?
분석도 아니고 꿈도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마음의 상처를 모두 지울 수 있을까요, 친구에게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아주 친밀한 관계 속에서 받는 그 상처들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요? 제가 대답하기를 바라고 계시나요? 혹시 정말 그런가요? 부디 여러분이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자, 이제 잠시 동안만, 아무도 대답하시는 분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분석이 우리가 가려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꿈이 특정한 삶의 부분에서는 가치가 있겠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있는 동안 하루하루를 보고, 듣고, 모든 것들을 이해하려 하고,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이상의 것으로 나아간다면, 꿈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깨어 있고, 살아 있으며, 에너지로 충만해 있으며, 자기 부정이 없고, 내면의 모순을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을 잘 때 꿈을 꿀 필요가 없고, 여러분의 마음과 뇌는 완전한 휴식을 갖게 됩니다. 꿈이란 일상을 살면서 여러분의 마음과 뇌를 망가뜨리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낮 동안에 진행되는 생활들에 질서를 고려한다면, 뇌는 밤 동안 질서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마음을 움직여 보세요! 질서란 여러분이 삶의 무질서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무질서를 이해하십시오. 질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 들지 마시고요. 여러분이 질서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순간 그것은 고정된 청사진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죠? 그러나 삶이 추악하고 부질없으며, 싸움이 난무하고, 항상 이를 귀찮아하며, 듣기 싫은 험담들과 어리석은 행동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이것이 곧 삶의 무질서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면, 그 순간 질서는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됩니다.
자, 아무도 여러분에게 답해주거나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다고 가정해 보세요. 마음 속 깊은 곳에 사무친 상처들을 완전히 없애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명석한 여러분들,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으며 프로이드(Freud)와 융(Jung)과 그 밖의 다른 전문가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는 여러분들은, 과연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여러분은 솔직하게 “잘 모르겠어요.”라고 할 수 있나요? 자, 아주 조심스럽게 묻건대, 정말로 여러분은, 성심으로 말이죠, “잘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마음은 책을 뒤적이고 있거나, 어딘가에 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해답을 구하기 위해 방황하고 있나요? 제발요. 여러분. 정말 전심(全心)으로, 아주 솔직하게, “잘 모르겠어요. 거기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저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고, 그 의미와 중요함과 깊이에 대해 정말로 공감하고 있어요. 나는 그것을 분명 보았고, 관찰했고,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으며, 걱정하고 탐구했지요. 하지만 제겐 답이 없어요.” 라고 말할 수 있나요?
자, 잘 들어 보십시오. 지금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problem)’란 여러분이 그것을 해결(resolve)하기를 원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하는 것은 곧, 나는 현재의 마음과는 달리 분명하고, 상처가 없고, 더렵혀지지 않고, 자유로우며 생명력으로 충만한, 아름답고 생기 있는 그런 마음을 갖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 지켜보았고 탐구했으며, 문제를 분석을 한다든가 꿈을 해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좀 도와달라고 한다고 해서, 구루(guru)에게 찾아가 “모든 걸 잊으십시오. 신(god)만을 생각하십시오.”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 어쨌든 이 점을 떠나, 우리는 위에서 말한 문제를 인식합니다. 자 그럼 이렇게 말해 보겠습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내가 아무런 답을 찾을 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내가 그 문제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감하고 계십니까?
내가 거대한 산 앞에 맞닥뜨렸다고 합시다. 엄청나게 높고 그 풍채가 장엄하며, 억겁의 세월 동안 같은 곳을 지켜온 고결함을 지닌 그런 산입니다. 이 산이 바로 내 앞에 있습니다. 왜 나는 문제를 만들어야만 합니까?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을 꼭 올라가고 싶어 하거나, 그 너머로 꼭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산을 보고,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산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가 안 된다면, 곧 문제가 풀린 상태와 다름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논리적 속임수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큰 줄기를 따라 엄청난 양의 물이, 깊고 고고하게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강 너머로 가면 더 큰 자유와 아름다움과 사랑과 평화 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강을 건너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에겐 보트도 없고, 수영을 할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강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지금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내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야기한 것들을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만족하지 못한 것, 즉 내가 받은 상처(내가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상처 받지 않습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문제는 잠시 미루고, 다른 이슈를 하나 봅시다. 이미지(image)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문화로부터 비롯되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문화 안에서, 항상 다른 것들과 비교하고, 측정합니다. 살아가는 내내 위인이나 성인, 현자, 또는 책이나 조각상에 글을 옮겨 놓은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항상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우리는 “나는 똑똑해” 혹은 “나는 멍청해.”하고 판단하지요. 당신은 당신보다 더 똑똑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번뜩이고, 더 지적인 사람들에 비해 둔한 사람이겠지요. 어쨌든 이렇게 비교의 기준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는 더 나은 것과 덜한 것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인간 문화의 한 단면이지요. 자 이제 자문해 보건대, 왜 나는 이렇게 비교해야 하는 것입니까? 단지 주어졌으니까요. 아니면 내가 정말 공들여 쌓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더 큰 차, 더 큰 집, 더 큰 마음, 이렇게 점진적으로 달성해 나가는 것들을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존재하면서 행하는 모든 행동들은 비교로부터 출발합니다. 부자, 가난뱅이, 건강한 사람, 허약한 사람, 성인군자, 죄인 등등이죠.
자,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기준이 없는, 다시 말해서 비교를 탈피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마음속으로 아무 것도 비교하지 않아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옷을 고르거나 할 때는 이것저것 비교해 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집을 짓기라도 하게 되면 이것저것 비교해 보아야 하겠지만, 우리가 마음속으로 (나를 다른 것에) 비교할 필요가 있나요? 예수와 부처의 계승자들이 성자(聖者)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비교하도록 길러져 왔고, 그것은 곧 우리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다른 것에 비교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습니다. 자, 비교라는 걸 해 보죠. 여러분은 거기 앉아 있고 강연자는 연단에 서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분리가 존재합니다. 높고 낮음이죠. 그리고는 당신은 “아, 어떻게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많이 알고 있을까? 나는 이렇게 조금 밖에 모르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비교는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비교라는 것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그 무엇보다 더 우수하거나, 혹은 더 열등한 존재가 됩니다. 비교를 통해서 여러분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그 결론은 현실과는 무관한 습관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내가 비교를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했으니, 나는 사실이 무언지, 진실이 무엇인지와는 무관하게 그 결론을 부여잡고 있는 겁니다. 내가 비교한 것이고, 내가 직접 보았고, 내가 배운 것이기 때문이죠. 살아가면서 느낀 적 없습니까? 이게 바로 현실이 아닌 것을 계속 부여잡고 있는 습관인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비교를 합니까? 습관이기도 하겠고,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기도 하겠고, 어떤 면으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도 하겠지요. 또한 끊임없이 비교하는 가운데 내 자신이 투쟁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열심히 싸우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내게 살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일 테지요. 내가 비록 지금 우울하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다. 과연 아무런 비교도 없이, 그러나 만족하지도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가 비교하기를 멈춘다면, 나의 있는 그대로(what is)에 ‘만족’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혹시 내가 비교를 멈추는 순간 나의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고, 내가 비교를 시작하는 순간,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분명 에너지의 소모가 있고, 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반드시 그렇게 하기 위한 에너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비교를 하느라 이 에너지들을 소모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통찰력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제 통찰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통찰이 여기에 닿을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에너지는 더 이상 비교하고, 측정하고, 열등감 혹은 우월감에 빠지거나 침울해하는 데 쓰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정말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에너지만을 가지게 되며, 그 있는 그대로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겠지요. 여러분은 스스로가 덜 떨어졌다거나 무식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는 “나는 무식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고도 여러분이 바보 같습니까? 자신이 바보 같다는 그 사실을 모르게 될 때, 비로소 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어서요.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여 보십시오.
우리는 많은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 속에서, 경제 속에서, 사회 속에서, 관계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의 선택적 집합을 제각각 소유하고 있지요.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여러 가지 상황의 결론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분석하지만 않는다면, 혹은 분석의 도구로 꿈을 사용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루 종일 깨어 있고 스스로를 그대로 지켜보고 있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을 보고 계십니까? 생각이 문제를 만듭니다. 생각은 우리에게 “그래, 바로 그거야, 난 지금 비교하고 있고, 나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고, 난 상처 받았고, 그것을 넘어서야만 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사실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죠. 즉, 생각은 (진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에 대해 문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이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진실을 보게 되는 순간, 생각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않습니다. 충심으로 고하건대, 이것이 얼마나 놀라우리만치 간단하고, 미묘하며, 아름다운 것인지 보아 주세요. 이 사실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게 되는 순간, 그걸로 끝입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있는 그대로(what is)’를 볼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비로소 여러분은 “나는 무엇인가(What am I)?”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비교하지 않고, 더 이상 모방하지도 않고, 비교는 모방과 복종을 낳지요, 내게 아무 상처도 없고, 어떤 결론도 없고, 따라서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을 때, 그 순간 나는 무엇입니까? 이 순간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죠. 생각이 난무하면서 “나는 저것을 분석해야만 해, 저 너머로 가야만 해, 혼란스럽군, 나는 또 이렇게 해야만 해 저렇게 해야만 해...” 여러분도 그렇게 느낍니까? 모든 이미지들과 분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은 항상 “저기만 넘으면, 이 고비만 넘기면 더 평화롭게, 행복하게, 조용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윤택한 삶의 이미지’를 좇는 것일 뿐,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이해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냥 ‘나’라는 단어입니까? 특징지을 수 있는 어떤 것입니까? ‘나’라는 것이 기억과 경험과 지식이나 어떤 상징이나 아이디어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mind)’이라는 것은 완전히 비어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정말 완전히 빌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셨습니까? 어떻게 되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문제를 낳습니다. 여러분 지금 말씀드리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전 계속 여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것만 취하시고, 그럴 수 없는 것은 놓아 주십시오.
문명(civilization)이 제게 말합니다. 뭔가가 되라고. 성공하고, 어떤 공동체에 속하고, 머리는 길게 또는 짧게 하고, 마약을 해라 또는 하지 마라, 교회에 가라 혹은 가지 마라, 자유로워져라, 독립적으로 사고하라 등등. 그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사회는 늘 우리를 특정 패턴에 순응하도록 강요합니다. 그 패턴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고, 곧 그 이미지가 바로 내가 되는 것이죠. 이미지라는 것은 선생들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신이 외로운 순간 그것이 고통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질투나 두려움, 기쁨 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이미지들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매우 표면적(superficial)인 성격의 것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을 봅니다. 동의하십니까? 이 사실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이 표면적(*마음이 갖가지 이미지들로 들어차고 형상화되어, 사실이 아닌 과거의 기억과 이미지에 의해, 즉 현재의 진실이 아닌 과거의 허상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상태, 또는 그런 마음 - ※ 주석이 필요할 것 같아서 달아보았습니다. 수정 부탁드립니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혹은 ‘표면적 마음’에 대해 묘사한 것에 동의하십니까?
자, 우리의 마음이 비교로부터, 복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지를 입으면, 우리는 바지에 적응합니다. 그렇죠? 제가 인도에 가면, 저는 지금 입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입습니다. 나는 길의 방향을 정하는 정도의 적응은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어떤 순응의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다른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쌓아 온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분명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교를 당할 때면 우월감 혹은 열등감을 느끼지요. 그렇다면 어떤 측정이나 비교도 없을 때, 이미지가 존재할까요? 어떤 이미지도 없이 마음이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이 보이나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관계 뿐 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어떤 관계를 형성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후 여러분은 그 이미지로부터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겐 나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없지만, 내가 여러분에 대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난 그 이미지를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미지가 좋고, 거기에 안착하고 싶어 하고, 그게 제 결론이 될 테니까요. 자, 이렇게 되면 나와 여러분 사이에 관계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전혀 아니지요. 여러분들은 항상 관계를 넓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neurotic person)은 항상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나에 대한 이미지를 계속 부여잡고 있는 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미지를 하나도 갖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어야만 비로소 어떤 선입관이나 결론도 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절대로 상처받지 않으며, 비교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하고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혹시 여기에 대해 제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강연자가 여러분에게 앞서 언급했다시피, 의식은 수많은 인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the content of consciousness is consciousness).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셨습니까? 나의 의식이란 곧 애국심이라든가, 무수한 교육의 산물 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요. 이러한 갖가지 인식들이 의식을 형성합니다. 의식은 수많은 경계선들을 형성합니다. 각각의 의식들은 크고 작게 인식의 경계들을 긋고 의식을 구성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내용물들이 없다면, 즉 어떤 측정이나 아이디어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 의식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여기에 흥미를 느끼나요? 나는 내 안에 충돌이 있을 때 비로소 의식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충돌이나 문제가 없다면 대체 의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의식 속에 경계가 있을까요? 내용물이 없으니 어떤 경계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엔 공간(space: 空間)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중심도 없고, 그러므로 경계도 없는 그런 공간입니다. 여러분도 알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사랑에는 어떤 정해진 크기나 경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더 깊이 들어갑시다. 지금은 더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질문자 : 여러 가지로 조건화 된 마음을 통합하려는 모든 인위적 노력들은, 필연적으로 더 큰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질문자께서는, 우리가 조건화된 마음을 하나로 묶어 보기 위해 통합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모두 그런 조건화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과 나 사이에 그것을 통합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살다 보니 갖가지 경험을 통해 마약 중독자가 되었고, 여러분은 마약을 하진 않지만 다른 방법으로 조건화 되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톨릭 신자이고 나는 힌두교 신자이며, 우리는 통합을 이루길 바라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성공회의 고위 당직자가 인터뷰에 응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에 대해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도 어느 정도 나름대로의 진리를 갖고 있지요. 그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자 질문한 사람이 되묻기를, “그것으로 좋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 선생님은 그 사람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부분적으로요, 아니면 상당한 부분 그럴 수 있겠죠.” 라고 말하고는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무엇이 중요한지 아시오? 우리의 신앙 안에서 오로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다른 이들은 그분을 품고 있지 않소.” 고작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고명하다는, 아니, 이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자, 조건화 된 두 마음이 서로 합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니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을까요? 조건화 되었다는 말은 곧 그 속에 분열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분열은 반드시 충돌을 가져옵니다. 당신은 내 아내고,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거나, 당신이 내 남편이고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욕망과 욕심과 소유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쪽은 다른 한쪽에게 영향을 받고 그 역할에 조건화 됩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또 다른 여러 일들에 대해 함께 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분리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완전히 합일될 수 있을까요? 그러지 않는 한 우리 사이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갈등이 존재할 것입니다.
분리가 없을 때 비로소 합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주 간단한 얘기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과 결론과 의견들에 의해 대단히 분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이미지와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열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분열되어 있으며, 우리의 에너지를 다투고, 싸우고, 전쟁하는 데 소모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내가 글재주가 좀 있고, 유명해지고, 내 허영심을 책에 투사하는 데 이러한 에너지를 쓴다면 그건 나에게 어느 정도 생산적인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내 안에 분열이 없어지고, 진실과 진리를 보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시키는 어떤 결론이든 이미지든 비교든 뭐든 간에 온전하게 볼 수 있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사는 데 거대한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 당신은 자유, 그리고 함께 하는 것(together)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 함께 한다는 관념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줄 수 있겠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저는 그 함께 한다는 ‘관념(idea)’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더 들어가게 되더라도 여전히 더 많은 관념을 양산하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여러분에게 어떤 관념도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것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정말 느끼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저는, 우리가 서로의 문제를 나누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즉 여러분과 저 모두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함께 문제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관찰한 것을 여러분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것이 아니죠. 함께 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여러분의 느낌과 나의 느낌이, 여러분의 열정과 나의 열정이 서로 맞닿아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질문자께서 함께 한다는 말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그것은 나누고, 참여하며, 탐구하고, 관찰하고, 함께 생각함으로써,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상대방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간에 분리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동시에, 같은 수준에서, 같은 열정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함께함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지금 현재의 삶을 바로 이 문제에 고스란히 투영시키고 쏟아 부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는, 곧 우리의 삶 그 자체이니까요.
질문자 : 강연자께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의 권위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만, 돈이나 극심한 노동, 삶의 중압감, 두려움, 폭력 등이 가지는 권위에 대해서는 전혀, 혹은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 이런, 제게 질문을 던지셔도 됩니다. 안 그런가요? (*질문자가 평서문을 통해 우회적으로 질문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질문자께서는, 당신은 (내면의) 권위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만 돈, 권세, 착취, 빈곤 등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럼 이 대목에서 중요한 이슈는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돈의 권위가 엄연히 존재하고, 힘 가진 자들의 권위도 존재하며, 종교적인 권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권위도 있고, 사회의 분열 자체가 권위를 갖기도 하며, 갖가지 사회적 모순도 권위를 띠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에게도, 칼 마르크스(Karl Marx)에도, 외부의 지식들, 과학, 물리학에도 권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면의 권위가 존재하며, 이는 곧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알고, 너보다 더 명확하게 볼 줄 알며, 너보다 더 많이 강단에 섰다는 이유로, 스스로에게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고 나를 바깥으로 내쫓을 수 있는 내 셋방 집주인에게도 권위가 존재하지요. 이렇게 세상에는 수많은, 복잡한 양상을 띤 권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요? 여러분도 지금 저와 마주하고 계십니까?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이 거대하고 복잡한 권위의 문제에 대해 어디서부터 비집고 들어가야 할까요? 질문자가 질문을 했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저 멀리 어디에서부터인가요? 돈, 재산, 가난뱅이와 부자가 갖는 권위에서 출발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떤 지점에서 문제를 다루시겠습니까? 너무 조용하시네요. 제 질문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어디에서 출발해야하는가 입니다. 제게는 다른 것보다 돈의 권위가 먼저 보이네요. 돈은 다른 모든 것들을 포괄할 수 있으니, 거기에서 시작해 봅시다. 하지만 돈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믿음에도 분명 권위가 존재합니다. 즉, 나의 외부에는 돈이라는 엄청난 권위가 존재하고, 나의 내면 한 귀퉁이에는 지식이라는 엄청난 권위가 존재하지요.
저는 권위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봅니다. 권위는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예속시켜 버립니다. 내가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그 빈곤은 나를 깎아내리고, 파멸시키기도 합니다. 돈의 힘은 정말 엄청난 것이며, 마찬가지로 사상의 힘 또한 엄청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르크스, 예수, 부처, 그 누가 됐든 말이죠. 그럼 자문해 봅니다. 대체 이 넓디넓고 복잡한 권위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어디에서부터요? 돈을 도마 위에 올릴까요? 돈 가진 사람들에게 폭탄을 던질까요? 집 있는 사람들 집에 불 지를까요? 그 사람들을 죽일까요? 그러고 나서 “돈 가진 놈, 집 가진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야.”라고 외칠까요? 자,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바깥으로 보이는 권위들로부터 출발해야 할까요, 내가 있는 바로 이곳부터 출발해야 할까요. 우리가 바깥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내 생각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즉, ‘저기(there)’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여기(here)’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내가 그 권위를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가 마음속에 자리 잡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죠. 돈의 권위, 부의 권위들이 말입니다.
따라서 권위에 접근하려면 내가 현재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은 곧 내게 가장 가까운 곳이고, 그곳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먼 곳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권위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써) 좋은 대통령을, 좋은 장관을 뽑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스스로의 신뢰를 그들에게 맡기는 순간 이 문제는 끝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어떤 정치인도, 성직자도, 사상도, 힘도 믿지 않게 됩니다. 결국 “나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왜 나는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 속에도 권위를 두고 추앙하고 싶어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그토록 권위를 받아들이고, 숭배하고, 필요로 하는가 말입니다. 그게 왜 필요한 것입니까? 권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솔직해 지십시오. 사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권위야말로 우리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는 원천이 아니던가요? 재산은 여러분에게 정말 큰 기쁨을 주지 않나요? 세금을 좀 많이 떼이더라도 말이죠. 권위란 곧 위신이며 사회적 위치죠.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생각이 많은 사상가나, 책을 많이 쓰고 유명해 진 사람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느껴본 적이 있나요? 여러분도 그렇게 되면 아주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자, 우리는 누구나 갖가지 형태의 힘을 숭배합니다. 완전히 다른 사회와 문화를 만들려면, 우리 각자는 권위의 문제를 이해하고 통찰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권위에서 자유로워지세요. 백날 이렇게 얘기만 하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