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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방에서 의자왕의 부친인 무왕의 왕이 되기전 상황과 그와 관련한 의자왕의 출생에 대한 추론글을 올렸는데 그와 관련하여 의자왕과 광해군을 비교해보기로 했습니다.
두 군주가 비록 완전 동일한 입장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공통된 맥락을 가지고 있는 점이 많습니다.
크게 정리하면
1. 왕이 되기전까지 가시밭길 입지를 인내하고
2. 왕이 된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 탄압 숙청
3. 말년에 토목공사등 민생을 위축시키는 실정
4. 결국 말기에 국가멸망 및 반정으로 인한 왕위상실 및 비참한 최후
1. 우선 왕이 되기전 이 두 군주의 입지가 일반적으로 안정적인 세자상태로써 든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자로 지낸시기는 광해군은 16년 의자왕은 9년입니다.
왕자시절 입지를 비교한다면 광해군은 세자가 된후 백성들로부터는 상당한 지지를 받은데 반해 부왕으로부터는 냉대를 당한반면 의자왕은 아예 세자책봉을 30대후반정도에 받았고 그 전까지 경쟁세력에 대한 견제를 혹독히 받은것으로 추론합니다.
다만 그 당시 정치적 정황을 분석할 기록이 너무 부실함으로 왜 의자왕이 세자책봉을 늦게 받았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분석할 길이 현재로써는 없습니다.
헌데 제 추측이기는 하지만 의자왕이 광해군보다 유리한점으로는 출생성분상 지위와 부왕으로부터의 인정이라는 점에서이라고 보는데 의자왕의 생모가 아직 누구인지가 미상이나 무왕의 정비사택씨 소생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지라 그렇다면 의자왕의 생모는 정비가 아닌 후궁일지? 의자왕이 후궁소생왕자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정황상 맞지 않는데 우선 출생시기가 부왕이 왕이 되기전 신분상태라서 그 상태에서 측실을 들일 입장은 아니죠. 그렇다면 생모가 첩이 아니라면 조선시대의 1부1처제개념이 아닌 왕의 경우 정실부인을 다처가 가능할수 있다면 사택씨왕후가 제1왕후이고 그외 왕후소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선의 왕중에서 왕이 되기전에 적자가 아닌 서자를 먼저 출생한 경우를 들라면 영조의 처음 세자였던 경의군 효장세자(진종)이 있기는 합니다만 영조의 경우 31세에 왕이 되어 무왕보다 왕이 된 나이가 많고 정성왕후에게도 계속 적자출산을 보지못하는 상태였죠.
헌데 문제는 의자왕이 장자이라면 생모가 정실부인으로써는 제일 먼저 혼인했는데도 불구하고 왕이 된후 사택씨 왕후를 제1왕후로 책봉할 경우 왕자들 서열에 문제가 생길수가 있습니다. 보통 조선시대 생각하는 적장자 개념이 이 당시에는 개념상 다를수가 있슬것입니다.
여러 정실부인들의 소생왕자는 다 적자이기는 하지만 적장자가 되려면 이들 왕자중 단지 제일연장자가 아닌 제1왕후의 제일연장왕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논리라면 의자왕은 적자이기는 하지만 적장자는 아니다라는 것이 됩니다. 당시의 종법체제가 어떠한지 기록이 없스니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632년 즉 무왕입장에서 왕이 된지 30년이 넘어서 세자책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상식밖의 결정인데 광해군같이 부왕이 당초에 서왕자만 출생했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이렇게 늦게 세자책봉할리가 없죠.
의자왕이 확실한 종법상 적장자라고 한다면 설령 의자왕을 견제하고자 해도 명분상으로 의자가 세자책봉되는것을 반대할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법상 적장자가 될수 없는 경우라면 여기에도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제1왕후인 사택씨 왕후소생의 제일연장 왕자인 교기를 애시당초 세자책봉을 안했는지도 의문이 생깁니다.
적자이고 나이상으로도 가장 연장자이지만 적장자로 인정받지못한 또다른 케이스로 호동왕자가 있습니다.
호동왕자역시 나이상으로도 가장 연장이고 능력이 출중했지만 제1왕후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국 비참한 말로를 맞았는데 제가 보이게는 의자왕자는 호동왕자와 동일한 케이스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광해군보다 불리한 점이 있다면 영창대군은 광해군보다 31살이 어린 늦둥이 동생이지만 사택씨왕후 소생 아들 교기는 아마도 무왕이 즉위한후 몇년안에 출생한 이복동생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사택씨왕후가 인목왕후같이 늦게 맞아들인 계비가 아닌 왕이 된 직후 맞아들인 공식적인 제1왕후라면 그 소생 교기는 대략 늦어도 605년이전생으로 많이 잡아보 의자왕과 10세이내 차이가 됩니다.
그러니 유일한 적자라도 아직은 아기라서 도저히 세자를 바꿀수가 없는 선조의 경우와는 다르게 무왕입장에서 교기를 적장자로 취급하여 세자책봉하고 싶다면 일찌감치 교기를 세자책봉을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추측을 하건데 무왕은 선조와는 다르게 생물학적으로 장자인 의자를 세자책봉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와 맞물려서 비록 왕이 되는 과정에서 사택씨의 도움을 받았스나 사택씨의 권력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도 생각했슬 것입니다.
무왕입장에서 의자를 세자책봉하고 싶어하고 사택씨세력을 억누르려고 하는것이 타당하다면 이런 가설이 가능한데 애시당초 무왕은 의자왕 생모를 제1왕후로 승격시키고 싶지만 부득히 사택씨의 지원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내심 원치는 않지만 사택씨왕후흫 의자왕 생모보다 윗서열왕후로 봉하게 되었고 왕권강화를 바라면서 사택씨를 어찌보면 토사구팽하고자 했스니 그것이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면서 의자의 세자책봉을 늦게나마 달성했다라고 봅니다.
그리고 추후 연구대상으로 고대에서 왕이 정실왕비를 다처하는 경우 그 소생간의 서열 적장자가 되는 조건이 어떻한지 종법질서가 조선왕조가 어찌 다른지를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선조가 무왕의 행동과 동일했다면 광해군을 철저히 지지했슬 것이고 그에 따라 광해군이 페모살제하는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슬 것입니다.
그리고 의자왕자가 비록 해동증자라는 별명에서 보드시 인내하고 지내왔다고는 하나 그 시기가 632년 태자책봉시이전에만 해당되는지도 살펴보아야 하는데 만일 의자를 세자책봉을 하게 된 정치적 배경을 사택씨가문세력의 억제를 성공하면서 왕권강화를 완성한 분위기라고 한다면 세자책봉한 후의 의자는 광해군과는 비교가 안되는 탄탄한 안정기반을 가지게 됩니다. 태생적으로 서자이고 부왕말년에 적자동생이 생긴 광해군과는 상식적인 종법상으로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왕의 전제왕권강화성공과 의자의 세자책봉을 연관시켜 본다면 632년 세자책봉후의 의자태자의 입지는 광해군의 세자시절과는 차원이 다르게 탄탄대로를 달렸슬 것이 분명하죠.
정리를 한다면 의자왕이 광해군보다 유리했던 점은 적장자인정여부까지는 불투명해도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적자신분이라서 서자신분인 광해군보다는 당연히 종법상 우월하며 결정적으로 부왕의 인정과 지지라는 점입니다. 차라리 광해군은 세자가 안되었다면 그냥 평범하게 살았슬것을 부득히 세자가 되면서 부왕으로부터 냉대를 당하게 되니 세자가 된 이후 상황에서는 입장이 완전 달라지는 것이죠.
2. 의자왕과 광해군이 왕이 된후 공통적으로 자신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었던 세력들을 제거하는 일인데 사택왕후는 인목대비에 그 소생왕자 교기는 영창대군에 대응할수 있습니다.
물론 의자왕은 이들을 폐모살제하지는 않았는데 광해군과 입장차가 있었던 것이 기본종법상으로도 차이가 나는데다가 결정적으로 부왕의 행태의 차이인것입니다. 아무래도 광해군이 미워서 끌어내리고 싶었지만 결국 못하고 죽은 선조의 행태를 감안하면 의자왕이 바라보는 사택씨왕후 모자보다는 인목왕후모자가 월등히 위험천만한 존재이죠.
3. 후대로 갈수록 무리수를 두고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점도 유사한데 의자왕은 서자41명을 좌평에 임명하고 이복동생 교기를 섬으로 유배보내는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애초에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들을 죄다 숙청합니다.
그리고 말년에 토목공사로 백성을 민생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유사한데 둘다 궁궐공사를 자주벌인것이 유사하죠
4. 말년에 파국을 맞이하여 왕위를 상실한것을 비교한다면 의자왕은 나라자체가 망해버렸고 광해군은 능양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통점을 거론한다면 지지기반의 상실입니다. 백제가 망한원인을 단순히 군사력부실로 보기 보다는 의자상에 등을 돌리고 군사동원에 협조치 않은 귀족들의 행태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광해군 역시 과도한 정적탄압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대북세력의 지지기반붕괴의 측면이 강한데 특히나 예식진이 의자왕을 잡아서 당군에 넘긴것과 반정당일 훈련대장 이홍립이 그냥 대궐문을 열어 반정군과 내응한점이 그 맥락에서 유사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아무튼 두 군주 둘다 결국 파국을 맞이해서 왕위를 상실했스나 군주로써의 자질은 우수한 성군재목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주변 정치상황이 불운한 운명을 타고나게 만들었기에 다소 강압적인 정적탄압을 행하다 보니 부득히 혼군같이 되어 버렸고 그 과정에서의 지지기반상실과 민심이반이 국가멸망과 반정이라는 결론으로 가게 된것이 공통적입니다.
어찌보면 자질은 우수하지만 참으로 아쉽고도 애석한 운명을 타고난 군주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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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숙청은 역대 국왕들도 다 해왔던 정치라 그것만 가지고 민심 이반을 심각하게 초래해서 무너졌다고 보는건 무리가 많지요
태종이나 세조도 왕권 강화 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고
부왕 선조는 기축옥사로 천명씩이나 숙청할 정도였고 광해군의 증조부 중종은 광해군보다 더한 횟수의 옥사로 숙청을 자행하였지요
그런데도 이 둘은 쫒겨나지 않았지요 그건만 보면 과도한 숙청 떄문에 민심이반으로 몰락한다는 주장은
승자가 된 반대세력들의 프로파간다적 폄하 논리에 지나지 않는 법이지요
그리고 광해군의 숙청은 결과적으로 이이첨의 대북당의 독주만 가져오는 것에 불과했던 터라 그저 대북의 권력 강화용으로 이용될수밖에 없던게 광해군의 숙청 정치였지요 중립외교에 이이첨의 대북이 방해 요소로 작용해서 어려움을 겪어서 그 때문에 이들의 압력에 따라 심하 파병을 허용할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왕권 강화보다 자기 코드와 맞는 당파의 권력 확대를 추구하는 당쟁의 선상에서 벌일수밖에 없는 광해군의 숙청이지요
그리고 적서차별 국가에서 서자출신인 광해군의 정통성은 약점이 될수밖에 없고 게다가 사대 종주국 명으로부터 고명을
받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명 사신들로부터 계승 적법성에
적법성에 대한 조사까지 당할 정도로 수모를 겪은게 광해군이었지요 그리고 궁궐공사는 왜란으로 불타버린 궁궐들을 재건하려는 성격으로 시작되었기에 왕조 국가의 기본 성격상 부득이한 면이 있었고 풍수 지리설을 내세워서 궁궐 공사를 단행하였기에 풍수 지리설에 지배적인 민중들도 그 공사를 수용할수밖에 없었지요 반정을 주도한 반정 공신들중에 광해군의 궁궐 공사로 인한 피해를 입은 자들이 널려 있어서 그 때문에 반정 명분에서 광해군의 궁궐 공사가 크게 부각될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백성들이 부담을 졌어도 그런데 궁궐 공사에 반발하여 대규모 민란까지 벌이지 않은 정황을 보면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그리 큰 반감을 품지 않았지요 광해군의 몰락은 중립외교로 인한 집권당 대북파와의 갈등으로 인한 정권 반대파들에 대한 경계망 약화 훈련대장 이흥립은 반정에 가담한 장신을 사위로 둔 개인적 이유 떄문에 광해군을 등진 것이고 여기에 이흥립을 천거한 영의정 박승종은 반정 당일날 이흥립에 대한 고발이 들어왔는데도 그를 친족이라고 비호해준 것이 광해군의 몰락을 가져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