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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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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조선과 근대 토론방 광해군과 의자왕의 공통적인 맥락을 비교 분석
선구자 추천 0 조회 95 24.03.21 20:31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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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3.21 21:26

    첫댓글 숙청은 역대 국왕들도 다 해왔던 정치라 그것만 가지고 민심 이반을 심각하게 초래해서 무너졌다고 보는건 무리가 많지요
    태종이나 세조도 왕권 강화 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고
    부왕 선조는 기축옥사로 천명씩이나 숙청할 정도였고 광해군의 증조부 중종은 광해군보다 더한 횟수의 옥사로 숙청을 자행하였지요

    그런데도 이 둘은 쫒겨나지 않았지요 그건만 보면 과도한 숙청 떄문에 민심이반으로 몰락한다는 주장은
    승자가 된 반대세력들의 프로파간다적 폄하 논리에 지나지 않는 법이지요

    그리고 광해군의 숙청은 결과적으로 이이첨의 대북당의 독주만 가져오는 것에 불과했던 터라 그저 대북의 권력 강화용으로 이용될수밖에 없던게 광해군의 숙청 정치였지요 중립외교에 이이첨의 대북이 방해 요소로 작용해서 어려움을 겪어서 그 때문에 이들의 압력에 따라 심하 파병을 허용할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왕권 강화보다 자기 코드와 맞는 당파의 권력 확대를 추구하는 당쟁의 선상에서 벌일수밖에 없는 광해군의 숙청이지요

    그리고 적서차별 국가에서 서자출신인 광해군의 정통성은 약점이 될수밖에 없고 게다가 사대 종주국 명으로부터 고명을
    받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명 사신들로부터 계승 적법성에

  • 24.03.21 21:33

    적법성에 대한 조사까지 당할 정도로 수모를 겪은게 광해군이었지요 그리고 궁궐공사는 왜란으로 불타버린 궁궐들을 재건하려는 성격으로 시작되었기에 왕조 국가의 기본 성격상 부득이한 면이 있었고 풍수 지리설을 내세워서 궁궐 공사를 단행하였기에 풍수 지리설에 지배적인 민중들도 그 공사를 수용할수밖에 없었지요 반정을 주도한 반정 공신들중에 광해군의 궁궐 공사로 인한 피해를 입은 자들이 널려 있어서 그 때문에 반정 명분에서 광해군의 궁궐 공사가 크게 부각될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백성들이 부담을 졌어도 그런데 궁궐 공사에 반발하여 대규모 민란까지 벌이지 않은 정황을 보면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그리 큰 반감을 품지 않았지요 광해군의 몰락은 중립외교로 인한 집권당 대북파와의 갈등으로 인한 정권 반대파들에 대한 경계망 약화 훈련대장 이흥립은 반정에 가담한 장신을 사위로 둔 개인적 이유 떄문에 광해군을 등진 것이고 여기에 이흥립을 천거한 영의정 박승종은 반정 당일날 이흥립에 대한 고발이 들어왔는데도 그를 친족이라고 비호해준 것이 광해군의 몰락을 가져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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