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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회고록 31] “대통령님, 비덱이 뭔가요?” 잡아뗀 최순실, 난 믿었다
2016년 10월 24일 오전부터 10월 25일 오전까지의 24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24시간을 기점으로 내 운명의 항로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그 전날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10월 24일 오전 나는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임기 내 개헌’ 추진을 제안했다.
당시에 내가 국면 전환용으로 개헌 카드를 꺼냈다는 식의 얘기도 나돌았는데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내가 임기 초에 “개헌은 블랙홀”이라며 개헌 논의에 반대했던 이유는 자칫 정치권이 개헌 논의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국정과제 추진 동력이 상실될 가능성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개헌 자체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10월 24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 연설을 통해 개헌 추진 발언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의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5년 단임제의 가장 큰 폐해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전 정권의 정책을 폐기하는 탓에 정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 여야의 극심한 갈등과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국회 과반이 찬성해도 법안이 제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국정이 표류하는 현실을 보면서 현행 대통령제는 한계에 봉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임기 후반부라도 야당의 협조를 얻으며 국정 과제를 무사히 완수하고 싶었다.
당시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던 창조경제 정책, 북한의 5차 핵실험과 향후 움직임,
일본과의 지소미아(GSOMIA,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등 대내외적으로 챙겨야 할 과제들이 많았다.
당시 나의 개헌 제안은 오랜 기간의 고민이 반영된 것이었다.
“대통령님, 지금 뉴스 보고 계십니까?”
그런데 정국은 내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0월 24일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경제 관련 업무를 살피다가 물어볼 것이 있어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관이나 수석들로부터 대면 보고도 받지만 그때그때 전화로 현안을 논의하는 것도 나의 업무 방식이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안 수석의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질문을 듣던 그는
“대통령님, 지금 혹시 뉴스 보고 계십니까?
JTBC 뉴스에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씨 관련 의혹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좀 확인해보셔야 겠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일단 안 수석에게 나머지 업무 관련 지시를 마무리한 뒤 보도 내용을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그 무렵 최서원 원장(과거 유치원장을 했던 경력이 있어서 평소 최 원장으로 호칭)의 ‘비선 실세 의혹’ 보도가
여기 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2014년에도 언론에서 정윤회씨와 관련해 사실과 전혀 다른 보도를 냈다가 오보로 확인된 전례가 있었다.
그렇기에 JTBC의 보도가 나올 즈음에도 나는 언론들이 뭔가 잘못된 정보들을 전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차였다.
안 수석과의 통화를 마친 뒤 JTBC 보도를 확인해봤다.
JTBC 취재팀이 최 원장의 컴퓨터 파일을 입수했는데,
최 원장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받아봤고 그 시점은 연설을 하기 전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최 원장에게 가끔씩 연설문을 보여주고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볼 때 이해가 잘 되는지 물어본 적은 있다.
그래서 연설문 작성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 국민들 눈에 불편하게 비쳐졌다면 그건 사과를 구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그토록 큰 문제가 될 일인지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최 원장과 관련해 제기돼 왔던 의혹들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일들이었다.
지금 와서 반추해보면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부터 지근거리에서 도와준 사람이었기에
최 원장에 대한 경계심의 문턱이 낮아졌던 것 같다.
먼저 최 원장과의 인연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1975년 9월 대한구국선교단과 서울시의사회의 자매결연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엔 대통령 영애)과
최태민 대한구국선교단 총재(오른쪽).
중앙포토
1974년 어머니가 비명에 가신 뒤 나는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감사하게도 그런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어왔다.
편지들을 일일이 읽으며 힘을 얻고 있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최태민 목사가 쓴 장문의 편지였다.
세간에서 추측하듯 영적인 내용은 일절 없었고,
앞으로 내 역할이 막중하다면서 나라와 사회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진심으로 조언하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도 생전에 아버지가 미처 살피지 못한 사회의 그늘진 부분들을 많이 챙겼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의 조언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던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1975년 3월 최 목사를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해보니 그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사회에서 살피고 챙겨야 할 부분들에 대해 여러가지 조언을 해줬다.
내가 퍼스트레이디로서 역할을 한 것 중에 기억나는 것을 꼽자면 야간 무료 진료 봉사가 있다.
당시에는 의료보험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병이 들면 약 한 첩도 못 쓰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의사협회와 결연을 해 퇴근 후 의사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무료 진료를 해주는 야간병원 운영을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이를 듣고 “참 좋은 일 한다”며 현장에 직접 와보신 적도 있는데,
훗날 여기서 치료받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의료보험제도를 서둘러 도입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이렇게 시작된 야간 무료병원은 1979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새마음병원을 비롯해 몇몇 병원으로 확대됐다.
최서원, 임선이(최태민 부인) 여사 심부름으로 알게 돼
1979년 박정희 대통령과 딸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가 새마음병원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1974년 연말에 TV방송에 출연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사회자가 나에게 앞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나는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말을 하면서 이를 위해 새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목사가 이 방송을 보았는지 내게 새마음 교육을 위해 필요한 조직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해 만들어진 것이
‘새마음 갖기 운동 본부’였다.
최 목사는 본부장을 맡았고, 나는 ‘새마음 봉사단’의 총재를 맡아 어려움을 겪는 계층을 돕는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 당시 최 목사의 딸인 최서원 원장에 대한 기억은 없다.
예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나와 최 원장의 인연을 부각하기 위해
1970년대에 그녀가 내 곁에서 안내를 하는 듯한 영상을 내보낸 것을 봤다.
하지만 당시엔 나와 최 원장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최 목사의 딸이라고 소개를 받았던 것 정도는 기억이 난다.
또 최 원장은 스스로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을 맡았다고 한 적이 있는데, 정확한 사실관계는 기억나지 않는다.
최 목사 일가와 가까워진 것은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청와대를 나온 뒤 부터였다.
나는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기 전 살았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왔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 세 남매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때 최 목사 일가는 나의 어려운 상황을 도와줬다.
특히 최 목사의 부인인 임선이 여사는 나를 애틋하게 여기며 음식이나 생필품 등을 챙겨주곤 했다.
임선이 여사는 내가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연세도 있고, 내가 사적인 일도 믿고 논의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최순득·최서원 자매와 알게 됐다.
당시 최 원장은 서울 압구정동에서 초이유치원 원장을 하고 있었는데 수완이 좋아 유치원이 잘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녀를 ‘최 원장’이라고 불렀고, 최 원장이 정윤회씨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전해 들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내가 1990년 서울 장충동 집을 팔고 삼성동으로 이사간 것을 놓고
최 목사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였다는 등의 억측이 나돌기도 했다.
어떻게든 나와 최 목사를 엮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당시 장충동에서 삼성동으로 이사한 것은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집을 알아보려고 하니 임 여사가 돕겠다고 나섰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칩거 생활을 이어왔던 내가 직접 나와서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이 걱정됐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임 여사가 맡게 됐는데 자연스레 자신이 살던 집 주변에서 찾았던 것 같다.
1979년 6월 10일 ‘1회 새마음제전’ 개회식에 참석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와 대학생이던 최서원씨(가운데).
중앙포토
정작 삼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최 목사 일가와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다.
최 목사는 1980년대 육영재단 일을 잠시 돕기도 했지만 1990년을 전후로 그만뒀다.
1994년 최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몇 달 뒤에야 알았다.
가족 쪽에서도 딱히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1997년 말 나는 그해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대선 후보를 돕게 됐는데,
그때 선거 현장을 돌아다니려니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땅히 상의할 사람이 없어 결국 임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임 여사가 자신의 사위인 정윤회씨를 소개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내가 이듬해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정씨와 최 원장이 선거일을 돕게 됐다.
어려울 때 곁에서 일을 도와주다 보니 최서원-정윤회 부부 모두와 가까워졌고,
이무렵 정호성·안봉근·이재만 비서관도 이들 부부와 잘 알게 됐다.
장충동에 살 때는 임 여사의 부탁으로 가끔 최순득(최서원 원장의 언니)씨가 오가며 생필품이나 음식을 전해줬는데,
1998년 이후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최 원장이 맡게 됐다.
여성 혼자 살면서 정치인 생활을 하다 보니 개인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었다.
사적 영역의 부탁을 동생들에게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남성 비서관들에게 맡기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최서원 원장이 도와주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또 최 원장은 과거에도 특별한 날이면 카드 등을 보내 ‘도와드리겠다’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전하곤 했기에
나도 심적 부담이 덜했다.
최서원이 가져다 준 의상이 뇌물? 모두 내 돈으로 지불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나는 과거부터 도와줬던 이들에게 연락을 해서 감사 표시를 했다.
최서원 원장에게는 감사 표시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면서 짐 정리 등을 부탁했는데,
결국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이전에 그녀가 나를 돕던 역할이 계속 이어졌다.
대통령이 되었어도 개인적인 일을 부탁할 만한 다른 사람을 찾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던 탓이다.
또 낯선 사람에게 무언가 맡기고 부탁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2016년 비선 실세 논란이 터지고 나자 차라리 진작에 최 원장에게 공식적인 직함을 주고
일을 시켰으면 어땠겠냐고도 한다.
하지만 당시엔 최 원장 본인이 하는 일도 있었고, 그녀가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원하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최 원장에게 맡기는 일이 주로 개인적인 일이다 보니 공식 직함을 준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79년 6월 10일 ‘1회 새마음제전’ 개회식에 참석한 최서원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왼쪽부터).
국가자료원
최 원장이 주로 도움을 준 것은 의상이었다.
나중에 언론에서는 내가 최 원장에게 옷을 받은 것을 두고 ‘뇌물’이니 ‘경제적 공동체’니 하면서 비난을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옷 값은 전부 내 개인 돈으로 지불했다.
내가 일일이 옷의 스타일이라든지 옷감을 고르고 확인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최 원장이 구매를 대신 해준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의상실을 소개하고 그곳에서 옷을 대신 구입해 가져왔을 뿐이다.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나 엘리자베스 여왕도 의상을 직접 고르고 구입하지는 않았을 텐데,
의상을 누가 어떻게 도와줬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렸을 때 청와대의 경험으로는 대통령 의상은 주로 영부인들 몫이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딱히 이런 것을 부탁할 만한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최 원장이 그런 일을 도와줬다.
의상 때문에 청와대에 따로 직책을 둔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최 원장이 ‘비선 실세’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포장되기는 했지만,
그녀가 청와대 관저로 들어오는 경우는 대부분 옷을 수선하기 위해 의상실에 맡겨야 하거나
외국 순방을 위해 새로운 옷을 구입할 때였다.
세간에서 그녀의 존재를 잘 몰랐다는 점도 오해를 부추기는 결과가 됐지만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을 도우려고 오는데 굳이 요란하게 알릴 필요가 없어서였다.
나중에 최 원장과 그녀의 딸인 정유라씨가 청와대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최 원장을 만난 건 대부분 관저 접견실이었고, 관저에서 식사를 함께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 원장은 강남에서 유치원을 운영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다.
또 내가 쓴 글들을 모두 숙독한 데다가 옷이나 생필품 구매 등의 일들을 오랫동안 도와주다 보니
나의 생각이나 표현 방식을 잘 이해하는 편이었다.
연설비서관이 연설문을 작성해왔을 때 내가 평소 쓰는 표현과는 뉘앙스가 달라 어색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다른 참모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최 원장의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녀는 정호성 비서관 등과도 알고 지낸 기간이 10여 년이 넘다 보니 스스럼없는 관계가 되어 의견을 편안하게 주고받았다.
어쨌든 최 원장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일부 문구나 표현 방식에 대한 조언이었을 뿐
연설문의 기본 내용을 바꾼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
또 최 원장이 상시적으로 연설문을 고친 것도 아니다.
나중에 고영태 더블루K 이사라는 사람이 “최서원 원장의 취미는 대통령 연설문 고치는 일”이라고 말해서
마치 나의 모든 연설문이 그녀의 손을 거친 듯이 알려지게 됐지만 일부 연설문에 해당되는 것일 뿐이다.
최서원씨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고영태씨가 2016년 10월 31일 검찰 조사를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그는 언론 등을 통해 최씨의 취미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라고 발언했다.
중앙포토
그래서 나는 2016년 하반기부터 여러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터져나온 비선 실세 의혹을 보면서 다소 당혹감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최 원장의 역할은 의상·생필품 구매와 가끔 연설문에 자신의 의견을 보태는 정도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그리고 삼성에서 정유라씨에게 말을 제공했던 사실까지 추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나는 이런 보도들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님, 비덱이 뭔가요?”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것은 10월 12일이다.
이날 안종범 정책조정수석과 우병우 민정수석, 김성우 홍보수석 등이 찾아왔다.
언론 등에서 제기하는 비선 실세 논란이 커지고 있으니 대책을 논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직 내가 최 원장에 대해 정확히 어떤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모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때였다.
마침 이 무렵 최 원장은 독일에 가 있어 불러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 또한 하루하루 국정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이 문제에 매달리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논란이 커지는 것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의 건의대로 2016년 2월 대기업 총수들과의 단독 면담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정확히 알리기로 했다.
나는 문화와 스포츠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았으면 어쩌면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일에 종사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방면에서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대통령 선거에 나설 무렵에는 한국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래서 후보 시절부터 문화에 대한 공약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인수위 시절에도 민간 단체가 문화 관련 법인을 손쉽게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 후에 4대 국정 기조를 내세우면서 문화 융성을 포함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문화 콘텐트 산업을 정부가 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화나 스포츠 진흥을 정부가 주도하면 반드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문화 융성의 핵심은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인재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간의 자율성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정부는 이런 것을 뒷받침하면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문화 산업이 발전하면 우리 기업의 브랜드 가치나 국가의 이미지도 높아지기 때문에
이것이 다시 관광 수요 등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일자리나 먹거리 창출까지 활성화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화를 후원하는 우수 기업에는 세제 혜택도 주고 최저생계비로 생활하는 예술인은 실업급여 기준에서
월 100만원씩 최대 8개월간 준다든지 하는 국민의 문화권을 최초로 보장하는 법안 등을 만들기도 했다.
나 역시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들의 초청행사에도 참석하고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외 행사에서 기업인들을 만나게 될 때도 나는
“21세기는 역시 문화가 대세 아니냐.
우리한테는 한류라는 소중한 자산이 있으니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더 많이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민간에서 관심을 많이 갖고 호응해 달라.
한류가 세계로 확산되면 결국 우리 기업들도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 좋을 것”
이란 취지의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많은 기업인이 이에 공감을 표시했다.
내가 기업들에 문화와 관련해 부탁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런 부분에 대해 솔직히 말하고 이해를 구하면 국민도 어느 정도 납득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2016년 10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우병우 민정수석,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박 대통령, 김재원 정무수석.
중앙포토
다만 안종범 수석이 언론 등에서 제기하는 비선 실세 의혹을 인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크게 화를 냈다.
왜냐하면 최서원 원장을 ‘비선 실세’로 인정한다면 그녀가 그만큼 권력을 휘두르고 다닌 것이 사실이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민정수석을 비롯한 참모들이 나에게 그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런 보고나 조언도 하지 않다가 언론 보도가 터지니까 그때서야 느닷없이 비선 실세를 인정하자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모두 최 원장이 벌이고 다닌 일들을 알고 있으면서
나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이냐는 생각이 들면서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때라도 최 원장의 행적을 정확히 파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 나의 큰 실책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 원장이 설마 그런 정도로 엉뚱한 일을 벌이고 다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오랜 세월 봐왔고 내가 어려울 때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왔기 때문이다.
최 원장이 독일에 비덱 스포츠라는 회사를 세워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보도가 10월 중순에 나왔을 때는
사실을 한번 확인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비덱이라는 회사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최 원장은 나에게 “대통령님, 비덱이 뭔가요?”라고 반문했다.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한 그녀를 믿었다.
그녀가 설마 나에게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것이 최 원장과의 마지막 통화였다.
얼마 후 언니 최순득씨로부터 최 원장과 관련한 연락이 왔을 때도 나는 최 원장의 귀국을 종용했다.
돌아와서 모든 것을 소상히 밝히면 국민의 오해도 어느 정도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쨌든 사회 혼란이 커지는 것을 막고 분위기를 수습해야 한다는 수석들의 요구는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10월 20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 의혹과 관련해
“만약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저는 오로지 국민들께서 저를 믿고 선택해주신 대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지키는 소임을 다하고
제가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퇴임을 하면 자연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 재단을 만들어 무언가를 또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24일 저녁 JTBC의 보도가 나오자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