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과부와 고아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의 양면성
<출22:22-24>
*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
나는 분노를 터뜨려서, 너희를 칼로 죽이겠다. 그렇게 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며, 너희 자식들은 고아가 될것이다.
<출22:25-27>
*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표준새번역)
우선 모든 성경기록은 양면성(상반된 이중성)이 아닌 것이 없듯이
과부와 고아에 대한 기록 역시 반드시 그러함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본문에서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면
그 괴롭힌 자들에게 벌을 내려서 그들의 아내를 과부 되게 하고
그들의 자식들을 고아 되게 하리라 하셨는데,
전자의 과부와 고아는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고, 후자의 과부와 고아는
심판의 대상임을 누구나 확연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간단히 확인되었듯이 성경은 과부와 고아라고 하는 문자자체가
양면성임은 물론이고, 성경은 또한 반드시 문맥을 따라 풀어지고
증거되어야 하므로 성경문자는 문자일 뿐, 고정불변의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문자는 짝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단순히 문자의
짝을 찾아서 성경해석을 도모하는 자들이 포진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뿜어내는 열변의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도록 각별한 각성을
촉구하면서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는
이 시대의 과부와 고아는 과연 누구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성경은 성경기록시대가 따로 있고 그 때는 예언시대가 된다.
그리고 그 예언(기록)이 성취되는 때도 따로 있고 그 때를 실상시대라고
하는데 오늘날은 곧 성경예언(성경기록)이 성취되고 있는 실상시대이다.
그런데 성경예언은 형이하학(육)으로 기록되었고, 그 성취의 실상에서는
그 형이하학의 기록이 형이상학(영)으로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일컬어 "봉한 책" 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예컨데 하나님이 이스라엘민족을 진두지휘해서 이방민족들과 싸우실 때는
문자 그대로 무기전쟁이며 피흘리는 육박전이며 생물학적으로 죽이고 죽는
육적 전쟁이었으나,
그것이 성취되는 오늘의 실상시대의 전쟁에서는 우리의 심령을 죽이고 죽는
영적 전쟁이며 진리전쟁인 것이다.
육적인 것을 영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성경 해석이며 증거이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과부와 고아 역시 마찬가지다.
옛적의 육적인 과부와 고아를 오늘날은 영적인 과부와 고아로 증거해야 한다.
성경 기록시대의 과부와 고아는 육적이요, 표면적이요, 문자적이요,
인간도덕적 가치를 유발하는 가난과 외로움이 바깥으로 표출된 과부와 고아였다.
그러나 오늘날 성취시대의 과부와 고아는 영적이요, 내면적으로 심령이
곤핍한 자요, 가난과 외로움이 남 모르게 안으로 내재해 있는,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진리를 모르는) 내면의 슬픔으로 자기존재의
정체성과 하나님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긍휼의 대상에서 홀아비는 빠져 있고 과부로
표현했을까? 옛적 성경기록시대는 독선의 남성시대이므로 사회활동은
남성들만의 몫이었고 남편들만이 가족의 필요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남편이 없는 부녀,
즉 과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신 것이고 그것이 오늘날은 공급자이신
하나님이 없는 영적 과부로 풀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고 돌보시는 남편이 되고
부모가 되어 주신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다면 과부가 될 수 없고 고아가 아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된다.
그런데 이같이 공급자이신 하나님이 없는 오늘의 영적 과부와
영적 고아를 왜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가?
하나님이 있는 자는 불쌍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자는 불쌍히
여기신다면 하나님이 있는 자는 구원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자는
구원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도무지 해괴하지 않고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형이하학이 아니고 형이상학이다.
상술했듯이 하나님은 성경을 형이하학으로 감추어 기록하셨고 그것을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본 모습대로 형이상학으로 풀어지도록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온전히 깨닫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 육적 문자가
영적으로 풀어지기 전 지금까지는 비유로 봉한 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속의 하나님을 문자 그대로 믿었으며
비유로 봉한 책임에도 참 뜻의 콘텐츠를 찾지 못하고 비유 그대로,
형이하학 그대로 수박 겉핧기만 했다. 하나님을 모셨으되 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고 거짓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즉 참 남편이 아닌, 외간 남자를 남편인양 깜박 속으며 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마리아 여인만 못했다.
[요4:16-18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라는 대화에서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했으며
예수께서도 여인에게 남편이 없다고 하셨다.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남편이 아니라고 하심을 볼 때
여섯번째 까지도 남편이 아닌 것이 된다.
다섯은 창조 첫째 날에서 창조 다섯째 날까지를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여섯번 째는 창조 마지막날로 여섯째날인 오늘 이시대의
남편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의 남편(하나님)은 자칭 재림주인 적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한것이다.
다섯은 이미 지난 옛 구양식이므로 남편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여섯째인 오늘의 자칭 재림주도 두말할 나위 없이 남편이 아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남편이 아니고 신약의 하나님도 진정한 남편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하나님도 모두 형이하학으로 기록된
성경문자를 그대로 믿어온 창조미완의 위성체 달빛 하나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구약성경 그 이전의 하나님은 그야말로 샤머니즘 세계이므로
남편이 아님은 불문가지이다.
이같이 남편이 아님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남편)을 모시고 섬기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큰소리 치고 있으니 사마리아 여인만 못한 것이다.
남편이 없다고 답변한 사마리아 여인이 곧 남편 없는 과부와 같고
부모 없는 고아와 같다. 예수님도 그녀의 말을 인정하고 네 말이
참되다고 하셨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자처럼 남편이 없다고 말을
해야 한다. 남편 없는 과부는 슬프고 외롭다.
부모 없는 고아는 굶주려서 기아선상에 있다.
그러므로 그 같은 과부와 고아는 외로움과 굶주림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남편을 찾아, 부모를 찾아, 즉 성경의 참뜻을 찾아 진리를 찾아
십만리로 헤매고 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는 또 다른 표현의
“영적 거지 나사로” 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구하기 위해 떠나신다고 하신 또 다른 표현의 “길 잃은 어린 양” 인 것이다.
불쌍하기 그지없는 긍휼의 대상이 아닌가? 연민의 대상이 아닌가?
하나님은 반드시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구원의 반열로 입궁시키신다.
그러나 그 반대로 본문에서 지적된대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서
과부와 고아가 있다. 전자의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그들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그들의 자식들은 고아가 되리라고 하신
그 후자의 과부와 고아들이 있는데 이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전자의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을 업신여기며 매 타작을 해서 출교시키며 한벌 옷을 저당 잡으며
이자를 받아 탈취하며 그들에게 남편과 부모 없음을(하나님 없음을)
빌미로 마구 짓밟아 뭉개는 기성교단과 적그리스도들이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후자의 과부와 고아들이다.
기성교단과 적그리스도들은 자칭 하나님(남편)이 있다고 뽐내는 자들이다.
참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창조미완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에
내용은 없으면서도 허장성세로 신도들의 머릿수와 목소리만 크다.
따라서 오늘의 참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진정 하나님이 없는 부끄럽고
처량한 과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과부가 아니고 여황이라고
주장하며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않으리라 한다고 알려주고 있다(계18:7).
기성교단은 비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먹고 마시는 돼지들이요
소경들이다. 문자 그대로이면 유치하기 짝이 없어 부끄러움의
극치임은 물론 무엇보다 문맥이 맞지 않아서 장애물이 앞을 가려도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로 양심 불감증에 걸려 있다.
즉 하나님(남편)이 없음에도 있다고 주장하는 광기다(이것이 우상숭배임).
그리고 자칭 재림주집단인 적그리스도는 한 술 더 뜬다.
최근에 나타난 세력의 신으로서 군림하므로 직접 남편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들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한국사회에서만도 자칭 재림주였던
그 숫한 아무개들이 파리 목숨처럼 힘없이 이미 사라지고
세상엔 없다. 그럼에도 어떤 자칭 재림주는 죽어서도
“재림주 아무개 여기에 잠자다” 라는 묘비명을 남기고 있을 정도이니
그 광기를 누가 말릴 것인가.
이같이 남편이 없음에도 남편이 있다고 주장하고 과부임에도 과부가
아니고 여황이라고 주장하며 큰 바벨론 성을 쌓고 있다.
이렇게 큰 바밸론 성을 쌓고 있는 오늘의
기성교단과 자칭재림주들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과부와 고아들인 것이다.
[계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는 책망과 경고를 듣고 있는 자들이
심판의 대상으로서 과부와 고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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