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릴 적 해운대 바닷가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
우리집 부근에는 해송이 어우러진 모래밭이 있었고 그 사이를 지나서 바닷가로 나갈 수 있어서 여름이면 피서차 내려온 사촌 형들과 해수욕을 하며 뛰어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동백섬내에 있는 군부대에 복무하셨는데, 부대로 가는 동백섬은 지금과 달리 조그만한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가끔씩 다리위의 낚시꾼들을 구경하곤 했었다.
이번에 그 해운대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부산에 사는 대학 동창생이 마련한 동기 모임에 기꺼이 편승했다.
2 동백섬 입구 조선비치호텔을 지나자 쉴새없이 들락거리는 파도를 머금은
백사장을 따라 펼쳐진 고층 빌딩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을 하늘을 향해 치솟은 마천루와 알록달록한 언덕위 집들이 적절히 뒤섞인 모습은 외국의 어느 도시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특히 저녁식사후 그려진 해변의 야경은 더욱 환상적이었다. 해운대의 명물이라는 달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원스레 파고드는 바람과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은 어느 별세계에 온 듯했다.
우리는 100층이 넘는다는 LCT 레지던스에 숙소를 잡았다. 거실창을 통하여 아늑한 바다가 무심하게 너울대는 가운데 동백섬 너머 멀리 오륙도가 보였다. 마치 그림속에 내가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었다.
이윽고 낯익은 얼굴들이 거실에 둘러앉아 맥주캔을 비우면서 학창시절 엉뚱한 일들에 탐했던 무용담에 서로 낄낄댔다. 아무런 목적도 의도도 없는 부작위 상태로 해운대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3 다음날도 여전히 바람이 제법 분다. 한 줄기 바람이 코와 입을 통하여 흠뻑 들어와 내 몸속을 씻어 내리는 것 같다. 웬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지만 나는 그 공허함이 좋다.
비운다는 것! 누군가 자신의 좌우명이 '지족상락(知足常樂)' 이라는 말에 내심 공감이 간다.
젊은 시절, 철없이 뜻모를 자유로움을 원했던 나는 이제 소유라는 굴레는 벗어버리고, 그 대신 영광의 순간에도 자신을 채찍질한 말이었다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에 관심을 두고 싶다.
이른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세상의 모든 것은 늘 한 곳에 머무를 수는 없지 않는가?
4 친구들과 함께한 이번 가을나들이는 멋진 행복이었다. 그동안 건성으로 지나쳤던 동백섬, 달맞이길, 청사포를 포함하여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어린 날의 해운대 기억과 즐겁게 대조해 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금, 해운대에 모였던 예의 그 편한 얼굴들이 다시 떠오른다. 특히 차분히 모임을 준비하며 돌아올 때 부산어묵까지 챙겨준 C와 너무나 오랜만에 나타나 저녁까지 사준 J, 그리고 분위기에 맞춰 쉴새없이 떠들어 대던 초로의 신사들~
그들을 생각하며 바리톤 김동규의 노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를 다시 듣고 있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