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1년 4월 7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요한 5,31-47)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you have eternal life through them;
even they testify on my behalf.
But you do not want to come to me to have life.
말씀의 초대
사람들은 모세가 없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한 생활을 한다. 모세는 주님께 주님의 백성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간청한다. 주님께서는 그 간청을 들어주신다(제1독서). 요한의 타오르는 불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빛이었다. 구약의 모든 예언과 말씀도 예수님을 향해 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 마음에는 하느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공산화되어 사회 전체가 공산 체제로 바뀌었을 때의 일입니다. 공산 정부는 교회의 모든 종교 행사를 금지하였고,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수용소에 몰아넣고 같은 제복을 입히고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심지어 수용소 안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성경은 물론 성경 구절이 적힌 쪽지조차도 지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날이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느님 말씀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자 그들은 저마다 외우고 있는 성경 구절을 나누면서 그날의 양식으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을 나누면서 말씀의 힘으로 힘겨운 강제 노역을 견디어 냈고 온갖 학대에서도 경비병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경비병들이 회심하기에 이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 삶에 힘과 생명을 주는지를 들려주는 생생한 경험담입니다.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평소에는 그 고마움을 모르던 말씀이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한 모금 생수처럼 우리 삶에 힘과 위로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 경탄하며 힘을 얻어 주님을 찬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성경은 죽은 글자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 특히 지도자들을 꾸짖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날마다 단 한 구절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깊이 새기고 살면 말씀이 생명이 되어 우리를 영적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
유다인들은 신심 깊은 민족입니다. 계율에 충실했고 철저하게 주님을 신봉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의 숱한 기적을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그토록 예언했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이러한 증언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요한 세례자가 이미 증언하였고,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미 증언해 주셨지만, 유다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지 못하는 것 역시 믿음이 없는 결과라고 한탄하십니다.
제도에 ‘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판을 가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랐던 메시아’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판단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독단은 무섭습니다. ‘자신의 틀’ 안으로 하느님까지 끌어들이려 합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알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진실은 더욱 어렵습니다. 오늘은 ‘사실’로 믿었던 것이 내일은 ‘아닌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거짓’으로 알았던 것이 내일은 ‘진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문만으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행동 몇 가지만으로 ‘사람을 단정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유다인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배척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해의 삶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신앙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섭섭해하면 안 됩니다. 불공평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한 차원’ 높은 삶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강론과 강의 그리고 성경 공부와 피정 등을 통하여 주님에 관하여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있어도, 주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주님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한 주님에 관한 정보일 수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만나 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품고 있는가?
- 황인수 신부-
하느님의 명을 받고 사람들의 생명을 거두러 오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명을 받아 어느 농가에 갔다가 막 쌍둥이를 낳아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생명을 거두려고 했습니다. 죽음의 천사를 알아 본 엄마는 애원합니다. “제가 죽으면 이 아이들은 고아가 됩니다. 부디 약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자란 후에 저를 데리러 오십시오.”
차마 엄마의 생명을 거두지 못한 천사는 빈손으로 하늘로 돌아가는데 하느님은 그를 지상으로 내쫓습니다. “내 명을 어겼으므로 이제 너를 지상으로 추방한다. 세 가지를 알 때까지 하늘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 세 가지는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천사는 우여곡절 끝에 세 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 번째 문제인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알게 된 것은 위험에 처한 자신을 구해 준 제화공 부부의 사랑을 보게 된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우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매력은 그가 무엇을 품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좇는 사람은 그것이 가진 매력만큼을 품습니다. 돈에 대한 꿈을 품은 사람은 돈이 갖는 매력을 보여주겠지요. 권력이나 명예를 꿈꾸는 사람은 또한 권력이나 명예가 우리를 끄는 만큼의 매력을 가질 거고요. 그러나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매력, 신비를 품게 됩니다. 기왕에 품을 거라면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품는다는 말을 잉태라고 바꿀 수 있다면 그 잉태는 또 품은 것을 낳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품은 하느님이 태어나시도록, 눈에 보이게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되도록?….
“공기는 영어로 air입니다. 그럼 물은 영어로 몰까요?”
그러자 한 아이가 기세 좋게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물은 셀프입니다.”
물이 영어로 ‘셀프’가 맞을까요? 당연히 맞지 않지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이 어린이에게 물은 셀프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기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습니다.
“선생님, 어제도 엄마랑 동네 분식집에 갔었는데 분명히 쓰여 있었어요. ‘물은 셀프’라고 말이에요.”
아이가 글을 잘못 읽은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단지 아이가 받아들인 뜻이 잘못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 모습을 우리들의 모습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분명히 옳다고 주장할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분식집에 분명하게 적혀있지만 물이 영어로 셀프가 아니듯이, 내가 직접 본 것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긴 이런 말도 있지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일생에 딱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독선으로 인해 그 어떤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독선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독선이 내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독선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당시 유다인들의 신심을 누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심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지독한 독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설명을 하시고,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내 안에도 이러한 독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내 기준에서 벗어나면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어리석은 모습을 자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독선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식별의 기준
-김성웅신부-
광야의 한 신비가가 깊은 기도 중에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능력이든 그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생각 끝에
그는 가뭄이 들어 메마른 우물에 물을 샘솟게 하는 기적, 앓는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주십사고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반드시 자기가 자리를 떠난 후에 기적이 일어나서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그 기적이 자기로 인해 일어났다는 것을 모르도록 해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이 조건이 허락되기 전에는 능력을 받지 않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자기가 받을 영광에 관심을 두는
우리들을 뒤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들 가운데서 특별히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삶의 규범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줄곧 당신의 일들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향하게 하시는 예수님 안에 우리의
마음이 머무를 때, 우리가 하는 작은 일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뭇가지가
될 것입니다.
말씀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용서의 귀감이라 하면 역시 고정원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까지 잃고도 유영철을 용서하고 그를 양야들로 삼고 그의 두 자녀들까지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의 용서가 한 번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가해자가 사형을 당해봐야 자신에겐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용서를 해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가장 큰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용서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보다 더 힘든 것은, 유영철 자신도 용서를 받아주지 않을뿐더러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입니다. 특별히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그를 거의 정신병자 취급을 하였습니다. 종교에 속았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의 남은 두 딸마저도 아버지에게 오바하지 말라며 홀로 남은 아버지를 멀리할 지경입니다. 딸들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용서하지 말아야하는데 그는 이미 용서를 알아버렸기에 그렇게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는 이번에 사형 합헌 결정이 나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또 한 번 저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용서를 통해 한평생을 몸의 한 부분처럼 지녀온 생각조차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엇이 두려워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걸 꺼리는 걸까요.” 꺼리는 것이 아니라 믿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성경도 예수님도 용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워하는 것이 힘든 줄 알면서도 용서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용서한 사람이 미움의 굴레에서 나오기를 원치 않는 모습을 볼 때는 그보다 마음 아픈 일은 또 없는 것입니다.
구약엔 신약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예언서들을 설명해 주시며 메시아가 어떻게 죽어서 3일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약에 당신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세 번씩이나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 이것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말처럼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덕에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란 말을 듣게 됩니다.
자칫 잘못된 성경공부는 교만만 키울 수 있습니다. 성경박사들보다 공부도 못한 성인들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여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믿음은 체험하게 합니다. 그저 공부만 해서 많이 안다고 말씀을 체험한 것은 아닙니다. 체험되지 않는 연구는 꿀을 맛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연구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믿고 살아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테이프의 필름을 빼서 눈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으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비디오테이프와 같고 믿음은 바로 비디오 플레이어와 같습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고정원씨도 용서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심정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기 싫어서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맛을 볼 수 없을 것이지만, 용서도 믿고 해 본 사람만이 그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도 먼저 믿고 실천해 본 사람만이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양승국신부- <강가에 설 때 마다> 가끔씩 가는 강가에 설 때 마다 드는 느낌입니다. 강가의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풍요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은 늘 깨끗하고 맑습니다.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강물은 내려오는 물을 잡으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아두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두어두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흘러들어온 만큼 내려 보내다 보니 늘 그렇게 맑고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릇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릇을 유용하게 사용하려면 자주 비워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한번 담았다가 비우지 않고 계속 담아두면 일회용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주 비우고 또 비워내야 또 다시 다른 것을 채우고, 또 채우면서 그릇으로서의 몫을 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논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노력이 ‘부단한 자기 비움’입니다.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는 유다인들,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는지 모릅니다. 눈만 떴다 하면 성경을 펼쳤습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성경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에 통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축척한 성경지식 때문에 쫄딱 망했습니다. 성경지식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보다 자주 그들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비워냈어야 했는데, 보다 자주 자신들의 성경지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반복했어야 했는데, 그러한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율법지상주의로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지엽적인 부분이 몰두하다보니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에 소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경의 핵심정신을 파악하지 못하다보니 성경을 살지 못했습니다. 성경 정신을 삶에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독할 때, 마지막 장을 다 읽은 후, 성경을 ‘탁’ 덮고 나서 든 한 가지 생각, 제 개인적 성경의 최종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죄 많은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인간 세계로 들어오신 참 하느님.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희생양이 되심으로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구원자 하느님. 지금 우리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지금 우리 정신, 우리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잠시도 잡어두지 않고 끊임없이 떠나보내는 강물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여러 생각들을 미련 없이 떠나보내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매일 아침 우리에게 건네지는 복음말씀 가운데, 단 한단어만 마음 안에 간직해보십시오. 그게 어렵다면 단 한 문장만 선택해보십시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매끼 식사처럼 여기고 씹고 또 씹어보시기 바랍니다. 음미하고 또 음미해보십시오. 참 생명의 에너지가 천천히 샘솟기 시작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전망이 다가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으로 사는 것 -정명숙 수녀- 거짓말이 난무하고, 거짓이 진실인 양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자기들끼리 -장재봉신부- 오늘 모세에게 이르시는 하느님의 진노가 엄청납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유다인 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발언도 평소와 다르게 차갑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그런데 잠시 생각을 돌려보면 하느님께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이 기막힌 타락사건에 모세가 어서 나서서 말려주기를 원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느님께서 참으로 진노하셨다면 굳이 모세에게 “어서 내려가라”고 이르실 까닭이 없었을 것이니까요. 진실로 참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이 괘씸하고 미워서 도무지 용서할 수 없으셨다면 말씀대로 그들을 삼켜버리게 할 작정이었다면 굳이 모세에게 무거운 십계명 돌판을 들고서 어서 산을 내려가라고 말씀하실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진멸시키면 훨씬 간단히 처리될 일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께서도 온 유다 백성들이 당신의 말을 진실로 믿어줄 것을 바라셨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강한 어조를 통해 그분의 외로움을 켜켜이 느끼게 되는 이유입니다. 두 분 모두 속으로는 애가 타는 중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시어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알리고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너무나 몰라주는 세상이 야속해서 오늘 속을 토로하십니다. 세상에서 외롭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나 속이 상해서 오늘 우리에게 호소를 하시는 것이라 깨닫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호령하고 군림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에게 겁을 줘서 꼼짝 못하게 만드는 폭군이 아니십니다. 무서워서 벌벌 떨게 만드는 일을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곁에서 지내며 모든 일을 나누고 싶으십니다. 어려우면 달려오는 품이 되어 서러운 가슴 쓸어주며 아린 마음 다독여 힘을 주고 싶으십니다. 기쁠 때에도 힘들 때에도 가장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끼리 할 수 있으니 하느님은 가만히 높은 자리에만 계시라고 밀어 올리니 예수님 속이 상합니다. 우리네끼리 살아갈 테니 아무것도 간섭하지 말라고 떼밀어버리니 하느님 애가 타십니다. ‘자기들끼리.......’ 오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며 설움이 북받쳤을 것만 같습니다. 어떤 몸짓으로 다가가 그분의 마음을 다독여드리렵니까? 오늘 그분의 젖은 음성에 무엇이라 응답을 올리겠습니까?
“머리가 너무 짧으면 경박해 보인답니다. 손님에게는 긴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걸요.”
이 말을 들은 손님은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갔지요. 잠시 뒤에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본 손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너무 짧게 자른 것 아닌가요?” 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초보 이발사는 아무 말도 못하는데, 스승님께서 말해요.
“짧은 머리는 긴 머리보다 훨씬 경쾌하고 정직해 보인답니다.”
이번에도 손님은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 손님이 왔습니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본 손님은 머리 모양은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막상 돈을 낼 때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에 스승님께서는 “머리 모양은 사람의 인상을 좌우 한답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머리 다듬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요.”라고 말했고, 세 번째 손님 역시 매우 밝은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네 번째 손님이 왔고 그는 이발 후에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참 솜씨가 좋으시네요. 겨우 20분 만에 말끔해졌어요.”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초보 이발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이지 몰랐는데, 스승님께서는 “시간은 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손님의 바쁜 시간을 단축했다니 저희 역시 무척 기쁘군요.”하면서 손님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어떻게 보면 한없이 부정적으로만 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긍정적인 말을 통해서 손님이나 자신의 제자를 기분 좋게 만들고 있었지요. 사실 우리 주변을 보면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람들에게 힘을 뺏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완고함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기적과 힘이 되어 주는 말씀을 해주심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선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러한 완고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부정적인 생각으로 다른 이의 힘을 뺏는 모습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다른 이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인터넷 악플의 거짓 증언들이 생명을 앗아갑니다. 사회 구석구석
거짓문화가 확산되어갑니다. 이 거짓문화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걱정스럽습니다. 어른들의 거짓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내면풍경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두렵습니다. 우리 사회의
참된 진리에 대한 불감증이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한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시기와 질투로 옷 입은 거짓 증언자들은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아픈 이들을 고쳐주고 좋은 일을 하는데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기나 질투도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정말 못 말리는 분이십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뿐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나 삶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거짓이 진짜인
것 같은 세상에서 사랑과 진리를 위해서라면 아무도 못 말리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 김혜경-
한때 죽도록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샤워를 하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도 있었고, 주방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하고 아이를 등교시킨 뒤 일을 하러 가는 고달픈 생활이 이어지는 가운데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유일한 희망이고 위안은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 들립니다. 이전에 언급한 증언·믿음 ·생명·영광 등의 단어도 모두 여기에서 걸리는 듯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증언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증언을 하는 증거자에 대한 믿음도 없고, 생명에 대한 열망도 하느님에 대한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으로 왔다고 하는 것조차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엄청난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망각하고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분을 잊지 않는 한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반대가 되면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그분을 망각한 채 절망하고 있으니 우리는 구제할 수 없는 바보들인가 봅니다.
성서 해석?
-전삼용신부-
꿀이 귀하던 시절 한 노인은 우연히 산속을 지나다 꿀을 발견하였습니다. 손으로 한 움큼을 떠서 입에 넣었습니다. 처음으로 맛보는 그 꿀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왔고 다시 그 곳을 찾으려했지만 더 이상 산을 오를 힘도 없는데다 또 사람들과 함께 갈 때는 좀처럼 꿀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꿀을 맛보았다면 자신들도 한 번 맛보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느낀 것을 그들도 느끼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노인은 자신이 갔던 산 어딘가에는 또 다른 꿀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음도 직감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죽기 전에 꿀맛을 글로 남겨 놓고 그 꿀이 있는 산에 오르는 법을 적어놓기로 하였습니다. 그것만을 남기고 그 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쓴 것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꿀은 마치 투명한 황금처럼 생겼지만 딱딱하지는 않다. 그것을 입에 넣으면 온 입 안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퍼지며 세상의 쓴 걱정을 잊게 만든다. 이 꿀을 먹으려면 산을 오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믿고 오르라. 그러면 그 맛을 발견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신기한 것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그렇게 쓰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학이 발전하였고 그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이 노인이 말한 꿀이란 무엇일까?’를 놓고 학술 연구회도 하고 수많은 이론들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이 있는지를 놓고 죽음을 각오하고 그 험한 산을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꿀에 대한 수많은 책이 나왔고 박사들이 생겨났지만 그들 중엔 정작 꿀을 직접 맛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느꼈던 것을 적은 것입니다. 왠지 성경공부란 것이 직접 그 맛을 보게 하지는 못하고 겉핥기만 하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빠져가며 히브리어, 희랍어 단어를 외우고 성경 주석하는 법도 배우고 논문도 썼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전공하는 분들과 많은 트러블이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공부보다는 믿음을 강조했고 그들은 성경 말씀을 파고듦으로써 믿음도 생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성경을 파고들면 믿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믿음을 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서 믿음이 생긴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만 읽게 하면 될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믿어보려고 성경을 집어 들었다가 황당한 이야기들에 성경을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약엔 신약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예언서들을 설명해 주시며 메시아가 어떻게 죽어서 3일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약에 당신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는 당대 최고 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성경을 좔좔 외우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눈이 없었기에 성경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간 이후에는 구약에서 신약의 모습을 발견해냅니다. 성령님만이 믿음을 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자칫 잘못된 성경공부는 교만만 키울 수 있습니다. 성경박사들보다 공부도 못한 성인들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여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믿음은 체험하게 합니다. 그저 공부만 해서 많이 안다고 말씀을 체험한 것은 아닙니다. 체험되지 않는 연구는 꿀을 맛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연구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믿고 살아 그 말씀을 삶으로 체험하여 깨닫도록 합시다.
비디오테이프의 필름을 빼서 눈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으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비디오테이프와 같고 믿음은 바로 비디오 플레이어와 같습니다. 배우려고 하기 전에 먼저 믿으려고 합시다.
-김찬선신부-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관구 봉사자 소임을 끝내고 쇄신 기간을 3개월 가질 때
무전 순례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울서부터 진도까지 가는 길에 ‘일로’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장바닥에서 관상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쪽에 앉아 관상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니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금 더 있으니 먼 데 있는 사람의 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조금 더 있으니 소리치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더 있으니 멀리서 소리치는 사람까지 보였습니다.
조금 더 있으니 개개의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조금 더 있으니 개개의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조금 더 있으니 존재이신 하느님이
존재들과 不二이신 하느님으로 저에게 왔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어찌 주님이 보이지 않을까요?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 어찌 주님을 보지 못할까요?
주님 말씀을 공부하는데 어찌 주님을 보지 못할까요?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리만 듣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소리만 듣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보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만 보기 때문입니다.
“나”가 사라져
“지금, 여기”에 “나” 없는 나로 있다면
소리와 존재가 不二로서,
인간 존재와 하느님 존재가 不二로서 나에게 다가옵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우리 성당 판공성사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오후 3시의 참회예절을 시작으로 저녁 늦게까지 고해성사가 있었지요. 그런데 어제는 날씨가 참으로 안 좋았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오더니만, 오후에도 어둑어둑한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당에 들어가면 꽤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참회예절을 위해 저 역시 성당에 들어가서 교우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서 참회예절을 인도하는 봉사자의 말에 저 역시 따르면서 저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지요. 30분의 참회예절 시간이 끝나고, 약간의 공지사항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눈을 뜨고 자리를 일어나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성당 안이 너무나 환한 것입니다. 분명히 성당에 들어올 때에는 날씨가 어둑어둑한 것뿐만 아니라, 참회예절 분위기를 내기 위해 어두운 조명만 켜서 더욱 더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30분 동안 눈을 감고 뜨는 순간은 어둡다는 생각보다는 너무 환해서 눈부시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참회를 열심히 해서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뜨면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뜨면 어두운 세상도 밝게 보이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습들을 때로는 보지 않을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부정적인 것들,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고 체험하려 하기보다는 때로는 눈을 감고서 잠시 거리를 두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다시 부정적인 것들을 접하게 될 때에는 그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부정적인 생각과 말만을 행하시는 분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시고 그러한 생각과 말을 하시는 분들은 또 모든 것이 다 긍정적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이 부정적일 때에는 잠시 나를 다시금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보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계속 부정적으로 보다 보니, 예수님의 하는 행동과 말이 모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이는 십자가상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들이 잠시만 눈을 감고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예수님께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렇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보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또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의 못 박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양심성찰의 시간을 가집시다.
빠다킹신부
주님,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그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이회진신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한 뒤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벌써 하느님을 잊고 수송아지를 부어 만들고는 우상을 경배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그토록 쉽게 배신한 이스라엘에 진노하시어
그들을 모두 없애시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재빠른 배신이라기보다
모세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 모세는 자기 백성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와 은총을 청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미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오는 즉시, 혹시 잠시 뒤 다시 우상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춥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들 때문에 분노하고 미워하고 멀리하며,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보다는 세상적인 것을 먼저 받아들입니다.
잠시 하느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하고 용서를 하다가도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 하며 돌아서거나,
정말 주님께서 들어주실까 하며 마음 한 구석에 어둠을 품고 맙니다.
우리의 기도와 다른 이들을 위해 드리는 희생이 하느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요?
분명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는 분명 안됩니다.
모세는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분의 진노 앞에서도 기도했고,
자기 백성이 자신과 하느님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혹시나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지 않지 않을까? 의심하지 않았고,
내 기도 때문에 그분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까하고 의심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욕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로 존경 받게 될 것이라는 자만도 없었고,
하느님 앞에 더 의로운 사람이라 인정받게 되리라는 기쁨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백성들의 수많은 불평불만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하느님께 매번 은총을 전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
다만 모세는 자신의 삶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백성이자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도 분명해집니다.
모세처럼...
하느님 백성을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주님, 저를 배신하거나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게 힘을 주소서. 아멘.”
생명의 주인
-허찬란 신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모세와 성경에 기록된 당신에 관한 증언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메시아를 안다고 하느냐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는 대목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 묵상해보았습니다. 초등학교 교리 시간에 배웠던
성경 공부, 고등학교 때 나눴던 성경 모임, 신학교에 갓 입학하여 배웠던
구약입문 시간은 성경 그 자체를 읽고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생각하며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도록 했고, 나와 더불어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
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느끼며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성경 주석을 하면서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려는 숱한 위기를 맛보았습니다.
강론대에서도 복음과 예수님을 선포하는 대신 성경의 정황을 조금 안다는
미명 아래 세상 이야기로 도배를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머리로
알아듣는 지식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과 믿음으로 읽고 쓰고 묵상하고,
느낀 바를 나누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는 소망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코드 문화
-정복례 수녀-
오늘 복음 중에 예수께서 유다인들에게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질책하신다. 최근 몇 년 동안 회자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코드’라는 말이다. 특히 정치권 뉴스에서 자주 듣게 된다. 이른바 코드 문화란 끼리끼리 문화를 말한다. 사자성어 중에 ‘초록동색(草綠同色)’이라는 말이 있다. 풀색과 녹색은 같다는 뜻으로, 같은 처지나 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그들끼리 함께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뜻을 지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다. 이런 말은 요즘 말로 ‘코드’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을 연상시킨다. 곧 코드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영광을 주고받는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게 만든다.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는데, 이들은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까지도 소외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명동성당 상설고해소를 찾은 일이 있었다. 성당 비탈길을 올라가는데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어떤 자매님이 맞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강남으로 이사했어요!” 그러자 내 뒤에서 누군가 볼멘소리를 했다. “흥, 강남? 강남, 좋아하시네!” 나는 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상대적 박탈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약자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었다.
끼리끼리 문화 또는 코드 문화로 살아가는 것은 자연인으로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한테서 동질의식을 느끼고 가장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이런 자연인의 모습을 뛰어넘어야 한다. 바로 예수님이 그 모델이시다. 예수님은 당대의 비천한 사람들, 심지어 죄인들마저 끌어안으셨다. 이제 우리는 무의식중의 끼리끼리를 벗어나 깨어 있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들끼리’라는 말은 없고, 다만 ‘우리 모두’가 있을 뿐이다.
"중재 기도"
-이수철신부-
주님과 모세와의 격의 없는 대화의 기도가 부럽습니다.
너무나 친밀한 대화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사람, 모세에게만은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입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겠다.”
당신의 사람에게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시며
스트레스를 푸시는 하느님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모세는 전혀 위축됨 없이
하느님께 애원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웬만큼 신뢰하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도저히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모세의 간곡한 애원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어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 던 재앙을 거두셨다 합니다.
참으로 모세에게서 참된 지도자상을 봅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는 모세처럼
공동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하고, 하
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약에서의 하느님과 백성간의 중재자 모세는
그대로 신약의 중재자이신
대사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세처럼 끊임없이 중재 기도를 바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여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우리들입니다.
특히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서
매일 봉헌하시는 대 중재 기도 미사에 참여하는 우리들입니다.
이 미사성제의 은총으로 세상에 내리시려 던 재앙을 거두시고
매일 축복의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증언,
예수님이 이루신 일들의 증언,
성경의 증언,
아버지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디어져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을 믿지 못하고,
주님께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해 심히 개탄하는 주님입니다.
매일 예수님의 대 중재 기도, 미사에 참여하여
모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친밀한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믿음과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아멘.
권력
-김훈일 신부-
권력은 그 속성상 힘이 강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추종과 찬양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권력은
늘 한 곳으로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한 번 잡은 권력은 나누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권력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이런 달콤한 권력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탐합니다. 그런데 권력은 그 정통성이
없으면 오래 유지되기가 어렵습니다. 권력은 반드시 모든 사람이 추종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정통성을 찾아야 합니다. 즉 누가 나에게 권력을 주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예수님께 정통성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누구에게서 배웠으며 당신이 하는 행동들과 말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말씀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감동이 되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고백하는 가톨릭 신앙은 나를 통해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양승국신부-
<저리 고운 옥색 하늘이 열리는 날>
가끔씩 바닷가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도 잔잔하던 바다, 그래서 호수 같은 바다였는데,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높은 파도가 몰려옵니다. 먹구름과 함께 인자한 노인 같던 바다는 한 순간에 화가 잔뜩 난 난폭한 젊은이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바다, 갯바위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뺨에 와 닿은 바람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몸에 느껴지는 바람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히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느껴지지 않던 새로운 감정이 밀물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내 인생도 먹장구름이 활짝 걷히고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열릴 날이 반드시 다가올거야, 하는 충만한 희망이 다가왔습니다.
잠시지만 너무나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피정의 결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불투명하고 흐리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보다 생생하게 전해져올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경말씀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제 영혼에 내려와 하느님 말씀 한자 한자가 감사와 선물로 다가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 그분의 말씀은 제게 정녕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꿀처럼 달 것이고, 생명수처럼 시원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제 인생을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되겠지요. 그때 제 삶은 보란 듯이, 그리고 말끔히 정돈되고,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드는 심각한 반성입니다. 그간 너무도 주변에서만 맴돌았구나. 원뿌리를 외면하고 가지만 붙들고 있었구나, 하는 후회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원전입니다. 성서 본문입니다. 원천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봉독은 뒷전인 채, 주석서다, 해설서다, 지침서에만 너무 매달렸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말씀, 성경 원전이 제 삶의 중심이 되길 바랍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리 삶이 허황된가, 왜 이다지도 인생이 허전한가, 생각해봤더니 말씀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더군요.
매일의 말씀에 삶의 지침이 있음을, 그러기에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말씀에서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길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어디에 있든, 그 어떤 곤경 앞에 서 있든, 그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가 다가온다 해도, 흔들리지 않고 외로워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것은?
새벽을 열며 -조명언신부-
얼마 전, 가전제품 중 하나를 구입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어떤 업체의 물건이 괜찮은지를 검색하던 중, 꼭 마음에 드는 물건을 하나 발견할 수가 있었지요. 더군다나 인터넷 상에 나와 있는 수많은 누리꾼들의 평도 아주 긍정적입니다. 글쎄 평점 5점 만점에 4,9점이니까요. 저는 이 물건을 사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그날 오후 우연히 어떤 분에게 이 물건에 대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신부님, 제가 이 물건 샀다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아마 신부님도 후회하실껄요.” 결국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이 물건을 샀을까요? 아닙니다. 수많은 누리꾼들의 긍정적인 말을 무시하고 단 한 사람의 평가를 듣고서 물건을 사지 않게 되었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의 작은 말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작은 말, 조그마한 행동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끊임없이 잘못과 실수를 반복해서 범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러한 부족한 면들을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상의 삶 안에서 당신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공간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주님을 느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습니까? 또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내게 힘과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린 적이 없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일상의 삶 안에서 주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매 순간 기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내 기준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주님의 기준에 맞추며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기준만을 내세우지요. 그런데 그 기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얼마 전에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에 우리나라의 축구경기를 볼 기회가 있었지요. 그런데 상대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반칙을 하는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상대 나라 선수들을 욕하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상대 나라의 파울 숫자보다 우리나라 선수의 파울 숫자가 더 많은 것입니다. 즉,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나라 선수가 파울 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상대 나라 선수의 파울만 보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내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대신 주님께 그 기준을 맞춘다면 우리들은 일상의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그 안에서 참된 행복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으세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니까요.
-정호신부-
우리는 사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정해놓고 그 과정을 살피며 함께 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이 죽음은 부활을 희망하고 있음도 우리는 압니다. 그렇지만 당장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복음 속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그분의 행동이나 말씀 속에서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이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죽을만한 일을 하신 적도 없을뿐더러 우연하게라도 사고를 만날 여지조차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것도 하느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이라는 날조된 명목 하나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수밖에 없으셨는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해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이 과연 하느님을 믿었는지 예수님은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당신 스스로의 증언보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심을 증언한 숱한 예언자 중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세례자 요한을 당신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세례자 요한의 예언보다 훨씬 중요한 예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또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를 예언했다면 구세주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주시러 오셨으니 훨씬 중요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누구의 증언으로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도, 성서 속의 증언도, 그들이 하느님을 믿게 해 준 고마운 조상 모세의 가르침 속에서도 드러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온 역사에 기록된 하느님 구원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곧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그들은 구세주를 기다린다고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불신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십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시며 그토록 바라신 것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었기에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우신 듯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꼬집으십니다.
“그러나 아마 딴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세우고 온다면 너희는 그를 맞아들일 것이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가 있겠느냐? ”
만일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의 놀라운 모습을 자랑하며 다니셨다면 그래서 거기에 걸맞은 품위 있는 행동과 화려한 언변, 사교술을 통해 사람들 앞에 섰다면 그들은 예수님께 분명 열광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정말 인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실제 왕으로 오셨거나 이름높은 스승으로 등장했다면 정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사랑만을 전하셨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분은 그분의 이름을 숨기시고 당신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이 전해주시는 사랑을 사람들이 느끼도록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건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끄셨습니다. 사랑이 아버지의 뜻이었고, 또 예수님의 삶의 이유였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장 눈 앞에 나타난 사랑을 거부했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믿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팔아 자신들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악한 모습을 지닌 이스라엘을 고발할 것은 사랑하러 오신 하느님, 예수님이 아닌 그들에게 하느님을 전해준 모세일거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삶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설명이 안되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장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행동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구세주를 기다린다고 하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 고백하고 따르는 신앙생활의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타난 스스로 잘난 사람들이 아닌가요? 성공에 약한 사람들. 성공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이 당장 나타나셔도 그분의 평범한 모습에 그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무수히 지나치는 소중한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또다시 못 박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