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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묵상글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 죄가 죄를 낳지 않도록 조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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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1 03:29
- 죄가 죄를 낳지 않도록 조심!
오늘 복음은 죄와 용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인데
솔직히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이고 특히
죄에 관한 얘기는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도 싫고 여러분도 싫으시겠지만 가능하면 밝게
죄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아니, 더 불행해지지 않고 불행이 확대되지 않기 위해
죄를 왜 짓지 말아야 하냐면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짓기를 그만두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니 죄 얘기를 우리가 그만둘 것이 아니라
죄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죄가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선 죄가 내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죄가 죄를 낳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고,
죄 때문에 자포자기해 더 죄를 짓지 않고,
죄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 것 등입니다.
남의 죄로 인해 또한 죄짓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지은 죄로 그를 미워하지 않음은 물론
나와 상관없는 죄로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말 것입니다.
다음은 내 죄가 남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오늘 주님은 꼬드겨서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꼬드기지 않았어도 곧 의도하지 않았어도 죄짓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심코 한 말이나 생각 없이 하는 행위가
그에게 상처가 되고 죄짓게 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공인일수록 또 대통령처럼 높은 자리의 사람일수록
그런 일이 더 많고 더 많은 사람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의 처지나 상태를 고려하고 배려하지 않아 죄짓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사랑하여 자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자녀의 기색을 늘 살피는 엄마조차도 자녀를 죄짓게 하니
공인이나 높은 이들은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무심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지 않고 방심하면 더욱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불행을 확대 재생산하는 죄의 생리를,
죄가 죄를 낳는 죄의 생리를 알고 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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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50대 중반을 살면서, 지금까지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기회가 있기는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친구와 말다툼했고, 방과 후에 학교 근처 공터에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또래보다 키도 몸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저의 힘에 밀려 넘어져서 제 몸 아래에 깔렸지요. 이제 주먹만 뻗으면 되는데, 차마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덤비지 마.”라고 말하고는 풀어줬습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때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싸움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저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맞을까요? 4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그 친구의 기억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뇌과학자의 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1년이 지나면 중요한 세부 사항을 잊어 버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억의 정확도가 시간이 지나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때의 일이 어제 있었던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확한 기억들이 왜곡되어 뇌 깊이 새겨질 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미워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채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새로운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부정적 마음으로는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긍정적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 머릿속을 채워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길입니다. 이 길로 나아가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심지어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해서 불편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길이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았던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믿음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작은 믿음이라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길,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기억으로 가득 차면서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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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부모의 장기적인 시야가 자녀의 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루이 파스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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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잘못으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일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없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져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 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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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 받았음을 기억하라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으니,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유혹은 나 자신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꼭 해야 합니다. 화해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용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지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 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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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과 한국의 집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에는 ‘현관(玄關)’이 있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옵니다. 현관에는 신발장이 있고, 우산 거치대가 있고, 구둣주걱이 있습니다. 현관은 ‘정화(淨化)’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현관을 지나면서 모두 털어버리면 좋겠습니다. 현관을 통해서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현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수(聖水)’입니다. 달라스 성당에는 성전 입구에 세례대가 있습니다. 세례대에는 늘 일정량의 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성수를 찍거나, 세례대에 손을 적시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겁니다. 가톨릭 교리 중에 ‘연옥’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연옥은 일종의 현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성인들의 통공과 우리의 기도가 함께 하면 연옥 영혼들은 정화될 겁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초대받을 겁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계단에 ‘난관(欄干)이 있습니다. 난간은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실내와 실외, 안전과 위험, 자유와 제한 사이의 경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난간은 인간의 본질적인 경계 설정 욕구를 반영합니다. 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자유를 제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난간을 넘어서거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욕구를 어떻게 경험할까요?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난간을 뛰어넘었습니다. 난간은 보호자나 사회적 안전망과 같은 역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에서 안전을 찾을 때 '난간'과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보이지 않는 난간이 있으며, 우리는 항상 어떤 경계 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간은 규칙과 질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규범과 법적 ‘난간’을 세워 둡니다. 이러한 난간이 보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원로는 현관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감독은 난간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원로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은 세상 속에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의 역할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다른 하나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로와 감독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고 평가하기보다는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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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많은 아픔을 겪습니다. 많은 사건과 사고와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와 아픔을 줍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는 부정할지라도 우리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상처와 아픔이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부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상처를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상처를 주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형제보다 더 너그러워서가 아닙니다. 아량이 넓어서도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바보이기 때문에도 아닙니다.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역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청하는 이에게 용서를 해야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앞에 두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져라.’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용서받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그저 용서를 청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며 살아가면 어떨까요? 다른 이가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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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라면 몇 개까지 끓여봤니?
바쁜 오후 일정을 마치고 저녁 6시쯤 방에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습관처럼 냉장고를 열었는데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찬장을 보니 짜장라면 두 봉지가 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 자신과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데….
한 봉지는 너무 적을 것 같아! 오늘은 두 봉지 어떨까?
먹을 수 있을까? 두 봉지는 적은 양이 아니야!
저녁 내내 속이 불편할 수 있는데….
여기서 질문입니다. 저는 몇 봉지를 끓였을까요?
맞습니다. 저는 두 봉지를 끓였습니다.
그리고 저녁 내내 속 불편하게 지냈습니다. 후회하면서….
순간의 허기가 고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순간의 과욕이 후회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늘 자제하려 해도 허기와 맛있는 것은 너무 강한 유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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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 실천”
옛 어른의 말씀이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내 안의 고통은 억지로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다산>
죽음도 고통도 참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 아니 자주 원인을 캐기 보다는 주님 안에서 화해함이 지혜요 겸손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마르티노 주교의 수도생활에 있어서 각별한 인연 때문에 기념이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일컫는 성 베네딕도 보다 거의 백년전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성 마르티노 주교 수도승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후렴도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복된 마르티노는 임금이신 예수를 한껏 사랑하고,
지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목자 주교 성 마르티노였습니다. 성인의 생애도 참 파란만장합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제국 휘하의 한나라였고 성인의 평생 체험 영역이 참 넓고 깊었습니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이태리에서 성장과정과 15세부터 25년간 군복무기간을 지낸후 전역하는데 전투를 거부함으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된 셈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전역후 프랑스에서 성 힐라리오의 제자가 되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371년 시민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투르의 주교로 서임되고 수도생활도 병행하면서 주교직도 충실히 수행합니다. 오늘날 프랑스의 대표적 성인인 마르티노의 투르 성당은 대표적인 순례지로 산티아고로 떠나기전 많은 이들이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인은 특히 본당 사목에 열정을 다했고 397년 81세로 선종했으니 당시로는 천수를 누린 셈입니다. 특히 성인에 관한 “성 마르티노의 외투”라는 유명한 전설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가 군문에 있으면서 18세에 세례를 받게된 동기가 되었고 수도성소의 계기도 된 생생한 체험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르티노는 걸인을 만났고 측은한 마음에 외투 절반을 잘라 줍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걸인에게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라고 천사들에게 하는 말을 듣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보게 되었고 이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이 전설적 일화에 근거한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에 관한 마태복음 25장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예언적 장엄한 서술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각자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자비의 선행을 베풀었는지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굶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였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도와 준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합니다. 바로 곤궁에 처한 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이들을 도와줌이 바로 자신을 도와준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참으로 기존 종교의 틀을 벗어나는 놀랍고 놀라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곤궁중이 이들을 내 형제라 칭하며 이들을 도와 줌이 바로 자기를 도와 준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전례가, 기도가, 공부가. 계명 준수가 아닌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최종 구원의 심판잣대라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 하여라.
자비를 행한 이들에게 천국행을 선언하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잣대에 의한 심판은 오늘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연장선상위에 있음을 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이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사랑의 구원활동에, 해방활동에 종사한 이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 주위의 곤궁중에 이들을 도와줌이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며 구원의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구원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곤궁중에 있는 형제들과 더불어 고해인생이 아닌 기쁨의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구원의 축제 옷을 입혀주시어 찬미와 감사,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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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행복하여라
벗들을 믿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희망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곧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빛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맑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바르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참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곱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착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솔직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어울리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일어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나아가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살맛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살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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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4)
우리는 ... 육신의 병을 한두 번 치료해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 주는 의사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또한 욕정에 사로잡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를 꾸짖고 벌할 권한과 의무를 지닌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서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갈라 2 참조). 마태오 복음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나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르셨지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영혼이 안에서 “쉬면서 수동적으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말에 주목하라. 이와 같이 우리는 힘쓰기보다는 버리고 무심코 가라앉을 펼요가 있다. 이 직관의 단계에서 우리의 앎이 가능해지는 까닭은 지성이리는 이름의 기능 때문이다. 지성은 이미지 없이, 매개물 없이, 닮은 것 없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아는 지식을 제공한다. 바로 이 심층에서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은 우리와 같이 된다.
하느님을 하느님 아닌 분으로 전락시키는 셋째 경우는 우리가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다. 하느님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싫증 난 적이 없을 만큼 하느님은 무한하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여러분에게는 하느님이 더 적어질 것입니다. 실로 여러분이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하여 싫증이 날 정도가 되었다면.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27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히브 2,5-18
구원의 영도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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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전례문의 표현이 예전과 달리 조금씩 변경되었습니다, 1980년도엔 죄의 고백을 다 마친 후, 다음과 같은 성찰 기도문을 했었습니다. 『이 밖에 나 성찰치 못한 죄와 남이 나로 인해 지은 죄 있을 터이니 신부는 도무지 저를 벌하고 사하소서.』 그땐 조금은 생소하게 들렸지만, 시간이 지난 요즘은 아주 의미 있는 성찰문이었다, 고 느낍니다. 사실 타인과 살다 보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본의 아니게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서로 죄짓게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게 사람 사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억하심정이 아니면 남을 죄짓게 혹 남을 불편하게 의도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다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나약하기에 우리 각자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고, 예수님의 언급처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17,1) 그런데 이 말씀에 덧붙여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표현은 너무 지나치시지 않나 생각이 들며 반감마저 듭니다. 아니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을 이해하신 듯,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고 말씀 해 놓고서는 남을 죄짓게 하면 불행하여라! 라고 저주아닌 듯 저주를 퍼부으시니 저희더러 어쩌란 말씀입니까?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여기 있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죄짓게 하는 일이 불행하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요? 어찌 하오리까?
오늘 복음의 구조는, 첫째 죄의 유혹에 대한 경고(17,1-3a), 둘째 잘못의 꾸짖음과 용서(17,3b-4), 그리고 믿음의 힘(17,5-6)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실 저 역시도 다른 형제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전 ‘양성지도자-양성자’, ‘장상-수하자’의 관계가 아닌 이젠 성숙한 수도자로 대등한 입장에서 살다 보니, 새삼스럽게 신앙의 관점과 접근 태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서 잘못의 꾸짖음과 용서의 폭도, 깊이도 달라지고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전 어르신들이 자주 표현하신 말씀, 사는 것이 죄다, 는 말처럼 삶 자체가 사람에게 죄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제 생활 초기에는 한사코 아닙니다, 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하지만 이젠 기꺼이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때론 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세속, 마귀, 육신이 죄의 근원이라고 가르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어기면서 다른 사람을 떠나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며 현실이라고 봅니다. 결국 사람이 어디서 살던지 죄의 유혹은 어디에나 있으나, 남을 죄짓게 하는 행동은 참으로 본인 스스로에게도 불행한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자신이야 이미 깨닫고 나름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할지 모르지만 더불어 사는 사람의 작고 약한 믿음과 희망을 무너뜨리고 좌절시키는 행동은 철저하게 근절되어야 할 것으로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은 이들이 아니라 미처 깨우치지 못하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 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 던져지는 편이 낫다.”(17,2)하고 예수님께서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같은 가르침을 마태오 복음에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 던져버리는 게, 눈을 빼 던져버리는 게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마태18,8~9)라고 듣기 민망할 정도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남이 나로 인해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죄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신체의 일부인 손과 발 그리고 눈을 잘라버리고 빼낼 수 있는 용기는 어떤 누구에게도 없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를 스스로 보속으로 실행하겠다고 설사 고백자가 말하더라도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제는 한사코 반대할 것이며,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봅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으로 하여금 죄짓게 한 형제의 손과 발을 그리고 눈을 어떻게 칼로 내리칠 수 있겠으며 눈을 빼낼 수 있겠습니까? 만일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는 데 있어서 내가 남의 원인이 되고, 남이 나의 원인이 된다면 서로의 잘못을 꾸짖고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해야 할 믿음의 실천이고 사랑의 증거라고 봅니다. 타인의 잘못에 직면하여 화를 먼저 내고 칼로 응징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속하지만 꾸짖음과 용서는 인간의 이성적인 믿음과 사랑의 행위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꾸짖는 까닭은 타인을 단죄하고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사람이 되도록 바로잡아 주기 위한 것인데, 이는 곧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17,3)하는 말씀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 곧 꾸짖음과 용서는, 죄나 잘못의 횟수와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해당합니다. 오늘 복음의 아름다운 점은 이러한 예수님의 강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미쳐 이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살아오지 못했던, 즉 내가 남을 죄짓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꾸짖음과 용서를 제대로 베풀지 못하고 살아 온 삶을 깨달은 제자들이 마침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17,5)라고 스스로 스승이신 예수님께 고백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알면서도 늘 서로가 서로에게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잘못을 꾸짖고 용서하는 삶을 통해서 더욱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간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면 족하고도 남습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기에 그 시초에는 겨자씨 한 알만한 것이라도 충분합니다. “주님, 저로 인해 형제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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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작은 이에게 사랑 실천을 /
박윤식 [big-llight] 2024-11-10 ㅣNo.177502
마르티노 성인은 316년 무렵, 현재 헝가리의 솜바테이 지역인 판노니아에서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다음 군인이 된 그는,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다.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기적의 신비 체험을 하고 나서 곧장 세례를 받았다. 그 뒤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뽑혔다. 착한 목자로서 모범을 보이고,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성직자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397년 프랑스 중부의 캉데생마르탱에서 선종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그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들 예수님에게 지상 순례를 명하시어, 당신 뜻을 직접 전하게 하셨다. 오래 전에 물로서 심판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예언자들을 통해 수차 지적하였는데도 안하무인이었다. 모세에게 일러준 자비에 바탕을 둔 그 십계명도 사회의 기득권 인사인 율법 학자 등에 의해 권위의 법으로 탈바꿈 해 어린 백성에게는 오히려 짐으로 멍에를 더 지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약자는 더 궁핍한 이르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짧은 삼년의 공생활 이었지만, 엄한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일러주셨다.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 사랑 실천의 자세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며,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지침서까지 일러주셨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황금률’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여정을 끝내시고 아버지 곁으로 가시면서, 죄의 구원과 같은 베푸는 자비의 일차 순례와는 달리, 우리가 베푼 사랑의 점검 차원에서 ‘최후의 심판’을 하러 다시 이차 순례를 하신단다. 그때는 자비가 담긴 회개와 용서가 아닌, 사랑 실천을 점검인 심판만 하신다나. 그래서 초라한 구유의 아기 모습이 아닌, 마치 임금처럼 ‘영광에 싸여’ 오신단다. 그리고 우리가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각자 행실을 판가름하시고 상이나 벌을 내리신단다. 그 많은 율법이 아닌, 작은 이 사랑 그 하나만 가지고서.
“내가 영광에 싸여 천사와 함께 와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가 내 앞으로 모이면, 나는 그들을 오른쪽왼쪽으로 가를 것이다. 그리고는 나는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은 너희 의인들아, 와서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중 한 사람에게 해 준 게 바로 내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의인과 악인의 구분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보잘것없는 이들을 어떻게 베풀었는지를 보시겠단다. 다시 말해 심판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소외된 작은 이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 여부라나. 그것도 보통 작인 이가 아닌, 최상인 ‘가장 작은 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며, 지금껏 당신이 보여주신 자비를 그대로 실천하라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다. 그렇다. 온 힘과 마음, 정신을 다해 우리를 기다리는 작은 이 찾아 나서자. 그들이 바로 예수님임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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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교정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형제의 죄는 꾸짖어 바로잡아야 하고, 그가 뉘우치면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혼자 용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 형제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기에, 회개하지 못한 채 죄에 머물게 됩니다.
혼자서 용서하고 마는 것은, 그를 꾸짖을 때 예상되는 갈등과 다툼이 싫어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고, 불편함의 회피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에게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와 불편해지는 결과까지도 감당하기로 결심하면서, 형제를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 죄를 저지른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다면, 곧바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다고 생각한 큰 죄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늘 더 큽니다.
또 되풀이되어 고백하기도 부끄러운 죄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처음처럼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지치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같이 형제가 어떠한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지르더라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큰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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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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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도 있는데
두 복음이 조금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꾸짖다가 아니라 타이르라는 표현으로 나오며
죄를 이야기하는 부분과 용서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바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즉 죄 이야기와 용서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루카에서는
이 두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전해집니다.
두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에서
죄와 용서가 선후관계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용서에 앞서서 죄를 꾸짖는 것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용서를 이야기하면서
잘못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덮는 것이
용서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을 언급하는 자체가
용서와 반대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잘못을 언급하는 것은
상대방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
어떤 부분에서 실수했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덮기에 바쁘다보니
그 행동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죄를 꾸짖으라는 말씀은
심판자로서 그 죄를 비난하라는 것보다
상대방의 잘못을 정확하게 알려주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실 상대방의 모습을 함께 보아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제 용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
뉘우치는 마음 없이
단순히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못의 반복이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한다면
용서의 반복된 청으로
자신을 알아갈 마음이 드러난다면
용서의 반복으로
오히려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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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 마음은...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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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것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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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용서 안 하면 그 사람을 지옥에 버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이제 용서로 나아갑니다.
마치 용서하지 않으면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처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세 주제를 이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남을 죄짓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겨지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는데, 용서해 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군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군대는 용서가 안 되는 시스템으로 그려집니다.
승영은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강한 신념과 이상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청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친구이자 상관인 태정을 만납니다. 태정은 군대 시스템에 적응한 선임으로서 친구인
승영을 보호해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승영을 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임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승영은 갈등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럴 수 없는 존재인지.
그리고 군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태정이 한 것처럼 선임에게는 복종하고 후임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후임이 애인과 헤어지고 힘들어할 때 승영은 자신이 살자고 후임을 때리고 후임은 자살합니다.
승영은 본래 군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정이 산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합니다.
태정은 밖에서 잘만 삽니다. 아무 일 없었듯이. 승영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죽은 후임 때문에 자신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매이게 됩니다.
거기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지 못하면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깨고 자신을 용서해 주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전에 락 토마스(Rock Thomas)의 사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 아버지에게 애정을 구걸하였습니다.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이 죽도로 일해 번 돈으로
아버지의 병원비와 세금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은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자라고 여기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야근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하루에 이 말을 500번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고 가슴이 북받쳐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였고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누군가의 용서로 주어집니다.
믿게 되면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누군가를 지옥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가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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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용서를 청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1-6)”
1)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라는 말씀은,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세상 사람들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불행하여라.’는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 즉 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 나의 말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정말로 ‘큰 죄’이고, 그 죄를 짓는 자는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 마태오복음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을 더욱 자세하게 풀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이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은 ‘네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네가 보거든’이고,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입니다.>
죄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그를 회개시켜서 ‘함께’ 구원받기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실천’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형제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 또한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마태 7,1-2).
루카복음의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마라.”,
또는 “회개하는 경우에만 용서하여라.”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형제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는 용서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루카 23,3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고(마태 18,22), 회개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3) 우리는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용서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서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입장’에만 두고서, 자기도 용서를 청하는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용서를 청해야 하는 입장에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형제가 너를 꾸짖거든 달게 받아들이고 회개하여라.”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루에도 일곱 번이나 죄를 짓고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한다고 하면?
하느님께서는, 또는 형제들은 그때마다 나를 용서해 주는데, 그렇게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회개한다고 말하는 그 회개는 과연 진정성이 있는 회개일까?
고해성사 5단계에서, 통회와 고백 사이에 ‘정개’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고,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굳은 결심을 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회개가 될 뿐이고,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물론 살다 보면 죄를 짓고, 또 본의 아니게 의지와 상관없이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일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떻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형제들이 도와줄 것입니다.
4)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관한 말씀을 ‘용서’에 관한 말씀과 합해서 생각하면,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면,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
또는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하면,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더라도 구원받을 길이 열릴 것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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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7,1-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실수나 잘못을 더도 덜도 말고 ‘딱 세 번만’ 참아주면 이 세상에서 살인이라는 범죄가 사라질 수 있다니,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되새기게 되지요. 그런데 이 세 번 용서하고 참아준다는게, 그가 잘 할 수 있도록 세 번이나 다시 기회를 준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거나 나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이가 아니라면, 보통은 한 두번 용서해줬는데도 같은 죄가 또 반복되면 그런 사람은 ‘구제불능’이라며 그와 맺은 관계를 쉽게 끊어내버리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걸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를 향한 내 사랑이 딱 두 번 참아주는 정도 밖에 안되며 그 이상은 안하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성찰케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에게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그 사람을 비난하고 단죄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게 모르게 하는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나쁜 표양’이 되어, 그들이 무엇이 진정 올바른 것인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죄를 짓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특별히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 자기 성찰과 수덕생활은 게을리하면서 ‘남 탓’만 하려고 든다면 그런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죄의 수렁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멸망케 될거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처럼 자신의 말과 행동이 남에게 악표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의 사랑이라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어도 용서하는 것은, 더 나아가 잘못을 저지르는 그를 꾸짖고 가르쳐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지요. 하지만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했다지만, 그가 나에게 준 상처가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아 마음이 쓰리고 아픈데 무조건 그를 용서하라고 하시니 억울하고 힘들어서 어렵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방어’라는 기제를 갖고 있기에 자기 실수나 잘못을 어떻게든 감추고 부정하며 합리화하려고 드는 법인데, 그래서 그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면 ‘발끈’해서 나에게 덤벼들 게 뻔한데, 그처럼 위험한 ‘소 귀에 경 읽기’를 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도긴개긴’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부족하고 단점 많은 나에게 과연 그를 꾸짖을 자격이 있긴 한건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너나 잘 하세요’라고 손가락질 하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그분의 선하신 뜻과 놀라운 섭리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 믿음이 형제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붙들어 준다는 겁니다. 그를 변화시켜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만드는 ‘기적’은 내가 일으키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이니, 우리는 그저 있는 힘껏 믿음을 부여잡고 그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우리 마음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때가 찼을 때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회개’라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때가 올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쓰러진 이를 사랑과 자비로 일으켜 세우는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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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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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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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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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1.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2024.11.11> 아침을 여는 묵상 (딤전 6:11~21절)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잊지 말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 선한 싸움은 어떠한 싸움입니까?
➲ 선한 싸움은 영생을 얻는 싸움입니다(11~16절).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짓되고, 허황된 꿈과 복음의 진리보다 돈과 명예에 사로잡힌 삶에서 벗어나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는 삶(11절)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영생을 취한만큼 이제는 삶에서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탄의 계속되는 유혹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12절). 짧은 시간에 끝나지 않을 싸움이기에 지혜와 인내로써 이 싸움을 싸워 가야 합니다. 바울은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만물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합니다(13~14절). ‘기약이 이르면....’ 믿음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주의 주 되시며, 모든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14~16절).
어떤 분야든지 성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반복 훈련과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개인의 반복과 노력이 없이는 건강한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는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결단이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니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고, 부당한 대우를 경험해야 할 경우도 있고, 많은 핍박과 더 나아가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는 처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빌라도 앞에서 당당하게 당신의 하실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때를 소망하며 오늘도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영생을 얻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선한 싸움은 소망을 얻는 싸움입니다(17~19절).
많이 가졌다는 것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을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쓰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덧없는 이 땅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것들로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17~19절).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분명한 방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을 자꾸만 빼앗아 가는 것이 물질이고, 재물입니다. 물질과 재물은 유혹은 언제나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천국의 소망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재물은 정함이 없습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이 갈팡질팡 해지는 것입니다. 현재 내 손에 있는 것이 지극히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만큼 나누는 삶을 살아가므로 천국 소망을 얻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선한 싸움은 믿음을 얻는 싸움입니다(20~21절).
바울은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거짓된 가르침을 피하고 주님이 부탁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힘주어 명령합니다. 거짓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믿음에서 벗어나기에 바른 교훈에서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명령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강력한 세상의 압력과 회오리바람 같은 핍박이 몰아쳐 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붙잡고 있는 복음의 진리만큼은 결코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고,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거짓된 것들을 좇게 되면 결국 믿음에서 벗어나는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와는 결코 비교될 수 없음을 굳게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해 온갖 거짓된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는 성도들을 방치해 두지 말고 십자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동시에 거짓된 가르침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참된 믿음을 얻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말씀을 기준으로 순결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기는 삶을 살되,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딤전 6:11~2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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