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아! 잊느랴 ! 어찌 우리 이날을 ~ 조국의 원수들이 ~짖밟아 오든날을 ~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하리 |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
이 노래가 한 地方言論社(지방언론사)의 記事(기사)로 因(인)해 "金大中(김대중) 政權(정권), 盧武鉉(노무현) 政權(정권)에 걸쳐 10年間(년간) 禁止曲(금지곡)으로 指定(지정)되었고, 歌詞(가사)도 바뀌었다"라는 主張(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該當(해당) 記事(기사)에서만 10年間(년간) 禁止曲(금지곡)이었다고 한 줄 써놓았을 뿐, 音源(음원)을 包含(포함)한 그 以外(이외)의 關聯(관련) 根據(근거)를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2005年(년) 盧武鉉(노무현) 政府(정부) 때의 55週年(주년) 行事(행사)에도 6.25의 노래를 合唱(합창)한 事實(사실)이 있다. 따라서 該當(해당) 記事(기사)는 該當(해당) 政權(정권)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造作(조작), 陰謀論(음모론), Fake news(가짜 뉴스)로 判明(판명)되었다.
왼쪽부터 趙芝薰(조지훈), 朴木月(박목월), 朴斗鎭(박두진).
1939年(년) 雜誌(잡지) 《文章(문장)》을 通(통)해 詩人(시인) 鄭芝溶(정지용) 의 推薦(추천)으로 登壇(등단)하면서 세 詩人(시인)이 함께 登場(등장)했다. 셋 모두 自然親和的(자연친화적)인 時風(시풍)을 지닌 共通點(공통점)이 있는데, 이를 두고 日帝强占記(일제강점기) 의 慘酷(참혹)한 民族(민족) 現實(현실)을 外面(외면)한 現實逃避的(현실도피적) 時風(시풍)이라는 批判(비판)도 있다. 다만 詩(시)의 抒情性(서정성)과 流麗(유려)함에서만큼은 首位級(수위급)을 다툰다는 것은 大部分(대부분) 共感(공감)하는 編(편).
乙酉文化史(을유문화사)에서 60週年(주년) 記念(기념)으로 새롭게 靑鹿輯(청록집)을 發刊(발간)하였으니 中高等學生(중고등학생) 當時(당시) 文學(문학) 修業(수업)을 追憶(추억)하는 Wiki Knit(위키니트라)면 한 번 읽어보도록 하자. 秀能(수능) 工夫(공부)하며 朴木月(박목월)의 나그네,[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朴斗鎭(박두진)의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趙芝薰(조지훈)의 승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를 얼마나 많이 읽었던가. 참고로 나이는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순이다.]
金大中(김대중) 前(전) 大統領(대통령)의 追慕詩(추모시)인 ‘별이 되신 님이시여!’를 지은 심재방 詩人(시인)은 個人的(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개사하기도 하였다.
作詞家(작사가)가 朴斗鎭(박두진)인데, 靑鹿派(청록파)로 有名(유명)한 그 詩人(시인) 맞다. 靑鹿派(청록파)의 抒情的(서정적)이고 流麗(유려)한 時風(시풍)을 생각하면, 靑鹿派(청록파)의 性向(성향)과 對比(대비)되는 이 노래의 느낌이 달리 느껴질 것이다.
6.25 戰爭(전쟁) 또는 한국 전쟁(韓國戰爭, 標準語(표준어) : 6·25 戰爭(전쟁), 六二五(육이오) 戰爭(전쟁), 韓國戰爭(한국전쟁), 文化語(문화어) : 朝鮮戰爭(조선전쟁)/祖國解放戰爭(조국해방전쟁), 英語(영어) : Korean War, 中國語(중국어) 正體(정체) : 韓戰/朝鮮戰爭(한전/조선전쟁.러시아語(어) :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年(년) 6月(월) 25日(일) 午前(오전) 4時(시)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奇襲的(기습적)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을 侵攻(침공)하여 勃發(발발)한 戰爭(전쟁)이다. UN forces(유엔군)과 中國人民支援軍(중국인민지원군)等(등)이 參戰(참전)하여 世界的(세계적)인 大規模(대규모) 戰爭(전쟁)으로 悲話(비화)될뻔 하였으나, 1953年(년) 7月(월) 27日(일) 22時(시)에 締結(체결)된 韓國休戰協定(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休戰(휴전) 以後(이후)로도 現在(현재)까지 兩側(양측)의 有無形跡(유무형적) 葛藤(갈등)은 持續(지속)되고 있다.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以後(이후), 共産(공산)·反共(반공) 兩國陣營(양국진영)으로 對立(대립)하게 된 世界(세계)의 冷戰的(냉전적) 葛藤(갈등)이 熱戰(열전)으로 暴發(폭발)한 代表的(대표적) 事例(사례)로, 냉전(冷戰)인 同時(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同時(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複雜(복잡)한 性格(성격)을 가졌다.
이는 國際聯合軍(국제연합군)과 意料進(의료진)을 비롯해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과 소련까지 關與(관여)한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以後(이후) 最大(최대)의 國際戰(국제전)이다. 또한 韓半島(한반도) 休戰協定(휴전협정)으로 戰爭(전쟁)을 쉬고 있다. 그래서 全世界(전세계)에 남은 마지막 冷戰(냉전)地域(지역)이다.
6.25 전쟁 | |||
냉전 및 한반도 분쟁의 일부 | |||
교전국 | |||
대한민국 미국 유엔 전투 파병국 의료 지원국[ 물자 지원국 지원 의사 표명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의료 지원국 기타 지원국 | ||
지휘관 | |||
李承晩이승만 申性模신성모 蔡秉德채병덕 丁一權정일권 白善燁백선엽 金錫源김석원 李鐘贊이종찬 金鍾五김종오 金弘壹김홍일 손원일 최용덕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 매슈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마크 웨인 클라크 |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김두봉 남일 김책 † 강건 † 김무정 마오쩌둥 펑더화이 쑹스룬 덩화 저우언라이 이오시프 스탈린 † 니키타 흐루쇼프 | ||
병력 | |||
UN군 사령부:[13] 대한민국 국군 602,902명[14] 미국 326,863명[15] 영국 56,000명 프랑스 3,421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뉴질랜드 3,794명 캐나다 25,687명 네덜란드 5,322명 필리핀 7,420명 터키 14,936명 콜롬비아 5,100명 벨기에 3,498명 태국 6,326명 그리스 왕국 4,992명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룩셈부르크 83명 의료부대 목록 노르웨이 623명 이탈리아 128명 스웨덴 1,124명 덴마크 630명 인도 627명 총계: 1,078,433 명 | 공산군: 조선인민군 450,000 명[16] 중공군 1,350,000 명 소련군: 26,000 명 총계: 1,826,000 명 | ||
피해 규모 | |||
군인 149,005명 전사 710,783명 부상 132,256명 실종 민간인 373,599명 사망 229,625명 부상 303,212명 실종 총계 522,604명 사망 940,408명 부상 435,468명 실종 총계 1,898,480명 사상 36,574명 전사 103,284명 부상 3737명 실종 4439명 포로 총계 137,250명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97명 포로 총계 4908명 | 군인 294,000명 전사 226,000명 부상 120,000명 실종 및 포로 민간인 406,000명 사망 1,594,000명 부상 680,000 명 행방불명 총계 700,000명 사망 1,820,000명 부상 800,000명 실종 총계 3,320,000명 사상 197,653명 전사 383,500명 부상 25,600명 실종 및 포로 총계 592,000여명 사상 및 실종&포로 315명 전사 500명 부상 총계 815명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
目次(목차)
3.1 韓半島(한반도) 分斷(분단)과 軍政(군정)實施(실시)
3.2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狀況(상황)
3.2.1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支配力(지배력) 强化(강화)와 戰爭(전쟁)準備(준비) 交涉(교섭)
3.2.2 소련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戰爭支援約束(전쟁지원약속)
3.2.3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戰爭準備(전쟁준비)
3.3.1 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의 昏亂(혼란)
3.4 韓國戰爭(한국전쟁) 前(전)의 여러 戰鬪(전투)
4.2 過去(과거)의 韓國戰爭(한국전쟁) 原因(원인) 假說(가설)
4.2.1 Stalin's Principal (Leadership)(스탈린 主導說(주도설)
5.2.1 大邱(대구) 後退(후퇴)와 多富洞戰鬪(다부동전투)
5.3.3 中共軍(중공군) 介入(개입)과 長津湖戰鬪(장진호전투)
5.3.4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反擊(반격)準備(준비)
6.2.2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6.3.2 戰爭(전쟁) 中(중)의 拉北者(납북자), 捕虜送還(포로송환) 問題(문제)
9 6.25 戰爭(전쟁)을 素材(소재)로 한 作品(작품)
槪要(개요)
戰爭(전쟁) 以前(이전) 미리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毛泽东(마오쩌둥)과Soviet union(소비에트 聯邦(연방)의 Иосиф Сталин:Joseph Stalin(이오시프 스탈린)의 協助(협조)와 支持(지지)를 얻은 金日成(김일성)은 1950年(년) 6月(월) 25日(일) 새벽 4時(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38度線(도선)과 東海岸(동해안) 연선(沿線) 等(등) 11個所(개소)에서 境界(경계)를 넘어 大韓民國(대한민국)으로 進擊(진격)하였다.
또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大攻勢(대공세)에 戰爭(전쟁)이 1週日(주일)만에 金日成(김일성)의 勝利(승리)로 끝날 뻔 했으나,United Nations(유엔)은 美合衆國(미합중국)을 主軸(주축)으로 바로 United Nations(유엔) 安全保障理事會(안전보장이사회) 決議(결의) 第(제)82號(호)를 議決(의결)하고 이 戰爭(전쟁)에서 大韓民國(대한민국)을 援助(원조)하기로 決定(결정)하고 派兵(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月(월) 7日(일 元帥(원수)를 總司令官(총사령관)으로 하는 UN forces(유엔군)이 組織(조직)되었다. United Nations(유엔)은 日本(일본) 東京(도쿄)에 本部(본부)를 세웠다. 人民軍(인민군)은 無防備(무방비) 狀態(상태)였던 中部地方(중부지방)과 湖南地方(호남지방)을 揷時間(삽시간)에 휩쓸었다. 聯合軍(연합군)은 洛東江(낙동강) 防禦線(방어선)에서 背水陣(배수진)의 決戰(결전)을 展開(전개)하였다.
聯合軍(연합군)은 ) Douglas MacArthur(더글러스 맥아더)의 9月(월) 15日(일)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을 開示(개시)하여 北漢)軍(북한군)의 뒤쪽을 攻擊(공격)하여 이를 始作(시작)으로 大大的(대대적)인 反擊(반격)을 하여 10月(월) 10日(일) 平壤(평양)에 이어 鴨綠江(압록강) 附近(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1月(월) 中旬(중순) 中國人民解放軍(중국인민해방군)이 介入(개입)하여 戰勢(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惠山鎭(혜산진)까지 進擊(진격)하던 寒國軍(한국군)은 1月(월) 4日(일)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3月(월) 15日(일)에 奪還(탈환)하였다. 그 渦中(와중)에 南路黨(남로당)의 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 顚覆(전복)을 위한 活動(활동)과 이를 制壓(제압)하려는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의 衝突(충돌)로 居昌(거창) 良民(양민)虐殺(학살) 事件(사건), 國民(국민) 防衛軍(방위군) 事件(사건) 等(등)의 여러 悲劇的(비극적)인 事件(사건)들이 일어났다. 以後(이후) 3年(년) 동안 持續(지속)된 戰鬪(전투)로 數(수)많은 軍人(군인) 및 民間人(민간인)이 死傷(사상)하였고, 大部分(대부분)의 産業(산업) 施設(시설)들이 破壞(파괴)되는 等(등) 兩側(양측) 모두가 큰 經濟的(경제적), 物質的(물질적) 被害(피해)를 입었으며, 理念的(이념적)인 理由(이유)로 民間人(민간인)들의 虐殺(학살)이 咨行(자행)되고 地主(지주)들의 處罰(처벌)과 그 報復(보복)이 反復(반복)되면서 南(남)·北(북) 間(간)의 敵對的(적대적)인 骨(골)이 깊어지는 結果(결과)를 낳게 되었다. 심지어는 38線(선)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戰爭(전쟁)까지 하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으며 高地戰(고지전) 以後(이후) 1953年(년) 7月(월) 27日(일) 22時(시)에 締結(체결)된 韓國休戰協定(한국휴전협정)으로 因(인)하여 設定(설정)된 韓半島(한반도)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休戰(휴전)하였다.
現在(현재)까지 繼續(계속) 이 狀態(상태)가 維持(유지)되고 있어 가장 오래 이어진 戰爭(전쟁)이라는 記錄(기록)을 繼續(계속) 更新(경신)하고 있으며, 休戰協定(휴전협정) 締結(체결) 以後(이후)에도 南北(남북) 間(간)에 衝突(충돌)은 發生(발생)하고 있다.
多樣(다양)한 名稱(명칭)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와 絶對(절대) 多數(다수)의 言論(언론)은 公式的(공식적)으로 6.25 사변(六二五事變) 或(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이라는 名稱(명칭)을 使用(사용)하고 있다.
內戰的(내전적) 意味(의미)를 强調(강조)하는 境遇(경우)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불린다.
略稱(약칭)으로 부르는 境遇(경우) 6.25 또는 육이오(六二五)라고 한다.
六十甲子(육십갑자)를 適用(적용)하여 경인동란(庚寅動亂)이라 부르는 境遇(경우)도 있다.
英語(영어) 原文(원문)의 飜譯(번역)을 通(통)해 한국 전쟁(韓國戰爭)이라 부르는 境遇(경우)도 있다.
조선전쟁(朝鮮戰爭)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日本(일본)에서 쓰이는 用語(용어)로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도 가끔 쓴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大部分(대부분) 學者(학자)들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美國(미국)과 Canada(캐나다) 等(등) 西歐(서구) 國家(국가)들은 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과 Vietnam War(베트남 戰爭(전쟁) 사이에 벌어져 젊은 世代(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理由(이유)로 잊혀진 戰爭(전쟁)(The Forgotten War) 或(혹)은 알려지지 않은 戰爭(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부르기도 한다.
背景(배경)
1945年(년) 8月(월) 15日(일) 日本(일본)으로부터 解放(해방)을 맞은 韓半島(한반도)는 解放(해방) 直後(직후) 他意(타의)에 依(의)해 南(남)과 北(북)으로 分斷(분단)되었다. 美軍(미군)과 Soviet Army(소련군)의 占領(점령)이 끝나고 韓半島(한반도)에는 大韓民國(대한민국)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정부)가 樹立(수립)되었다. 北韓(북한)은 Soviet Union(소련)과 中國(중국)을 說得(설득)하여 韓半島(한반도)를 赤化統一(적화통일)하려는 計劃(계획)을 樹立(수립)하고 準備(준비)를 해 나갔다. Soviet Union(소련)은 Soviet Army(소련군)이 韓半島(한반도) 38線(선) 以北(이북)에 進駐(진주)한 以來(이래), Asia(아시아)共産化(공산화)를 目的(목적)으로 北韓(북한)에 Soviet Union(소련)을 代理(대리)할 수 있는 共産(공산) 政權(정권)을 세우고, 韓半島(한반도)의 統一(통일)을 妨害(방해)하면서 侵掠(침략)의 機會(기회)를 엿보아 왔다.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은 1949年(년) 10月(월) 01日(일) 中國(중국) 國民黨(국민당)을 大陸(대륙)에서 몰아내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을 樹立(수립)하였다. 半面(반면)에, 美國(미국)은 駐韓美軍(주한미군)이 撤收(철수)를 完了(완료)(1949年(년) 6月(월) 하고, 美國(미국)의 極東防衛線(극동방위선)이 Taiwan(타이완)의 東(동)쪽 卽(즉), 日本(일본) Okinawa(오키나와)와 Philippines(필리핀)을 連結(연결)하는 線(선)이라고 宣言(선언)(Atchison Declaration(애치슨 선언), 1950年(년) 1月(월)을 하는 等(등) 大韓民國(대한민국)에 대한 軍事(군사) 援助(원조)를 最小化(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時期(시기)였기에, 美國(미국)은 Soviet Union(소련) 共産圈(공산권)과의 直接的(직접적)인 軍事(군사) 衝突(충돌)이 第(제)3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을 惹起(야기)할 수도 있다는 國際的(국제적)인 情勢(정세)를 考慮(고려)하였으며, Soviet Union(소련) 亦是(역시) 그러한 理由(이유)로 北韓(북한)에 대한 公開的(공개적)인 支援(지원)을 中斷(중단)하였다.
韓半島(한반도) 分斷(분단)과 軍政(군정)實施(실시)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當時(당시)에 日本(일본)帝國(제국)이 聯合國(연합국)에게 降伏(항복)을 拒絶(거절)하자 美國(미국)은 日本領土(일본영토)에 原子爆彈(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Soviet Army(소련군)은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 地域(지역)까지 進擊(진격)했다. 이로써 韓半島(한반도)는 1945年(년) 8月(월) 15日(일)에 日本(일본)帝國(제국)의 植民地(식민지)에서 벗어나 獨立(독립), 光復(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線(선)을 起點(기점)으로 하여 日本軍(일본군) 武裝解除(무장해제)를 名分(명분)으로 進駐(진주)한 Soviet Army(소련군)과 美國軍(미국군)에 依(의)해 南(남)과 北(북)으로 갈라져, 北(북)쪽에 共産主義(공산주의) 國家(국가)인 Soviet Union(소련)의 軍政(군정), 南(남)쪽에 資本主義(자본주의) 國家(국가)인 美國(미국)의 軍政(군정)이 始作(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Soviet union(소비에트聯邦(연방)과 美國(미국)이 韓半島(한반도)를 分割(분할) 占領(점령)하여 理念代決(이념대결)을 벌임으로써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勃發(발발)했다는 視覺(시각), 卽(즉), 韓國戰爭(한국전쟁)을 代理戰爭(대리전쟁)으로 理解(이해)하는 視覺(시각)이 있다.
그리고 南北分斷(남북분단) 後(후) 美蘇共同委員會(미소공동위원회)와 Moscow Three-phase Conference(모스크바 三相會議(삼상회의)에서 1950年(년)까지 英國(영국), 中華民國(중화민국), 美國(미국), 蘇聯(소련)이 信託統治(신탁통치)를 하는 內容(내용)도 있는데 卽(즉), 38線(선)을 경계로 南(남)쪽엔 英國(영국)과 美國(미국)이, 北(북)쪽엔 中華民國(중화민국)과 蘇聯(소련)이 占領(점령)하기로 했는데 더 正確(정확)하게 말하면 옛날 百濟(백제)의 首都(수도)가 扶餘(부여)였을 때에 百濟(백제)의 領土(영토)를 英國(영국)이 占領(점령)하고, 나머지 38線(선) 以南(이남)은 美國(미국)이 占領(점령)하기로 했다. 38線(선) 北(북)쪽으로선 蓋馬高原(개마고원)을 境界(경계)로 平壤(평양), 開成(개성), 南浦(남포), 新義州(신의주), 海州(해주)을 包含(포함)한 西部(서부) 地域(지역)은 中華民國(중화민국)이 東部(동부) 地域(지역) 元山(원산), 金剛山(금강산), 咸興(함흥), 興南(흥남), 長津(장진), 惠山鎭(혜산진), 淸津(청진), 羅瑨(나진)을 包含(포함)한 곳은 蘇聯(소련)이 占領(점령)해서 5年間(년간) 信託統治(신탁통치)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9年(년)에 國共內戰(국공내전)에서 國民黨(국민당)이 共産黨(공산당)에게 敗北(패배)하고 38線(선) 北(북)쪽의 西部地域(서부지역)이 共産黨(공산당)으로 넘어가 西部地域(서부지역)도 共産國家(공산국가)가 되므로 38線(선) 北(북)쪽 全體(전체)가 共産國家(공산국가)가 되는 常況(상황)이었다. 하지만 1950年代(년대)가 되면 4開國(개국)이 손떼야 되는 常況(상황)이었는데 美國(미국)은 이와 反對(반대)로 卽時(즉시) 獨立(독립)을 主張(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對話(대화) 때문에 전혀 實行(실행)되지 못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常況(상황)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內(내)에서 韓國戰爭(한국전쟁)은 金日成(김일성)과 朴憲永(박헌영)의 主導(주도)로 이루어졌으며, 金策(김책), 金武亭(김무정)도 積極的(적극적)으로 贊成(찬성)하였다. 李承燁(리승엽) 等(등) 南路黨(남로당) 系列(계열)의 人士(인사)들도 贊成(찬성)하였고, 軍事指導者(군사지도자)들인 姜健(강건), 金雄(김웅), 金光俠(김광협), 方虎山(방호산), 李權武(리권무), 金昌德(김창덕), 柳京洙(유경수) 等(등)은 南(남)쪽과의 一戰(일전)을 苦待(고대)하였고 勝利(승리)를 確信(확신)하였다. 이에 比(비)해 崔庸健(최용건)은 積極的(적극적)으로 反對(반대)하였고, 金枓奉(김두봉), 洪命憙(홍명희), 張時雨(장시우)等(등)은 反對(반대) 또는 消極的(소극적) 贊成(찬성)을 하였다.
金日成(김일성)은 數次例(수차례) 蘇聯(소련)의 支配者(지배자)인 Stalin(스탈린)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統治者(통치자)인 毛泽东(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回(회)나 南侵(남침) 許諾(허락) 乃至(내지)는 戰爭(전쟁) 支援(지원)을 要請(요청)하였다. 公開(공개)된 舊蘇聯(구소련)의 文書(문서)에 依(의)하면 애초에 Stalin(스탈린)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絶對的(절대적) 優位(우위)를 確保(확보)하지 못하는 한 攻擊(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人民軍(인민군)의 實力(실력)이 美國(미국)과 大韓民國(대한민국)을 相對(상대)로 아직은 單獨(단독)으로 戰爭(전쟁)을 치를 만한 實力(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美國(미국)과의 直接的(직접적) 摩擦(마찰)을 두려워하여 武力(무력)行事(행사)를 忌避(기피)하였다. 그럼에도 金日成(김일성)은 數次例(수차례) Stalin(스탈린)을 說得(설득)하였고, 一部(일부) 歷史(역사) 硏究者(연구자)들이 옛 蘇聯(소련)의 文書(문서)들을 根據(근거)로 主張(주장)하는 理論(이론)에 依(의)하면, Stalin(스탈린)은 美國(미국)을 試驗(시험)하고 美國(미국)의 關心(관심)을 Europe(유럽)에서 Asia(아시아) 돌리기 위해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이 戰爭(전쟁)에 대한 援助(원조)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條件(조건)으로 金日成(김일성)의 南侵(남침)을 承諾(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Stalin(스탈린)은 强力(강력)한 軍事的(군사적) 援助(원조)로서, 蘇聯(소련)의 最新武器(최신무기)들을 大量(대량)으로 提供(제공)하였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支配力(지배력) 强化(강화)와 戰爭準備(전쟁준비) 交涉(교섭)
金日成(김일성)은 朝鮮勞動黨(조선로동당)의 一黨獨裁(일당독재)를 基盤(기반)으로 反對派(반대파)(民族主義者(민족주의자), 宗敎人(종교인)를 通(통)하여 自國(자국) 內(내) 政治的(정치적) 立志(입지)를 强(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最高人民會議(최고인민회의) 幹部會議(간부회의)를 通(통)하여 統一(통일)을 위하여 占領軍(점령군)의 卽刻的(즉각적)인 撤收(철수)를 要求(요구)하여,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駐屯(주둔) 蘇聯軍(소련군)은 1948年(년) 12月(월) Siberia(시베리아)로 撤收(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蘇聯(소련) 政府(정부)는 Москва(모스크바)에서 秘密裏(비밀리)에 軍首腦會談(군수뇌회담)을 開催(개최)하여 撤軍(철군) 以後(이후)의 具體的(구체적)인 計劃(계획)을 樹立(수립)하고 '特別軍事使節團(특별군사사절단)'을 通(통)해서 執行(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會議(회의)에는 金日成(김일성)等(등)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高位(고위) 軍部代表(군부대표)도 參席(참석)하였다. Москва(모스크바) 計劃(계획)이라고 불리는 戰爭準備(전쟁준비) 計劃(계획)은 滿洲(만주)에 있던 朝鮮人(조선인) 義勇軍(의용군) 部隊(부대)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歸國(귀국)시켜 5個(개) 師團(사단)을 갖게 하고 이 外(외)에 8個(개)의 前方師團(전방사단)과 優秀(우수)한 裝備(장비)를 保有(보유)한 8個(개)의 豫備師團(예비사단), 그리고 500隊(대)의 Tank(탱크)를 保有(보유)하는 2個(개)의 機甲師團(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年(년) 2月(월) Stalin(스탈린)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樹立(수립) 後(후) 처음으로 金日成(김일성)과 朴憲永(박헌영)을 Москва(모스크바)로 불러 蘇聯軍(소련군)의 撤收(철수)로 因(인)한 軍事力(군사력) 空白(공백)과 韓半島(한반도) 情勢(정세)를 論議(논의)하였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首腦部(수뇌부)는 訪問(방문) 期間(기간)인 3月(월) 17日(일)에 Europe(유럽)에서 一般的(일반적)으로 締結(체결)하던 '友好(우호) 防衛條約(방위조약)'이 아닌 '朝(조)·蘇(소) 經濟(경제)·文化協定(문화협정)'을 締結(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美軍撤收(미군철수) 發表(발표)에 대한 蘇聯(소련)의 對應(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韓國戰爭(한국전쟁)의 責任(책임)을 謀免(모면)하기 위한 計劃(계획)이라고 보는 見解(견해)도 있다.
1949年(년) 8月(월) 12日(일), 金日成(김일성)과 朴憲永(박헌영)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이 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平和的統一案(평화적통일안)을 拒否(거부)하고 있으므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對南攻擊(대남공격)을 準備(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는 李承晩(이승만) 政權(정권)에 대한 大規模(대규모) 民衆蜂起(민중봉기)가 分明(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言及(언급)했다. 金日成(김일성)과 朴憲永(박헌영)은 萬若(만약) 對南攻擊(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人民(인민)들은 이를 理解(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强調(강조)했다. 그들은, 李承晩(이승만) 大統領(대통령)이 많은 親北(친북) 從北(종북) ‘民族人士(민족인사)’들을 投獄(투옥)시켰지만 北韓(북한)은 아직도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의 蜂起(봉기)를 組織(조직)할 能力(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1949年(년) 南朝鮮勞動黨(남조선로동당)等(등)의 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의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들이 反共政權(반공정권)이었던 李承晩(이승만) 政權(정권)의 共産主義(공산주의) 彈壓(탄압)에 依(의)해 大大的(대대적)으로 檢擧(검거)되었다는 것을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온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들의 虛僞報告(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1949年(년) 8月(월) 27日(일), 北韓(북한) 駐在(주재) 蘇聯(소련) 大使(대사)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는 8月(월) 12日(일)~14日(일)의 金日成(김일성)과의 面談內容(면담내용)을 Stalin(스탈린)에게 報告(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理由(이유)로 北韓(북한)의 對南攻擊(대남공격)이 不可(불가)하다고 結論(결론)을 내렸다.
1. 現在(현재) 韓半島(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存在(존재)하며 그 中(중) 大韓民國(대한민국)은 美國(미국) 및 其他(기타) 國家(국가)에 依(의)해 承認(승인)됨.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攻擊時(공격시) 美國(미국)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을 武器彈藥(무기탄약) 供給(공급)뿐 아니라 日本軍(일본군)의 派遣(파견)을 通(통)해 支援(지원)할 可能性(가능성)이 있음.
2.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對南攻擊(대남공격)은 美國(미국)이 大蘇聯(대소련) 母艦(모함)∙宣戰(선전)에 利用(이용)할 수 있음.
3. 政治的(정치적) 側面(측면)에서 北(북)의 攻擊(공격)은 南北(남북)한 人民大多數(인민대다수)의 支持(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軍事的(군사적) 側面(측면)에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 大韓民國(대한민국)에 대해 壓倒的(압도적) 軍事力(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大韓民國(대한민국)은 이미 相當數(상당수) 强(강)한 軍隊(군대)와 警察力(경찰력)을 創設(창설)하였음에도 蘇聯(소련)의 支援下(지원하)에 있는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에 比(비)하여 弱勢(약세)에 있었다. Stikoff(스티코프)는 金日成(김일성)이 提議(제의)한 江原道(강원도) 地域(지역)의 '解放區域(해방구역)' 創設計劃(창설계획)에는 贊成(찬성)하고 또한 人民軍(인민군)에 依(의)한 甕津占領計劃(옹진점령계획)도 軍事的(군사적)으로 妥當(타당)하다고 報告(보고)했으나 南韓(남한)의 反擊時(반격시) 이 作戰(작전)이 持久戰(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言及(언급) Stalin(스탈린)에게 提出(제출)한 9月(월) 15日字(일자) 報告書(보고서)에서, Stikoff(스티코프)는 “金日成(김일성)과 朴憲永(박헌영)은 現(현) 情勢下(정세하)에서는 平和統一(평화통일)이 不可能(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北(북)이 南(남)한 政府(정부)를 武力攻擊(무력공격)하면 南北(남북)양쪽의 人民(인민)들이 이를 支持(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只今(지금) 武力統一(무력통일)을 안하면 統一(통일)이 延期(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南韓(남한) 政權(정권)은 左翼勢力(좌익세력)을 彈壓(탄압)하면서 北進(북진)할 수 있는 强力(강력)한 軍隊(군대)를 만들어 統一(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金日成(김일성)은 南進(남진)을 始作(시작)할 때 蘇聯(소련)과 中共(중공)이 援助(원조)해줄 것을 企待(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見解(견해)는 南北(남북)의 內戰(내전)은 北(북)에 有利(유리)하나 北韓軍(북한군)이 南(남)한 攻擊(공격)을 開始(개시)하면 蘇聯(소련)이 國際的(국제적) 非難(비난)을 받게 되며 美國(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南韓(남한)을 積極(적극) 支援(지원)할 可能性(가능성)을 排除(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北韓(북한)이 南韓(남한)에서 빨치산[partizan:敵(적)의 後方(후방) 에서 通信(통신) 이나 交通施設(교통시설) 을 破壞(파괴)하거나 武器(무기)나 物資(물자)를 奪取(탈취)하고 人命(인명)을 殺傷(살상)하는 非正規軍(비정규군)] 活動(활동)을 强化(강화)하는 것은 좋다. 甕津作戰(옹진작전)은 有利(유리)한 狀況下(상황하)에서는 實施可能(실시가능)하고, 이를 위해 38線(선) 地域(지역)에서 南(남)쪽의 挑發(도발)을 利用(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蘇聯(소련) 共産黨(공산당) 政治局(정치국) 中央委(중앙위)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南侵(남침)이 猜忌的(시기적)으로 適切(적절)하지 못하다는 指示文(지시문)을 Stikoff(스티코프)를 經由(경유)하여, 金日成(김일성)에게 傳達(전달)하였다.(1949年(년) 9月(월) 24日(일)
蘇聯(소련)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戰爭(전쟁) 支援約束(지원약속)
1950年(년) 1月(월) 17日(일) 朴憲永(박헌영)의 官邸(관저)에서 열린 晩餐(만찬)에서 金日成(김일성)은 北韓(북한) 駐在(주재) 蘇聯(소련) 大使(대사) Stikoff(스티코프)에게 南侵(남침) 問題(문제)를 다시 提起(제기)하고 이를 論議(논의)하기 위하여 Stalin(스탈린)과의 面談(면담)을 希望(희망)한다는 意思(의사)를 披瀝(피력)했다. 이 對話(대화)에서 金日成(김일성)은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이 中華民國(중화민국)을 몰아내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을 成立(성립)한 것을 契機(계기)로 鼓舞(고무)되어 大韓民國(대한민국)이 차지한 南韓(남한)을 解放(해방)시킬 次例(차례)라고 强調(강조)하고,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紀綱(기강)이 세워진 優秀(우수)한 軍隊(군대)를 保有(보유)하고 있다고 主張(주장)했다. 또 金日成(김일성)은 以前(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南韓(남한)의 先制攻擊(선제공격)에 대한 反擊(반격)만을 承認(승인)한 1949年(년) 3月(월)의 Stalin(스탈린)의 決定(결정)에 不滿(불만)을 토로했다.
1月(월) 30日(일), Stalin(스탈린)이 署名(서명)한 電報(전보)를 平壤(평양)으로 打電(타전)했다. 電文(전문)에서 Stalin(스탈린)은 金日成(김일성)의 不滿(불만)은 理解(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緻密(치밀)한 準備(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實現(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冒險(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點(점)을 理解(이해)해야 한다고 言及(언급)했다. Stalin(스탈린)은 金日成(김일성)을 接見(접견)해 이 問題(문제)를 論議(논의)할 準備(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支援(지원)할 用意(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5월 12일, Stikoff(스티코프)가 金日成(김일성) 및 朴憲永(박헌영)과 面談(면담)한 자리에서 金日成(김일성)은 毛泽东(마오쩌둥)과의 面談計劃(면담계획)을 밝혔다. “蘇聯(소련)에서 돌아온 後(후) 李斗淵(이두연) Ambassador to Beijing(駐(주)베이징大使(대사)로부터 毛泽东(마오쩌둥)과의 面談(면담) 結果(결과)를 報告(보고)받았다. 毛泽东(마오쩌둥)는 ‘朝鮮統一(조선통일)은 武力(무력)에 依(의)해서만 可能(가능)하며 美國(미국)이 南韓(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次大戰(차대전)을 始作(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美國(미국)의 介入(개입)을 두려워할 必要(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毛泽东(마오쩌둥)와 面談(면담)하기 위해 5月(월) 13日(일) 北京(베이징)으로 出發(출발)할 것이다. 毛泽东(마오쩌둥)는 내가 對南(대남) 軍事行動(군사행동)을 곧 始作(시작)할 생각이라면 非公式(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毛泽东(마오쩌둥)에게 北韓(북한)으로 移讓(이양)되는 中共軍(중공군) 所屬(소속)의 朝鮮人(조선인) 師團(사단)을 위해 中國(중국)이 鹵獲(노획)한 日本(일본) 및 美國武器(미국무기)를 提供(제공)해줄 것을 要請(요청)할 計劃(계획)이다.
50年(년) 6月(월)께로 豫定(예정)하고 있는 南侵計劃(남침계획)을 具體的(구체적)으로 樹立(수립)하라는 指示(지시)를 北韓軍(북한군) 總參謀長(총참모장)에게 示達(시달)했다. 作戰(작전)이 6月(월)에 開始(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準備(준비)가 完了(완료)될지 自信(자신)이 없다.” 5月(월) 13日(일), 金日成(김일성)과 朴憲永(박헌영)이 北京(베이징)에 到着(도착)하여 毛泽东(마오쩌둥)과 面談(면담)하고 Stalin(스탈린)이 Москва(모스크바) 會談(회담) 때 ‘現(현) 國際環境(국제환경)은 過去(과거)와는 다르므로 北韓(북한)이 行動(행동)을 開始(개시)할 수 있으나 最終決定(최종결정)은 毛泽东(마오쩌둥)과의 協議(협의)를 通(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說明(설명)했다. 5月(월) 14日(일) Stalin(스탈린)은 毛泽东(마오쩌둥)에게 보낸 特別電文(특별전문)에서 “國際情勢(국제정세)의 變化(변화)에 따라 統一(통일)에 着手(착수)하자는 朝鮮(조선)사람들의 提請(제청)에 同意(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中國(중국)과 朝鮮(조선)이 共同(공동)으로 決定(결정)해야 할 問題(문제)이고 中國同志(중국동지)이 同意(동의)하지 않을 境遇(경우)에는 다시 檢討(검토)할 때까지 延期(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5月(월) 15日(일), Москва(모스크바)의 message(메시지)를 받은 뒤 毛泽东(마오쩌둥)는 金日成(김일성) · 朴憲永(박헌영)과 具體的(구체적)으로 意見(의견)을 交換(교환)하였다.
金日成(김일성)은 北韓(북한)이 ‘軍事力(군사력) 增强(증강)-平和統一(평화통일) 對南提議(대남제의)-大韓民國(대한민국)쪽의 平和統一(평화통일) 提議(제의) 拒否(거부) 뒤 戰鬪行爲(전투행위) 開始(개시)’의 3段階(단계) 計劃(계획)을 세웠다고 言及(언급)했다. 毛泽东(마오쩌둥)가 이 計劃(계획)에 贊成(찬성)을 表明(표명)하고 日本軍(일본군)의 介入(개입) 可能性(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金日成(김일성)은 日本軍(일본군)이 參戰(참전)할 可能性(가능성)은 別(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美國(미국)이 2萬(만)~3萬名(만명)의 日本軍(일본군)을 派遣(파견)할 可能性(가능성)을 전혀 排除(배제)할 수는 없다고 答辯(답변)했다.
그러나 日本軍(일본군)의 參戰(참전)이 狀況(상황)을 決定的(결정적)으로 變化(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毛泽东(마오쩌둥)는 萬一(만일) 美軍(미군)이 參戰(참전)한다면 中國(중국)은 兵力(병력)을 派遣(파견)해 北韓(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蘇聯(소련)은 美國(미국)쪽과 38線(선) 分割(분할)에 관한 合議(합의)가 있기 때문에 戰鬪行爲(전투행위)에 參加(참가)하기가 不便(불편)하지만 中國(중국)은 이런 義務(의무)가 없으므로 北韓(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北韓(북한)이 現(현) 時點(시점)에서 作戰開始(작전개시)를 決定(결정)함으로써 이 作戰(작전)이 兩國間(양국간) 共同(공동)의 課題(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同意(동의)하고 必要(필요)한 協力(협력)을 提供(제공)하겠다고 했다. 5月(월) 29日(일), 金日成(김일성)은 Stikoff(스티코프)에게 4月(월) Москва(모스크바) 會談時(회담시) 合議(합의)된 武器(무기)와 技術(기술)이 이미 거의 大部分(대부분) 北韓(북한)에 到着(도착)했음을 通報(통보)하였다. 이 通報(통보)에서, 또한, 金日成(김일성)은 새로 創設(창설)된 師團(사단)들이 6月末(월말)까지 準備(준비) 完了(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金日成(김일성)의 指示(지시)에 따라 北韓軍(북한군) 參謀長(참모장)이 Vasiliev:Васильев(바실리예프) 將軍(장군)과 함께 마련한 南侵攻擊(남침공격) 計劃(계획)을 北韓指導部(북한지도부)가 承認(승인)하였고, 軍組織(군조직) 問題(문제)는 6月(월) 1日(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北韓軍(북한군)은 6月(월)까지 完全(완전)한 戰鬪準備(전투준비) 態勢(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金日成(김일성)은 6月末(월말) 以後(이후)는 北韓軍(북한군)의 戰鬪準備(전투준비)에 관한 情報(정보)가 南(남)쪽에 入手(입수)될 수 있으며 7月(월)에는 장마가 始作(시작)된다는 點(점)을 指摘(지적)했다. 6月(월) 8日(일)~10日(일)께 集結地域(집결지역)으로의 兵力移動(병력이동)을 始作(시작)할 것이라고 報告(보고)되었으며, 金日成(김일성)과 面談(면담) 뒤 Stikoff(스티코프)는 Vasiliev:Васильев(바실리예프) 將軍(장군) 및 Постников:Postnikov(포스트니코프) 將軍(장군)과 意見(의견)을 交換(교환)했다.
그들은 7月(월)에 攻擊(공격)을 始作(시작)하는 것이 가장 時宜適切(시의적절)하나 日氣關係(일기관계)로 6月(월)로 變更(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6月(월) 11日(일), 大韓民國(대한민국)은 統一民主祖國戰線(통일민주조국전선)이 提議(제의)한 平和統一案(평화통일안)을 拒否(거부)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戰爭準備(전쟁준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을 準備(준비)함에 앞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情報(정보)를 相當部分(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平壤(평양)에서 發見(발견)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情報文件(정보문건)에 依(의)하면 大韓民國(대한민국) 各(각) 行政(행정) 所在地(소재지)의 군(郡) 單位(단위)까지 1950年度(년도)의 쌀, 보리 等(등)의 모든 農作物(농작물) 豫想(예상) 收穫量(수확량)이 細密(세밀)하게 記錄(기록)돼 있었다.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이 情報(정보)를 바탕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確保(확보)할 수 있는 食量(식량)의 規模(규모), 卽(즉) 供出量(공출량)을 計算(계산)한 狀態(상태)였다. 특히 모든 種類(종류)의 主食(주식)은 물론이며 主食(주식)이 아닌 깨까지 郡(군) 單位別(단위별)로 豫想(예상) 收穫量(수확량)과 供出量(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그리고 大韓民國(대한민국) 領土(영토)인 靑丹(청단)地域(지역)에서는 解放前(해방전)부터 農業用水(농업용수)로 使用(사용)한 久庵(구암)貯水池(저수지)의 水路(수로)를 北韓(북한)이 一方的(일방적)으로 끊음으로써 靑丹平野(청단평야)의 營農(영농)을 못하도록 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戰爭(전쟁) 보름 전(6月(월) 10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典型的(전형적)인 和戰兩面欺瞞術(화전양면기만술)의 一環(일환)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이 逮捕(체포)한 金三龍(김삼룡) 및 李舟河(이주하)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抑留(억류) 中(중)이던 曺晩植(조만식)과 38線(선)에서 交換(교환)하자며, 6月(월) 23日(일)을 協商期日(협상기일)로 提案(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副首相(부수상) 兼(겸) 外務相(외무상)인 朴憲永(박헌영)의 强力(강력)한 要求(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年(년) 6月(월) 16日(일) 李承晩(이승만)은 北(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要求(요구)를 했고, 6月(월) 18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同時交換(동시교환)을 主張(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同時(동시)에 交換(교환)하자”라는 攻防(공방)을 되풀이하였다. 또한, 6月(월) 16日(일)에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最高人民會議(최고인민회의)가 大韓民國(대한민국) 國會(국회)에 平和統一(평화통일) 方案(방안)을 提議(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그 裏面(이면)에서 戰爭準備(전쟁준비)를 마무리해 갔다. 卽(즉), 6月(월) 12日(일)부터 人民軍(인민군)은 38線(선) 以北(이북) 10~15km 地域(지역)으로 再配置(재배치)되기 始作(시작)했고, 6月(월) 16日(일)에는 蘇聯(소련)大使(대사)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는 北韓軍(북한군) 總參謀部(총참모부)가 作成(작성)한 侵攻作戰(침공작전) 計劃(계획)을 Москва(모스크바)에 報告(보고)했다.
이 計劃(계획)은 1個月(개월) 期間(기간)으로 3段階(단계)로 構成(구성)되어 있다. 6月(월) 20日(일),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는 Москва(모스크바)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水陸兩用(수륙양용) 作戰用(작전용) 船舶供給(선박공급)과 蘇聯軍(소련군) 水兵(수병)을 함께 提供(제공)할 수 있는지 與否(여부)를 問議(문의)했다. Москва(모스크바) 時間(시간)으로 午後(오후) 10時(시)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는 Москва(모스크바)로 電話(전화)를 걸어 Москва(모스크바) 時間(시간)으로 午後(오후) 11時(시)께 南韓政府(남한정부)가 北韓(북한)에 대해 攻擊(공격)을 始作(시작)하라는 命令(명령)을 내렸다는 諜報(첩보)가 北韓(북한)쪽에 午後(오후) 8時(시) 무렵 入手(입수)되었다고 報告(보고)했다.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는 이 諜報(첩보)가 公開文書(공개문서)로 돼 있어 疑心(의심)스럽다고 評價(평가)했다.
6月(월) 21日(일),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는 Stalin(스탈린)에게 金日成(김일성)의 message(메시지)를 傳達(전달)했다. 이 message(메시지)에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入手(입수)한 各種(각종) 諜報(첩보)에 따르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侵攻(침공)에 관한 情報(정보)가 大韓民國(대한민국)에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해 大韓民國(대한민국)이 戰鬪(전투)準備態勢(준비태세)를 强化(강화)하는 措處(조처)를 取(취)하고 있다는 內容(내용)이 들어 있다. 金日成(김일성)은 前(전)에 構想(구상)했던 甕津半島(옹진반도)에서의 前哨戰(전초전)을 修行(수행)치 않고 6月(월) 25日(일) 全戰線(전전선)에 걸쳐 戰鬪行爲(전투행위)를 始作(시작)하는 것이 目的(목적)에 符合(부합)한다고 말했다. 6月(월) 21日(일) 밤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2次(차)에 걸쳐 北韓(북한)에 대한 戰鬪行爲(전투행위)를 開始(개시)하라는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의 命令(명령)을 radio(라디오)를 通(통)해 捕捉(포착)했다고 主張(주장)하였다. 蘇聯(소련)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軍艦(군함)에 勤務(근무)할 蘇聯(소련) 수병 派兵要請(파병요청)에 대해 이는 敵軍(적군)이 介入(개입)할 수 있는 口實(구실)이 되므로 受諾(수락)할 수 없다고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答信(답신)하였다. 6月(월) 22日(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駐在(주재) 蘇聯(소련) 大使館(대사관)에 暗號電文(암호전문)의 交信(교신)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向後(향후) 一切(일체)의 暗號電文(암호전문)을 打電(타전)하지 말라는 Москва(모스크바)의 指示(지시)가 示達(시달)되었다. 以後(이후) 1950年末(년말)까지 平壤(평양)과 蘇聯(소련) 外務省間(외무성간)에는 電報(전보) 交信(교신)이 中斷(중단)되었다.
특히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住民(주민)들이 草家(초가)지붕을 고칠 餘裕(여유)도 주지 않음은 勿論(물론)이고 當時(당시) 大韓民國(대한민국)에 전혀 全無(전무)했던 T-34/85를 確保(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日帝時代(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道路(도로)의 幅(폭)을 2倍(배) 以上(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等(등) 徹底(철저)하게 準備(준비)했다. 半面(반면),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는 韓國戰爭(한국전쟁) 하루 前(전)날 兵士(병사)들에게 休暇(휴가)를 보내는 等(등)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편,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醫療部隊(의료부대)인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949軍部隊(군부대)는 6月(월) 24日(일) 午前(오전) 1時(시) 38線(선) 附近(부근)에 野戰病院(야전병원)을 設置(설치)하고 醫療要員(의료요원)들을 各(각) 該當(해당) 部分(부분)에 配置(배치)하였다. 6月(월) 25日(일) 午前(오전) 12時(시)까지 治療準備事業(치료준비사업)을 完了(완료)한 病院(병원)은 戰鬪準備(전투준비) 狀態(상태)로 待機(대기)하였다. 25日(일) 午後(오후) 2時(시)부터 部隊(부대)는 벌써 전상(戰傷) 患者(환자) 取扱(취급)을 始作(시작)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狀況(상황)~大韓民國(대한민국) 內部(내부)의 昏亂(혼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李承晩(이승만) 大統領(대통령)은 歸國(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立場(입장)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內(내)의 政治的(정치적) 昏亂(혼란)을 겪고 있었다. 朴憲永(박헌영)과 같은 左翼(좌익) 政黨(정당), 또 金九(김구)와 같은 國內派(국내파)의 民族主義(민족주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 그리고 李承晩(이승만)과 같은 海外派(해외파)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不信(불신)하였고, 그 結果(결과) 大韓民國(대한민국)은 여러 個(개)의 政黨(정당)이 亂立(난립)되는 等(등) 深刻(심각)한 政治(정치) 社會的(사회적) 問題(문제)에 直面(직면)하고 있었다.
金奎植(김규식) 等(등)은 左右派(좌우파)의 合作(합작)과 協力(협력)을 推進(추진)해왔고 兩者(양자)를 仲裁(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平壤(평양)을 訪問(방문)하는 等(등) 努力(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張德秀(장덕수) 暗殺(암살) 事件(사건)으로 李承晩(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金九(김구)가 同參(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 했으나, 金日成(김일성)이나 李承晩(이승만)이나 모두 剛勁(강경)한 態度(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失敗(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美國(미국) 軍部(군부)는 韓半島(한반도)를 '戰略的(전략적)으로 抛棄(포기)할' 計劃(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美國(미국) 軍部(군부) 首腦部(수뇌부)의 思考觀(사고관)에서 '만일 蘇聯(소련)이 東北(동북)Asia(아시아)에서 3次(차) 大戰(대전)을 일으킬 可能性(가능성)'이란 疑問(의문)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價値(가치)를 評價(평가)하는데 가장 核心的(핵심적)인 思考(사고)였다. 만일 美國(미국)이 陸軍戰(육군전)을 上程(상정)한다고 생각하면, 韓半島(한반도) 南(남)쪽에 駐韓美軍(주한미군)을 配置(배치)할 수 없었다.
韓半島(한반도)에서 3次(차) 大戰(대전)이 勃發(발발)할 境遇(경우)에 韓半島(한반도)에 投入(투입)될 蘇聯(소련) 陸軍(육군)과 美國(미국)의 陸軍(육군)은 軍事學的(군사학적)으로 根源的(근원적)인 限界(한계)가 있었다. 蘇聯(소련)과 韓半島(한반도)는 땅으로 連結(연결)되어 있지만, 美國(미국) 陸軍(육군)은 韓半島(한반도)에 投入(투입)되기 위해서는 太平洋(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狀況(상황)에서 海軍戰(해군전)과 空軍戰(공군전)을 上程(상정)한다면 亦是(역시) 韓半島(한반도)는 美國(미국) 立場(입장)에서 전혀 必要(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作戰(작전)이라도 空軍戰(공군전)과 海軍戰(해군전)은 韓半島(한반도)를 迂回(우회)해서 充分(충분)히 修行(수행)이 可能(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美軍部(미군부)는 暫定的(잠정적)으로 韓半島(한반도)에서 駐韓美軍(주한미군)을 撤收(철수)시키고, 만일 蘇聯(소련)이 大大的(대대적)인 挑發(도발)을 敢行(감행)할 境遇(경우)에는 大韓民國(대한민국)과 中華民國(중화민국)을 暴棄(포기)하고 北太平洋(북태평양)에 있는 Aleutian Islands(알류샨 列島(열도)와 日本(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島嶼(도서)防衛線(방위선)을 構築(구축)해 蘇聯(소련)과 3次(차) 大戰(대전)을 修行(수행)한다는 計劃(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美軍部(미군부)가 1946年(년) 秘密裏(비밀리)에 樹立(수립)한 Pincer plan(핀서 計劃(계획)과 Moonrise plan(문라이즈 計劃(계획)이다. Pincer plan(핀서 計劃(계획)과 Moonrise plan(문라이즈 計劃(계획)의 島嶼防衛線(도서방위선) 構想(구상)이 바로 駐韓美軍(주한미군)의 全面(전면) 撤收(철수)를 明示(명시)한 Atchison Line(애치슨 라인)의 原形(원형)이다. 結局(결국),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의 反對(반대)에도 不久(불구)하고 駐韓美軍(주한미군)은 約(약) 500名(명)의 軍事顧問團(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部隊(부대)가 1949年(년) 6月(월) 29日(일) 撤收(철수)하였다.
金日成(김일성)에게 積極的(적극적)인 軍事力(군사력) 支援(지원)을 提供(제공)한 蘇聯(소련)과 달리, 위와 같이 美國(미국)은 李承晩(이승만)이 强力(강력)한 軍事力(군사력)을 保有(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結果(결과)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軍事力(군사력)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比(비)하여 매우 脆弱(취약)한 狀態(상태)에 直面(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李承晩(이승만) 大統領(대통령)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나기 前(전)인 1949年(년) 9月(월) 30日(일) 外信記者會見(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는 北韓(북한)의 실지(失地)를 回復(회복)할 수 있으며 北韓(북한)의 우리 同胞(동포)들은 우리들이 掃蕩(소탕)할 것을 希望(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等(등) '北進統一論(북진통일론)'을 主張(주장)했다. 또한 蔡秉德(채병덕) 陸軍參謀總長(육군참모총장)은 radio(라디오) 放送(방송)에서 "아침은 開成(개성)에서 점심은 平壤(평양)에서 저녁은 新義州(신의주)에서 먹겠다."며 好戰的(호전적)인 發言(발언)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北進統一論(북진통일론)은 韓國戰爭(한국전쟁) 當時(당시) Seoul(서울)이 今方(금방) 陷落(함락)될 程度(정도)로 軍事力(군사력)이 脆弱(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實現可能性(실현가능성)이 없는 空想(공상)일 뿐이었으나, 北韓(북한)은 이를 戰爭(전쟁)의 빌미로 利用(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主張(주장)이 있다.
1949年末(년말), 陸軍本部(육군본부) 情報局(정보국)은 1950年(년) 春季(춘계)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度線(도선)에서 全面的(전면적)인 攻擊(공격)을 할 것이라는 綜合情報報告書(종합정보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에 陸軍本部(육군본부)는 計劃樹立(계획수립)을 서둘러 陸軍本部(육군본부) 作戰命令(작전명령) 第(제)38號(호)(一名(일명), 國軍防禦計劃(국군방어계획)을 確定(확정)(1950年(년) 3月(월) 25日(일)하고, 例下部隊(예하부대)에 이를 下達(하달)하여 施行(시행)토록 하였다. 이 國軍防禦計劃(국군방어계획)은 신태영(申泰英) 陸軍總參謀長(육군총참모장)의 指示(지시)로 陸軍本部(육군본부) 作戰局長(작전국장) 강문봉(姜文奉) 大領(대령)이 中心(중심)이 되어 作成(작성)되었다. 戰爭(전쟁) 勃發(발발) 1週日(주일) 前(전)까지 姜文奉(강문봉)이 作戰局長(작전국장)에 있었다.
申性模(신성모)는 大統領(대통령)이 命令(명령)만 내리면 바로 戰爭準備(전쟁준비)를 마치고 北枕(북침)을 하겠다고 妄言(망언)을 했고 戰爭(전쟁)을 願(원)하지 않았던 美軍(미군)은 國軍(국군)의 戰車(전차)와 戰鬪機(전투기) 모두 押收(압수)하고 曲射砲(곡사포)와 對戰車砲(대전차포) 90% 以上(이상)을 押收(압수)했다.
이 일로 因(인)해 北韓(북한)이 南侵(남침)할 名分(명분)이 생겼고 1950年(년) 6月(월) 情報局(정보국)에서 北韓(북한)이 南侵(남침)을 準備(준비)한다는 情報(정보)를 數(수)없이 보냈지만 申性模(신성모)는 北韓(북한)은 절대 南侵(남침)을 하지 않는다고 情報(정보)를 無視(무시)했고 1950年(년) 6月(월) 23日(일) 情報局(정보국)에서 北韓(북한)이 南侵(남침)한다는 情報(정보)를 보냈으나 申性模(신성모)는 南侵情報(남침정보)를 每番(매번) 無視(무시)하였고 蔡秉德(채병덕)에게 命令(명령)내려 全軍(전군) 非常警戒令(비상경계령)을 모두 解體(해체)하였다. 蔡秉德(채병덕)은 國軍(국군) 將兵(장병)들을 休暇(휴가)外出(외출) 보낼 것을 要求(요구)했고 申性模(신성모)는 이를 許諾(허락)하였다. 國軍(국군) 兵力(병력) 半以上(반이상)을 休假外出(휴가외출)을 보낸 이 일은 情報(정보)를 받은 北韓(북한)에게는 큰 損失(손실) 없이 南侵(남침)할 수 있는 有一(유일)한 機會(기회)였고 結局(결국)에는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난 原因(원인)이 되었다.
한편, 制憲國會(제헌국회)의 任期(임기)가 끝날 무렵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에서는, 政界(정계)는 勿論(물론)이고 一般(일반)의 物議(물의)를 무릅쓰고 第(제)2次(차) 總選擧(총선거) 實施(실시)를 遲延(지연)시키는 한편, 赤字豫算(적자예산)의 編成(편성)을 試圖(시도)하였으나 當時(당시) 이를 反對(반대)하는 美國(미국) 國務長官(국무장관) Dean Acheson(딘 애치슨)의 覺書(각서) 到達(도달)로 말미암아 政府(정부)에서는 從來(종래)의 主張(주장)을 變更(변경)하여 第(제)2代(대) 國會議員(국회의원) 選擧(선거)를 實施(실시)하였다.
(1950年(년) 5月(월) 30日(일) 選擧(선거)의 結果(결과) 無所屬(무소속) 議員(의원)이 國會(국회)議席(의석)의 過半數(과반수)를 점하여 壓倒的(압도적)인 優勢(우세)를 보이고 몇몇 中間派(중간파) 議員(의원)들이 頭角(두각)을 나타냈으며, 政府側(정부측) 與黨(여당)의 進出(진출)은 微微(미미)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에 대해, 1949年(년) 6月(월)에 制定(제정)되어 選擧直前(선거직전)인 1950年(년) 4月(월)에 施行規則(시행규칙)을 公布(공포)한 土地改革法(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原則(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事實(사실)상 土地改革(토지개혁)의 意義(의의)가 稀薄(희박)하여, 國民(국민)이 露骨的(노골적)으로 政府(정부)에 反感(반감)을 表示(표시)한 結果(결과)라고 速斷(속단)하고 이때에 南侵(남침)을 敢行(감행)하면 틀림없이 大韓民國(대한민국) 國民(국민)의 支持(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判斷(판단)하였다. 1950年(년) 6月(월) 19日(일)의 大韓民國(대한민국) 第(제)2代(대) 國會(국회)가 議長團(의장단) 選出(선출)을 始作(시작)으로 活動(활동)을 始作(시작)한 것은 戰爭(전쟁) 直前(직전)이었다.
한편, CIA는 韓國戰爭(한국전쟁) 勃發(발발) 엿새 前(전)의 報告書(보고서)에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南侵可能性(남침가능성)을 낮게 評價(평가)하고 있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蘇聯(소련)의 衛星國家(위성국가)로 獨自的(독자적)인 戰爭(전쟁) 遂行能力(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根據(근거)였다.遂行能力
그러나 CIA의 豫測(예측)과는 달리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勃發(발발)하자 白堊館(백악관)은 그 責任(책임)을 물어 CIA를 戰爭(전쟁) 勃發(발발) 後(후) 며칠간 白堊館(백악관) 安保會議(안보회의)에서 排除(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首長(수장)을 交替(교체)했다. 反共主義者(반공주의자)인 美國(미국)의 John Foster Dulles(존 포스터 덜레스) 國務長官(국무장관) 顧問(고문)이 大韓民國(대한민국)을 訪問(방문)하여 38度線(도선)을 視察(시찰)(1950年(년) 6月(월) 20日(일)하는 等(등) 美國(미국)의 北枕(북침)에 대한 威脅(위협)을 느낀 金日成(김일성)이 먼저 南侵(남침)을 決定(결정)했다는 主張(주장)도 있다.
1950年(년) 6月(월) 24日(일) 陸軍本部(육군본부) 情報局(정보국)(局長(국장) 張都暎(장도영), 北韓班長(북한반장) 金鍾泌(김종필), 文官(문관) 朴正熙(박정희)이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大規模(대규모) 兵力(병력)이 38線(선)에 集結(집결)했다는 報告(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軍首腦部(군수뇌부)는 바로 그 날 非常警戒(비상경계)를 解除(해제)하였다. 그 날은 週末(주말)이라 거의 折半(절반)에 該當(해당)하는 兵力(병력)이 外出(외출)했다. 그 날 저녁 陸軍本部(육군본부) 將校(장교) Club start party(클럽낙성파티)에는 前方部隊(전방부대) 師團長(사단장)들까지 招請(초청)되었었다.
그 外(외) 戰爭(전쟁) 勃發(발발) 2週前(주전) 大部分(대부분)의 指揮官(지휘관)을 交替(교체)하고, 1週前(주전) 大部分(대부분)의 前方部隊(전방부대)의 位置(위치)를 變更(변경)하고, 前方部隊(전방부대)의 重火器(중화기)와 車輛(차량) 中(중) 60% 가량을 後方(후방)으로 보내는 等(등) 個別的(개별적)으로는 理解(이해)가 가나 綜合的(종합적)으로는 常識(상식)으로는 도저히 理解(이해)할 수 없는 行爲(행위)가 集中的(집중적)으로 일어나 李亨根(이형근)이 著書(저서) 《軍番(군번) 1番(번)의 외길人生(인생)》에서 6.25 初期(초기)의 10大(대) 不可思議(불가사의)를 提起(제기)하며 軍指揮部(군지휘부)(李承晩(이승만), 蔡秉德(채병덕) 參謀總長(참모총장), 金白一(김백일) 參謀長(참모장), 申性模(신성모) 國防部長官(국방부장관), 김경근國防部次官(국방부차관) 안에 通敵分子(통적분자)가 있다고 主張(주장)하게 되는 原因(원인)이 되며, 一角(일각)에서는 李承晩(이승만) 南侵(남침) 誘導說(유도설)의 根據(근거)가 되었다.(李亨根(이형근)은 軍番(군번) 1番(번) 問題(문제)로 日本陸士(일본육사) 先輩(선배)인 蔡秉德(채병덕)과 個人的(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常態(상태)이며, 이것은 國軍創設(국군창설) 첫날이자 最初(최초)의 派閥(파벌) 싸움의 始初(시초)가 되었다)
韓國戰爭(한국전쟁) 全(전)의 여러 戰鬪(전투)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勃發(발발)하기 前(전)에도 여러 번의 戰鬪(전투)가 있었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이 일어나기 前(전)까지 1949年(년) 1月(월) 18日(일)부터 1950年(년) 6月(월) 24日(일)까지 있었던 戰鬪(전투)횟수는 總(총) 874回(회)였다.
1948年(년) 4月(월) 3日(일): 濟州(제주) 4·3 事件(사건)
1948年(년) 10月(월) 19日(일): 麗水(여수)·順天(순천) 事件(사건)
1949年(년) 12月(월) 24日(일): 聞慶(문경) 良民(양민)虐殺(학살) 事件(사건).
北韓(북한)의 南侵(남침)을 正當化(정당화)하고자 하는 主張(주장)에 따르면,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이 侵入(침입)한 횟數(수)는 432回(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回(회)는 飛行機(비행기) 侵入(침입), 42回(회)는 艦隊(함대)襲擊(습격)도 包含(포함) 되어 있었다. 물론 大韓民國(대한민국) 空軍(공군)은 地域(지역)의 偵察(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連絡機(연락기) 및 L-5 連絡機(연락기) 外(외)에, 戰爭(전쟁) 勃發(발발) 直前(직전) 國民(국민) 誠金(성금)으로 Canada(캐나다)로부터 購入(구입)한 T-6 Texan(텍산) 10隊(대)가 全部(전부)였다.
衝突(충돌)은 黃海道(황해도) 甕津半島(옹진반도)에서 江原道(강원도)의 襄陽(양양)까지 걸쳐져 있어 單純(단순)한 局部的(국부적) 衝突(충돌)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甕津半島(옹진반도), 開城(개성), 議政府(의정부), 春川(춘천) 그리고 江陵(강릉)附近(부근)에서 戰鬪(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地域(지역)들은 1950年(년) 6月(월) 25日(일)에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主(주) 攻擊(공격)地域(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北韓軍(북한군) 第(제)1師團(사단)은 개성 附近(부근) 到處(도처)에서 마치 韓國軍(한국군)의 戰力(전력)이라도 試探(시탐)하듯 頻繁(빈번)한 挑發(도발)을 自行(자행)하다가 1950年(년) 봄에 와서는 거의 每日(매일)같이 開城(개성)과 白川(백천)등 38線(선) 沿邊(연변)都市(도시)에 迫擊砲(박격포)射擊(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當時(당시) 大韓民國(대한민국)은 全國(전국)을 通(통)틀어 航空機(항공기)는 고작 22隊(대)였으며 그것도 分界線(분계선)이 아닌 湖南地方(호남지방)에 있었다. 또한 艦艇(함정)은 36隊(대) 保有(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先制攻擊(선제공격)했다는 當時(당시)의 目擊談(목격담)도 끊이지 않았다.
軍事力(군사력) 比較(비교)
1950年(년) 6月(월) 當時(당시) 北韓軍(북한군)은 13萬(만) 5千餘名(천여명)의 地上軍(지상군)을 確保(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兵力(병력)은 正規軍(정규군) 6萬(만) 5千餘名(천여명), 海洋警察隊(해양경찰대) 4千餘名(천여명), 警察(경찰) 4萬(만) 5千餘名(천여명) 等(등)이었다. 大韓民國(대한민국) 陸軍(육군)은 8個(개) 師團(사단) 1個(개) 獨立(독립)聯隊(연대)로 編成(편성)돼 있었다.
最前方(최전방)인 38線(선) 防禦(방어)를 위해 西(서)쪽에서부터 17聯隊(연대)(甕津半島(옹진반도))-1師團(사단)(靑丹(청단)∼積城(적성)-7師團(사단)(積城(적성)∼京畿道(경기도) 加平郡(가평군) 北面(북면) 적목리)-6師團(사단)(적목리∼진흑동)-8師團(사단)(진흑동∼東海岸(동해안)을 布陣(포진)해 놓았다. 後方(후방)인 서울에는 首都(수도)警備司令部(경비사령부)를 두고, 大田(대전)에 2師團(사단), 大邱(대구)에 3師團(사단), 光州(광주)에 5師團(사단)을 둬 共匪(공비) 掃蕩作戰(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部隊(부대)를 統合(통합) 指揮(지휘)한 것은 陸軍總參謀長(육군총참모장) 蔡秉德(채병덕) 少將(소장)이었다.
반면 北韓軍(북한군)은 民族(민족)保衛省(보위성)에 崔庸健(최용건) 副元帥(부원수)를 앉히고(1948年(년), 只今(지금)의 韓國(한국) 陸軍(육군)野戰軍(야전군)司令官(사령관)에 該當(해당)하는 戰線司令部(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大將(대장)(4星將軍(성장군)을 司令官(사령관)에, 강건(姜健) 中將(중장)(2星將軍(성장군)을 參謀長(참모장)에 任命(임명)했다. 그리고 戰線司令部(전선사령부) 밑에는 西部戰線(서부전선)을 擔當(담당)하는 1軍團(군단)과 東部戰線(동부전선)을 攻擊(공격)할 2軍團(군단)을 創設(창설)했다.
1軍團長(군단장)에는 김웅(金雄) 中將(중장)을, 2軍團長(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中將(중장)을 任命(임명)했다. 6月(월) 12日(일)부터 北韓軍(북한군)의 38線(선) 配置(배치)를 위한 部隊(부대) 移動(이동)은 始作(시작)되었으나 38線(선)에서 떨어져 있던 部隊(부대)들이 일제히 南下(남하)했다. 23日(일)에 完了(완료)된 北韓軍(북한군)의 38線(선) 配置(배치) 兵力(병력)을 보면 10個(개) 步兵師團(보병사단)과 1個(개) 戰車旅團(전차여단) 및 3個(개) 警備旅團(경비여단) 等(등)으로서 北韓(북한) 共産軍(공산군)의 總兵力(총병력)에 該當(해당)하는 것이었다. 北韓軍(북한군) 1軍團(군단) 麾下(휘하)에는 6師團(사단)-1師團(사단)-4師團(사단)-3師團(사단)-105戰車旅團(전차여단)이, 2軍團(군단)에는 2師團(사단)-12師團(사단)-5師團(사단)이 配屬(배속)되었다(西(서)쪽에서부터). 그리고 豫備部隊(예비부대)로 13師團(사단)은 1軍團(군단)에, 15師團(사단)은 2軍團(군단)에 配屬(배속)하고, 10師團(사단)은 總豫備隊(총예비대)로 北韓(북한) 防禦(방어)를 위해 平壤(평양) 地域(지역)에 配置(배치)해두었다. 北韓軍(북한군)과 別途(별도)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內務省(내무성)에 北韓(북한) 住民(주민)의 越南(월남)을 막는 部隊(부대)로 38警備隊(경비대)(韓國(한국)의 戰鬪警察隊(전투경찰대)와 恰似(흡사) 3個(개) 旅團(여단)을 編成(편성)했다. 이 中(중) 3警備旅團(경비여단)은 國軍(국군) 17聯隊(연대)가 布陣(포진)한 甕津半島(옹진반도) 바로 北(북)쪽에 布陣(포진)해 있었다.
北韓軍(북한군)은 蘇聯製(소련제) T-34/85形(형) Tank(탱크) 242隊(대), Yak-9 戰鬪機(전투기)와 IL爆擊機(폭격기) 200餘隊(여대), 各種(각종) 重野砲(중야포)와 重迫擊砲(중박격포)로 武裝(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은 韓國戰爭(한국전쟁) 直前(직전)까지 空軍(공군)은 對空砲火(대공포화)가 없는 地域(지역)의 精察(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連絡機(연락기) 및 L-5 連絡機(연락기) 外(외)에, 戰爭勃發(전쟁발발) 直前(직전) 國民(국민) 誠金(성금)으로 Canada(캐나다)로부터 購入(구입)한 T-6 Texan(텍산) 10隊(대)를 追加(추가)한 것이 全部(전부)였다. 陸軍(육군)은 戰車(전차)가 단 한대도 없었으며, 유일한 獨立(독립) 機甲(기갑)聯隊(연대)의 裝備(장비)는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當時(당시)에도 偵察用(정찰용)으로 쓰인 37mm 對戰車砲(대전차포)를 搭載(탑재)한 M8 greyhound(그레이하운드) 裝甲車(장갑차) 1個(개) 聯隊(연대)가 全部(전부)였다. 大戰車(대전차) 火力(화력)으로는 步兵用(보병용)의 2.36inch(인치) bazooka(바주카포)와 砲兵(포병) 兵科(병과)의 57mm 對戰車砲(대전차포)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性能(성능)이 向上(향상)된 候騎形(후기형)T-34를 相對(상대)하기에는 힘든 武器(무기)였다.
또한 現代戰(현대전)의 核心(핵심) 支援(지원) 戰力(전력)인 砲兵(포병)은 105mm 經曲射砲(경곡사포)와 4.2inch(인치) 迫擊砲(박격포)만으로 武裝(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師團(사단)당 1個(개) 大隊(대대)만 配置(배치)되어 있었고, 砲彈(포탄)도 不足(부족)했다. 實際(실제)로 白善燁(백선엽) 將軍(장군)이 指揮(지휘)한 開城(개성) - 汶山(문산) - 坡州(파주) 축선을 防禦(방어)하던 國軍(국군) 1 步兵師團(보병사단)은 戰鬪(전투) 하루 만에 砲彈(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 全體的(전체적)으로 大韓民國國軍(대한민국국군)은 但只(단지) 15日間(일간) 戰鬪(전투) 行爲(행위) 修行(수행)이 可能(가능)한 補給品(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原因(원인)~南侵(남침)
韓國戰爭(한국전쟁)은 北韓(북한)의 意志(의지)로 勃發(발발)하였으며, Joseph Stalin( 오시프 스탈린)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毛泽东(마오쩌둥)의 支援(지원)을 約束(약속)(金日成(김일성)은 蘇聯(소련)의 支援(지원)이 充分(충분)하므로,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의 支援(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南侵(남침)이며, 이 說明(설명)은 大韓民國(대한민국)과 美國(미국)의 記錄(기록), 公開(공개)된 舊蘇聯(구소련)의 秘密文書(비밀문서)를 通(통)해 證明(증명)되었다. 蘇聯共産黨(소련공산당)의 Nikita Khrushchev:Никита Хрущев尼基塔·赫鲁晓夫Nikita Khrushchev(니키타 흐루쇼프) 전(前)書記長(서기장)은 그의 回顧錄(회고록)에서 韓國戰爭(한국전쟁)은 金日成(김일성)의 計劃(계획)과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의 承認(승인)으로 始作(시작)되었다는 點(점)을 밝혔다.
結局(결국) 舊蘇聯(구소련) 秘密文書(비밀문서)의 公開(공개)에 따라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南侵(남침)은 金日成(김일성)이 主導(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支援(지원)을 約束(약속)받은 것도 金日成(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內亂(내란)擴戰說(확전설), Иосиф Сталин:Joseph Stalin(이오시프 스탈린) 主導說(주도설), 李承晩(이승만) 主導說(주도설) 等(등)은 그 說得力(설득력)을 잃고 있다.
戰爭記念館(전쟁기념관)에서 展示(전시) 中(중)인 Russian(러시아語(어)로 된 南侵作戰(남침작전) 計劃書(계획서)
閉鎖的(폐쇄적)인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共産主義(공산주의) 體制(체제)의 特性(특성), 參戰者(참전자) 證言(증언), 구 蘇聯(소련)의 公開(공개)된 文書(문서)를 考慮(고려)할 때,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主張(주장)하는 李承晩(이승만) 北枕說(북침설)은 說得力(설득력)이 없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境遇(경우), 大韓民國(대한민국)과의 修交(수교)以前(이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主張(주장)인 北枕說(북침설)을 公式的(공식적)으로 同意(동의)하였으나, 最近(최근)의 經濟開放(경제개방)과 大韓民國(대한민국)과의 修交(수교) 以後(이후)에는 南侵說(남침설)을 定說(정설)로 認定(인정)하고 있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은 1996年(년) 7月(월)에 韓國戰爭(한국전쟁)의 記錄(기록)을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北枕(북침)에서 北韓(북한)의 南侵(남침)으로 修訂(수정)하는 歷史(역사) 敎科書(교과서) 改訂(개정)을 하였다.
蘇聯(소련)의 崩壞(붕괴) 以後(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韓國戰爭(한국전쟁) 關聯(관련)秘密文書(비밀문서)가 公開(공개)된 以後(이후), 韓國戰爭(한국전쟁)의 原因(원인)은 南朝鮮勞動黨(남조선로동당) 朴憲永(박헌영)의 說得(설득)을 받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金日成(김일성)이 大規模(대규모)의 大韓民國(대한민국) 侵入(침입)을 計劃(계획)하고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의 裁可(재가)를 얻어 開始(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過程(과정)에서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은 金日成(김일성)의 裁可(재가)를 무려 48番(번)이나 拒絶(거절)하고 前方(전방) 爲主(위주)의 Guerrilla warfare(게릴라戰(전)만 許容(허용)했지만 金日成(김일성)의 强力(강력)한 意志(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結局(결국)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은 南侵(남침)을 承認(승인)하고 말았다. 美國(미국)의 社會學者(사회학자) Bruce Cummings(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介入(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英國(영국) 情報機關(정보기관)에서 나온 文件(문건)에 따르면,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은 金日成(김일성)에게 '美國(미국)은 大韓民國(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過去(과거)의 韓國戰爭(한국전쟁) 原因(원인) 假說(가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中心(중심)이 된 人民解放戰爭(인민해방전쟁)이라는 評價(평가)와 함께 北枕(북침)이라는 見解(견해), 南侵(남침)이라는 見解(견해), 雙方(쌍방) 責任論(책임론)이 過去(과거)에 있었고, 自由民主主義(자유민주주의) 體制(체제)를 守護(수호)한 戰爭(전쟁) 이라는 評價(평가) 等(등)도 있다. 大韓民國(대한민국) 中心(중심) 視覺(시각)으로는 軍兵力(군병력)과 警察兵力(경찰병력)의 休暇日(휴가일)을 利用(이용)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武力(무력) 挑發行爲(도발행위)이자 南侵(남침)으로 規程(규정)하고 있고, 共産主義(공산주의) 勢力(세력)으로부터 自由民主主義(자유민주주의) 體制(체제)를 守護(수호)한 `戰爭(전쟁)이라고도 主張(주장)해 왔다. 다음은 大韓民國(대한민국)과 美國(미국) 等(등)의 國家(국가)에서 過去(과거)에 提起(제기)되었던 韓國戰爭(한국전쟁) 原因(원인)에 대한 여러 假說(가설)과 主張(주장)들이다.
Stalin:Сталин(스탈린)— 主導說(주도설)
韓國戰爭(한국전쟁)이 金日成(김일성)이 아니라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의 意志(의지)로 勃發(발발)했다는 說(설)이다. 그 理由(이유)로 北大西洋條約機構(북대서양조약기구)의 壓力(압력)을 極東(극동)으로 分散(분산), 美日平和條約(미일평화조약)의 牽制(견제), 美國(미국)의 威信(위신)을 떨어트리고 Asia region(아시아地域(지역)의 共産化(공산화)를 促進(촉진)하기 위한 武力示威(무력시위),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의 獨自(독자) 路線(노선)에 대한 牽制(견제) 等(등)의 理由(이유)로 韓國戰爭(한국전쟁)이 始作(시작)되었다고 主張(주장)하고 있다.
蘇聯(소련)은 蘇聯(소련)의 支配(지배) 아래 있던 Burayat Soviet(부라야트 소비에트) 社會主義(사회주의) 自治共和國(자치공화국)(現(현) Burayat Soviet(부라야트 소비에트) 共和國(공화국)의 機甲部隊(기갑부대) 軍事(군사) 1,500餘名(여명)을 派遣(파견)했으며, 戰爭(전쟁) 初(초) Seoul(서울)에 나타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Tank(탱크)는 모두 이들이 操縱(조종)했다는 說(설)도 蘇聯(소련)의 主導(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은 美國(미국)과의 葛藤(갈등)을 걱정하여 韓國戰爭(한국전쟁)을 反對(반대)하는 立場(입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金日成(김일성)은 Stalin:Сталин(스탈린)에게 50餘會(여회) 假量(가량)을 韓國戰爭(한국전쟁)을 勃發(발발)시켜달라는 裁可(재가)를 要求(요구)하였고,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은 拒絶(거절)하였지만, 結局(결국)은 以後(이후)에 戰爭(전쟁)을 承認(승인)하게 되었다.
韓美(한미) 共謀說(공모설)
李承晩(이승만)의 第(제)1共和國(공화국)의 北進(북진) 統一論(통일론)이 對南挑發(대남도발)을 促進(촉진)시켰다는 說(설)이다. 李承晩(이승만)은 여러 차례 武力北進統一(무력북진통일)을 부르짖었으며, 美國(미국)의 軍事援助(군사원조)를 公公然(공공연)히 要請(요청)한 바 있다. 實際(실제)로 1950年代(년대) 初(초)부터 南北(남북)은 競爭的(경쟁적)으로 軍備(군비)를 增强(증강)시키기 始作(시작)했고, 美國(미국)이 國軍(국군)을 强化(강화)시키면 李承晩(이승만)이 武力統一(무력통일)을 推究(추구)할 것이라고 判斷(판단),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豫防的(예방적) 措置(조치)를 取(취)했다는 主張(주장)이다.
하지만 韓美共謀說(한미공모설)은 위 項目(항목)에 관련된 舊蘇聯(구소련)의 文書公開(문서공개)로, 提示(제시)된 적 있는 假說(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年(년) 6月(월), 56年(년)만에 公開(공개)된 CIA 極秘文書(극비문서)에서 韓國戰爭(한국전쟁) 勃發(발발) 불과 엿새前(전)인 6月(월) 19日(일), 北韓(북한)의 南侵可能性(남침가능성)이 낮게 評價(평가)한 報告書(보고서)를 作成(작성)하였고 北韓(북한)이 蘇聯(소련)의 徹底(철저)한 衛星國家(위성국가)로 獨自的(독자적)인 戰爭(전쟁) 遂行能力(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報告(보고) 있었다.
內亂(내란) 擴戰說(확전설)
韓國戰爭(한국전쟁)은 6月(월) 25日(일)에 始作(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以前(이전)의 期間(기간)을 包含(포함)해야 한다는 說(설)이다. 1950年(년) 以前(이전)부터 이미 政治的(정치적), 理念的(이념적) 對立(대립)에 따른 局地的(국지적) 武力(무력) 衝突(충돌)이 數十(수십) 次例(차례) 繼續(계속)되었으며 그것이 擴大(확대)되어 韓國戰爭(한국전쟁)이 되었다는 視覺(시각)이다. 實際(실제)로 1950年(년) 6月(월) 25日(일) 以前(이전)에 이미 數(수)많은 局地戰(국지전)과 武力衝突(무력충돌)이 있었으며, 1950年(년) 6月(월) 25日(일)에도 사람들은 旣存(기존)의 局地戰(국지전)의 延長(연장)으로 認識(인식)하여 避難(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視覺(시각)에 따르면, 戰爭(전쟁)期間(기간)은 다음과 같이 區分(구분)한다.
작은 戰爭(전쟁)( ~ 1950年(년) 6月(월) 25日(일): 38線(선) 附近(부근)에서의 局地的(국지적) 武力衝突(무력충돌)이 繼續(계속)됨.
制限(제한) 戰爭(전쟁)(1950年(년) 6月(월) 25日(일) ~ 1950年(년) 7月(월) 1日(일): 北韓(북한)이 大規模(대규모) 武力動員(무력동원)을 通(통)해 大韓民國(대한민국)의 首都(수도) Seoul(서울)을 電擊(전격) 侵奪(침탈)하여 不法(불법)으로 統一政府(통일정부)를 樹立(수립)하려 함.
全面(전면) 戰爭(전쟁)(1950年(년) 7月(월) 1日(일) ~ 1950年(년) 10月(월): 日本(일본)에 駐屯(주둔)하고 있던 大隊規模(대대규모)의 美軍(미군) Smith Unit(스미스部隊(부대)가 參戰(참전), 北韓(북한)은 7月(월) 1日部(일부)로 戰時國家總動員令(전시국가총동원령)을 發令(발령)함.
擴大(확대) 戰爭(전쟁)(1950年(년) 10月(월) ~ 1951年(년) 6月(월):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의 成功(성공) 後(후) UN聯合軍(연합군)은 Seoul(서울)을 收復(수복)함. 以後(이후) 降伏(항복)을 再次(재차)勸告(권고)했으나 對答(대답)이 없어, 國軍(국군)이 最初(최초)로 38線(선)을 넘어 北進(북진) 始作(시작), 곧 UN forces(유엔軍(군)도 進擊(진격) 始作(시작), 平壤(평양)收復(수복), 鴨綠江(압록강)까지 進擊(진격)했으나, 中國(중국) 人民解放軍(인민해방군) 參戰(참전)으로 이어짐. 戰爭(전쟁)이 새로운 局面(국면)으로 접어듦.
固着(고착) 戰爭(전쟁)(1951年(년) 6月(월) ~ ): 中國(중국) 人民解放軍(인민해방군)의 2次例(차례)에 걸친 春季攻勢(춘계공세)를 막아내고 聯合軍(연합군)의 莫强(막강)한 火力(화력)에 共産側(공산측)이 停戰協定(정전협정)을 받아들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爲主(위주)이거나 그를 中心(중심)으로 評價(평가)하려는 視覺(시각)에 依(의)하면 人民軍(인민군)이 中心(중심)이 된 人民解放戰爭(인민해방전쟁)이라는 評價(평가)와 함께 北枕(북침)이라는 主張(주장), 美國(미국) 等(등) 外國(외국)의 介入(개입)으로 失敗(실패)한 解放戰爭(해방전쟁)이라는 主張(주장)도 있다.
其他(기타) 兩是兩非論的[양시양비론적:양쪽 이 다 옳거나 양쪽 이 다 그르다는 主張(주장)] 性格(성격)으로 雙方(쌍방)責任論(책임론)을 提起(제기)하는 意見(의견)도 있다.
經過(경과)
北韓(북한)의 金日成(김일성)의 命令下(명령하)에, 大韓民國(대한민국)이 攻擊(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反擊(반격)한다는 虛僞宣傳(허위선전)을 하면서, 蘇聯(소련)에서 支援(지원)한 最新型(최신형) T-34/85를 앞세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1950年(년) 6月(월) 25日(일) 午前(오전) 4時(시), 38度線(도선)과 東海岸(동해안) 연선(沿線) 等(등) 11個所(개소)에서 境界(경계)를 넘어 大韓民國(대한민국)을 奇襲(기습) 南侵(남침)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은 數的(수적)으로 劣勢(열세)인데다 裝備(장비)도 不足(부족)했다.
午前(오전) 9時(시)경에는 開城防禦線(개성방어선)을 擊破(격파)하고 當日(당일) 午前(오전)에 東豆川(동두천)과 抱川(포천)을 陷落(함락)시켰다. 26日(일) 午後(오후)에 議政府(의정부)를, 27日(일) 正午(정오)에는 이미 Seoul(서울) 道峰區(도봉구)의 倉洞防禦線(창동방어선)을 넘었다. 倉洞防禦線(창동방어선)이 뚫린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은 미아리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하였으나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戰車(전차)에 依(의)해 崩壞(붕괴)되었다. 28日(일) 새벽에는 Seoul(서울) 市內(시내)가 占領(점령)되고, 午前(오전) 2時(시) 30分(분)에 爆破(폭파)를 맡은 將校(장교) 세 사람에 依(의)해 漢江大橋(한강대교)가 爆破(폭파)되었다. 美國(미국) 空軍(공군) 航空機(항공기)가 “當時(당시) 美空軍(미공군)이 使用(사용)하던 航空機(항공기) 投下用(투하용) ‘AN-M64’ 美製(미제) 爆彈(폭탄)”을 漢江大橋(한강대교)와 漢江鐵橋(한강철교)에 投下(투하)했다.
北韓(북한)의 南侵(남침)은 때마침 冷戰(냉전)으로 緊張(긴장)되어 있는 全世界(전세계)에 미친 바, 波紋(파문)은 참으로 前(전)에 없던 것이었다. 戰爭(전쟁)이 勃發(발발)하자 本國(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駐美(주미) 韓國大使(한국대사) 兼(겸) UN 韓國代表(한국대표) 張勉(장면)은 때를 놓치지 않고서 國難(국난)을 打開(타개)하는 重責(중책)을 짊어지고 祕藏(비장)한 決議(결의)로 6月(월) 24日(일) 當日(당일)(美國(미국)은 韓國(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美(미) 國務省(국무성)과 徹夜(철야) 協議(협의)한 結果(결과) 韓國問題(한국문제)를 翌日(익일) UN安保理事會(안보이사회)에 緊急提訴(긴급제소)하여 25日(일)과 27日(일)의 決意(결의)로 北韓(북한)을 侵掠者(침략자)로 規程(규정)하고 卽時(즉시) 38線(선) 以北(이북)으로 撤退(철퇴)할 것과 會員國家(회원국가)는 이 侵掠者(침략자)를 援助(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擊退(격퇴)시키는데 協力(협력)할 것을 決意(결의)하였다. 事態(사태)를 重視(중시)한 美國(미국) 大統領(대통령) Harry S. Truman(해리 S. 트루먼)은 27日(일) 美海空軍(미해공군)에 出動(출동)을 命令(명령)하고 다시 30日(일)에는 美地上軍(미지상군)의 韓國出動(한국출동)을 命令(명령)함과 同時(동시)에 韓國全海岸(한국전해안)의 海上(해상) 封鎖(봉쇄)를 命(명)하였다.
그 사이, 6月(월) 28日(일) Seoul(서울)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에게 陷落(함락)당하였으나 張勉(장면)은 '美國(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放送(방송)을 通(통)해 United Nations(유엔) 決議事項(결의사항) 等(등)을 本國(본국)에 放送(방송)하였다. 이어 7月(월)7日(일) Marshal Douglas MacArthur(더글러스 맥아더 元帥(원수)를 總司令官(총사령관)으로 하는 UN forces(유엔군)이 組織(조직)되었고 8日(일)에는 United Nations(유엔) 決意(결의)에 依(의)한 United Nations(유엔) 깃발이 처음으로 戰場(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 7月(월) 14日(일)에는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의 指揮權(지휘권)이 美軍(미군)에게 넘어갔다. William F. Dean(윌리엄 F. 딘) 少將(소장)이 行方不明(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有名(유명)한 大田戰鬪(대전전투)(7月(월) 20日(일)를 비롯한 戰爭(전쟁) 初期(초기)에 있어서 美國(미국) 第(제)24師團(사단)과 國軍(국군)은, 壓倒的(압도적)인 兵力(병력)과 裝備(장비)를 갖춘 北韓軍(북한군)의 作戰((작전)에 對抗(대항)하여 遲延作戰(지연작전)으로써 後方(후방)의 韓(한) · 美軍(미군)의 增援展開(증원전개)를 위한 귀중한 時間(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大田(대전)을 넘어선 北韓軍(북한군)은 進路(진로)를 세 方面(방면)(湖南(호남), 慶北(경북) 倭館(왜관)(洛東江(낙동강), 永川(영천) 및 浦項(포항)으로 侵攻(침공)을 繼續(계속)하였다.
北韓軍(북한군)은 湖南平野(호남평야)를 휩쓸고서 南海岸(남해안) 沿岸(연안)으로 侵入(침입)하는 한편 慶北(경북)北部戰線(북부전선)과 東海岸(동해안) 戰線(전선)과 呼應(호응)하여 세 方面(방면)으로부터 釜山(부산)-大邱(대구)의 美軍(미군) 補給線(보급선)을 切斷(절단)하여 韓美兩軍(한미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作戰(작전)을 强行(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北韓軍(북한군)의 攻勢(공세)에 밀린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大田(대전)과 大邱(대구)를 거쳐 釜山(부산)까지 移轉(이전)하였다. 韓(한) · 美(미) 聯合軍(연합군)은 洛東江(낙동강)을 最前線(최전선)으로 東海岸(동해안)의 浦項(포항)으로부터 北部(북부)의 倭館(왜관) 南部(남부) 海岸(해안)의 馬山(마산)을 連絡(연락)하는 Walker line(워커 라인)(釜山(부산) 半月形(반월형) 陣地(진지)를 構築(구축)하고 最後(최후)의 決戰(결전)을 展開(전개)하였다.
北韓軍(북한군)은 8月(월) 15日(일) 大邱(대구)를 侵攻(침공)하고자 大邱(대구) 西南北方(서남북방)에 6萬(만)의 兵力(병력)과 數十隊(수십대)의 戰車(전차)를 集中(집중)하였으나 16日(일) 美國(미국) 空軍(공군) B29의 戰略的(전략적) 大爆擊(대폭격)으로 말미암아 完全(완전) 潰滅(궤멸)되었고 한편 이 사이에 聯合軍(연합군) 兵力(병력)은 韓國軍(한국군) 5個(개) 師團(사단)을 비롯하여 美軍(미군) 4個師團(개사단), 英國軍(영국군) 2個(개) 大隊(대대), 濠洲軍(호주군) 1個(개) 大隊(대대) 그 밖에 10個國(개국)에서 派遣(파견)된 數萬(수만)의 聯合軍(연합군)으로써 增援(증원)되어 이렇게 北韓軍(북한군)의 主力(주력)을 誘導吸收(유도흡수)한 聯合軍(연합군)은 마침내 9月(월) 15일 Douglas MacArthur(더글러스 맥아더)의 총지휘하에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을 敢行(감행)하여 成功(성공)하였다. 9月(월) 28日(일)에 洛東江(낙동강) 防禦線(방어선)을 넘어 大大的(대대적)인 反擊(반격)을 開始(개시)했으며, 같은 날 Seoul(서울) 中央廳(중앙청)에서 李承晩(이승만) 大統領(대통령)은 Marshal Douglas MacArthur(더글러스 맥아더 元帥(원수)를 同伴(동반)하여 Seoul(서울) 收復式(수복식)을 擧行(거행)하였고 비로소 90餘日間(여일간) 죽음에 사로잡혔던 Seoul(서울) 市民(시민)은 다시 自由(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United Nations(유엔) 總會(총회)는 38線(선) 突破(돌파)에 대한 基本的(기본적)인 目標(목표)를 附與(부여)함으로써 本格的(본격적)인 北進(북진)이 展開(전개)되어 10月(월) 19日(일)에는 朝鮮 民主主義 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首都(수도)인 平壤(평양)까지 다다랐고, 26日(일)에는 國境地帶(국경지대)인 楚山(초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中國人民支援軍(중국인민지원군) 28萬名(만명)이 戰鬪(전투)에 介入(개입)하여(11月(월) 28日(일) 戰勢(전세)가 搖動(요동)치게 되었으며, 聯合軍(연합군)은 長津湖(장진호) 地區(지구)의 血戰(혈전)을 전사(戰史)에 남기고 撤收作戰(철수작전)을 始作(시작)하여 Seoul(서울) 市民(시민)은 또다시 쓰라린 1·4 後退(후퇴)를 겪게 되었다. 그 渦中(와중)에 居昌(거창) 良民(양민)虐殺(학살) 事件(사건), 國民(국민) 防衛軍(방위군) 事件(사건) 等(등)의 事件(사건)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韓半島(한반도) 內(내)에서 美國(미국), 蘇聯(소련), 中國(중국)까지 介入(개입)하여 韓半島(한반도)에서 모두 맞붙었다.
勃發(발발)과 서전(緖戰)
倭館(왜관)(慶尙北道(경상북도) 漆谷郡(칠곡군) 倭館邑(왜관읍)에서 美軍(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共産國家(공산국가)의 盟主格(맹주격)인 蘇聯(소련)에서 大量(대량)으로 製作(제작)하여 여러 共産圈(공산권)에 뿌린 관계로 當時(당시) 北韓(북한) 뿐만 아니라 共産界(공산계)의 主力戰車(주력전차)였다.
開戰初期(개전초기) 北韓(북한) 步兵(보병)의 基本火器(기본화기)
北韓軍(북한군)은 "先制 打擊 戰略(선제타격전략)"으로 불리는 戰爭(전쟁) 開始(개시) 作戰計劃(작전계획)에 따라, 1950年(년) 6月(월) 25日(일) 새벽 4時(시)에 人民軍(인민군)은 242隊(대)의 戰車(전차)를 앞세우고 38線(선)을 넘어 甕津(옹진) · 開城(개성) · 東豆川(동두천) · 春川(춘천) · 인악(仁岳) 等地(등지)의 陸路(육로)와, 東海岸(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等地(등지)에 上陸(상륙)하여 일제히 攻擊(공격)해 왔다. 北韓軍(북한군) 3警備旅團(경비여단)과 6師團(사단) 所屬(소속)의 14聯隊(연대)를 動員(동원)해 甕津半島(옹진반도)에 配置(배치)된 韓國軍(한국군) 17聯隊(연대)를 攻擊(공격)하였고, 北韓軍(북한군) 6師團(사단)과 1師團(사단)은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을(開城(개성) 汶山(문산) 地區(지구), 北韓軍(북한군) 4師團(사단)과 3師團(사단)은 韓國軍(한국군) 第(제)7師團(사단)을(議政府(의정부) 地區(지구), 北韓軍(북한군) 2師團(사단)과 12師團(사단)은 韓國軍(한국군) 6師團(사단)을(春川(춘천)地區(지구), 北韓軍(북한군) 5師團(사단)은 12sidecar(사이드카聯隊(연대)를 配屬(배속)받아 韓國軍(한국군) 8師團(사단)(江陵(강릉) 地區(지구)을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戰車(전차)도 없는 無防備(무방비) 狀態(상태)에서 攻擊(공격)을 당한 韓國軍(한국군)은 全般的(전반적)으로 北韓軍(북한군)에게 밀려 後退(후퇴)하였다. 韓國軍(한국군)은 卽刻(즉각) 週末(주말) 外出(외출) 中(중)인 將兵(장병)들을 全員(전원) 歸隊(귀대)시키고 後方(후방) 師團(사단)들로부터 5個(개) 聯隊(연대)를 一線(일선)에 急派(급파)하였으나 26日(일)에 甕津半島(옹진반도)의 韓國軍(한국군) 17聯隊(연대)는 할 수 없이 撤收(철수)했고, 熾烈(치열)한 攻防戰(공방전)끝에 議政府(의정부)가 敵(적)의 手中(수중)에 들어갔으며, 27日(일) 저녁에는 Seoul(서울) 東北方(동북방) 미아리 高地(고지)를 防禦(방어)하는 韓國軍(한국군) 第(제)5師團(사단) 및 第(제)7師團(사단)의 陣中(진중)에 敵(적)이 浸透(침투)하여 彼此(피차) 敵(적)을 分揀(분간)할 수 없는 肉薄戰(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混亂(혼란) 中(중)에 敵(적) 戰車部隊(전차부대)의 一部(일부)는 이미 Seoul(서울) 市內(시내)에 侵入(침입)했으며, 政府(정부)는 大田(대전)으로 後退(후퇴)했다. 28日(일) 새벽 3時(시) 漢江(한강) 人道敎(인도교)가 豫定時間(예정시간)보다 앞서 爆破(폭파)되고, 漢江(한강) 以北(이북)의 韓國軍(한국군)은 總退却(총퇴각)을 敢行(감행)해, 北韓軍(북한군) 戰鬪機(전투기)가 上空(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展開(전개)하여 全員(전원) 撤收(철수)하니 28日(일)에는 首都(수도) Seoul(서울)이 敵(적)에게 完全(완전) 陷落(함락)되었다. 陸軍本部(육군본부)는 水原(수원)으로 後退(후퇴)하고 渡江(도강)한 韓國軍(한국군) 部隊(부대)들은 統合再編(통합재편)되어 漢江(한강) 남안에 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했다.
甕津半島(옹진반도) 戰鬪(전투)~開城(개성), 汶山(문산) 戰鬪(전투)
韓國戰爭(한국전쟁) 勃發日(발발일)(1950年(년) 6月(월) 25日(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開城(개성), 고랑포(高浪浦) 一帶(일대)에서는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師團長(사단장) 白善燁(백선엽)이 第(제)203戰車聯隊(전차연대)로 增强(증강)된 北韓軍(북한군) 第(제)1師團(사단) 및 第(제)6師團(사단)과 맞서 싸웠다. 開戰(개전) 直前(직전),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 麾下(휘하)에는 第(제)11, 12, 13聯隊(연대)가 配屬(배속)되어 있었다.
第(제)12聯隊(연대)는 靑丹郡(청단군)에서 開城市(개성시)까지 80km, 第(제)13聯隊(연대)는 第(제)12聯隊(연대) 配置(배치)地域(지역)의 西(서)쪽 끝인 禮成江(예성강) 流域(유역)부터 20km(卽(즉), 대원리(大院里)-원당동(元堂洞) 區間(구간)에 이르는 38線(선), 卽(즉) 國境(국경)을 警備(경비)하고 있었고 第(제)11聯隊(연대)는 師團(사단) 豫備(예비)로서 搜索(수색)에 駐屯(주둔)하고 있었다. 北韓軍(북한군) 第(제)1師團(사단)과 第(제)6師團(사단)이 砲擊(포격)과 그에 이어, 戰車部隊(전차부대)를 앞세워 38線(선)을 넘어 戰鬪(전투)를 開始(개시)하자 第(제) 12聯隊(연대)는 초전(初戰)에 分散(분산)되어 開豊郡(개풍군) 南端(남단)의 漢江(한강) 最河流(최하류)에서 江(강)을 건너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汶山里(문산리)로 撤收(철수)하였다.
第(제)11聯隊(연대)는 수색에서 汶山(문산)으로 나아가, 臨津江(임진강) 防禦線(방어선)에서 北韓軍(북한군)을 맞았다. 第(제)13聯隊(연대)는 坡州(파주) 坡平山(파평산)에서 北(북)쪽을 向(향)해 防禦戰(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月(월) 26日(일), 第(제)1師團(사단)의 西(서)쪽에 位置(위치)한 韓國軍(한국군) 獨立(독립) 第(제)17聯隊(연대)가 後退(후퇴)함으로써 西(서)쪽이 脆弱(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北韓軍(북한군) 第(제)6師團(사단)의 一齊攻擊(일제공격)에 밀려, 第(제)11聯隊(연대)는 臨津江(임진강) 防禦線(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第(제)13聯隊(연대)도 坡平山(파평산)에서 北韓軍(북한군)에 抵抗(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師團(사단) 指揮部(지휘부)는 奉日川(봉일천)에 駐屯(주둔)하게 된다. 第(제)12聯隊(연대)를 좇아 北韓軍(북한군) 第(제)6師團(사단)은 金浦(김포)와 Seoul(서울) 陽川區(양천구)까지 進出(진출)하였다.(6月(월) 28日(일)
議政府(의정부) 戰鬪(전투)
6·25 勃發(발발) 直前(직전), 議政府(의정부) 抱川(포천) 地域(지역)의 38線(선)은 第(제)7師團(사단)(師團長(사단장) 劉載興(유재흥)의 例下(예하) 第(제)1 · 9聯隊(연대)와 砲兵(포병), 工兵(공병)이 防禦(방어)를 擔當(담당)하고 있었다.
第(제)1聯隊(연대)는 東豆川(동두천) 正面(정면)(西(서)쪽), 第(제)9聯隊(연대)는 抱川(포천) 正面(정면)(東(동)쪽)에 配置(배치)되었다. 한편 北韓軍(북한군)은 鐵原(철원)-漣川(연천)-議政府(의정부)를 거쳐 Seoul(서울)을 早期(조기) 占領(점령)하려는 計劃(계획)하여 第(제)1軍團(군단)의 2個(개) 師團(사단)이 議政府(의정부) 正面(정면)을 執中(집중) 攻擊(공격)할 準備(준비)를 해 두었다. 勃發(발발) 當日(당일), 營內(영내)에 待機(대기)하고 韓國軍(한국군) 第(제)9聯隊(연대)를 北韓軍(북한군) 第(제)3師團(사단)이 攻擊(공격)을 始作(시작)하였다.
警戒(경계)任務(임무) 中(중)이던 第(제)9聯隊(연대) 第(제)2大隊(대대)는 北韓軍(북한군)의 砲擊(포격)에 後退(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第(제)2大隊長(대대장)의 戰況(전황) 報告(보고)를 받은 第(제)9聯隊長(연대장)(尹春根(윤춘근)은 議政府(의정부)邑內(읍내)에 待機(대기)中(중)이던 第(제)1 · 3大隊(대대)로 하여금 抱川(포천) 新北面(신북면) 萬歲橋(만세교) 附近(부근)에서 陣地(진지)를 構築(구축)하게 하고 防禦戰(방어전)을 펼쳐 北韓軍(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北韓軍(북한군) 第(제)3師團(사단) 第(제)7·9聯隊(연대)는 護國路(호국로)를 따라 南侵(남침)을 繼續(계속)했다.
이에, 第(제)1·3大隊(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議政府(의정부) 等(등)에서 集結(집결)했다. 한편, 首都警備司令部(수도경비사령부) 例下(예하)의 第(제)3聯隊(연대)가 抱川(포천)에 急派(급파)되어 蘇屹邑(소흘읍) 松隅里(송우리) 附近(부근)에서 防禦戰(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亦是(역시) 北韓(북한)의 機械化部隊(기계화부대)에 밀려서 蘇屹邑(소흘읍) 이동교리 祝石嶺(축석령)으로 後退(후퇴)를 거듭했다.(以上(이상), 6月(월) 25日(일) 이로써 議政府(의정부)가 急迫(급박)한 商況(상황)이 되었다.
遞信部(체신부) 保險局長(보험국장) 김의창(金義昌)은 抱川(포천) · 議政府(의정부)의 戰況(전황)을 國務會議(국무회의)에 報告(보고)한 바 있다.
春川(춘천) 및 洪川(홍천) 戰鬪(전투)
江陵(강릉) 戰鬪(전투)~陸軍本部(육군본부)의 對應(대응)
當時(당시) 陸軍(육군)의 總指揮者(총지휘자)는 蔡秉德(채병덕) 總參謀長(총참모장)이었다. 開戰(개전) 當日(당일)(6月(월) 25日(일), 午後(오후) 2時(시)에 열린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 蔡秉德(채병덕)은 “敵(적)의 全面(전면)攻擊(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李舟河(이주하), 金三龍(김삼룡)을 奪取(탈취)하기 위한 策略(책략)으로 보인다”고 答(답)했다. 蔡(채) 參謀總長(참모총장)은 陸士(육사) 敎導隊(교도대) 生徒(생도) 1期(기)(262名(명) 및 2期(기)(227名(명)를 抱川(포천) 戰鬪(전투)에 投入(투입)하라고 命令(명령)하였다.(6月(월) 25日(일) 午後(오후) 蔡秉德(채병덕)은 다음날(6月(월) 26日(일) 午後(오후)의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는 Seoul(서울) 死守(사수)를 公言(공언)하였고 命令(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平壤(평양)을 占領(점령)할 수 있다고 好言壯談(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한편, 陸軍本部(육군본부) 狀況室(상황실)의 當直下士官(당직하사관)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 분주하게 狀況(상황)을 接受(접수)하고 있었다. 아침 7時(시) 以前(이전)에는 陸軍本部(육군본부)로 이어지는 軍(군)의 主要(주요)通信網(통신망)이 在京(재경)遊擊隊(유격대)들에 依(의)해 切斷(절단)되었고 北韓軍(북한군)은 韓國軍(한국군)의 通信網(통신망)을 流言蜚語(유언비어)를 퍼뜨리는 等(등)에 逆利用(역이용)하고 있었다.
Seoul(서울)의 狀況(상황)
以前(이전)부터 38線(선) 附近(부근)에서의 小規模(소규모) 衝突(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大韓民國(대한민국) 國民(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軍用車(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軍(군) 將兵(장병)들은 빨리 原隊(원대)로 復歸(복귀)하라"는 Microphone sound(마이크 소리)가 搖亂(요란)해지면서 조금씩 動搖(동요)하기 始作(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午前(오전) 7時(시)가 넘어서야 放送(방송)은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侵攻(침공)해 왔다는 消息(소식)만 간단히 傳(전)하고 "將兵(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原隊復歸(원대복귀)하라"는 公知放送(공지방송)만 反復(반복)하고 있었다.
UP通信社(통신사)의 Seoul(서울)駐在(주재) 特派員(특파원) 잭 제임스(Jack James)가 發送(발송)한 전문(電文) 記事(기사) 內容(내용)에 대하여 UP通信社(통신사)의 도널드 곤잘레스(Donald Gonzales)는 美國(미국) 國務府(국무부) East Asia Pacific Office(東(동)아시아 太平洋擔當局(태평양담당국) 涉外官(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W. Bradley Connors)에게 確認(확인)을 要請(요청)하였다.(午前(오전) 11時(시) 4分(분)) 駐韓(주한) 美國(미국)大使(대사) John Mucho(존 무초)도 11時(시)에 Washington, D.C.(워싱턴D.C.)에 電話(전화)를 걸어 “北韓軍(북한군)이 韓國(한국)에 대한 全面(전면) 攻擊(공격)을 開始(개시)했다”고 報告(보고)했고, 北韓(북한)의 攻擊(공격) 狀況(상황)을 國務府(국무부)에 傳達(전달)했다. Washington(워싱턴) 當局(당국)은 이 公式(공식)報告(보고)를 6月(월) 24日(일) 21時(시)26分(분)에 接受(접수)하였다.
戰爭(전쟁)이 勃發(발발)하고 7時間(시간)26分(분) 後(후)였다. 國務府(국무부) East Asia Pacific Office(東(동)아시아 太平洋擔當局(태평양담당국) 次官補(차관보) Dean Rusk(딘 러스크)는 동국(同局) 涉外官(섭외관) Bradley Connors(브래들리 코너스)로부터 戰爭(전쟁) 勃發(발발) 事實(사실)을 報告(보고)받고, 駐韓(주한) 美國大使(미국대사) John Mucho(존 무초)에게 Jack james(잭 제임스)가 打電(타전)한 記事(기사)(戰爭(전쟁) 勃發(발발)의 事實(사실) 與否(여부)를 確認(확인)하라는 指示(지시)를 내렸다.한편, 戰爭(전쟁) 勃發(발발)에 관한 駐日(주일) 聯合軍(연합군) 最高司令部(최고사령부) 司令官(사령관) MacArthur(맥아더)의 最初(최초)의 報告(보고)는 Washington(워싱턴) 時間(시간)으로 1950年(년) 6月(월) 25日(일) 5時(시), 侵攻(침공)이 開始(개시)된지 14時間(시간) 뒤에 陸軍省本部(육군성본부)에 到着(도착)했다. 그러나 MacArthur(맥아더)는 駐韓(주한) 美軍(미군) 軍事(군사) 顧問團(고문단)의 要請(요청)에 따라 開戰(개전)當日(당일)부터 合參(합참)의 指示(지시)도 받지 않고 韓國軍(한국군) 支援(지원)措置(조치)를 取(취)하기 始作(시작)했다.
1950年(년) 6月(월) 26日(일) 밤 10時(시) 반경 李承晩(이승만)은 東京(도쿄)에 있는 美國(미국) 極東軍(극동군) 司令官(사령관) MacArthur(맥아더)에게 電話(전화)를 걸어 도움을 要請(요청)하였다.李承晩(이승만)은 radio(라디오) 演說(연설)로 Seoul(서울)市民(시민)은 政府(정부)를 믿고 動搖(동요)하지 말라는 放送(방송)을 通(통)해, Seoul(서울)市民(시민)들이 Seoul(서울)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督勵(독려)한 半面(반면) 그 自身(자신)은 放送(방송) 進行(진행) 中(중)에 閣僚(각료)들과 함께 特別列車(특별열차)로 大田(대전)으로 避身(피신)하였다. 6月(월) 27日(일) 새벽 2時(시)에 李承晩(이승만)은 大田行(대전행) 特別列車(특별열차)를 타고 大田(대전)으로 내려갔다.
6月(월) 27日(일) 새벽 4時(시)에 열린 非常(비상)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 政府(정부)의 水原(수원) 遷都(천도)가 定式(정식)으로 議決(의결)되었다. 李承晩(이승만)은 大田(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月(월) 1日(일) 새벽에 列次(열차)편으로 大田(대전)을 떠나 裡里(이리)에 到着(도착)하였다. 7月(월) 2日(일)에는 다시 木浦(목포)에 到着(도착)하였고, 배편으로 釜山(부산)으로 옮긴 뒤 7月(월) 9日(일) 大邱(대구)로 옮겨갔다. 6月(월) 27日(일) 아침 6時(시)에 Seoul(서울)中央(중앙)放送(방송)은 水原(수원) 遷都(천도) 消息(소식)을 傳(전)했으나, 이를 取消(취소)하라는 壓力(압력)으로 取消(취소) 放送(방송)이 있었다. Seoul(서울) 市民(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狀況(상황)에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Seoul(서울) 市民(시민)들은 待避(대피)하기 始作(시작)했다.
處刑(처형)된 美軍(미군)~保導聯盟(보도연맹) 事件(사건)
6月(월) 27日(일) 저녁에 Seoul(서울) 近郊(근교)까지 밀어닥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들과 肉薄戰(육박전)을 敢行(감행)했으나, 워낙 戰勢(전세)가 불리하여 大韓民國(대한민국)은 政府(정부)를 大田(대전)으로 옮겼다.
6月(월) 27日(일) 保導聯盟員(보도연맹원)에 대한 處刑(처형)이 執行(집행)됐다.
虐殺(학살)은 主(주)로 國軍(국군)(陸(육),海(해),空軍(공군)과 西北靑年會團(서북청년회단)等(등)의 極右(극우) 暴力團體(폭력단체)의 依(의)해 咨行(자행)되었으며, 美國(미국) 文書(문서)에서 美軍政(미군정) 美軍(미군) 將校(장교)의 參觀(참관)과 許可(허가) 最終(최종) 指示(지시)로 밝혀져있다.
韓國戰爭(한국전쟁) 初期(초기),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 步兵(보병)의 基本(기본) 火器(화기)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北韓軍(북한군)이 漢江(한강)을 넘어서 進擊(진격)할 것을 憂慮(우려)해 6月(월) 28日(일) 새벽 2時(시) 30分(분)경 아무런 豫告(예고)도 없이 漢江(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漢江鐵橋(한강철교)를 爆破(폭파)하였다. 이 爆破(폭파)로 50대 이상의 車輛(차량)이 물에 빠지고 最小(최소)한 500名(명)이 爆死(폭사)하였다. 漢江(한강) 鐵橋(철교)의 爆破(폭파)로 國民(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只今(지금)까지도 政府(정부)의 이 같은 失策(실책)은 批判(비판)을 받고 있다. 當時(당시)의 戰況(전황)으로 볼 때 6~8時間(시간)의 餘裕(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早期(조기) 爆破(폭파)로 人命(인명) 殺傷(살상)은 물론 兵力(병력)과 物資(물자) 輸送(수송)에 막대한 打擊(타격)을 입혔다는 批判(비판)이 대두되자, 李承晩(이승만) 政權(정권)은 나중에(8月(월) 28日(일) 當時(당시) 爆破(폭파) 責任(책임)을 맡았던 工兵監(공병감)인 大領(대령) 崔昌植(최창식)을 '敵前(적전)非行罪(비행죄)'로 逮捕(체포)해 9月(월) 21日(일) 死刑(사형)을 執行(집행)했다. 崔昌植(최창식)은 12年(년) 만에 再審(재심)을 거쳐 1962年(년) 無罪(무죄) 判定(판정)을 받아 死後(사후) 復權(복권)되었다.漢江(한강) 鐵橋(철교)의 爆破(폭파)는 申性模(신성모)國防長官(국방장관)이 指示(지시)했지만, 總理(총리) 李範錫(이범석)이 建議(건의)하였다는 主張(주장)도 있다. 漢江(한강) 鐵橋(철교)의 爆破(폭파)로 國民(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은 Seoul(서울)을 넘어 釜山(부산), 浦項(포항)과 慶尙道(경상도) 東海岸(동해안), 大邱(대구), 蔚山(울산), 慶州(경주), 永川(영천)과 그 以南(이남)을 除外(제외)한 모든 地域(지역)을 占領(점령)하게 되었다.
Seoul(서울)市民(시민) 144萬(만)6千餘名(천여명) 가운데 Seoul(서울)이 人民軍(인민군)에게 占領(점령)당하기 前(전)에 Seoul(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萬名(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越南同胞(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萬名(만명)이 政府高官(정부고관), 右翼政客(우익정객), 軍人(군인)과 警察(경찰)의 家族(가족), 自由主義者(자유주의자)들로 推定(추정)된다.
한때 李承晩(이승만)은 日本(일본) 山口県:Yamaguchi Prefecture(야마구치현)에 亡命政府(망명정부)를 設置(설치)하는 方案(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政權(정권) 官吏(관리)들은 韓半島(한반도)와 地理的(지리적)으로 가까운 山口県:Yamaguchi Prefecture(야마구치현)에 亡命政府(망명정부) 樹立(수립)意思(의사)를 日本(일본)에 傳達(전달)했으며, 日本(일본) 政府(정부)는 山口県:Yamaguchi Prefecture(야마구치현) 知事(지사) 田中:Tanaka(다 나카)에게 6萬餘名(만여명)을 收容(수용)할 施設(시설) 및 食量(식량)을 準備(준비)하라고 指示(지시)했다고 했다. 當時(당시) 田中:Tanaka(다 나카) 知事(지사)는 縣(현)의 小學校(소학교)를 亡命政府(망명정부) 施設(시설)로 確保(확보)하는 方案(방안)과 日本(일본) 政府(정부)에 대해 特別(특별) 食量(식량)配給(배급)要請(요청) 與否(여부)를 檢討(검토)하기도 했다. 1950年(년) 6月(월) 27日(일) 李承晩(이승만)은 大統領(대통령)과 內閣(내각)으로 構成(구성)된 亡命政府(망명정부)를 日本(일본)에 樹立(수립)하는 方案(방안)을 駐韓(주한) 美國大使(미국대사) John Mucho(존 무초)에게 問議(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美(미) 國務省(국무성)에 報告(보고)되었다.
北韓軍(북한군)이 Seoul(서울)을 占領(점령)하고 全羅道(전라도)까지 威脅(위협)하자, 李承晩(이승만) 大統領(대통령)은 大田(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月(월) 1日(일) 새벽에 列車(열차)편으로 大田(대전)을 떠나 裡里(이리)에 到着(도착)하였다. 7月(월) 2日(일)에는 다시 木浦(목포)에 到着(도착)하였고, 배편으로 釜山(부산)으로 옮긴 뒤 7月(월) 9日(일) 大邱(대구)로 옮겨갔다.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Seoul(서울) 占領(점령)
6月(월) 28日(일) 새벽 人民軍(인민군)의 Tank(탱크)가 Seoul(서울) 中心部(중심부)에서 目擊(목격)되었다. 그러나, 바로 漢江(한강)을 渡河(도하)하지 않고 7月(월) 3日(일)까지 Seoul(서울)에 머물렀는데, 그 理由(이유)에 대해 여러 見解(견해)가 나뉘어 있다. 첫째 春川(춘천)戰鬪(전투)의 敗戰(패전)으로 因(인)한 包圍(포위)計劃(계획) 失敗(실패), 둘째 渡河(도하)裝備(장비) 不足(부족), 셋째 南路黨(남로당) 責任者(책임자)인 朴憲永(박헌영)이 戰爭 勃發時(전쟁발발시) 20萬名(만명)의 南勞黨員(남로당원)의 一齊(일제) 蜂起(봉기)로 大韓民國(대한민국) 自體(자체)가 早期(조기) 崩壞(붕괴)시키겠다고 豪言壯談(호언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主張(주장) 하였다는 3가지 說(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見解(견해) 中(중) 많은 學者(학자)들이 春川(춘천)戰鬪(전투)에서의 國軍(국군)의 防禦(방어)가 人民軍(인민군)을 沮止(저지)한 것이 Seoul(서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理由(이유)로 보고있다.
이 2師團(사단)은 議政府(의정부)에서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에 敗退(패퇴)하고 남은 兵力(병력)이 只今(지금)의 銅雀大橋(동작대교)에서 廣(광)나루까지 防禦陣(방어진)을 構築(구축)하고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의 渡河(도하)를 沮止(저지)하는 任務(임무)를 맡았다.
洛東江(낙동강) 防禦戰(방어전)
1950年(년) 8月(월) 17日(일)의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에서 美合衆國(미합중국) 陸軍(육군) 24師團(사단) 所屬(소속) M24 Chapi Tank(채피 戰車(전차)와 戰車兵(전차병)들의 모습.
金海(김해)와 馬山(마산) 사이에서 빠져나와 避亂(피란)을 가는 一家族(일가족)의 모습
大田(대전)을 占領(점령)한 北韓軍(북한군)은 다시 進路(진로)를 3分(분)하여 一部(일부)는 西(서)쪽으로 호남(湖南) 一帶(일대)를 휩쓸고 馬山(마산)으로 닿고, 一部(일부)는 京釜線(경부선)을 따라 大邱(대구)로 向(향)했으며, 또 一部(일부)는 東(동)으로 浦項(포항)에 肉薄(육박)했다. UN forces(유엔군)은 總司令部下(총사령부하)에 韓國軍(한국군)까지 包含(포함)시켜 作戰(작전) 系統(계통)을 統一(통일)하고 部隊(부대)를 大幅(대폭) 增强(증강)하여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을 마지막 防禦線(방어선)으로 삼아 反擊(반격)을 開始(개시)할 態勢(태세)를 完了(완료)한 때였다.
8月(월) 7日(일) UN forces(유엔군)은 馬山地區(마산지구)에 美第25師團(미제25사단) · 34師團(사단) 其他(기타) 第5戰鬪團(제5전투단) · 第(제)3海兵旅團(해병여단) 等(등)을 投入(투입)하여 釜山(부산)을 目標(목표)로 肉薄(육박)하는 北韓軍(북한군)에게 强力(강력)한 反擊(반격)을 加(가)하여 3日(일) 동안에 60里(리)를 進擊(진격), 韓國軍(한국군)의 蔡秉德(채병덕) 少將(소장)이 戰死(전사)한 河東地區(하동지구)를 奪還(탈환)했다. 이것은 6月(월) 25日(일) 以後(이후) UN forces(유엔군)이 가한 最初(최초)의 本格的(본격적) 反擊(반격)이었다.
8月(월) 13日(일)에는 東部戰線(동부전선) 浦項(포항)에 突入(돌입)한 北韓軍(북한군)을 韓國軍(한국군) 首都師團(수도사단)과 第(제)3師團(사단)이 對抗(대항)하여 北韓軍(북한군)의 主攻擊(주공격) 地點(지점)으로서 洛東江(낙동강) 渡河作戰(도하작전)을 위해 10餘日(여일)을 두고 4個(개) 師團(사단)의 兵力(병력)을 投入(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UN forces(유엔군)은 8月(월) 16日(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出動(출동)시켜 北韓軍(북한군)의 集結地(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都合(도합) 850瓲(톤)에 달하는 數千個(수천개)의 爆彈(폭탄)을 投下(투하)했으니 이것은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後(후) 最大(최대)의 爆擊記錄(폭격기록)이다. 그러나 北韓軍(북한군)은 굽히지 않고 18日(일)에는 大邱(대구) 北方(북방) 13mile(마일) 地點(지점)까지 肉薄(육박)했다.
이 날 政府(정부)는 大邱(대구)에서 釜山(부산)으로 後退(후퇴)하고 大邱(대구) 市民(시민)에게는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最後(최후)의 決戰(결전)을 覺悟(각오)한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은 英國軍(영국군) 步兵(보병) 第(제)27旅團(여단)의 支援(지원)을 받아가며 北方(북방)으로 4Km를 反擊(반격), 뒤이어 이 날 美(미) 第(제) 24師團(사단)과 海兵(해병)師團(사단)의 應援(응원) 出動(출동)이 있어 23日(일)까지는 大邱(대구) 北方(북방)의 戰勢(전세)를 完全(완전)히 逆戰(역전)시켜 洛東江(낙동강) 以南(이남) 地域(지역)을 確保(확보)했다.
이 後(후) 北韓軍(북한군)은 大邱(대구)를 避(피)하여 東(동)·西(서)로 部隊(부대)를 移動(이동)하더니, 最後(최후)의 決戰(결전)인 第(제)2次(차) 협공(挾攻)作戰(작전)을 企圖(기도)했다. 西南(서남)地域(지역) 진주(晋州) 方面(방면)에 北韓軍(북한군)의 4個(개) 步兵師團(보병사단)(4·6·7·9)과 1個(개) 戰車聯隊(전차연대)(105師團(사단) 16聯隊(연대)가 集結(집결)하고, 東部戰線(동부전선) 浦項(포항) 北方(북방)에 亦是(역시) 4個(개) 步兵師團(보병사단)(5·8·12·15)과 1個(개) 戰車聯隊(전차연대)(105)가 集結(집결)하여 9月(월) 3日(일) 12時(시)를 期(기)하여 同時(동시)에 UN forces(유엔군)을 攻擊(공격)해 왔다. 그러나 北韓軍(북한군)은 이미 士氣(사기)가 極度(극도)로 低下(저하)되고 戰鬪力(전투력)이 氣盡(기진)하였으며, 訓練(훈련)도 되지 않은 新兵(신병)들을 補充(보충) 兵力(병력)으로 編成(편성)한 狀態(상태)였다.
西南(서남)地域(지역)에서는 馬山(마산)의 美(미) 第(제)2師團(사단)·25師團(사단)이 北韓軍(북한군)의 繼續(계속)되는 夜襲(야습)攻擊(공격)을 막아서 擊退(격퇴)시켰으며, 東部戰線(동부전선)에는 韓國軍(한국군) 第(제)2軍團(군단)이 9月(월) 10日(일) 最强(최강)을 자랑하던 北韓軍(북한군) 第(제)15師團(사단)과 1個(개) 砲兵(포병)聯隊(연대)를 영천(永川)地區(지구)에 몰아 包圍(포위)하고 4,800餘名(여명)의 北韓軍(북한군)을 射殺(사살), 數(수) 많은 車輛(차량)과 戰車(전차) 武器(무기) 等(등)을 빼앗아 完全(완전) 殲滅(섬멸)한 後(후) 單番(단번)에 15km를 北進(북진)하여 敵(적)의 氣勢(기세)를 最終的(최종적)으로 꺾어놓고 말았다.
當時(당시) 美(미)8軍(군) 司令官(사령관)이던 워커(Walker) 中將(중장)은 12日(일) 談話(담화)를 發表(발표)하여 ‘韓國(한국) 戰線(전선) 最大(최대)의 危機(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北韓軍(북한군)의 南侵(남침) 攻勢(공세)는 決定的(결정적)으로 꺾이고 UN forces(유엔군)의 北進(북진)이 있을 뿐이었다.
大邱(대구) 後退(후퇴)와 多富洞(다부동) 戰鬪(전투)
多富洞(다부동) 戰鬪(전투)의 主要(주요) 指揮官(지휘관)이었던 陸軍(육군)少將(소장) 白善燁(백선엽)이 戰鬪(전투)로 洛東江(낙동강)의 임시 防禦線(방어선)을 構築(구축)하고 UN forces(유엔군)等(등)의 增援(증원) 派兵(파병)때까지 여유 時間(시간)을 獲得(획득)했다.
8月(월)까지 北韓軍(북한군)은 大邱(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에서 國君(국군)과 美軍(미군)의 强烈(강렬)한 抵抗(저항)으로 膠着狀態(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交戰(교전)이 繼續(계속)되었다. 이때 大韓民國(대한민국) 國軍(국군) 第(제)1師團長(사단장) 白善燁(백선엽)은 多富洞(다부동)에서 人民軍(인민군)의 侵攻(침공)을 擊退(격퇴)하고 8月(월) 3日(일) UN forces(유엔군)은 馬山(마산)-倭館(왜관)-盈德(영덕)을 잇는 洛東江(낙동강) 防禦線(방어선)을 쳤다.
United Nations(유엔)에서의 說得作業(설득작업)
Soviet(소비에트) 聯邦(연방)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側(측)은 6.25 戰爭(전쟁)이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先制(선제) 攻擊(공격)으로 勃發(발발)했다고 主張(주장)했다. 8月(월) 1日(일), 安保理事會(안보이사회)의 8月(월) 議長國(의장국)이었던 蘇聯(소련) 側(측) 代表(대표) Малик:Malik(말리크)는 理事會(이사회)에 出席(출석)했다.
議長席(의장석)에 앉은 蘇聯(소련) 側(측) 代表(대표) Малик:Malik(말리크)는 그 동안의 韓國(한국)事態(사태)에 대한 安保理(안보리)의 모든 決議(결의)가 無效(무효)임을 宣言(선언)하였다. 그는 “安保理事會(안보이사회)의 常任(상임) 理事國(이사국)인 蘇聯(소련)과, 또 常任理事局(상임이사국)으로서 당연히 參席(참석)해야 할 中共(중공)代表(대표)가 없는 동안에 通過(통과)된 決議案(결의안)은 하나도 認定(인정)할 수 없다” 고 主張(주장)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 側(측) 代表(대표) 團長(단장) 張勉(장면)은 8月(월) United Nations(유엔) 安保理(안보리) 會議(회의)에서도 Observer(옵서버)資格(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Малик:Malik(말리크)는 끝내 張勉(장면)의 着席(착석)을 拒否(거부)했다.
또한 Малик:Malik(말리크)는 “6‧25 動亂(동란)은 人民軍(인민군)의 南侵(남침)에서 始作(시작)된 것이 아니고, 反對(반대)로 韓國軍(한국군)의 北枕(북침)”이라며 “美國(미국)이 韓國軍(한국군)을 背後(배후)에서 操縱(조종)했다”고 主張(주장)하였다. 蘇聯(소련) 側(측) 代表(대표)의 이런 易宣傳(역선전)을 미리 豫想(예상)한 張勉(장면)은 美國(미국) 側(측) 代表(대표) Austin(오스턴)과 짜고 韓國(한국)戰線(전선)에서 鹵獲(노획)한 蘇聯製(소련제) 小銃(소총) 한 정을 證據物(증거물)로 提示(제시)하고 反駁(반박)하였다.
Малик:Malik(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韓國(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蘇聯(소련)은 전혀 關聯(관련)이 없다”며 “蘇聯軍(소련군)은 이미 1947年(년)에 완전히 北韓(북한)에서 撤收(철수)했고, 이번 動亂(동란)에 蘇聯(소련)에서는 銃(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斷言(단언)했다. 美國(미국) 側(측) 代表(대표) Austin(오스턴)은 張勉(장면)이 韓國(한국)戰線(전선)에서 가져온 ‘1950年(년) 蘇聯製(소련제)’라는 鐵印(철인)이 찍힌 小銃(소총)을 證據物(증거물)로 提示(제시)하였고, 蘇聯(소련) 側(측)이 提示(제시)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北枕(북침) 主張(주장)과 蘇聯(소련)의 不介入(불개입) 主張(주장)은 論破(논파)당하였다.
張勉(장면) 代表(대표)는 9月(월)에 열린 United Nations(유엔) 安保理(안보리) 理事會(이사회)에도 參席(참석)하는데, 9月(월) 安保理(안보리) 議長國(의장국)은 英國(영국)이었다. 9月(월) 1日(일), Gland wynn(글랜드윈 접) 英國(영국) 側(측) 代表(대표)가 安保(안보) 理事會(이사회)의 司會(사회)를 맡자 張勉(장면)은 着席(착석)과 發言權(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要求(요구)했다. 議長(의장)은 “當事國(당사국)인 大韓民國(대한민국)을 代表(대표)하는 張(장) 大使(대사)에게 着席(착석)을 許(허)한다”고 宣言(선언)하여 張勉(장면) 代表(대표)는 무난히 着席(착석)하였다.
議長(의장)으로부터 發言權(발언권)을 얻은 張勉(장면) 代表(대표)는 “그 동안 갖은 侮辱(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蘇聯(소련)을 攻駁(공박)하였다. 蘇聯(소련) 代表(대표) Малик:Malik(말리크는 “規則(규칙) 發言(발언)!”이라며 그의 發言(발언)을 制止(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Малик:Malik(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 者(자)가 누군데 무슨 資格(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發言(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者(자)는 李承晩(이승만) 徒黨(도당)의 傀儡(괴뢰)”라고 마구 辱說(욕설)을 퍼부었다. 張勉(장면)은 Малик:Malik(말리크)의 辱說(욕설)에 대해 取消(취소)하라고 抗卞(항변)하였다.
大韓民國(대한민국)에는 李承晩(이승만) 徒黨(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憲法(헌법)에 依(의)해 合法的(합법적)으로 當選(당선)된 大統領(대통령)의 任命(임명)을 받아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를 代表(대표)해 이 자리에 議長(의장)의 招請(초청)으로 着席(착석)했노라.
그는 約(약) 40餘分間(여분간) 共産圈(공산권)의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北枕(북침)” 主張(주장)과 “韓國民(한국민)들끼리의 內亂(내란)”이라는 主張(주장)을 反駁(반박)하는 演說(연설)을 했고, 이는 國際社會(국제사회)에 生放送(생방송)으로 中繼(중계)되었다.
UN forces(유엔군)의 總反擊(총반격)
UN forces(유엔군)이 육전(陸戰)에서 전과(戰果)를 올리기까지는 空軍(공군)의 지원폭격(支援爆擊)이 크게 奏效(주효)하였으니 United Nations(유엔) 空軍(공군)은 이미 개전(開戰) 20日(일) 만에 제공권(制空權)을 掌握(장악), B29, B26 等(등) 重爆擊機(중폭격기)는 敵(적) 後方(후방)의 交通路(교통로)를 破壞(파괴)하는 한편 平壤(평양)·鎭南浦(진남포)·咸興(함흥)·城津(성진)·淸津(청진)·羅南(나남) 等地(등지)의 軍需品(군수품) 工場(공장)을 完全(완전)히 破壞(파괴)했다. Saber jet(세이버 제트기)·F51 戰鬪機(전투기)·英國機(영국기)·호주기(濠洲機) 等(등)이 戰線(전선)을 主(주) 攻擊目標(공격목표)로 삼고 各(각) 方面(방면)으로 攻襲作戰(공습작전)을 展開(전개)하였다.
한편 海軍(해군)도 開戰(개전) 直後(직후)부터 制海權(제해권)을 掌握(장악)하였으나 地上作戰(지상작전)이 後退(후퇴)를 거듭하므로 큰 活躍(활약)을 못 하고 있던 中(중), 洛東江(낙동강) 戰線(전선)에서 陸軍(육군)의 反擊(반격)이 開始(개시)되자 電擊的(전격적) 北上(북상)을 企圖(기도)하는 MacArthur Commander-in-Chief of the UN(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命令(명령)에 依(의)해 9月(월) 13日(일)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이 開始(개시)되었다.
이 作戰(작전)의 海軍(해군) 司令官(사령관)은 美(미) 海軍(해군) 少將(소장) 도일(Doyle)로서, 動員(동원)된 軍艦(군함)은 韓國(한국) 15척, 美國(미국) 226隻(척), 英國(영국) 12隻(척), Canada(캐나다) 3隻(척), Australia(오스트레일리아) 2隻(척), New Zealand(뉴질랜드) 2隻(척), France(프랑스) 1隻(척), 都合(도합) 261隻(척)이었다.
13日(일)부터 2日間(일간)에 걸쳐 猛烈(맹렬)한 艦砲(함포) 射擊(사격)을 가한 後(후) 15日(일) 새벽 마침내 UN forces(유엔군)과 國軍(국군) 海兵隊(해병대)가 General MacArthur(맥아더 將軍(장군) 指揮(지휘)로 仁川(인천)에 上陸(상륙), Seoul(서울)을 向(향)해 進擊(진격)했다. 金日成(김일성)은 UN forces(유엔군)의 仁川(인천)上陸(상륙)이 있자 소위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崔鏞健)을 Seoul(서울) 防衛司令官(방위사령관)으로 任命(임명)하고 約(약) 2萬(만)의 兵力(병력)으로 最後(최후) 抵抗(저항)을 試圖(시도)했으나 20日(일)에 UN forces(유엔군) 搜索隊(수색대)는 이미 漢江(한강)을 건너 Seoul(서울)에 浸透(침투)했고, 23日(일)에는 韓國軍(한국군)海兵隊(해병대)와 美(미) 第(제)1海兵(해병)師團(사단)이 Seoul(서울) 西北方(서북방)의 안산(鞍山)을 占領(점령)하고 다음 날 麻浦(마포)로 도하(渡河)하여 市內(시내)로 突入(돌입)했으며, 25日(일)에는 冠岳山(관악산) 方面(방면)으로부터 韓國軍(한국군) 第(제)17聯隊(연대)와 美(미) 第(제)7師團(사단)이 漢江(한강)을 渡河(도하)하여 南方(남방)으로부터 市內(시내)로 突入(돌입), 挾攻(협공)으로 猛擊(맹격)을 加(가)했다. 北韓軍(북한군)은 決死的(결사적) 抗拒(항거)로 市街戰(시가전)을 企圖(기도)하였으나 兵力(병력)의 大部分(대부분)이 殲滅(섬멸)되어 Seoul(서울)에서 退却(퇴각)하니, 9月(월) 28日(일) 歷史的(역사적)인 Seoul(서울) 奪還(탈환)이 이루어져 中央廳(중앙청) 尖塔(첨탑)에 다시 太極旗(태극기)가 올랐다.
이 Seoul(서울) 奪還(탈환)作戰(작전)은 南韓(남한)地域(지역) 戰鬪(전투)의 最終的(최종적) 決判(결판)이 되었으니, Seoul(서울)을 完全(완전) 奪還(탈환)한 UN forces(유엔군)은 다시 水原(수원) 方面(방면)으로 南下(남하)하여 敵(적)의 背後(배후)를 찔렀으며, 中部(중부)와 東部戰線(동부전선)에서도 무제한 北進(북진)攻勢(공세)를 取(취)하니 30日(일)에 벌써 國軍(국군) 第(제)30師團(사단)은 東海岸(동해안)을 電擊的(전격적)으로 北上(북상)하여 38線(선) 接境(접경) 인악리(仁岳里)에 이르렀다.
이에 38線(선) 以南(이남)의 共産軍(공산군)은 사실상 퇴로(退路) 마저 끊긴 채 完全(완전)히 痲痹(마비)狀態(상태)에 빠졌다. 9月(월) 30日(일) UN forces(유엔군) 總司令官(총사령관) General MacArthur(맥아더將軍(장군)은 北韓(북한) 共産軍(공산군) 總司令官(총사령관) 金日成(김일성)에게 降伏(항복)勸告文(권고문)을 보냈으나 金日成(김일성)은 이를 拒否(거부)하고 다만 南韓(남한)地域(지역)에 있는 共産軍(공산군)의 前面(전면) 退却(퇴각)만을 命令(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UN forces(유엔군) 司令部(사령부)는 麾下(휘하) 全將兵(전장병)에게 38線(선)을 突破(돌파)하여 北進(북진)할 것을 命令(명령)했고, 北韓軍(북한군) 部隊(부대)들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有一(유일)의 退路(퇴로)로 利用(이용)하여 後退(후퇴)했으며 나머지 一部(일부)는 智異山(지리산) · 大德山(대덕산)·回文山(회문산) 一帶(일대)에 包圍(포위)된 채 遊擊戰(유격전)을 企圖(기도)하게 되었다.
第(제)1機甲師團(기갑사단) 所屬(소속) 兵士(병사)가 開城(개성) 附近(부근)에서 불에 탄 屍體(시체)를 바라보고 있다.
10月(월) 1日(일) 午前(오전) 11時(시) 45分(분) 國軍(국군) 第(제)3師團(사단)은 이종찬(李鍾贊) 大領(대령) 指揮下(지휘하)에 最初(최초)로 38線(선)을 넘어 北進(북진)을 開始(개시)했으며 뒤이어 首都師團(수도사단)이 인제(麟蹄)를 거쳐 北上(북상)하여 10月(월) 10日(일) 3師團(사단)과 함께 원산(元山)市內(시내)와 명사십리(明沙十里) 飛行場(비행장)을 完全(완전) 占領(점령)했다. 中部戰線(중부전선)에서는 國軍(국군) 第(제)7師團(사단)과 8師團(사단)이 화천(華川)·김화(金化)를 거쳐 北上(북상), 18日(일)에는 西部戰線(서부전선)으로 北上(북상)한 美(미) 第(제)1軍團(군단)과 만나 平壤(평양) 南方(남방) 近郊(근교)에 肉薄(육박)하고 19日(일) 韓國軍(한국군) 第(제)1師團(사단)을 先頭(선두)로 하여 平壤(평양)을 完全(완전) 占領(점령)했다.
當時(당시) 平壤(평양)을 지키고 있던 敵軍(적군)의 최인(崔仁) 中將(중장)은 新兵(신병)으로 補充(보충)된 約(약) 2萬(만)의 兵力(병력)으로 防禦態勢(방어태세)를 取(취)했으나 大敗(대패)하여 청천강(淸川江) 以北(이북)으로 逃走(도주)했다.
한편 西部戰線(서부전선)에서는 10月(월) 20日(일)에 淸川江(청천강) 以南(이남) 숙천(肅川) 一帶(일대)에 美(미) 第(제)11공정사단(空挺師團)의 約(약) 4千名(천명)이 落下傘(낙하산)을 타고 내려 敵(적)의 後方(후방)을 攻擊(공격)하였으며, 國軍(국군) 第(제)6師團(사단)이 美(미) 第(제)24師團(사단)과 英國(영국) 旅團(여단)의 西海岸(서해안) 進擊(진격)과 補助(보조)를 같이하여 덕천(德川)·희천(熙川) 等地(등지)를 거쳐 西北(서북) 國境(국경)의 中央地點(중앙지점)인 초산(楚山)으로 進擊(진격), 26日(일) 午後(오후) 5時(시) 50分(분) 6師團(사단) 第(제)7聯隊(연대) 搜索隊(수색대)가 鴨綠江(압록강)에 이르렀다. 11月(월) 21日(일)에는 中部(중부)로 進擊(진격)한 國軍(국군) 第(제)7師團(사단)의 一部(일부)가 中部國境(중부국경) 혜산진(惠山鎭)에 도달했고, 東部戰線(동부전선)의 首都師團(수도사단)과 3師團(사단)은 元山(원산)에서 다시 北進(북진)하여 10月(월) 17日(일)에 咸興(함흥), 22日(일)에 북청(北靑), 28日(일)에 성진(城津)을 占領(점령)했으며, 여기서 第(제)3師團(사단)은 길주(吉州)를 거쳐 백두산(白頭山)을 向(향)해 합수(合水)로 進擊(진격)하고 11月(월) 25日(일) 首都師團(수도사단)은 咸鏡北道(함경북도) 道廳(도청) 所在地(소재지) 청진(淸津)에 突入(돌입)했다. 이로써 國土(국토)의 全域(전역)이 거의 收復(수복)되고 統一(통일)이 目前(목전)에 다달았다.
仁川(인천) 上陸作戰(상륙작전)
仁川(인천)에 上陸(상륙)하는 UN forces(유엔군)의 모습.
United Nations(유엔)軍(군)인 Douglas MacArthur(더글러스 맥아더)가 仁川(인천)에서 上陸作戰(상륙작전)을 觀察(관찰)하고 있다.
作戰(작전)의 第(제)1段階(단계)는 月尾島(월미도)의 占領(점령)으로 始作(시작)되었다. 1950年(년) 9月(월) 15日(일) 새벽 5時(시) 始作(시작)된 攻擊(공격) 準備(준비) 射擊(사격)에 이어 美(미) 第(제)5海兵聯隊(해병연대) 3大隊(대대)가 戰車(전차) 9隊(대)를 앞세우고 月尾島(월미도) 前面(전면)에 上陸(상륙)하였다. 月尾島(월미도)는 2時間(시간) 만에 完全(완전)히 美軍(미군)에 依(의)해 掌握(장악)되었다. 美軍(미군)은 負傷(부상) 7名(명)의 輕微(경미)한 被害(피해)를 입었으며, 人民軍(인민군)은 108名(명)이 戰死(전사)하고 106名(명)이 捕虜(포로)로 잡혔다.
이어 第(제)2段階(단계)로 國軍(국군) 第(제)17聯隊(연대), 美軍(미군) 第(제)7師團(사단), 美國(미국) 1 海兵(해병)師團(사단)이 主導(주도)한 仁川(인천)半島(반도) 攻擊(공격)이 이어졌다. 人民軍(인민군) 第(제)18師團(사단)과 仁川(인천) 警備兵力(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美軍(미군) 第(제)1海兵師團(해병사단)과 國軍海兵(국군해병) 第(제)1聯隊(연대)는 人民軍(인민군)의 主力(주력)이 糾合(규합)할 時間(시간)을 成功的(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仁川(인천) 掌握(장악)에 成功(성공)하였다.
Seoul(서울) 收復(수복)
그 後(후) Seoul(서울)을 빼앗긴 지 3個月(개월) 만인 9月(월) 28日(일)에 Seoul(서울)을 되찾았다. 韓國軍(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人民軍(인민군)을 뒤쫓아 38線(선)을 突破(돌파)하여 10月(월) 10日(일)에는 元山(원산)을, 10月(월) 19日(일)에는 平壤(평양)을 占領(점령)했다. 이어, 10月(월) 26日(일)에는 西部(서부)는 淸川江(청천강) 北部(북부)와 鴨綠江(압록강)의 楚山(초산)에 이르렀고, 中部(중부)는 長津湖(장진호)까지 進擊(진격)했으며, 東部(동부)는 鴨綠江(압록강)의 惠山鎭(혜산진)까지 進擊(진격)했다. 또한 11月(월)에는 豆滿江(두만강) 一帶(일대)까지 進擊(진격)하였다. 한편, 金日省(김일성)은 政府(정부)와 人民軍(인민군)을 미리 10月(월) 9日(일)에 北(북)쪽으로 거의 모두 撤收(철수)시킨 다음에 10月(월) 12日(일)부터 平壤(평양)에서 撤收(철수)했다.
中共軍(중공군) 介入(개입)과 長津湖戰鬪(장진호전투)
Seoul(서울) 收復後(수복후) 38線(선)을 넘어 繼續(계속)北進(북진)하던 韓國軍(한국군)과 美軍(미군)은 平壤(평양)을 占領後(점령후) 繼續(계속) 北進(북진)해 나아갔다.그러던 中(중) 鴨綠江(압록강) 까지 進擊(진격)했다. 그런데 統一直前(통일직전)까지 갔던 聯合軍(연합군)은 中共軍(중공군)이 갑작스런 介入(개입)에 唐惶(당황)하고 平壤(평양)까지 占領(점령)당하는 受侮(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聯合軍(연합군)은 中共軍(중공군)의 人海戰術(인해전술)에 밀려 繼續(계속) 後退(후퇴)를 하게 된다. 한편 美(미)10軍團(군단)은 咸鏡南道(함경남도) 長津郡(장진군)에서 中共軍(중공군)에게 包圍(포위)당하고 치열하게 戰鬪(전투)를 하게되는데 그 戰鬪(전투)가 바로 長津湖戰鬪(장진호전투)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反擊(반격)準備(준비)
한편,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9月(월) 30日(일)경,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를 面談(면담)한 자리에서 金日成(김일성)은 戰況(전황)이 不利(불리)하기 때문에 蘇聯(소련)의 援助(원조)를 要請(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內容(내용)의 便紙(편지)를 보낼 意向(의향)임을 밝혔다.: “敵軍(적군)이 38線(선)을 넘어 以北(이북)을 侵攻(침공)할 때에는 蘇聯軍(소련군)의 出動(출동)이 절대 必要(필요)하다. 만일 그것이 不可能(불가능)할 때에는 中國(중국)과 其他(기타) 共産主義(공산주의)國家(국가)들이 國際(국제)義勇軍(의용군)을 組織(조직)해 出動(출동)하도록 援助(원조)해 주기 바란다.”
10月(월) 1日(일),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은 北京(베이징)駐在(주재) 蘇聯大使(소련대사) Rosin:Канифоль(로신)에게 電文(전문)을 보내 다음 內容(내용)을 毛泽东(마오쩌둥)이나 周恩来(저우언라이)에게 至急(지급) 傳達(전달)하도록 指示(지시)하였다.: “中國義勇軍(중국의용군)을 보낼 수 있다면 빨리 5~6個(개) 師團(사단)이라도 38線(선)에 進出(진출)시켜야 할 것임.” 10月(월) 3日(일), 毛泽东(마오쩌둥)는 이렇게 回答(회답)했다.: “처음에 우리는 敵軍(적군)이 38線(선)을 넘을 始點(시점)에 中國(중국) 義勇軍(의용군) 數個師團(수개사단)을 投入(투입)할 생각이었으나 只今(지금)은 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北韓(북한)은 遊擊戰爭(유격전쟁)으로 이행하면 될 것이다. 必要(필요)하다면 貴下(귀하)의 休養地(휴양지)에 周恩来(저우언라이)와 林彪(린뱌오)를 보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한 駐中(주중) 蘇聯大使(소련대사) Rosin:Канифоль(로신)의 見解(견해)는 이러했다: “毛(마오)의 이 回答(회답)은 朝鮮問題(조선문제)에 관한 中國(중국)의 態度(태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음. 態度(태도) 變更(변경)의 原因(원인)은 아직 不明(불명)하다.” 金日成(김일성)은 駐北(주북)한 蘇聯大使(소련대사)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를 通(통)해,Stalin:Сталин(스탈린)에게 北韓(북한)이 어려움에 逢着(봉착)하였음을 理由(이유)로 援助(원조)와 도움을 要請(요청)하였다.
金日成(김일성)은 美軍(미군)이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를 占領(점령)하여 極東(극동)에서의 戰略基地(전략기지)를 만들 意向(의향)인 것 같다고 밝혔다. 11月(월) 20日(일),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은 Stikoff:Стикофф(스티코프)에게 飛行士(비행사) 養性(양성)에 관한 金日成(김일성)의 要請(요청)을 받아들일 것임을 通報(통보)토록 指示(지시)하였다. 그리고, 11月(월) 28日(일), 蘇聯(소련) 閣僚會議(각료회의)는 蘇聯(소련) 民間大學(민간대학)에 留學中(유학중)인 北韓(북한) 學生(학생) 2百命(백명)을 12月(월) 5日(일)까지 滿洲(만주)로 보내기로 決定(결정)하였다.
制限戰線(제한전선)의 激動(격동)
共産側(공산측)은 結局(결국) 戰勢(전세)가 有利(유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6月(월) 23日(일) 蘇聯(소련)의 유엔大使(대사) 마리크(Marik)로 하여금 韓國戰爭(한국전쟁)의 停戰(정전)을 提議(제의)해 오고 美國(미국)은 이에 呼應(호응)함으로써 7月(월) 8日(일) 開城(개성)에서 停戰會談(정전회담) 豫備會談(예비회담)이 開催(개최)되고 10月(월) 25日(일) 會談場所(회담장소)를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겨 會談(회담)을 進行(진행)했다.
11月(월) 28日(일)에는 當時(당시) 戰線(전선)을 臨示(임시) 休戰線(휴전선)으로 採擇(채택)하게 되어 한때 戰鬪(전투)가 小康狀態(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熾烈(치열)한 宣傳戰(선전전)을 首班(수반)하면서 여전히 戰鬪(전투)는 繼續(계속)되었다. 한편 國軍(국군)은 後方(후방)에서 9·28收復(수복) 때 智異山(지리산) 一帶(일대)의 山岳(산악)으로 集結(집결)한 패잔(敗殘) 공비(共匪) 掃蕩作戰(소탕작전)을 開始(개시)했다.
國軍(국군) 首都官(수도관)과 第(제)7師團(사단) 및 戰鬪警察隊(전투경찰대) 5個(개) 聯隊(연대)는 이해 12月(월) 2日(일)부터 이듬해 3月(월) 13日(일)까지 4次(차)에 걸친 攻擊(공격)을 가해 射殺(사살) 7,147名(명), 捕虜(포로) 6,883名(명), 歸順(귀순) 172名(명)의 戰果(전과)를 올려 일단 全面的(전면적) 掃蕩(소탕)을 끝냈다. 以外(이외)에도 1952年(년) 여름에는 거제도(巨濟島) 捕虜收容所(포로수용소)에서 數次(수차)에 걸쳐 暴動(폭동)이 일어난 5月(월) 7日(일)에는 捕虜代表(포로대표)와 談判(담판)을 하려던 收容所(수용소) 少將(소장) Dodd(돗드) 준장(准將)이 捕虜(포로)들에게 拉致(납치)되는 等(등) 騷亂(소란)이 일어났으나 6月(월) 末境(말경)에는 完全(완전)히 秩序(질서)를 回復(회복)했다.
1951年(년) 7月(월) 休戰會談(휴전회담)이 開始(개시)된 後(후)부터 韓國戰爭(한국전쟁)은 世界(세계) 戰史上(전사상) 처음보는 所爲(소위) 제한공격(制限攻擊)이라는 戰法(전법)을 採擇(채택)하게 되었으니, 當事國(당사국)인 韓國(한국)의 反對(반대)에도 불구하고, 共産軍(공산군)과 UN forces(유엔군)은 함께 休戰(휴전)의 成立(성립)을 希望(희망)하여 서로 觀望(관망)하는 態度(태도)를 取(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戰鬪(전투)는 다만 進擊(진격)을 敢行(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固定(고정)된 戰線(전선)에서의 近距離(근거리) 高地(고지) 爭奪戰(쟁탈전)은 熾烈(치열)하였으니, 한 능선(稜線)·한 高地(고지)에서 退却(퇴각)과 奪還(탈환)을 20餘回(여회) 이상 거듭하는 게 보통이었다.
1952年(년) 8月(월)부터 共産軍(공산군)은 後方(후방)의 兵力(병력)과 裝備(장비)를 補强(보강)하여 8月(월) 5日(일) 國軍(국군) 首都師團(수도사단)이 지키는 金化(김화) 等(등) 北方(북방)의 首都高地(수도고지)에 攻擊(공격)하여 왔다. 典例(전례)없이 砲擊(포격)을 强化(강화)한 敵(적)은 1日(일) 平均(평균) 2萬發(만발)을 發射(발사)하여 人海戰術(인해전술)로 肉薄(육박)해 8月(월) 10日(일)까지 6日(일) 만에 7番(번)이나 高地(고지)의 主人(주인)이 갈리었다. 이러한 싸움을 9月(월) 28日(일)까지 繼續(계속)하여 我軍(아군)은 高地(고지)를 確保(확보)하니 29日(일)에는 開戰(개전) 이래 最大(최대)의 砲擊(포격)으로 4萬(만) 8千發(천발)을 首都師團(수도사단) 地區(지구)에 퍼붓고 다시 方向(방향)을 돌려 백마고지(白馬高地)에 攻擊(공격)해 왔다.
白馬高地(백마고지)는 北漢江(북한강) 東(동)쪽에 位置(위치)한 獨立高地(독립고지)로서 鐵衣三角地帶(철의삼각지대) 안의 交通路(교통로)를 制壓(제압)하는 戰略上(전략상)의 主要(주요) 高地(고지)다.
이 地帶(지대)는 國軍(국군) 第(제)3師團(사단)·9師團(사단) 및 美(미) 第(제)2師團(사단) 等(등)이 防禦(방어)하고 있었는데, 10月(월) 29日(일)까지 1個月(개월) 사이에 25回(회) 이상 高地(고지)의 主人(주인)이 바뀐 끝에 我軍(아군)은 한걸음 進擊(진격)하여 철마高地(鐵馬고지)까지 占領(점령)했으며, 이 동안의 接戰(접전)은 主(주)로 白兵戰(백병전)이었다.
한편 首都高地(수도고지)와 白馬高地(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狙擊稜線)에서도 10月(월) 初(초)부터 猛烈(맹렬)한 敵(적)의 攻擊(공격)을 받았는데, 이 稜線(능선)은 鐵衣三角地帶(철의삼각지대) 東側(동측) 要衝(요충)으로 敵(적)의 主要(주요) 陣地(진지)인 오성산(伍聖山)에 對峙(대치)하는 地點(지점)이다. 이 地帶(지대)는 國軍(국군) 第(제)2師團(사단)이 當(당)하고 있었는데 4日間(일간) 戰鬪(전투)에 17回(회)나 稜線(능선)의 主人(주인)이 바뀌었으나 12月(월) 21日(일) 狙擊稜線(저격능선)의 암석봉(岩石峰)에 攻擊(공격)해 오는 敵(적)을 네 番(번)이나 擊退(격퇴)시키자 平穩常態(평온상태)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1953年(년) 1月(월)로 들어가 敵(적)은 散發的(산발적)으로 消極的(소극적)인 攻擊(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이 해 3月(월) 5日(일)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이 死亡(사망)한 後(후) 4月(월) 6日(일), 5個月(개월) 만에 休戰會談(휴전회담)이 再開(재개)되고 11日(일)에는 傷痍捕虜(상이포로) 交換協定(교환협정)이 調印(조인)되니 벌써 休戰境界線(휴전경계선)의 決定(결정)을 討議(토의)하게 되었다.
休戰協定(휴전협정)이 決定的(결정적)으로 成立(성립)될 段階(단계)에 이르자 敵軍(적군)은 5月(월) 初旬(초순)부터 전전선(全戰線)에 걸쳐 攻勢(공세)를 取(취)해 왔다. 그리하여 5月(월) 12日(일) 中東部(중동부) 戰線(전선)에 約(약) 4萬(만) 5千(천)의 兵力(병력)을 投入(투입)하고 12時間(시간) 동안에 11萬(만) 8千發(천발)의 砲擊(포격)을 가해 約(약) 3km 後退(후퇴)했으며, 東部戰線(동부전선) 단장稜線(斷腸능선), 西部戰線(서부전선) 연천(蓮川)地方(지방)도 深(심)한 攻擊(공격)을 받았다.
7月(월) 16日(일)부터 我軍(아군)은 總攻擊(총공격)을 開始(개시), 休戰(휴전)을 앞두고 戰略上(전략상)의 要地(요지)들을 確保(확보)하려던 敵(적)의 攻擊(공격)을 擊退(격퇴)시키고, 20日(일)까지는 앞서 잃었던 地域(지역)의 大部分(대부분)을 奪還(탈환)했다. 드디어 1953年(년) 7月(월) 27日(일) 午前(오전) 10時(시), 停戰協定(정전협정)이 正式調印(정식조인)됨으로써, 3年(년) 1箇月(개월)에 걸쳐 慘憺(참담)했던 韓國戰爭(한국전쟁)은 終戰(종전)이 아닌 休戰協定(휴전협정)만이 調印(조인)되었고, 韓半島(한반도)에는 '第(제)2의 38線(선)'인 休戰線(휴전선)이 設定(설정)되어 民族分斷(민족분단)의 悲運(비운)을 또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大量殺傷武器(대량살상무기)
1952年(년) 2月(월) 中國(중국)의 毛泽东(마오쩌뚱)은 蘇聯(소련)의 Stalin:Сталин(스탈린)에게 電文(전문)을 보내 美國(미국)이 航空機(항공기)와 野砲(야포)를 利用(이용), 8次例(차례)에 걸쳐 細菌(세균)武器(무기)를 使用(사용)했다고 主張(주장)했다.
1952年(년) 2月(월) 22日(일), 北韓(북한) 外務省(외무성)은 美國(미국)이 韓國(한국)에서 細菌戰(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는 聲明(성명)을 發表(발표)했다. 1952年(년) 1月(월) 28日(일)부터 美軍(미군) 飛行機(비행기)가 細菌(세균)에 感染(감염)된 昆蟲(곤충)을 大量(대량)으로 韓半島(한반도) 上空(상공)에 撒布(살포)하고 있다면서 United Nations(유엔) 側(측)에 强力(강력)하게 抗議(항의)했다.
1952年(년) 3月(월), 中國(중국)의 周恩来(주은래) 總理(총리)는 美軍(미군) 飛行機(비행기)가 中國(중국)의 華北地域(화북지역) 및 滿洲(만주)에서 細菌戰(세균전)을 遂行(수행)하고 있다고 發表(발표)하며 美國(미국)을 批判(비판)했다.
當時(당시) 中國軍(중국군)은 北韓軍側(북한군측)에서 發病(발병)한 傳染病(전염병)과 關聯(관련)해, 美軍(미군) 操縱士(조종사) 戰爭捕虜(전쟁포로)들에게서 細菌武器(세균무기)를 使用(사용)했다는 陳述(진술)을 받아냈지만, 이들은 釋放(석방)되어 美國(미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陳述(진술)을 飜覆(번복)했다.
英國(영국)의 生化學者(생화학자)인 Joseph Needham(조지프 니덤)을 團長(단장)으로 하는 國際科學者協會(국제과학자협회) 公式調査團(공식조사단)이 이와 關聯(관련)한 照査(조사)를 하여, 1952年(년) Needham(니덤) 報告書(보고서)를 作成(작성)했다. 美軍(미군) 飛行機(비행기)가 投下(투하)한 生物武器(생물무기) 爆彈(폭탄) 寫眞(사진) 等(등) 200餘(여)가지 證據資料(증거자료)가 添附(첨부)된 670 Page(페이지) 報告書(보고서)로, 2015年(년) 6月(월) 最初(최초)로 原文(원문)이 公開(공개)되었다.
2010年(년) 3月(월) 17日(일) Al Jazeera(알자지라) 放送(방송)은 美國(미국) 國立文書保管所(국립문서보관소)에서 入手(입수)한 美國(미국) 合同參謀本部(합동참모본부) 命令書(명령서)를 公開(공개)했다. 1951年(년) 9月(월) 21日(일)에 作成(작성)된 이 文書(문서)에는 "作戰狀況(작전상황)에서 特定病原體(특정병원체)의 效果(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大規模(대규모) 現場實驗(현장실험)을 始作(시작)할 것"을 指示(지시)했다.
MacArthur(맥아더) 將軍(장군)은 中國(중국) 滿洲地域(만주지역)에 核攻擊(핵공격)을 加(가)함으로써 中國(중국) 支援(지원)을 遮斷(차단)하고 戰勢(전세)를 逆戰(역전)시키려고 했다. 核武器(핵무기) 26發(발)을 1次(차)로 北韓(북한)과 滿洲(만주)에 投下(투하)하자고 主張(주장)했다. 當時(당시) Truman(트루먼) 大統領(대통령)도 韓國戰爭(한국전쟁)에서의 核武器(핵무기) 使用(사용)을 主張(주장)했다.
休戰協定(휴전협정).
李承晩(이승만)은 1951年(년) 6月(월) 9日(일) 休戰(휴전)의 決死反對(결사반대)를 宣言(선언)하였고 6月(월) 27日(일) 蘇聯(소련)의 休戰案(휴전안)을 拒否(거부)하였다. 1951年(년) 7月(월)에 休戰會談(휴전회담)이 開始(개시)된 後(후) 世界戰爭(세계전쟁) 史上(사상) 처음 보는 制限戰爭(제한전쟁)(休戰(휴전)이 되면 各其(각기)占領地域(점령지역)에서 國境(국경)이 定(정)해지는 條件(조건)으로 싸우는 戰爭(전쟁)이 벌어졌다.
1951年(년) 9月(월) 20日(일) 李承晩(이승만)은 休戰(휴전) 受諾(수락)의 前提條件(전제조건)으로 中國(중국) 人民支援軍(인민지원군) 撤收(철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武裝解除(무장해제), United Nations(유엔) 監視下(감시하) 總選擧(총선거)를 要請(요청)하였다.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 問題(문제)는 이미 1952年(년) 1月(월) 27日(일)에 妥結(타결)되었으며, 1952年(년) 5月(월)에 이르러선 捕虜交換(포로교환) 問題(문제)를 除外(제외)하곤 거의 大部分(대부분) 議題(의제)에 合議(합의)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 中(중) 2年(년) 동안 이렇다 한 成果(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의 介入(개입)으로 戰線(전선)이 固着化(고착화)하자,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을 負擔(부담)스러워한 美國(미국)은 現狀維持(현상유지) 次元(차원)에서 休戰協定(휴전협정)을 推進(추진)하였다. 蘇聯(소련)이 部分的(부분적)으로 參戰(참전)하자, 世界(세계) 여러나라들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이 머지않아 冷戰體制(냉전체제)와 韓國(한국)의 統一(통일)을 위한 第(제)3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可能性(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UN forces(유엔군)과 中國(중국) 人民解放軍(인민해방군)은 얼른 이 韓國戰爭(한국전쟁)을 中斷(중단)하고, 休戰(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美國(미국)은 Soviet union(소비에트 聯邦(연방) 및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側(측)과 休戰(휴전)을 論議(논의)한다. 1952年(년) 3月(월) 李承晩(이승만)은 分斷狀態(분단상태)에서의 休戰(휴전)은 韓國(한국)에 대한 “死刑宣告(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主張(주장)하며, “民族國家(민족국가)로 生存(생존)하기 위해 單獨(단독)으로라도 繼續(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强調(강조)했다.
徹底(철저)한 反共主義(반공주의)를 志向(지향)하였던 李承晩(이승만)은 北進(북진)을 固執(고집)하며 休戰(휴전)에 協助(협조)하지 않았다. UN forces(유엔군)과 韓國軍(한국군)이 反擊(반격)하였고 人民軍(인민군)을 鴨綠江(압록강)까지 北(북)쪽으로 물리쳤을 때, 李承晩(이승만)은 韓國(한국)을 分斷(분단)시킬 여러 번의 休戰提案(휴전제안)에 同意(동의)하기를 拒絶(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聯合國(연합국)들로부터 人氣(인기)를 잃게 되었다. 李承晩(이승만)은 United Nations(유엔)의 도움으로 統一(통일)된 韓國(한국)의 指導者(지도자)가 되기를 希望(희망)하였기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정부)를 完全(완전)히 除去(제거)하는데 妨害(방해)가 되는 어떤 協定(협정)에도 反對(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에 對應(대응)하여 좀 더 强力(강력)한 方法(방법)이 使用(사용)되어야 한다고 主張(주장)하였고 美國(미국)이 爆擊(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年(년) 3月(월) 5日(일) Stalin:Сталин(스탈린)의 死亡(사망)으로 休戰會談(휴전회담)은 새로운 局面(국면)을 맞게 되어, 1953年(년) 3月(월) 19日(일) 蘇聯(소련) 內閣(내각)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을 政治的(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決定(결정)을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과 北韓(북한)에 通報(통보)하면서 負傷捕虜(부상포로)의 우선 交換(교환)에 同意(동의)하도록 指示(지시)(또는 要請(요청)했다.
1953年(년) 5月(월) 30日(일) 李承晩(이승만)은 Eisenhower(아이젠하워)에게 보낸 親書(친서)에서 다시 韓美相互防衛條約(한미상호방위조약)을 要求(요구)하였다. 李承晩(이승만)은 休戰協定(휴전협정)을 妨害(방해)할 目的(목적)으로 收監(수감)된 捕虜(포로) 中(중) 反共捕虜(반공포로)를 大規模(대규모)로 釋放(석방)했다.(1953年(년) 6月(월) 18日(일) 電擊的(전격적)인 反共捕虜(반공포로) 釋放(석방)에 激奮(격분)한 美國(미국)은 李承晩(이승만)을 除去(제거)할 作戰(작전)을 計劃(계획)한다.
主(주)로 開城(개성)과 金剛山(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戰鬪(전투)가 繼續(계속)되다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蘇聯(소련)을 通(통)해 休戰(휴전)을 提議(제의)하였고, UN forces(유엔軍(군) 側(측)의 承認(승인)으로 休戰(휴전)이 成立(성립)되었다. 1953年(년) 7月(월) 27日(일) 22時(시)에 板門店(판문점)에서 休戰協定(휴전협정)이 調印(조인)됨으로써 3年(년) 1個月(개월) 만에 韓國戰爭(한국전쟁)은 休戰(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으며, 現在(현재)까지 繼續(계속)해서 效力(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休戰協定(휴전협정) 以後(이후) 李承晩(이승만) 大統領(대통령)은 다시 Seoul(서울)에 올라와서, 休戰協定(휴전협정) 4條(조) 60項(항)은 協定締結(협정체결) 後(후) 3個月(개월) 안에 韓半島(한반도) 問題(문제)의 平和的(평화적) 解決(해결)을 위한 高位級(고위급) 關係國(관계국) 政治會議(정치회의)를 開催(개최)할 것을 雙方政府(쌍방정부)에 建議(건의)했다. 直後(직후)인 1953年(년) 8月(월) 28日(일) 第(제)7次(차) United Nations(유엔) 總會(총회)는 United Nations(유엔) 總會(총회) 決議(결의) 第(제)711號(호)를 通(통)해 休戰協定(휴전협정)을 認准(인준)하고, 協定(협정) 4條(조)60項(항)이 建議(건의)한 대로 韓半島(한반도) 統一(통일)을 위한 政治會議(정치회의)가 開催(개최)되는 것을 歡迎(환영)한다고 宣言(선언)했다.
餘派(여파)
大韓民國(대한민국)을 비롯한 世界(세계) 大部分(대부분)이 北韓(북한)이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를 共産化(공산화)하기 위한 次元(차원)에서 38度線(도선) 全域(전역)에 걸쳐서 大韓民國(대한민국)에 대한 武力(무력) 侵攻(침공)을 敢行(감행)하였다는 南侵(남침)(南(남)으로 侵掠(침략)함)說(설)을 定說(정설)로 보는 가운데, 3年(년) 1個月(개월)에 걸친 韓國戰爭(한국전쟁)은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를 廢墟化(폐허화)했고, 參戰(참전)한 外國(외국)의 兵力(병력)에까지 極甚(극심)한 害(해)를 입었으며, 이때 使用(사용)된 爆彈(폭탄)의 數(수)는 不分明(불분명)하지만 1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은 그밖에도 約(약) 20萬名(만명)의 戰爭(전쟁) 未亡人(미망인)과 10餘萬名(여만명)이 넘는 戰爭孤兒(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千餘萬名(천여만명)이 넘는 離散家族(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工業施設(공업시설)이 破壞(파괴)되어 經濟的(경제적), 社會的(사회적) 暗黑期(암흑기)를 招來(초래)했다. 이번 韓國戰爭(한국전쟁)은 美國(미국)과 蘇聯(소련)을 비롯해 United Nations(유엔)과 醫療進(의료진) 그리고 中共軍(중공군)까지 參戰(참전)하면서 第(제)3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에 가까운 戰爭(전쟁)이었다.
蘇聯(소련)의 統計(통계)에 따르면, 北韓(북한)의 11.1%에 該當(해당)되는 113萬名(만명)의 人口(인구)가 戰爭(전쟁)을 通(통)하여 死亡(사망)하였고, 兩側(양측)을 合(합)하여 250萬名(만명)이 死亡(사망)하였다. 80%의 産業施設(산업시설)과 公共施設(공공시설)과 交通施設(교통시설)이 破壞(파괴)되었고, 政府(정부) 建物(건물)의 4分(분)의 3이 破壞(파괴)되거나 損傷(손상)되었으며, 家屋(가옥)의 折半(절반)이 破壞(파괴)되거나 損傷(손상)되었다.
韓國戰爭(한국전쟁)은 核武器(핵무기)를 除外(제외)한 當代(당대) 最新(최신)의 殺傷武器(살상무기)가 總動員(총동원)된 새로운 戰爭(전쟁)이었다. 戰爭(전쟁) 中(중) 美極東軍(미극동군)은 爆彈(폭탄) 46萬噸(만톤), Napalm Tan(네이팜탄) 3萬(만) 2,357瓲(톤), Rocket bomb(로켓탄) 31萬(만) 3,600發(발), Smoke rocket(煙幕(연막)로켓탄) 5萬(만) 5,797發(발), 機關銃(기관총) 1億(억) 6,685萬(만) 3,100發(발)을 쏟아 부었다. 韓半島(한반도) 全域(전역)이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生命體(생명체)들이 무수히 殺傷(살상)되었다.
3年(년) 동안 繼續(계속)된 이 戰爭(전쟁)으로 數(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大部分(대부분)의 産業施設(산업시설)들이 破壞(파괴)되는 等(등) 兩國(양국) 모두가 큰 被害(피해)를 입었으며, 大韓民國(대한민국)과 北韓(북한) 間(간)의 敵對的(적대적) 感情(감정)이 澎湃(팽배)하게 되어 韓半島(한반도) 分斷(분단)이 더욱 完固(완고)해지면서, 現在(현재)까지도 休戰線(휴전선)에 依(의)한 分斷對峙(분단대치) 狀態(상태)를 維持(유지)하고 있다.
休戰協定(휴전협정) 以後(이후)의 衝突(충돌)
休戰協定(휴전협정) 以後(이후) 크고 작은 局地挑發(국지도발) 및 武力(무력) 衝突(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1968年(년)에는 北韓(북한)에서 金新朝(김신조)를 앞세워 靑瓦臺(청와대) 浸透(침투)를 試圖(시도)한 事件(사건)이 있었으며, 이 過程(과정)에서 많은 警察(경찰)과 民間人(민간인)을 包含(포함)해 人命被害(인명피해)가 있었다.
1976年(년), 板門店(판문점) 도끼 殺人事件(살인사건)이 일어나 駐韓美軍(주한미군) 將校(장교) 2名(명)이 死亡(사망)하였다
2013年(년) 10月(월) 24日(일) 平和問題硏究所(평화문제연구소) 創立(창립) 30週年(주년) 記念(기념) 國際學術會議(국제학술회의)에서 청샤오허(成曉河) 中國人民大學(중국인민대학) 敎授(교수)에 依(의)해 金日成(김일성)은 1965年(년) 第(제)2次(차) 韓國戰爭(한국전쟁)을 計劃(계획)했지만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이 拒否(거부)했다는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外交部(외교부)의 機密(기밀)解除(해제) 文書(문서)(No.106-01480-07)가 公開(공개)되었다.
1990年(년) 利後(이후)에는 西海(서해) 北方限界線(북방한계선) 附近(부근)에서 數次例(수차례)의 海上(해상) 武力衝突(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年(년)에는 延平島(연평도) 附近(부근)에서 第(제)1延平海戰(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年(년) 韓日(한일) World Cup(월드컵) 期間(기간) 사이에 비슷한 地點(지점)에서 第(제)2延平海戰(연평해전)이 勃發(발발)하였다.
2007年(년) 南北(남북) 頂上會談(정상회담)은 '終戰(종전)'을 宣言(선언)하는 問題(문제)를 推進(추진)하기 위해 서로 協力(협력)해 나가기로 하였으나, 李明博(이명박) 行政府(행정부) 以後(이후) 狀況(상황)이 急變(급변)하여 北韓(북한)의 核實驗(핵실험) 等(등)으로 因(인)한 持續的(지속적)인 葛藤(갈등)으로 南北關係(남북관계)가 梗塞(경색)되었다.
2008年(년)에는 金剛山(금강산)에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觀光客(관광객) 1名(명)이 被殺(피살)되는 事件(사건)이 일어나 金剛山(금강산) 觀光(관광)이 中斷(중단)되었으며, 2009年(년)에는 大靑海戰(대청해전)이 勃發(발발)하였다. 2010年(년)에는 천안함 被擊事件(피격사건)과 延平島(연평도) 砲擊(포격)이 發生(발생)하였다.
2013年(년) 3月(월) 5日(일) 北韓(북한)의 3次(차) 核實驗(핵실험)에 따른 United Nations(유엔UN)의 對北(대북) 制裁(제재) 推進(추진)과 韓美(한미) 合同(합동) 軍事訓鍊(군사훈련) Key resolve(키 리졸브)에 反撥(반발)해 北韓(북한)은 人民軍(인민군) 最高司令部(최고사령부) 代辯人(대변인) 聲明(성명)을 通(통)해 Key resolve(키 리졸브) 訓鍊(훈련)이 開始(개시)되면 休戰協定(휴전협정)을 白紙化(백지화)할 것이라고 宣言(선언)했으며 11日(일) 訓鍊(훈련)이 開始(개시)되자 停戰協定(정전협정)의 白紙化(백지화)를 宣言(선언)했다.
그리고 2006年(년), 2009年(년), 2013年(년), 2016年(년)에 잇따라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4次例(차례)의 核實驗(핵실험)을 强行(강행)하였고, 2015年(년)에는 西部戰線(서부전선)砲擊(포격)事件(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2016年(년)에는 4次(차) 核實驗(핵실험)인 最初(최초)의 水素彈(수소탄) 核實驗(핵실험)까지 强行(강행)하면서 南北關係(남북관계)가 더욱 梗塞(경색)되었다. 1年(년) 뒤인 2017年(년), 6次(차) 核實驗(핵실험)을 進行(진행)하고, missile(미사일)을 發射(발사)하여 狀況(상황)을 더욱 惡化(악화)시켰다.
2020年(년),西海(서해)에서 延平島(연평도) 公務員(공무원) 被擊(피격) 死亡(사망) 事件(사건)이 일어났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金正恩(김정은)은 謝過(사과) 2日(일)뒤 威脅(위협)하였다.
戰後(전후) 國家別(국가별) 實態(실태)
大韓民國(대한민국)
美國(미국)의 統計(통계)에 따르면, 60萬名(만명)이 戰爭(전쟁) 中(중)에 死亡(사망)하였고, 全體(전체) 參戰國(참전국)의 死亡者(사망자)를 모두 合(합)하면 200萬名(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韓國(한국)의 死亡者(사망자)는 百餘萬名(백여만명)이 넘으며 그中(중) 85%는 民間人(민간인)이다.
韓國戰爭(한국전쟁)으로 因(인)해 韓半島(한반도) 全體(전체)가 廢墟(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日本(일본)이 만들어 놓은 北韓(북한) 地域(지역)의 大規模(대규모) 工業地域(공업지역)은 絨緞爆擊(융단폭격)을 당해 完全(완전)히 燒失(소실)되었다.
漢江(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數(수)많은 戰爭孤兒(전쟁고아)가 量産(양산)되었다. 高麗(고려) 宮闕(궁궐) 滿月臺(만월대)는 美軍(미군)의 野戰病院(야전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bulldozer(불도저)로 파헤쳐 지기도 하였다.
韓國戰爭(한국전쟁)으로 因(인)하여 1000萬名(만명) 이상의 離散家族(이산가족)이 發生(발생)하였다. 그리고 많은 孤兒(고아)들이 發生(발생)했는데 이 中(중) 相當數(상당수)의 어린이들을 美軍(미군) 將兵(장병)들이 入養(입양)해서 키웠고 이들은 어른이 되자 韓國系(한국계) 美國人(미국인)이 되었다.
戰爭(전쟁)을 通(통)해, 大韓民國(대한민국)은 美軍(미군)의 駐屯(주둔)과 美國(미국)의 經濟支援(경제지원)으로 軍事的(군사적)으로는 戰後(전후) 共産勢力(공산세력)에 依(의)한 南侵(남침)을 막고 經濟的(경제적)으로는 成長基盤(성장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나, 戰爭(전쟁) 以前(이전)부터 있었던 反共主義(반공주의)가 國家(국가)의 理念(이념)으로 굳어지게 되어, 李承晩(이승만)의 獨裁政權(독재정권) 維持(유지)에 活用(활용)하였다는 視覺(시각)도 있다.
南北(남북)을 分斷(분단)시키는 境界線(경계선)이 戰後(전후) 새로 바뀌게 되었는데 開城市(개성시) 等(등)에 平野地域(평야지역)은 北韓(북한)으로 되고 太白山脈(태백산맥)을 中心(중심)으로 한 조금 더 늘어난 山岳地域(산악지역)은 南韓(남한)으로 定(정)해졌다. 軍事的(군사적)으로는 山岳地域(산악지역)이 平野地域(평야지역)보다 占領(점령)하기가 힘들어서 더 價値(가치)가 있다는 理由(이유)로, 軍事分野(군사분야)에서는 戰後(전후)의 占領(점령) 地域(지역)에 戰爭(전쟁) 以前(이전)의 占領(점령) 地域(지역)보다 더 意味(의미)를 附與(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에서는 Seoul(서울)特別市(특별시) 龍山區(용산구)의 戰爭記念館(전쟁기념관)을 비롯해 全國(전국) 16곳에 參戰記念碑(참전기념비), 參戰記念館(참전기념관), 公園(공원)을 造成(조성)하여 各國軍(각국군)의 參戰(참전)과 殉國(순국)을 기리고 있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戰爭(전쟁) 過程(과정)과 戰爭(전쟁) 以後(이후)에 金日成(김일성)은 韓國戰爭(한국전쟁)의 責任(책임)을 朴憲永(박헌영), 金武亭(김무정) 等(등) 自身(자신)의 政敵(정적)들에게 全部(전부) 뒤집어씌우고 肅淸(숙청)하여 自身(자신)의 政敵(정적)을 效果的(효과적)으로 除去(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金日成(김일성) 共産王祖體制(공산왕조체제)'의 基盤(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戰爭期間(전쟁기간) 동안 占領地(점령지) 住民(주민)에 대해 大規模(대규모) 虐殺(학살)을 恣行(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美軍(미군) 戰爭犯罪(전쟁범죄)照査國(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文書(문서)들에서 드러났다.
共産主義的(공산주의적)인 産業化(산업화) 卽(즉), 計劃經濟(계획경제)에 따른 産業化(산업화)를 더욱 急速(급속)하게 推進(추진)할 수 있는 契機(계기)를 얻었으나 急進的(급진적)인 短期政策(단기정책)들의 效果(효과)는 未備(미비)하여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經濟的(경제적)인 狀況(상황)이 1960年代(년대) 以後(이후)로 大韓民國(대한민국)과의 比較(비교)에서 매우 惡化(악화)되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當時(당시) 日本(일본)이 만들어 놓은 大規模(대규모) 工業團地(공업단지)가 爆擊(폭격)으로 因(인)해 完全(완전)히 燒失(소실)되었으며 韓國戰爭(한국전쟁) 直前(직전)까지 大韓民國(대한민국)보다 工業(공업)이 發展(발전)한 先進國(선진국)이였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被害(피해), 以後(이후) 族閥獨裁(족벌독재), 軍事力(군사력) 增强(증강)에만 集中(집중)하게 되어 1970年代(년대)에는 經濟(경제)가 逆轉(역전)되어 大韓民國(대한민국)보다 後進國(후진국)이 되었다.
北韓(북한)은 戰後(전후) 復舊(복구)를 위해 Soviet union(소비에트聯邦(연방)으로부터 10億(억) рубль(루블)을 支援(지원)받았으며,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億(억) 舒适(위안)을 支援(지원)받았다.
開城(개성)과 黃海南道(황해남도) 一部(일부) 地域(지역)을 戰後(전후) 新解放地區(신해방지구)라고 하며 거기 살던 住民(주민)들을 咸鏡道(함경도)로 가서 살도록 보내고, 咸鏡道(함경도)에 住民(주민)들을 新解放地區(신해방지구)로 보냈다. 그리고 開城(개성)쪽으로 脫北(탈북)이 힘들도록 開城(개성)에는 承認(승인) 番號(번호)가 있어야 出入(출입)이 可能(가능)하도록 바뀌었다.
The United States美國(미국)
美國(미국)은 韓國戰爭(한국전쟁)에 가장 많은 軍事(군사)를 支援(지원)을
하였고, William F. Dean(윌리엄 F. 딘將軍(장군)을 비롯한 相當數(상당수)의 美軍(미군)들이 戰爭捕虜(전쟁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過程(과정)에서 銃殺(총살)된 美軍(미군)의 숫자도 많았다고 한다. 約(약) 54,000名(명)의 死亡者(사망자)가 發生(발생)하였으며, 이는 Vietnam war(베트남戰爭(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數(수)이지만 훨씬 짧은 時期(시기)에 發生(발생)하였다.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은 共産主義(공산주의) 陣營(진영)을 지키고 美國(미국)이 主導(주도)한 國際聯合軍(국제연합군)에 敗(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新生國家(신생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國際的(국제적)으로 位相(위상)을 提高(제고)시켰다. 그리고 國際法上(국제법상), 大韓民國(대한민국)을 侵掠(침략)한 北韓(북한)을 支援(지원)함으로써, 國際的(국제적)으로 外面(외면)과 指彈(지탄)을 받았고, 이는 한동안 같은 思想(사상)을 共有(공유)하는 蘇聯(소련)과 關係(관계)가 密接(밀접)해지는 傾向(경향)을 낳았다. 또한 이 戰爭(전쟁) 以後(이후) 中國(중국)의 經濟(경제)는 疲弊(피폐)해져서 中國(중국) 共産黨(공산당)은 大躍進(대약진) 運動(운동)을 始作(시작)하게 되었다.
UN forces(UN軍(군)
UNforces(UN軍(군)에는美國(미국)以外(이외)에 England英國(영국), Canada(캐나다), Turkey(터키), Greece(그리스) 等(등)이 所屬(소속)되어 1萬名(만명) 이상을 派兵(파병)하였다. Turkish army(터키군)은 1萬(만) 4936名(명)을 派兵(파병)하였고, 724名(명)이 戰死(전사)하였다.
戰後(전후) 提起(제기)된 問題(문제)
戰爭犯罪(전쟁범죄)~居昌(거창) 良民虐殺(양민학살) 事件(사건)
朝鮮人民軍(조선인민군): 小委(소위) 人民裁判(인민재판)等(등)의 組織的(조직적)인 戰時(전시) 民間人(민간인) 虐殺(학살), Seoul National University(서울大學校(대학교) 附屬病院(부속병원) 虐殺(학살) 事件(사건), 咸興(함흥) 虐殺(학살) 事件(사건), 靈光郡(영광군) 虐殺事件(학살사건), 303高地虐殺(고지학살), 大田矯導所(대전교도소) 虐殺事件(학살사건)(相互間(상호간) 韓國軍(한국군): 漢江(한강) 人道敎(인도교) 爆破(폭파), 居昌(거창) 民間人(민간인) 虐殺事件(학살사건), 保導聯盟(보도연맹) 虐殺(학살), 山淸(산청)·咸陽(함양) 良民虐殺(양민학살) 事件(사건), 國民防衛軍(국민방위군)事件(사건), 大田矯導所(대전교도소) 虐殺(학살) 事件(사건)(相互間(상호간) 戰爭(전쟁) 中(중)의 拉北者(납북자), 捕虜(포로) 送還(송환) 問題(문제) 重複(중복)人員(인원)을 除外(제외)하고 拉北(납북)事實(사실)이 確認(확인)된 拉北者(납북자) 數(수)는 96,013名(명).으로 現在(현재)에도 生存(생존)하고 있는 拉北者(납북자)가 一部(일부) 있을 것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推定(추정)하고 있으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否認(부인)하고 있다.
또한 休戰(휴전) 後(후)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UN forces(유엔軍(군) 捕虜(포로)들을 送還(송환)했다고 主張(주장)하나 아직도 未送還(미송환) 國軍捕虜(국군포로)가 存在(존재)하고 있으며 美軍(미군)을 비롯한 UN forces(유엔軍)군) 들도 全部(전부)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推定(추정)된다.
美國(미국)의 韓國(한국) 援助(원조)
美國(미국)은 1945年(년) 8月(월) 15日(일) 韓國(한국)이 日本(일본)으로부터 解放(해방)한 直後(직후)부터 1970年(년) 5月(월)까지 20年(년) 동안 物資(물자)와 外貨(외화)不足(부족) 問題(문제)를 無償(무상)으로 支援(지원)해 주었으며, 특히 1950年代末(년대말)까지는 有一(유일)한 外資導入(외자도입) 窓口(창구)로 韓國(한국) 經濟(復興(경제부흥)에 美國(미국)의 韓國(한국) 援助政策(원조정책)이 가장 큰 寄與(기여)를 해주었다. 美國(미국)의 韓國(한국) 無償援助(무상원조)는 約(약) 44億(억) dollar(달러),有償援助(유상원조)는 約(약) 4億(억) dollar(달러)에 달하여 韓國(한국) 經濟(경제)의 投資財源(투자재원) 마련, 國際收支(국제수지) 赤字補塡(적자보전) 및 經濟成長(경제성장)에서 매우 重要(중요)한 役割(역할)을 했고 美國(미국)의 援助(원조)는 그 當時(당시) 家難(가난)했던 韓國(한국) 政府(정부) 豫算(예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gallery(갤러리)
Korean War Historical Images Morning Calm Weekly Newspaper Installation Management Command, U.S. Army
Signal Corps Photographs of American Military Activity Part 2 (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戰後(전후)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 電子史料觀(전자사료관)
中共軍(중공군) 介入(개입)으로 平壤(평양)에서 撤收(철수)하는 UN forces(유엔軍(군)을 따라 南下(남하)하기 위해 大同江(대동강) 鐵橋(철교)에 매달린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南下(남하)하기 위해 끊어진 大同江(대동강) 鐵橋(철교)를 오르는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6.25 戰爭(전쟁) 當時(당시) 大同江(대동강)을 건너 南下(남하)하는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3日(일)의 寫眞(사진). 江(강)물은 얼어붙기 直前(직전)이고, 얼음조각이 떠다녔다.
中共軍(중공군)의 南下(남하)를 避(피)해 얼음같이 찬 大同江(대동강)을 맨발로 건너는 避難民(피난민)들. 이들은 故鄕(고향)인 平壤(평양)을 떠나 自由(자유)를 찾아 南(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中共軍(중공군)의 南下(남하)를 避(피)해 大同江(대동강)을 건너 避難(피난)하는 避難民(피난민) 行列(행렬) 가운데 家族(가족)을 찾고 있는 韓國人(한국인) 兒童(아동): 1950年(년) 12月(월) 3日(일) 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中共軍(중공군)의 介入(개입)으로 신발을 벗어들고 얼음 조각이 떠 다니는 大同江(대동강)을 건너 南下(남하)하는 避難民(피난민)들: 1950年(년) 12月(월) 13日(일)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1950年(년) 12月(월) 19日(일) 興南(흥남) 撤收(철수) 當時(당시) 上陸艦(상륙함)에 오르기 위해 늘어선 避難民(피난민)들. 一部(일부)는 소달구지로 끌고온 物品(물품)들을 漁船(어선)에 싣고 있다.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1950年(년) 12月(월) 19日(일) 興南(흥남) 撤收(철수)를 위해 물에 뜨는 것은 무엇이 타려는 北韓(북한)住民(주민). 南韓(남한) 上陸艦(상륙함)의 甲板(갑판)과 여러 漁船(어선)에 가득찬 避難民(피난민) 들.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1951年(년) 1月(월) 8日(일) 江陵(강릉) 外郭(외곽)에서 暴雪(폭설)을 뚫고 南(남)쪽을 向(향)해 끝없이 이어지는 避難(피난) 行列(행렬)D. Helms 中士(중사) 撮影(촬영).
Seoul(서울)에서 生捕(생포)된 12살의 人民軍(인민군) 송종태 二等兵(이등병)과 美軍(미군) Desert B Knight 一兵(일병). 송 二兵(이병)은 "Bugs Bunny"를 닮았다고 해서 "Bugs"라는 別名(별명)이 붙었다: 1951年(년) 1月(월) 14日(일) Angus J Walker 少領(소령) 撮影(촬영)
其他(기타)
’特殊(특수) 慰安隊(위안대) 實績(실적) 統計表(통계표)’ 檀紀(단기) 4285年度(년도) (1952年度(년도) 陸軍本部(육군본부) 後方戰死(후방전사), 韓國戰爭(한국전쟁) 때 特殊(특수) 慰安隊(위안대)가 設置(설치)되었다. 蔡命新(채명신) 將軍(장군)의 證言(증언)에 依(의)하면 韓國軍(한국군)은 士氣(사기) 振作(진작)을 위해 60餘名(여명)을 1個(개) 中隊(중대)로하는 慰安婦隊(위안부대)를 서너(3.4.) 個(개) 運用(운용)했다.
關羽(관우)의 67代(대) 後孫(후손)이자 關平(관평)의 66代(대) 後孫(후손)인 관충금(關忠金)은 이 戰爭(전쟁)에 中共軍(중공군)의 資格(자격)으로 參戰(참전)하여 國軍(국군)과 UN forces(UN軍(군) 聯合軍(연합군)과 戰鬪(전투)를 벌였다. 職責(직책)은 一般(일반) 兵卒(병졸)이였다.
6.25 戰爭(전쟁)을 素材(소재)로 한 作品(작품)
Korea大韓民國(대한민국)
movie映畫(영화)
1961年(년) 《5人(인)의 海兵(해병)》
1965年(년)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
2003年(년) 《太極旗(태극기) 휘날리며》
2005年(년) 《Welcome to Dongmakgol웰컴 투 동막골》
2010年(년) 《砲火(포화) 속으로》
2011年(년) 《高地戰(고지전)》
2014年(년) 《國際市場(국제시장)》
2015年(년) 《西部戰線(서부전선)》
2016年(년)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
2019年(년) 《長沙里(장사리): 잊혀진 英雄(영웅)들》
drama(드라마)
1975年(년) 《戰友(전우)》
1983年(년) 《戰友(전우)》
1983年(년) 《3840 遊擊隊(유격대)》
1991年(년) 《黎明(여명)의 눈동자)》
1999年(년) 《왕초》
2003年(년) 《야인시대》
2006年(년) 《서울 1945》
2010年(년) 《戰友(전우)》
2010年(년) 《로드 넘버원》
game(게임)
2015年(년) 《6월 25일》
Overseas海外(해외)
movie映畫(영화)
1957年(년) 《전송가》
1970年(년) 《매시》
1981年(년) 《오, 인천》
2017年(년) 《아일라》
drama(드라마)
1972年(년) 《매시》
|
첫댓글 이승철~목 2021-04-22 오후 6:41 ~ 참 좋은 자료입니다. 이 자료 저장 할 수 있게 보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