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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 19] 유식의 역사와 사상 / 정병조
유식불교는 반야사상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유식불교를 전공으로 하는 교학자들이 많이 있었고 비록 유식학파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상가들이 반야와 유식, 이 두 가지를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만큼 불교교리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유식사상이다.
유식학파는 마음의 진실을 구명해 보고자 하는 불교학파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우리들 마음의 소산이라고 본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그러한 경험과 인식의 주체로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철학적인 규명에서부터 종교적인 성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하여 왔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그러나 부파불교를 거치게 되면서 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대신에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를 연구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에 더욱더 몰두하게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부파불교의 시대를 부처님의 법, 진실에 대한 해설의 시대라 하여 아비달마, 즉 법에 대한 해설, 법에 대한 주석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사물의 공성, 사물의 인과성으로 말미암은 무자성 을 주장하는 반야의 철학이 등장하게 된다. 반야의 철학은 누누이 강조된 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무의 소지가 없지 않았다. 즉, '사물이 공이며 무자성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는 등의 교설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릇된 허무론적인 견해가 싹틀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대승불교도들은 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하게 되었다. 공이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공이란 물론 그릇된 것을 끊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는 허무의 그 무엇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은 동시에 온갖 착하고 온갖 훌륭한 것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더 이상 보탤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서 역시 공일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진공묘유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이 마음이라는 것을 규명해 보기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유식학파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볼교 심리학 정도로 유식학파를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심리학 에서도 프로이드나 C. G. 융 등에 이르면서 심리구조를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이라 한다. 따라서 잠재적인 무의식을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다고 보고, 무의식의 연구에 집중을 하고 있다. 현대 심리학과 유식은 인간의 심리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방법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식은 무의식의 바다를 설명하는 태도와 그 내용이 현대 심리학과 상당히 다르다. 아무튼, 인간 의식의 근저에 마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마음의 변현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라고 보는 것이 유식불교의 입장이다.
이 유식학파가 역사적으로 시작된 것은 미륵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유식불교도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미륵이라는 이는 신앙대상인 미륵과 동일 인물 인가 다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대체로 신앙대상인 미륵보살이 바로 이 유식학파의개조라는 설이 있다. 또 그와 반대로 동명이인이라는 설도 있어서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다. 유식불교의 기본 전거라 할 수 있는 경전으로는 <해심밀경 >을 들 수 있 다. 원래 기원 전후한 시기에 중국에는 <심밀해탈경> 이라는경전이 이미 소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해밀심경>이라고 하는 불교경전이 등장함으로써 유식불교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여러 교리들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그 외에도 여러 논서들이 있다. <유가사지론> <중변분별론> <구경일승보성론> 등은 매우 중요한 불교의 전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식불교가 미륵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이론적 으로 완성시킨 인물은 무착과 세친이다. 이 두 사람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유식불교가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다. 유식불교는 무착, 세친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 해왔으나 나중에는 교리에 대한 차이점 때문에 유상유식과 무상유식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이 유상유식은 쉽게 말하면 우리들 인식의 주체가 되는 근본의식, 근원의식이 영원히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유식은 그 근원적인 인식 자체의 허망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원적인 의식은 붙잡을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 유상유식과 무상유식은 상당히 대립된 이론을 전개시 켜 나간적도 있다. 그래서 인도불교의 경우에는 특히, 나 란다를 중심으로 해서 유식학파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둘로 나누어진 흔적이 있다. 이것을 중국, 한국, 일본 등 극동으로 전해준 사람이 현장스님이다. 그는 구법 여행을 떠난 선봉에 섰던 인물이고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해 경전을 번역한 위대한 역경승인데, 그에 의해 도입된 유식불교가 법상종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우리가 유식불교의 역사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스님은 원측이다. 그는 경주 모량리 출신으로 7세기 초반에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출가하여 아홉 살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중국에서 유식불교의 대가로 성장하였으나 현장스님과 반대되는 의견을 전개하였다. 즉, 현장스님은 유식의 실천 수행 가운데 '오성각별설'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유식불교의 분류방법에 따라서 중생의 유형이 다섯 가지가 있으며, 그들이 모두 다 성불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들 가운데 성불이 쉬운 부류가 있고, 또 도저히 성불이 안 되는 부류도 없지 않다는 매우 현실적인 인간관이다. 그에 대하여 원측스님은 '일성개불설'을 주장하였다. 즉, '모든 중생들이 다 불도를 닦아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라는 매우 일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세부적인 몇 가지 교리적인 견해 때문에 원측스님의 교학이 중국에서는 크게 번성치 못하였던 적이 있었다. 학설로 보아서는 현장에 버금가는, 아니 그를 능가하는 위대한 유식 교학자였으나, 중국인들의 텃세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는 원측스님의 여러 저술들은 거의 없어져 버렸는데, <해심밀 경소> 10권 중 마지막 한 권이 티베트 대장경 속에 입장 되어 있는 것을 1920년경에 발견한 일을 들 수가 있다. 그래서 티베트 말로 번역되어 있었던 것을 다시 한문본으로 재번역하여 복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현장과 대립된 이론을 전개시켰던 원측이 얼마나 중국 대륙에서 박해를 받았던가 하는 것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밖에 신라의 위대한 유식불교 관계의 교학승려로는 '태현', '경흥' 등 들수있다. 그들은 모두 중국 유학의 경험은 없지만 중국의 유식교학을 능가하는 탁월한 저술들을 많이 썼다. 그리고 신라의 중후기에 유식불교를 크게 번성시키는 주요 역할을 하였다.
<삼국유사> 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경주 남산에 있는 용장사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그 용장사에서는 미륵을 주불로 모셨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유식불교의 개조를 미륵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법상종 계통에서 주로 미륵을 신앙하고 있었던 관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유식불교의 중심사상은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다 체계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마음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외부의 객관대상을 인식하는 주체로써 여섯 가지를 상정한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이다. 눈을 통하여 외부대상을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느끼고 몸으 로 감촉을 느낀다. 그런데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섯 번째인 의식, 즉 마음에 의해서 통괄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보았을 때 동일한 사물을 보았는데도 어떤 때에는 좋다고 느껴지고 다른 때에는 싫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사실, 고향에 있는 느티 나무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느티나무가 그 생김이 다른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서울 시내의 느티나무가 더 잘 생기고 더 푸를 수도 있다. 요컨대, 모든 외부대상을 인식하는 주체가 되는 이 감각기관은 그 자체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다섯 가지의 감각을 통솔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이다. 유식불교도들은 이 마음의 단계를 제6 의식, 제7마나스, 제8아뢰야라고 상정하였다. 제6의식은 안. 이. 비. 설. 신까지가 다섯이므로 여섯 번째인 마음을 의식이라 한 것이다.
이 제6의식을 통솔하는 것은 제7의식 또는 마나스이다. 이 제7의식을 통솔하는 근원적인 의식을 제8아뢰야라고 하여 마음의 단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이중에서 제7마나 스, 제8아뢰야가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이라는 개념과 흡사하고 제6의식이 의식세계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제7마나스와 제8아뢰야의 특수성을 깨달음으로써 마음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다
제7마나스는 유식불교의 설명에 따르면 집요한 이기적인 마음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즉, 어떤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서 주관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제7마나 스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요한 이기심, 에고의 의지들이 제7마나스를 이루는 결정적인 것이 된다. 제7 마나스에 의해서 제6의식이 움직여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이기적인 방향으로 행동하게 된다.
반면에 제7마나스를 통솔하는 것은 제8아뢰야이다.이것은 모든 의식을 포함한다고 하여 '함장식''이라고 표현하거나, 인간의식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점에서 '근본식'이라고 쓰기도 한다. 그것은 가장 근원적인 의식이다.
그런데 제8아뢰야식은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상적인 가치판단을 넘어서는 것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가 제7마나스를 움직이지만 제7 마나스는 이기적인 마음에 의해 움직여지게 된다. 이 이기적인 제7마나스가 제6의식을 통솔하고 이와 같이 결정된 제6의식이 우리들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제8아뢰야의 바다를 이해하고 깨달음으로써 완벽한 해탈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데 어떤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예컨대 이렇게 생각해 보자. 바다! 그렇게 말하면 바다를 연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바다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바닷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사람이 생각하는 바다, 또 바다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쓰라린 이별을했던 사람이 생각하는 바다.....그 모든 바다가 다 다르다. 바다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도리가 없다.
과학자에게 바다를 물어보면 이렇게 그는 대답할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 보고로서 온갖 보물과 양식이 될 만한 것이 다 갖추어진 것이 바다라고. 또 어부에게 바다란 고기를 잡고 생활의 터전이 되는 곳일 따름이다. 이 모든 바다는 우리들 의 마음속에 있을 따름이다.
이것을 유식불교에서는 '일수사견'이라고 말 한다. 물은 하나인데 견해가 네 가지라는 뜻이다. 똑같은 물이지만 물고기에게는 사는 곳이고, 사람은 마시는 것이며 아귀나 지옥에 사는 중생들은 피고름으로 본다고 한다. 이와 같이 똑같은 물이지만 그 물에 대해 견해가 달라진다. 즉,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그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에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근거는 없다. 모든 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을 따름이다. 이것을 '일체종자심식 '이라고 말한다. 일체의 종자가 우리들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이다.
제8아뢰야식의 근원적인 마음의 바다를 이해했을 때 해탈할 수 있다고 설명했으나 이 근본적인 제8식은 잘 보여 지지도 않고 잘 알려지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제6의식이 우리들 마음의 진실인 줄로 착각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제6의식을 조절하는 제7의식이 에고 의식으로 인하여 반드시 나쁜 방향으로만 변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창적인 면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제7마나스라고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될 때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지만 선하게 발전시킬 때에는 좋게 발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 쉽게 생각해 보자. 몹시 더운 여름날에 난로불을 피워놓고 외투를 입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을 있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의 한 시간이 더 짧고 더 길겠는가? 시속 100km의 속도를 가진 두개의 기차가 교차할 때 앉아있는 우리는 시속 100km로 달리지만 시속 200km의 속도감을 느낀다. 시속 100km가 교차될 때 느끼는 감정의 변화 때문이다.
인생이라 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참되게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똑같은 일년이라는 세월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종자심식이란, 근원적인 우리들의 현실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의식구조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또 제8아뢰야식에 대해서는 흥미 있는 설명이 있다. 이것을 '함장식' 이라고 말했는데, 그 까닭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용섭, 용납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우리들 전생의 업연까지 모두 포용하고 있는 것이 제8식이다. 그래서 이러한 설명을 할 수도 있다. '어디서 훌륭한 분이 법문을 한다면 가서 들으라. 설령 그 말씀의 뜻을 몰라 졸았을지라도 의식세계 속에는 침잠되기 때문이다.'라고, 또 유식불교에서 자주 예로 드는 것이 있다. 안개비 속을 걸어가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옷이 젖는다. 또 검은 연 탄을 손으로 잡을 때 손이 검어지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와 같은 것을 훈습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외부대상의 성질이나 분위기 등이 우리 속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놀더라도 법당에 가서 놀고 장난을 치더라도 부처님 곁에 가서 하라. 그래야 불법이 몸에 저절로 배어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의 모든 것들을 함장한다는 뜻에서 제8아뢰야식 또는 함장식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제8아뢰야식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 이것이 선악의 피안을 초월하고 있다는 가르침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져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근본의식을 잘못 썼을 때 우리는 악마와 같은 존재로 변할 수도 있다. 동시에 우리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인격을 완성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제8아뢰야식이라는 근원적인 의식 속에는 이를 테면 악마와 천사가 공존한다고나 할까? 그 모든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근본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유식불교는 이 근본적인 제8식의 발견, 그리고 그 추구를 통해서 진실한 의미의 해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