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쎄시봉 - 웨딩 케잌(1988)
통기타 1세대 -
1960년대초무교동 쎄시봉 ▷ 1969년도부터 명동쎄시봉 ▷ 1970년YWCA청개구리의 집
통기타 2세대 -
73년 무교동쉘브르 ▷ 75년11월 명동쉘브르(이전)
이렇게 흘러 기라성같은 통기타 가수들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후반 대학가요제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나기 이전까지 청바지, 맥주, 통기타 시대를 열었다
◆ 1960년대 후반의 무교동 쎄시봉
무교동 쎄시봉(C'est Si Bon:아주좋다,멋지다)
1950년대 충무로에서 음악감상실 개업
1960년대 초 무교동 낙지골목(현 SK건물자리)으로 이전
그당시 음악감상실 쎄시봉 입장료는 40원(짜장면값30원)이였고 MC는 이백천, 정홍택씨 이벤트로는 신안가수선발대회, 시인과의만남, 스타와의만남, 매주금요일밤에는 "대학생의밤" 행사가 열렸다한다.
조영남의 등장 -
매주금요일 대학생의밤 행사에 MC였던 이백천씨가 개인일로 당일 MC를 홍익 캄보 보컬그룹 홍익대생인 이상벽(ROTC복장)에게 대신 맡아달라 했다고 한다. 이상벽씨가 음악, 문학이야기등 밑천이 달리자 "여기 대학생중에 누구 노래할사람 있나?" 라고 즉석 제안했고 구석에서 대학생 몇명이 조영남(당시 서울 음대 재학중)의 옆구리를 쿡쿡지르면서 "너가 나가보라"라고 해 머리를 긁적이며 더벅머리 조영남이 무대에 올라와서 트로트를 성악발성으로 불렀는데 대박이었다고.
이후 조영남은 쎄시봉라이브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송창식의 등장 -
송창식은 대학생은 아니었으나 이 대학교, 저 대학교 다니며 기타치고 노래했는데 주로 홍대잔디밭에서 많이 불렀다.
이상벽은 쎄시봉의고정 MC가 되어 홍대에서 기타치면서 놀던 송창식에게 '숙식만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쎄시봉 무대에서 기타치면서 처음 부른 노래가 오페라 아리아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였는데 청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송창식도 서울예고에서 성악전공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OST 를 맡아 왜불러, 고래사냥등을 노래하여 히트했다. 그외 싱어송라이터로서 수많은 노래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윤동주의 6촌동생 윤형주는 연대의대 재학시절 생물학과 이장희와 함께 대학 보컬 '라이너스'에서 같이 활동하다 쎄시봉의 "대학생의 밤" 행사에서 발탁, 쎄시봉에 합류했다.
윤형주 -
1969년 트윈폴리오 결성(송창식,윤형주,이익균)이후 하얀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등 히트곡을 양산하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팀해체후 각각 솔로로 데뷔 CM송 제작을 많이했다. 당시 귀공자 타입의 외모로 여성팬이 많았다
이장희 -
1974 최인호 소설 '별들의 고향' OST를 맡아 한잔의추억,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잊혀진 사람 등을 히트시키고, 쎄시봉에서 영시낭송으로 여학생들한테 인기탑이였다.
별들의 고향 명대사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홍대출신 MC 이상벽 소개로 홍익 캄보 보컬 멤버 강근식과 듀엣으로 활동했다.
김세환 -
윤형주가 연대 의대 2년 수료후 경희대 의대로 전학해서 당시 신문방송학과 다니던 김세환을 1971년 별이빛나는밤에 소개한후 쎄시봉에 합류한다.
한대수 -
유복한 가정의 한대수는 미국이민중 미국의 포크음악을 배워서 희피, 장발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귀국하여 쎄시봉에 합류했다.
◆ 당시 명동 쎄시봉 간판
1969년 5월경 무교동 쎄시봉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
1970년대초 명동 쎄시봉이 다른 사장님에 의해 다시 개업해 명동 통기타 시대가 열린다.
여기엔 통기타1세대인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한대수, 박상규, 서유석, 정훈희, 김민기, 양병집, 강근식, 전유성등 출연.
◆ 1969년도 명동 오비스캐빈의 등장
원래 심지다방을 운영하던 자리에 인테리어를 새로 단장해서 맥주홀인 오비스캐빈이 문을 연다.
여기엔 쎄시봉에서 이미 유명세를 탄 통기타가수들이 대거 출연한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도향, 서유석, 양희은, 신중현, 키보이스, 히식스, 펄씨스터스, 김추자 등 통기타 1세대 가수들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197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냉전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극도의 불안감이 팽배했던 당시, 자유와 평화를 외치는 반전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끓어올랐다. 그 중심에는 청년들이 있었다. 청년들을 하나로 만든 것은 모던포크와 록 같은 새로운 음악이었다.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 분위기가 극에 달했던 답답한 현실에 당대의 젊은이들은 숨이 막혔다. 탈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 문화적 돌파구의 멍석을 서울 중구 명동1가 1-1에 위치한 서울YWCA에서 깔아 주었다. 한국 포크의 성지,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으로 평가받는 명동 ‘청개구리의 집’이 탄생되는 시대적 배경이다. 1970년대는 기성세대들을 뒷방으로 물러나게 만든 청년들이 대중문화를 주도했던 새로운 시대였다. 청년문화는 흔히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로 대변된다. 그 세 가지 키워드로 당대의 청년문화 전체를 풀어낸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만 그 중심에 통기타와 포크송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금과는 달리 당대의 젊은이들은 놀 공간이 변변치 못했기에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적었다. 이에 서울YWCA는 청소년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급한 대로 직원식당을 개조해 주일을 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7∼9시 2시간 동안 개방했다. 43년 전인 1970년 6월 29일의 일이다.
처음 서울YWCA의 의도는 달랐다. 저소득층의 젊은이와 외국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 그리고 지방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에게 싼값으로 숙소를 제공하는 유스호스텔과 비슷한 성격의 숙소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기금이 확보되지 않아 젊은이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라도 제공하고자 안뜰 구석 큰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있던 단층 건물을 청개구리의 집으로 개조했던 것. ‘청개구리’라는 이름은 물가에 어울리는 버드나무의 이미지, 젊은이의 반항정신, 끊임없는 도약의 의미였다.
60평이 넘는 넓은 실내 바닥에는 녹색 카펫을 깔았고 입장하는 사람은 모두 신발을 벗게 했다. 메뉴는 단 한 가지 콜라뿐이었다. 콜라 한 잔 값으로 99원을 내면 누구나 입장이 가능했다. 오후 7시 개장해 9시까지 운영된 청개구리의 집이 처음 오픈했을 때는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음향·조명시설도, 심지어 방석도 없었다. 창고에 카펫만 깔아놓은 소박한 풍경이었다.
손님 중에 기타를 들고 와 노래하는 친구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이동할 수 있는 얕고 둥근 무대 옆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이후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면서 천장과 벽도 모두 푸른색으로 칠해졌고 유리창마다 온통 연꽃잎이 그려져 있어 아늑한 연못 속에 들어온 분위기를 연출했다.
청개구리의 집은 일주일을 단위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같이 가요평론가 이백천이 운영했던 포크살롱 ‘아베크 李’, 상설 연극프로 목요극장, 언더그라운 시네마, 클래식 음악강습회, 요리강습, 명사와의 만남, 젊은이의 광장 토론회, 각 나라 민속축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의자도 없는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음악을 듣고 연극과 영화를 즐기며 문학과 낭만을 이야기했다.
외국 번안곡이 세상을 지배했던 그 시절, 이곳에서 우리 노래 창작운동의 불씨가 생성되었다. 아마추어 대학생 포크가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직접 그린 포스터를 붙이고 리사이틀 무대를 열기 시작했던 것. 1970년대 한국 포크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서울미대생 김민기와 재수생 양희은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양희은의 첫 모습은 화려한 의상이나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머슴애처럼 청바지, 청남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였다. 청개구리의 집 공연에 참여했던 원로 평론가 이백천의 기억이다. “양희은이 청개구리에서 리사이틀을 했던 날,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어요. 공연 후 어땠냐고 묻기에 ‘너무 흥분한 거 아냐? 좀 들떠 보였어’라고 말했는데 ‘나 노래 안 해! 다신 노래 안 해’라고 울음을 터트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달래느라고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스타로 떠오를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죠.”
당대 거의 모든 포크가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여성포크 창작앨범을 발표했던 방의경, 혼성듀엣 라나에로스포의 한민과 초대 여성 멤버 은희, 최안순, 남성듀엣 투코리언스의 김도향, 손창철,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영세, 사월과 오월, 이주원,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도 청개구리의 집 단골손님이었다. 이용복은 등장 자체만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방송 출연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제약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청개구리의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그림물감 값이 부족해 고교동창 김영세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대학가와 시내 음악다방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학업보다 음악에 더 큰 매력을 느낀 김민기는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 창단멤버가 되었다. 김민기는 고교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재동초교 동문인 양희은과 만나 ‘아침이슬’ 같은 시대를 상징하는 명곡들을 빚어냈다.
또한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평론가 최경식과 기독교방송 김진성PD의 지원으로 1971년 명반으로 회자되는 첫 독집을 발표했다. 서울음대 작곡과 여대생 김광희는 김민기의 1집과 양희은의 1, 2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힘을 보탰다. 청개구리 무대를 통해 다운타운 최고의 통기타 가수로 떠오른 양희은은 김민기와 이용복, 김광희의 도움으로 1집을 발표해 한국 포크의 대모로서 첫 행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모두 청개구리의 집이 만들어낸 소중한 인연들이다.
1970년 소박하게 오픈한 청개구리의 집은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6개월 후 유스센터 건립 모금을 위한 창작 포크송을 소개하는 페스티벌을 대강당에서 열었다. 평론가 최경식이 주관했던 이 공연에는 최양숙, 서유석, 김홍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서수남, 도비두, 라나에로스포, 에보니스, 아미고스, 미7사단 캄보밴드 등이 출연해 대성황을 이뤘다.
개관 1주년을 기념해 포크 페스티벌 ‘청개구리 사운드’를 개최했다. 이때는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용복, 쉐그린, 투코리안스 등이 참여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1년 남짓 운영 후 잘나가던 청개구리의 집은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적자 운영이었지만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이상 현상에 군사정권은 불안했을 것이다.
청개구리의 집은 10년마다 한 번씩 부활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1988년 ‘청개구리 마당’이란 이름으로 부활했었고 1990년대에도 이백천과 이정선이 주도해 부활 공연을 진행했었다. 디지털 세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지난 2003년에도 서울YWCA 바로 그 자리인 1층 마루홀에서 ‘청개구리 포크 콘서트’란 이름으로 부활했었다. 당시 부활 청개구리 공연은 아이돌의 댄스음악 일변도 대중문화에서 소외된 386세대 팬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그 시절 정통 포크가수들을 다시 불러내면서 시작된 일종의 대안문화운동이었다. 필자는 한국일보 기자 시절 1년 6개월 동안 이 공연의 운영자로 일한 인연이 있다.
당시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8시, 서울YWCA 1층 마루홀은 100석 규모를 훨씬 넘는 180∼200여 명의 중년층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때론 자리가 없어 무대 앞에 주저앉아 2시간을 버텨야 했지만, 불평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1970년대 당시 포크 열풍의 중심세대였던 청년들은 어느덧 삶에 지친 중년세대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한 달에 한 번 애오라지 포크음악에 취해 그들만의 문화를 만끽했던 것은 문화사각지대로 내몰린 소외감이 원동력이 되었다. 부활된 서울YWCA 청개구리 공연은 지친 중년들의 쉼터 역할을 넘어 포크송을 통해 젊은 세대들과의 교감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청개구리 1세대 서유석, 이용복, 김광희, 방의경부터 김의철, 윤연선, 현경과 영애 박영애, 양병집, 이정선, 그리고 김두수, 이원재, 이성원, 나팔꽃 동인, 이정미, 전경옥, 손지연, 박강수, 손병휘, 손현숙 등 통기타 가수들은 포크음악의 부활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특히 이틀에 걸쳐 진행된 고 김정호의 트리뷰트 공연은 지상파 8시, 9시 뉴스를 타고 소개돼 대성황을 이뤘다. 1년 6개월 이어진 부활 청개구리 공연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대중음악계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7080 음악 부활로 이어졌다.
‘젊은이들에게 보람 있고 즐거운 대화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취지로 생겨난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은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국민가요 ‘아침이슬’이 처음 발표된 한국 포크의 성지로 평가받는다. 지금은 대형건물이 들어서 사라졌지만 1층에 위치한 마루홀은 청소년들의 문화공간으로 여전히 그 역할을 이어 가고 있다.
▲ 1970년 6월 29일 싱어송라이터 김민기(오른쪽)와 최경식이 ‘청개구리의 집’에서 열린 창작 포크송 페스티벌에서 노래하고 있다.
양희은의 등장 -
이미 유명해진 송창식은 YWCA 청개구리집에서 활동중인 양희은이 너무 노래를 잘해서 자기가 노래하던 골든타임 10분을 할애해서 양희은을 대뷔시킨다.
청개구리의 집에서는 통기타치면서 노래하는 학생들이 많았다한다.
김민기, 박은희, 양희은, 해바라기, 이동원, 방의경, 이주원등 여기에서 그 유명한 아침이슬이 김민기에 의해 작사작곡되어 양희은이 불렀다.
쉘부르를 돌아서 광교쪽엔 "꽃잎"이라는 음악 감상실 겸 경양식 집에도 대거 출연, 꽃잎은 가수 김정호가 운영하던 레스토랑으로 DJ는 김학래와 임하룡이 번갈아가며 했으며 전유성이 연예부장이었다. 출연 가수는 임창제, 전인권, 이광조, 강은철, 이종용, 이문세, 시인과촌장(하덕규) 등이 출연했다.
◆ 1973년 이종환의 무교동 "쉘부르"
통기타가수 2세대들 무대, 코쟁이 이종환씨가 사장 겸 PD, DJ로 활동하면서 영화 '쉘브르의 우산'에서 따와서 "쉘부르"라는 음악감상실 개업한다. 이곳에서 청바지와 통기타, 맥주의 소위 청, 맥, 통 시대가 펼쳐진다.
여기엔 통기타 2세대 가수들이 대거 출연한다.
최성수, 채은옥, 김정호, 변진섭, 권태수, 김세화, 어니언스, 이문세, 전영, 신형원, 쉐그린, 박진광 등의 가수가 출연한다. 당시 DJ는 허참
명동의 '청맥통' 바람이 불어 무교동에서 명동진출을 고대하던 이종환씨는 쉘부르를 명동으로 1975년11월 이전한다.
여기 출연가수들도 통기타 2세대들로 이수만, 강은철, 위일청, 전영, 이문세, 남궁옥분, 신계행, 강승모, 양하영, 최성수, 하덕규, 김승덕, 윤태규, 권태수, 박상규 등이 출연하고 DJ는 개그맨 고영수 였다.
70년대 부터 "Singer Song Writer" 시대가 열린다 .
1969년 한대수에 의해 씽어송라이터 선구자가되어 행복의나라로, 물좀주소 등을 발표했고 YWCA, 청개구리의집의
김민기의 '친구'
양희은의 '아침이슬', '사랑해', '이루어질수없는사랑' 뚜아에무아(이필원,박인희)의 '약속', '그리운사람끼리' 김정호의 '하얀나비', '새벽길', '이름모를소녀' 등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
송창식의 '창밖에는 비오고요', '딩동댕', '지난여름' 등
윤형주의 '라라라' 등
이장희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등
백순진의 '화'
이연실의 '새색씨 시집가네'
김도향의 '벽오동 심은뜻은'
김광희의 '세노야'(양희은노래)
김태곤의 '아야우지마라'
4월과 5월, 이정선등
한국의 싱어송라이터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말 부터 대학가요제에 의해 통기타음악은 아마츄어 대학생가수들의 영향을 받아 쇠퇴하여 미사리 카페촌, 백운호수 등 변두리로 밀려났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위에 언급되신 분들 보다는 좀 후세대이지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도 많은 사연을 낳은 곳이라 긴글로도 다 담진 못했지만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