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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현재 미국‧영국 등 의료선진국의 예방 가능한 사망률은 15% 이하인 데 반해 한국은 무려 32.
6%에 달했다. 한국에서는 1/3에 가까운 응급환자들이 제때 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깝게 죽는다
는 얘기다. 이미 오래 전부터 되풀이되어온 현상이지만 국가도 국민들도 깊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
다. 이국종이 영국으로 연수를 떠나기 전인 2006년 가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중증외상센터 설
립 의지를 가지고 이국종에게 협조를 요청해왔다. 부산대학교는 중증외상센터 설립계획을 세우면서
이국종이 2005년에 학계에 제출한 논문을 많이 참조했다고 밝혔다. 이국종은 2004년 보건복지부에 <
전문 응급의료센터 건립案> 보고서를 제출한 뒤, 아무래도 보고서가 사장될 것 같아 그와 관련된 논
문을 여러 편 발표했던 것이다.
논문의 핵심은 중증외상센터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의료진과 환자들을 센터에 집중 배치하여 규
모의 경제를 이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국종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동차보험회사, 산업재해관
리공단 등의 데이터를 집중 분석하여 실효성 있는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중
증외상 환자의 규모를 파악한 뒤, 미국의 외상센터 운영기준을 대입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모든 종합병원에 환자를 분산할 게 아니라 몇 개 권역별 외상센터를 지정하여 그곳에 집중적으로 환
자를 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외상센터별로 중환자실 40병상, 일반병실 120병상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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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 담당자는 물론 아주대병원 관계자조차 읽지 않은 그 논문을 부산대학교병원에서 눈여겨
보고 있다가 중증외상센터 건립계획의 기초자료로 삼은 것이다. 이국종은 한달음에 내려가 조석주
교수와 함께 정부에 제출할 부산대병원의 <중증외상센터 건립계획案>을 작성하는 데 협력했다. 이
국종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국립대학에서 앞장서서 중증외상센터를 건립한다면 그 파급효과
가 매우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조석주도 진작부터 중증외상센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계획案이 올라가면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5
월 이국종은 영국으로 연수를 떠났었다.
이국종이 영국에서 1년 동안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중증외상센터에 대한 관심의 강도가 어딘
가 달라져 있었다.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 센터장은 전국 13개 병원을 대상으로 중증외상특성화센
터 사업을 의욕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부산대학교병원은 이국종이 협조한 덕분에 정부로부터 중증
외상센터 사업을 유치해놓고 있었다. 그 사이에 허윤정 국회 전문위원도 법적, 제도적으로 사업을 뒷
받침해오고 있었다. 여기에 의사 출신인 손영래가 보건복지부 공공의료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일반직
공무원들이 복지부동으로 일관하던 관가의 분위기도 일신되어 중증외상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국책
사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손영래는 경직된 관료들로부터 의사들에게 너무 협조적이라는
욕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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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보건복지부는 수도권 9개 병원을 ‘중증외상 특성화 후보센터’로 선정했다. 물론 아주대
병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직교수 한 명이 외상센터장을 맡고 이국종은 감투 없이 책임교수를 맡았
다. 아주대병원 응급외상센터는 1년차 전공의 1명, 응급구조사 1명, 간호사 1명, 행정요원 1명의 단출
한 식구로 출발했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외상센터마다 외상외과 전문의 10명 안팎에 그보다 훨씬
많은 전공의와 전담간호사가 배정되어 있었다. 갖춰야 할 장비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첫술에 배
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국가로부터 연간 1억 원을 보조받는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언젠가는
수천 배 결실을 맺을 터였다.
외상센터가 가동된 2009년 여름, 상계동백병원에서 유방외과를 전공한 박성진이 외상외과 일을 배우
고싶다며 이국종을 찾아왔다. 박성진은 외상외과 업무를 수련하는 한 달 동안 딱 한 번 집에 다녀오
고는 외출도 하지 않고 외상외과에 매달렸다. 그는 수술은 물론 온갖 험한 일을 도맡아 했다. 이국종
은 그가 전망 좋은 유방외과를 초개같이 버리고 그 험난한 외상외과를 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
다. 그러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만 국내에서 가장 많은 병상을 확보하고 있는 병원에서 아주대병원
을 찾아준 성의가 고마워 아낌없이 가르쳐주었다. 박성진은 밤을 새워 남학생의 파열된 내장을 수술
한 뒤 새벽에 백병원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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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이 돌아가자 부산대병원에서 군의관 출신인 정경원을 임상강사로 보내왔다. 조석주 교수는 장
차 부산대병원의 중증외상센터를 맡을 수 있도록 잘 가르쳐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경우 월급
은 부산대병원에서 지급하기 때문에 일손이 아쉬운 이국종으로서는 따로 부탁이 없어도 성심성의를
다해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정식으로 부임하기 전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인사하러 들린 정경원의 표
정에는 탐이 날 정도로 열의가 가득했다. 2010년 5월, 제대한 정경원이 외상센터에 합류하자 각중에
센터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9월에는 김지영이 코디네이터로 합류했다. 그녀는 1999년부터 아주대병원 응급실에서 8년을 근무한
뒤 5년 동안 행정업무를 보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었다. 빈 침상을 두고도 만원이라며 환자를 받
지 않거나, 출혈이 심한 환자를 간단한 봉합수술만 하고 돌려보내는 돌파리 의사들에게 질려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간호사 자격을 딴 뒤 밴쿠버의 한 병원에서 3년 동안 근무했었다.
그녀는 캐나다에 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해 몇 가지 정리하러 잠시 귀국했다가 이국종의 간곡한 요청
을 거절하지 못하고 눌러앉은 것이다. 연봉은 물론 인격적인 대우에서도 훨씬 유리한 조건을 포기한
그녀에게 이국종은 늘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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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망설였지만 일단 외상 코디네이터 자리를 맡은 김지영은 곧바로 캐나다와 미국에 산재해
있는 외상센터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무섭게 파고들었다.
“교수님. 외상센터와 관련된 한국 자료는 전혀 못 찾겠는데요. 방법이 없을까요?”
이국종은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자신이 쓴 논문 몇 편을 건네주었다. 국내 의료인이 작성한 자료
는 그게 전부였다. 지금까지 전문적으로 중증외상에 관해 연구한 학자나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김지
영은 자신의 응급실 경험과 캐나다에서 체험한 선진 시스템을 참조하여 오래지 않아 아주대병원 외
상센터 운영계획을 수립했다.
전력은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다. 중증외상 환자들은 대부분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
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환자를 많이 받을수록 적자는 누적되었고 국가 지원은 빈약하기 그
지없었다. 이국종은 오직 환자를 살려내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옆도 돌아보지 않고 한 달 내내 달려오
다가도, 월말 결산에서 누적된 적자 규모를 알게 되면 맥이 탁 풀리곤 했다. 병원 측에서는 눈엣가시
인 외상센터를 소 닭 보듯 경원시했고, 이국종은 보직교수들의 단골 술안주가 되었다. 그는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외상센터 팀원들에게 늘 미안할 뿐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