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의 역사를 5,000년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최초의 인류가 살아온 시간을 따지면 수십 수만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반도 최초의 고인류인 네안데르탈인부터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까지 지금의 한민족은 수많은 역사를 거치며 이 한반도를 지켜왔다.
그 한반도 가장 중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DMZ가 가로지르고 있고 그 DMZ를 중심으로 한반도 역사는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면서 성장해 왔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DMZ의 역사를 발견하는 것 단순한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다. 한반도 통일의 열쇠를 발견하는 역사가 될 것이다. (필자 주)
한반도 역사의 중심 DMZ - 목차
1. 한반도의 최초 주인 DMZ를 정복하다 1) 아슐리안 석기와 구석기인들 2) 농업의 시작을 알리다 3) DMZ를 점령한 고인돌
2.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들 1) 광개토대왕 강화도를 점령하다 2) 연천의 육로를 개척한 장수왕 3) 삼국 통일의 기반을 이룬 진흥왕
3. 통일 시대로 나가는 DMZ 1) 매초성! 당을 내쫒고 통일을 이룩하다 2) 개성의 왕건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다 3) 이성계 최영의 목을 베다
4. 성리학 조선문화를 꽃피우다 1)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사림파 2) 조선 최고의 천재 율곡 이이 3)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
5. 신화가 된 사람들 1) 미륵으로 태어난 궁예 2) DMZ에 잠들어 DMZ의 신이 되다 3) 한반도 최고의 장군신 최영! 4) 임꺽정 철원의 영웅이 되다
6. DMZ의 관리자 미국과 북한...머나먼 통일! | |
연천의 육로를 개척한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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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가 임진강 방어선을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호로고루성. [사진-최현진] |
광개토대왕 이후로 고구려는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 위치에 섰다. 이제 한반도에서 고구려에 대항할 국가는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의 힘은 중국의 중원을 넘보게 되었다. 광개토대왕 사후 장수왕은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우고 중국과 북아시아의 혼란을 틈타 다각적인 외교로 고구려 서쪽의 안정을 취하였다. 또한 북위를 견제함으로써 남방 백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도 하였다.
제위 15년이 되던 해인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시작한다. 평양성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하정책이 시작되었다. 승려 도림을 백제로 보내 장수왕은 백제를 혼란에 빠지게 한 후 하남위례성을 빼앗고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 지속적인 백제 공략은 고구려의 남방경계선을 충청도 충주 일대로 넓히게 된다. 신라에 대해서는 우월적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왕권에 대한 과도한 개입과 신라와의 영토분쟁 등으로 신라가 고구려를 배반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은 한반도 중심인 DMZ 지역과 한강 일대를 완전히 차지함으로써 실질적인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장수왕의 남하정책은 신라가 고구려에 반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백제 역시 수도를 빼앗기고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게 하였다. 장수왕 이후 한반도는 DMZ 지역을 중심으로 뺏고 빼앗기는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평양으로 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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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변에 설치된 고구려성인 당포성. [사진-최현진] |
장수왕은 427년 본격적으로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성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중국 북주서에는 ‘환인성’ 혹은 ‘평양성’으로 적고 있다. 당시 평양은 ‘왕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당시 평양의 의미는 ‘지금의 평양성’, 혹은 ‘임금이 머무르는 곳’ 두 곳을 지칭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 본기’나 ‘삼국사기’등에 나오는 평양은 왕이 머물렀던 곳으로 중국의 ‘환인성’에 가깝다. 이 평양천도 후에도 장수왕 등은 평소에는 환인성에서 정사를 살폈다. 오히려 지금의 평양은 평원왕 이후 장수왕 당시의 평양이었던 대성산에서 지금의 평양에 도읍을 옮기게 되면서 평양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와 관련해서는 이미 동천왕 때에 평양으로 천도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당시 동천왕의 평양성 천도는 자의적인 천도가 아닌 중국 위나라의 침범으로 인해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을 빼앗겨 평양으로 일시 천도를 감행한 것이다.
이후 이곳 평양성은 고구려의 왕들이 잠시 머무르는 행궁으로 고국원왕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백제와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고 소수림왕 역시 백제의 피해를 받은 곳이기도 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이곳 악학궁지의 능참배를 위해 대성산 아래 안학궁지에 왕도를 하나 더 건설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안학궁지에 장수왕이 머무르면서 ‘평양성’이 고유명사로 변하게 되면서 일대를 평양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단 두 개의 왕도를 건설하고 평양천도를 실시하면서 장수왕은 세 가지 이점(利點)을 얻게 되었다. 첫째는 교통의 요지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동강 일대는 황해로 나가는 길목으로 중국과 강화도를 통해 한반도 남단으로 들어가는 수운의 중심이었다. 또한 육로로는 과거 낙랑국의 중심지로 사방으로 연결된 육로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과거 일본의 사신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도 이 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중국과는 멀기 때문에 중국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두 번째 이점은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동강 일대는 전형적인 2년3작의 농업지역이다. 특히 비옥한 충적평야인 재령평야와 평양평야는 논과 밭의 혼합지역으로 각종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다. 따라서 쌀이 부족한 고구려지역에서는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를 가질 수 있었고 일반 평민들의 주식인 보리나 수수 등이 이 지역에서는 비교적 풍족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로 이해 국가경영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양천도로 인해 기존 귀족세력을 새롭게 개편할 수 있었다. 장수왕은 대성산성을 건설하고 광개토대왕이 아직 완성하지 못한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시조인 동명성왕의 능을 이곳 평양으로 이장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위서’에 따르면 평양 천도 후 장수왕은 “대신과 귀족들을 무수히 죽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즉 평양 천도를 계기로 이에 따르지 않고 왕권에 저항하는 귀족세력을 하나 둘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귀족회의의 의장인 대대로의 임기를 3년으로 줄이고 부왕인 광개토대왕을 ‘호태성왕’이라는 극존칭으로 표현하였다. 이와 함께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신라를 ‘동이’라 호칭하며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만들어 가기도 하였다.
남으로의 영토 확대
고구려의 천도를 남부지역 영토 확장으로 본 백제와 신라는 동맹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한때 고구려와 신라는 인질을 파견하는 등 불균등한 질서 속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그것은 양국의 백제 견제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과도한 신라 내정간섭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한 종속적 관계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더구나 450년 실직지방에서 일어난 신라 하슬라 성주의 고구려 변장 살해사건 및 이에 대한 고구려의 일정한 양보는 당시 신라의 분위기인 고구려와의 종속적 입장을 극복하려는 신라의 분위기를 반영하였고 백제와의 실질적 군사동맹이 형성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반면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신라와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입장을 보여주는데 이는 중원고구려비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의 대남진출을 보여주는 비석으로 여기에는 광개토대왕대 이후 고구려가 신라를 정치, 군사적으로 긴박해 두면서 일부 군사집단을 신라 영토에 상주하고 신라를 고구려의 군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당시 영토를 소백산맥 이남으로 표현하고 신라의 경우 경주 부근까지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세는 오히려 6세기 이후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펴는 계기로 나타나게 된다.
광개토대왕대에 큰 타격을 입은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을 실현시키면서 고구려의 공세방향이 신라에 편중되는 동안 어느 정도 세력을 만회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백제는 고구려의 남방을 다시 괴롭히게 된다. 또한 장수왕 60년인 472년에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에 고구려의 압력을 견제할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백제 토벌에 나서게 된다. 475년 승려 도림을 이용하여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킨 후 장수왕이 직접 백제의 위례성을 공략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로 하여금 웅진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세력권은 한강 이남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의 북부지역에까지 그 세력권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세력권이 아산일대로 옮겨지게 된다.
연천의 육로를 개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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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탄강가에 설치된 은대리성. [사진-최현진] |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가 백제를 공략하기 위한 기본 루트는 평양에서 신계를 거쳐 개성과 관미성을 연결하는 해로를 주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청도와 경기도 북부 등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의 성이 경기남부 지역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남하루트는 조금 바뀌게 된다.
일반적으로 개성까지의 길은 그대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개성에서 위례성이 있는 서울의 송파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길은 개성에서 직접 고양을 지나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성에서 연천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하게 된다. 이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과, 한국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공화국)이 서울을 점령한 루트가 같다. 한국전쟁 당시 왜 공화국은 탱크 등 대한민국보다 월등한 화력을 가지고 개괄지를 돌파하지 않고 연천을 돌아 의정부로 들어오는 산길을 택했을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탱크 등의 중화기가 임진강을 건너기에 편한 길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보통 강을 보면 상류에 비해 하류는 유속은 느리지만 강폭이 깊고 넓은 것이 특징이다. 임진강도 예외는 아니다. 고양과 파주 지역의 임진강을 보면 곡류는 없지만 강폭이 상당히 넓은 것을 볼 수 있다. 오두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공화국과 대한민국과의 거리는 평균 2Km 이상이다. 물론 짧은 곳은 800m 정도의 곳도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조류로 인해 밀물과 썰물이 나타나고 갯벌도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빠른 속도로 남하하기에는 불리한 점이 많다.
반면에 상류로 갈수록 유속이 빠르고 곡류가 발달되어 있지만 반대로 강폭이 좁고 낮은 곳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연천 지역을 흐르는 임진강이 상류는 아니다. 그러나 하류지역에서는 배를 타고 건너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여울목이 나타나는 지점이다. 따라서 공화국의 탱크 등 중화기가 별다른 저항없이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곳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개활지의 경우 목진지를 장악할 경우 이곳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쉬운 예로 고양시 덕양산의 행주산성에서 고양시와 서울시를 바라볼 경우 누가 어디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즉 편하기는 하지만 반대편의 입장에서도 매우 막기 쉬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쟁시 나를 노출시키면서 적의 습격을 받을 수 있는 지형을 공격루트로 설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이 일본군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덕양산의 목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천의 경우는 매우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먼저, 연천과 의정부 수유리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길은 산악지형으로 적군에 몸을 숨기기에 아주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울과 원산까지에 걸쳐있는 구조곡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경원선 철길이 바로 그것인데 철원을 거쳐 연천을 지나 의정부 서울로 들어오는 길에 산악지형 중에 평탄한 길이 뚫려있는 곳이다. 따라서 대량의 중화기가 서울까지 편하게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공화국이 한국전쟁 당시 서울로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지형적 특성에 있었다.
바로 이 길의 개척자가 고구려의 장수왕이다.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의 중심에는 기마부대가 있었다. 고구려의 기마부대는 다른 나라의 기마부대에 비해 중무장을 하여 속도에서는 다소 뒤처지는 점이 있었지만 돌격력과 상대방에 대한 위압감은 당대 기마부대 중에 최고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기마부대가 이곳 연천지역을 통하여 위례성이 있는 서울로 진격하기에는 최고의 이점을 가진 공격루트가 바로 연천 지역이었다.
이 남하루트에 지어져 있는 고구려의 성들이 호로고루성과 당포성 및 은대리성 등이다. 이 성들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사이에 두고 삼각형 모양으로 건립된 강안평지형성으로 고구려 남하루트의 최전방 지휘부에 해당된다. 이 성을 지나 의정부를 넘어 서울의 상계동과 연결된 아차산 길을 따라가면 바로 백제 위례성을 한강과 경계로 맞서게 된다. 아차산은 백제 위례성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거점지로 이곳을 빼앗기면 백제의 왕도는 바람 앞에 촛불신세로 전락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장수왕은 연천을 통한 남하루트를 개척한 후 곧바로 아차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백제의 개로왕과 일전을 벌인다.
고구려 한강을 차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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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로고루성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장수왕과 북의 중장비 병력이 서울로 내려 온 여울이 보인다. [사진-최현진] |
장수왕은 매우 과감한 성격과 함께 치밀함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백제는 고구려의 강력한 힘을 자신들만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중국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먼저 중국 송나라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몰락하고 있는 국력으로 백제를 도와주기에는 힘들었다. 이에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에 접근했다. 그러나 이는 백제의 큰 판단착오였다. 이미 북위는 백제보다 고구려와의 화친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국제외교에 있어서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보다 앞서있었다.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남중국의 동진을 이은 송과 남제와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즉위 초부터 고구려를 괴롭히던 백제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술의 일환이었다. 이후 북위가 북중국의 최강자로 떠오르자 북위와의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강하기 시작했다. 장수왕 23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북위와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북위와 원만한 관계를 가지진 못했다. 장수왕 24년인 436년에 북위에 쫒긴 북연의 왕 풍흥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440년부터 461년까지 20여년간 긴장 상태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북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해 북위와의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백제가 북위와 접근한 472년부터는 오히려 북위와 매년 두 차례 이상의 사신을 파견하는 등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백제보다 더 적극적으로 북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외교관계를 통해 장수왕은 백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또한, 백제의 개로왕 21년인 475년에 승려 도림을 백제에 간첩으로 파견하면서 백제의 내정을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후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도림은 개로왕에게 궁궐의 축성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제의 국력을 날로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어 장수왕은 그해 9월 3만병의 대병력을 이끌고 남하를 개시한다.
고구려 본기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9월 왕이 군사 3만 명으로 백제를 침입했다. 백제의 서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였으며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장수왕은 스스로 병력 3만을 이끌고 연천을 거쳐 백제 위례성의 북쪽인 아차산까지 아무런 저항없이 내려왔다. 개로왕은 도림이 도망갔을 때 내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에 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신라에 파견해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백제 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도성은 7일 만에 공파” 당했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태자인 문주가 왔을 때는 패전을 목전에 둔 상태였을 것이다. 개로왕 역시 문주가 돌아오자 패전을 예견하고 문주에게 “난을 피해 나라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유언하고 문주와 헤어진다.
문주가 일부 신하들과 남쪽으로 내려가고 개로왕은 성문을 닫아걸고 신라의 구원병을 기다렸으나 신라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이에 개로왕은 기약 없는 신라군을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으나 개로왕을 추격한 백제출신의 고구려 장수에게 붙잡혀 모욕적인 행위를 당하며 아차성 아래로 끌려갔고 백제계 장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연천에서 남하를 시작한 장수왕은 백제의 위례성을 점령하고 한강을 온전히 고구려의 강으로 만들었다. 이후 장수왕은 백제를 도운 신라에 대해 481년에 남하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장수왕대의 남쪽 경계는 동으로는 경주 부근에서부터 서로는 아산만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