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기일》
삼복더위가 한창이다.
아버님의 기일이 돌아왔다. 벌써 오십 년 전의 일이다.
결혼하기 전 회사에 휴가를 내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서니 아버님은 많이 쇠약해져 계셨다.
“전축 좀 고쳐라.”
“라면 좀 끓여라.”
아버님은 평소처럼 말씀하셨다. 나는 전축을 고치고 라면을 끓였다. 고쳐진 전축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자 아버님은 따라 부르셨다. 그리고 라면을 반쯤 드시고는 말씀하셨다.
“아이고, 참 맛있다.”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셨다.
저녁 무렵에는 어머니의 빨간 브래지어를 보시고 다른 것으로 갈아입으라고 하셨다. 다음 날 아침,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 뒤에는 큰아들에게 물으셨다.
“오늘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겠냐?”
그날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아버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 될 줄은.
시집을 온 뒤에는 해마다 아버님의 기일을 챙겼다. 옛날 제사는 손이 많이 갔다. 음식을 마련하고 상을 차리고, 조율이시며 홍동백서며 복잡한 절차를 따라야 했다. 메를 올리고 탕을 올리고 여러 번 절을 했다.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제삿날이면 방 안이 비좁았다. 함께 엎드리다 보면 팔과 어깨가 부딪혔다.
아이들이 자라고 결혼하고, 조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 사이 어머님도 아버님 곁으로 가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도 어느덧 십오 년이 지났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이제 우리가 제사를 정리해야 아들들도 편하지 않겠어?”
동생들 부부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 형님 뜻에 따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렇게 집에서 지내던 제사는 성당 미사로 봉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사가 끝나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올해는 마음이 달랐다.
아버님 50주기였다.
오십 년.
그 숫자가 자꾸 마음에 남았다.
‘이번에는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 함께 먹어볼까.’
남편은 반대했다.
“더운데 안 돼. 밖에서 먹자.”
맞는 말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물러서지 않았다. 오십 년 만의 기일인데 한 번쯤은 직접 음식을 차려보고 싶었다. 고사리와 콩나물, 여러 나물을 준비했다. 탕국도 끓이고 갈비찜도 하기로 했다. 갈비를 주문하고 녹두도 샀다. 빈대떡도 부치기로 했다.
시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빈대떡을 부치면 두세 장씩 따로 챙겨 아버님께 먼저 가져다드리곤 했다. 그 음식에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하던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런 사소한 일이 기억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생선 세 종류와 탕국에 넣을 홍합과 새우도 샀다.
장을 보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날씨가 너무 더웠다.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만들었지?’
잠깐 후회가 밀려왔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식당에서 하자고 했잖아. 이렇게 더운데 집사람 고생시키면서까지 왜 그래.”
나는 대꾸하지 않고 앞치마를 둘렀다. 친한 친구들과는 지난해부터 약속한 여행이 있었다. 이박 삼일 수도원에서 함께 지내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탄자니아에서 사 년 동안 선교사로 지냈던 친구 부부와 함께하니 긴 이야기와 짧은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마지막 밤, 나는 아버님 50주기 이야기를 꺼냈다.
“50주기인데 집에서 음식 해서 같이 먹는 게 어떨까?”
친구들은 이미 생선도 사고 녹두도 사놓았다는 내 말을 듣고도 한결같이 말했다.
“이 더위에 어떻게 해?”
결국 식당을 예약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형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기일 당일이었다. 오후 두 시 반에 퇴근해 돌아왔는데 주문한 갈비가 아직 오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급한 대로 갈비를 따로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탕국을 끓이고 생선을 쪘다. 갈비 양념에는 배도 키위도 없었다. 있는 재료대로 무와 양파를 갈아 넣었다.
전날 밤 미리 준비해 둔 빈대떡 반죽은 딸 수란이가 일찍 와서 부쳐주었다.
미사를 드리고 상을 차리는 데에는 베드로 씨의 손길도 컸다. 더운 날 땀을 흘리며 여기저기 움직이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미사를 마친 작은 동서 내외가 도착했고, 먼저 와서 묵상하고 있던 큰 시동생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미사에 오신 신부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 기일 미사라 오셨군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따뜻하게 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한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한 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 더위에 고집을 부렸구나.’
음식을 하나씩 바라보며 빠진 것은 없는지 살폈다. 수박도 잘라 먹었다.
수박을 보니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아버님 장례 때 팔려고 준비해 두었던 수박이 무더위에 썩어 나갔던 일이다. 그때의 더위와 오늘의 더위가 겹쳐졌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옛날로 흘러갔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설거지까지 끝났다.
가족들이 서로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거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요즘 세상에는 남녀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모습이 이날따라 참 고마웠다.
사위와 가족들을 보내고 시동생과 술잔을 기울였다.
술이 조금 과했을까.
시동생은 몇 번이나 ‘50주기’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다 아버님이 향수를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수원에서 내려오면서 형수님이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역시 우리 형수다.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너무 일찍 가신 아버님 생각이 났다. 내가 치료차 서울에 갔을 때였다. 아버님은 나를 따라오시며 어느 옷가게 앞에서 말씀하셨다.
“골라봐라.”
그리고 분홍빛 투피스를 사주셨다. 며느리 셋 가운데 이제 아버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이 더 애틋하다. 지금은 집을 수리해 편하게 살고 있지만, 그때 살던 집은 몇 계단을 내려가야 했고 비가 오면 물이 스며들었다. 연탄불이 꺼질 만큼 습기가 차기도 했다.
그런 집에서도 우리는 웃으며 살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시골 저녁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아련하다.
오십 년.
아버님이 떠나신 뒤 오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가족의 모습도 달라졌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도 달라졌다. 집에서 차리던 제사는 미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기억은 바뀌지 않았다.
라면을 드시며
“참 맛있다”고 하시던 아버님,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아버님, 옷가게에서 분홍빛 투피스를 골라주시던 아버님. 나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들 속에 아버님을 모시고 산다. 그날 밤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었다.
“기왕 마신 술, 한잔 더 하자.”
시동생이 술잔을 들었다.
그러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생한 형수, 고맙다. 미안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 50주기. 제사를 지내려고 음식을 준비한 하루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날 우리는 아버님을 기억하는 동시에 서로를 다시 만났다. 오십 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아 옛이야기를 꺼내고, 웃고, 울고, 서로의 수고에 고맙다고 말했다.
어쩌면 집에서 음식을 차려 함께하는 마지막 기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잘했다.
더워서 힘들었고, 몇 번이나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싶었지만, 그날의 한 상을 차려놓고 가족들이 둘러앉은 모습을 보니 알 것 같았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제사 절차가 아니었다. 아버님을 기억하는 일이었고, 그 기억을 함께 나누는 가족이었다.
아버님의 기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오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기억 하나가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의 식탁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