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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전라도전통사찰
oss 추천 0 조회 490 14.03.23 12: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라도 전통사찰 다녀왔습니다

전북 순창군 만일사

1) 역사

만일사는 사적기가 전해지지 않아 그간 창건연대에 대해 백제시대인 384년(침류왕 원년), 혹은 삼국이 통일된 후인 673년(문무왕 13)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백제 때 창건되었음을 <만일사비>에 의해 확인할 수 있었다.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옥천지(玉川誌)>에 의하면 만일사는 백제의 원찰이었다고 한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무학 자초(無學自超) 스님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등극을 위하여 절을 중건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찾아지지 않았는데 이 또한 <만일사비>에서 확인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만일사(萬日寺)란 명칭 또한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 만일 동안 이 곳에서 기도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무학대사 이전에도 여러 가지 중건과정이 있었을 것이지만 기록이 없어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이 때의 만일사는 지금보다 북쪽으로 약 200m쯤 올라간 곳에 있었다. 이 자리에는 지금도 초석과 기와 등이 흩어져 있다.

 

무학대사가 중건한 이후 만일사는 임진왜란 때 다시 한번 소실과 중건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 중기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왜구가 침입해 불에 타 소실되었으며, 이것을 지홍(智弘)과 원측(元測) 스님이 다시 중축되었던 것이다. <만일사비>는 이 때의 유래를 담아 사찰 중건 후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만일사비가 건립된 해가 1658년이니, 상당히 빠른 시기에 전후 중수작업이 완수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만일사라는 사찰이 비중 있는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중건 이후 만일사 규모를 <옥천지>(1760년)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당시 만일사에는 요사채가 2채, 암자가 동암(東庵), 칠성암(七聖庵), 선적암(禪寂庵) 등 3채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만일사가 자리한 산 꼭대기 천길 위에 돌샘이 있어서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빌면 비가 내렸다고 이 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사찰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나 조선말 일제 36년을 겪으면서 절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이르러 주지 이금담(李錦潭) 스님이 만일사 대웅전 및 칠성각, 산신각을 짓고 불사를 추진하였으나 불행스럽게도 그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웅전이 소실되는 등 전화를 입어 다시 폐허가 되었고 칠성각만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에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겨 법당과 삼성각, 요사 등을 새로 건립하였다. <순창군지>(1982)에 의하면 당시 중건비용을 지원한 시주자가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에 거주하는 김인숙여사가 1949년에 이어 1954년에도 비용을 대서 중건이 이루어졌다

 

 

 

 

1) 위치

전북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502번지, 회문산(回文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063 - 653 - 5283)

 

2) 교통편

88고속도로 순창톨게이트로 나와서 순창IC삼거리에서 순창 ? 전주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경천교를 건너 2km정도 주행하면 관서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관서삼거리에서 강진 ? 전주방면으로 좌회전하면 바로 순창고등학교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27번국도 전주 ? 임실방면으로 우회전하여 12km정도 주행하면 임실 덕치면 일중리 중원마을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중원마을삼거리에 회문산 자연휴양림과 만일사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 길을 따라 3km정도 주행하면 순창 구림면 안정리에 도착하게 된다. 안정리 마을에서 회문산 자연휴양림방면으로 우회전하여 700m정도 올라가면 회문산 자연휴양림 못가서 좌측으로 만일사이정표가 설치되어있다. 이정표 길을 따라 좌회전하여 1.3km정도 주행하면 만일사 일주문을 지나 만일사에 도착하게 된다.

 

* 고속버스

서울(강남 터미널) - 순창

9시30분부터 16시10분까지 6회 운행, 301.4km, 4시간소요

 

 

 

 

 

 

전북 순창군 구암사

1) 역사

구암사는 623년(백제 무왕 24)에 숭제(崇濟)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 이후의 연혁이 알려질 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구곡 각운(龜谷覺雲) 스님이 1392년(태조 1)과 태종 때(1400~1418)에 각각 중창했는데 이 때 절 이름을 지금의 구암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구암사라는 이름은 사찰 동편 지점에 숫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밑에는 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기 때문에 명명한 것이다. 즉 신령스러운 거북이 모양을 닮아 산을 영구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당시 절터는 지금의 구암폭포 부근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당대에 널리 알려진 설파 상언(雪坡尙彦) 스님이 머물면서 법등을 이었다. 이 때부터 절은 화엄종의 법맥을 잇는 화엄사찰로 유명해져, 전국 각지에서 참선과 공부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스님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어서 1800년대 초에는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스님이 지금의 절터에 여러 전각들을 중건했으며 선강법회(禪講法會)를 개최해서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백파스님의 설법으로 입산수도한 승려가 강지에서 운집하여 선문중흥조하 일컬었고 그 법맥이 고창 선운사와 정읍 내장사, 장성 백양사, 해남 대흥사 등에 전법되었다. 헌종 때는 로사 기정진 선생과 친교하여 정진하였다.

 

긍선 스님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노사 기정진(奇正鎭)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있어서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수련하기도 했다. 김정희는 백파 스님을 높이 존숭해 수많은 그의 친필을 이곳에 남겨놓았으며, 그중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는 지방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비문은 대대로 제자들에 의해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대사의 출가본사인 선운사에 보내져 비를 세웠다고 한다.

 

전라관찰사였던 이경상은 백파스님의 선교강설에 감동되어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쌀 350석을 보시하여 사찰에 전답을 매입,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힌 비들은 한국전쟁으로 전부 없어지고, 현재는 바위에 새긴 글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영구산(靈龜山)내에 있는 사찰로 봉덕리 374번지에 위치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백제 무왕 35년(634년) 숭제법사가 창건. 경내의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불교계의 수도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찾아오는 길

 

복흥면 소재지에서 정읍 내장사로 가는 792번의 지방도로를 경유하다 보면 장성 백양사 방향의 분기점이 있다. 여기서 내장사 쪽으로 300미터 진입하여 왼편 자포교를 지나 다시 덕흥마을로 진입한다.

 

봉덕리 도화마을을 못 미쳐 서북쪽으로 백학봉이 보인다. 이 백학봉(영구산)은 노령산맥이 남으로 내려오다 멈추는 곳인데, 이 곳을 향하여 논과 밭 사이에 있는 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구암사라는 팻말이 있으며, 노령산맥의 주봉인 영구산(현재 도집산 해발 720미터)중턱에 위치한다

 

 

 

 

전남 담양군 용추사

용추사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백제 성왕 1년(523)에 신총과 혜증이 창건하였으며, 백제 무왕 25년(624)에 원광이 원당으로 삼아 중창하였다고 전하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유구나 유물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소요태능(1562-1649) 대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승군을 모아 김덕령장군과 연합하여 왜적과 싸웠는데, 그 영향으로 당시 이 지역의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  참화 속에 모두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 그 뒤 인조 8년(1630) 소요태능이 용추사의 법당을 중창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한 의병이 전국각지에서 크게 일어났는데 이 지역에서도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면암 최익현(1833-1906)이 의병항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1906년 4월 8일 담양 용추사에서 전 낙안군수 임병찬, 기우만을 비롯한 남도 선비 50명을 만나 결의를 다지고 “신분을 뛰어넘어 모두가 힘을 합하여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순천.낙안.흥양.여수.광양.장흥.보성.강진.해남.완도 등 전남의 동부지역과 서남부 연해 도서지역에 발송하였다. 이렇듯 용추사는 의병 항쟁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근대에 들어와서 6.25 전쟁 중 소실되었고, 1961년 본래의 절터에서 북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4칸의 법당을 다시 중수하여 내려오다 오랜 시간 방치된 것을 2000년 다시 법당을 짓고 법향을 잇고 있다.

 

용추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먼저 『가람고(伽藍考)』에 따르면 전라남도 담양군의 북쪽 오십리에 있는 용천사(龍泉寺)가 있고, 『태고사법(太古寺法)』에서는 담양군 용면 추월산에 자리하고 대본사 송광사의 말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용추사에 대한 寺名이 다소 혼돈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용천사가 추월산에 있고, 『범우고(梵宇攷)』의 기록에서는 법천사(法天寺)가 법천산에 있다고 적고 있어 혼돈을 주고 있으나 『한국사찰전서』에서는 용추사와 용천사가 모두 같은 절임을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일부 불서(佛書)의 기록에는 용추사를 옥천사(玉泉寺)로 기록하기도 한다.

 

 

 

 

담양읍에서 용면 소재지를 지나 담양호를 서쪽으로 돌아 순창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20km쯤 가면 가마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600m 올라가면 영산강의 발원지 용소로 가는 길과 용추사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여기로부터 포장된 산길을 따라 5km쯤 가면 산 계곡 깊숙한 곳에 용추사가 나타난다. 다른 길은 가마골 생태공원에 입장하여 용추계곡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용추사가 자리 잡고 있다.

 

버스는 가마골까지 있으며 산길로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고, 가마골 생태공원을 거쳐 올라가는 길은 도보로만 갈 수 있다.

 

 

 

 

 

전남 담양군 보광사

 

보광사는 1905년에 화엄사 중창주인 도광선사의 부친 김기춘거사가 고향인 황매산에 창건하여 수행처로 지내오다 1942년 도광, 도천 두 선사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중창하고, 선방을 개설하여 많은 선승을 배출하였다.

 

당시 한국 불교의 대종사인 전강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제자인 송담스님이 10년간 묵언 견성하였으며 도광스님은 100여명의 제자 중 화엄문도의 중진들을 이곳에서 배출하여 화엄문도의 산실이 되었다.

 

보광사의 대웅전은 경기도 안양 용화사의 것을, 일주문은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해체 이전해서 복원한 것이다.

 

 

담양읍내에서 금성산성으로 가는 15번 국도를 따라 가면 새로 만들어진 4차선 도로와 과거의 2차선 도로가 갈라진다. 2차선 도로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로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남아 있다.

 

이 도로의 중간에서 88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외추리로 가는 통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외추리를 지나가면 88고속도로 확장공사구간을 만나게 된다. 이를 거처 산위로 작은 길을 따라가면 보광사가 향매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교통안내>

? 담양읍 ⇔ 광 주: 시외버스 5분 간격 운행

? 담양읍에서 보광사까지는 택시나 승용차를 이용하여야 함.

 

<숙박시설>

? 담양온천관광리조트 (061)380-5000

? 담양읍내 호텔 및 모텔 있음.

 

 

 

 

 

 

전북 순창군 대모암

절이 자리한 대모산에는 조선시대에 군창으로 사용되었고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된 대모산성이 있다. 이 곳의 속칭으로는 ‘홀어미산성’ 혹은 ‘할미산성’으로 부르는데, 아마도 산성 내에 군량미 등을 저장했기 때문에 ‘합미성(合米城)’으로 부른 것이 와전되어 ‘할미산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할미성이 한자로 쓰여지면서 ‘대모(大母)’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절은 1933년에 박동식 등 30여 신도들의 힘을 모아 학성(鶴成) 스님이 창건했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절이 비었다가 1952년에 이문용(李文容) 스님 등이 법등을 이었으나 사세는 매우 초라했다. 이후 1973년에 법당을 중수하면서 비로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1985년에 범종각을 그리고 1993년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대모암은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31번지 대모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063 - 653 - 3549)

 

교통편

순창읍에서 광주 방향으로 약 1.5㎞ 되는 지점에서 오른쪽 냇가 쪽에 있는 길로 300m 쯤 올라가면 대모산이 있고, 대모산 안의 대모산성 앞에 절이 있다.

 

88고속도로 순창톨게이트로 나와서 순창IC삼거리에서 순창 ·전주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경천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좌측으로 경천을 끼고 1km정도 주행하면 옥천교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옥천교사거리에서 24번국도 광주방면으로 1km정도 주행하면 좌측으로는 다래모텔이 있고, 우측으로 대모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대모암 이정표길을 따라 우회전하여 냇가 길로 400m정도 올라가면 대모암에 도착하게 된다.

 

 

 

 

 

전북 순창군 실상암  

이름 없는 작은 시골 동네에 있는 작은 사찰. 실상암.

 

실상암은 무엇 하나 번듯하게 내세울 것도 없고 우람하거나 권위적이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절이다. 실상암을 찾아서 잘 포장된 큰 길을 지나다가 주위의 입간판을 놓쳐 몇 번이고 휙 지나쳐 버리곤 했다.

 

그곳을 만드시 찾아가리라고 마음 먹고 눈 똥그랗게 뜨고 찾지 않고는 달리다가 잊어버리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찾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아니다. 큰 길에서 난 샛길만 잘 찾아들면 길에서도 빤히 사찰의 전부가 눈에 들어올 정도이기 때문이다.

 

실상암은 정말 작다. 사찰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이다. 스님 혼자 거처하며 불법에 정진하다가 가끔씩 들르는 나그네를 맞기에 적당할 그런 사찰이다.

 

그러나 다시 잘 정돈된 마당에 서서 사찰을 한번 들러보면 이제 결코 작은 사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찰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크고 널찍한 대웅전과 마주하게 되면서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해진다.

 

실상암은 부처님을 향한 개인의 원력이 얼마나 강하고 위대할 수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 곳은 오로지 주지스님이 평생의 원력으로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사찰을 세우고자 주지스님은 주춧돌 하나하나, 기왓장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를 다듬고 쌓고 심었다고 한다.

 

가진 것 모두를 아낌없이 부처님을 위해 쏟아붓고서도 아직 힘이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부처님을 위해 쓰고 싶다는 주지 스님. 마치 이웃집의 맘씨 좋은 할아버지마냥 나지막하고 인자한 목소리에 주름진 얼굴조차 맑게 느껴지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한번 길을 나서서 실상암을 찾아가길 권한다.

 

너무 작은 실상암이지만, 그 작은 사찰에 어울리지 않게 큰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우리의 마음을 기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상암은 전북 순창군 순화리 671번지, 금산(錦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063 - 653 - 3384)

 

교통편

88고속도로 순창톨게이트로 나와서 순창IC에서 순창 · 전주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경천교를 건너 1.5km정도 주행하면 중앙로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중앙로사거리에서 담양 ? 광주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순창터미널을 지나면 우측으로 순창경찰서가 나온다.

 

경찰서를 지나 바로 우회전하면 순창여자중학교가 보이며 이곳에서 300m정도 올라가서 지하차도를 지나면 우측으로 실상암이 위치하고 있다. 순창여자중학교부터 실상암 까지 개천 옆 조그마한 농로길 이므로 서행 운전 하여야 한다.

  

 

 

 

전남 곡성군 수도암  

설산(雪山) 아래 아늑하고 조용한 곳에 위치한 수도암은 1928년 임공덕 보살이 지은 건물이 지금까지전해 오고 있다.

 

방문자의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먼저 반겨주는 것은 개들의 짖는 소리다. 깊고 조용한곳에 있는 산사이고 수도를 위한 암자였던지 찾는 사람이 드물고 소식 없이 찾아 온 방문객은 반겨주지 않았다.

 

암자는 먼지 하나 찾을 수 없을 만큼 청결했다. 위치가 가파른 산 속이라 터가 좁아 전각이 오밀조밀하게 붙어있었으나 오히려 호화스럽지 않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수도암은 곡성군 옥과면의 설산(522m) 남쪽 허리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신라시대 설두화상이 도를 닦던 곳으로 전해지나 그 당시 건물은 없고 1928년 임공덕 보살이 지은 건물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수도암 주차 됨니다

 

 

 

 

전남 곡성군 서산사  

곡성읍내에서 매우 가깝고 진입하기도 어렵지 않다. 나지막하고 가지런한 산을 배경으로 간단한 사찰을 이루고 있다. 방문하기 전 전화통화로 주지스님은 해외여행 중이라는 안내를 들었지만 절을 찾아갔다.

 

마침 절에서는 묵언이라 아무도 만날 수도 없었고 한마디의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마당 끝에 매어있는 한 마리의 백구마저도 낯선 이들에게 한 번도 짓지 않았다.

 

 역사와 연혁

서산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이다. 절은 1935년에 이 지방의 부호였던 정진태·수태·규태 삼형제가 아버지 정일택과 어머니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1938년 서산사로 바꾸었다. 창건 이후 연혁은 알려진 것이 없고 지금은 포교당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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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곡성I.C.를 나와서 곡성읍에 들어서면 작은 다리가 있어 이를 넘어서자마자 좌측으로 올라가면 작은 시민공원 내의 연못이 있는데 이를 끼고 들어가면 곡성향교로 가는 길이 나온다. 향교에 못 미쳐 좌측으로 꺾어지면 서산사가 위치한다.

 

 

 

 

 

 

전남 곡성군 관음사

역사와 연혁

관음사는 1729년(영조5) 백매선사가 쓴 관음사사적에 의하면 백제 분서왕3년(300) 성덕보살이 낙안포(지금의 보성 벌교)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 절을 짓고 이름을 관음사라 하였다고 한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창건 뒤 성공(性空)스님이 성덕의 상을 만들려다가 생각을 바꿔 관음상을 모시고 성덕산 관음사라 했다고 전한다.

 

관음사는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성덕산 관음사를 기록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관음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에는 “전라남도 옥과 성덕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가람고』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고사사법』에는 “곡성군 화면 성덕산에 있고 대본산 송광사의 말사”라고 적혀 있다.

 

관음사의 연혁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1374년 (공민왕 23)에 원통전을 중수하는 등의 5중창을 하였으며, 선원을 중심으로 큰스님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란 때 피해를 입고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신희. 담원. 담정 세 스님만은 끝까지 절을 지켰다. 1604년(선조 37) 5년에 걸쳐 모든 건물을 복원하였다.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던 원통전은 임진왜란의 화를 입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1611년(광해군 3), 1612년에도 중창하였고, 1636(인조 14)과 1718년(숙종 44)에는 원통전을 중수하였으며, 수각루인 금랑각을 지었다.

 

근대에 들어 1832년(순조 32)에 큰 홍수로 전각의 거의 반이 쓸려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그렇게 오래 방치하다가 1936년 청운스님이 중건하였는데 그 내용이 금랑각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수기는 근대의 고승인 한영 정호(漢英 鼎鎬: 1870~1948)스님이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당시 주지인 수용(袖龍)스님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1912년 영담화상이 전체 가람을 중수하였으나 6.25동란으로 모두 불탔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된다 하여 토벌군의 방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다. 이 때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원통전(273호)과 금동관음보살상(274호)이 소실되었다.

 

1954년 대은암의 건물을 옮겨와 원통전을 재건하였다. 1982년에는 지장전, 서원당, 금강문을 복원하였으며, 지금도 의욕적인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관음사는 광주에서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옥과IC를 빠져나와 화순방면 15번 국도를 달려 오산면 소재지와 심청공원을 지나서 계곡쪽으로 4.5Km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다.

 

 

 

 

 

 

 

 

전남 순천시 천자암(송광사부속암자)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松廣寺)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曹溪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21교구의 본사이다.


 

찾아오는 길 

자가용
서울에서 출발하려면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를 지나 주암 IC에서 송광사로 들어오는 길이 가장 빠르다. 새로 난 천안ㆍ익산간 고속도로를 타면 약 5시간 정도 소요된다.

 

대구에서는 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으며, 부산에서는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하면 된다.

 

대중교통

고속버스ㆍ기차ㆍ비행기 등을 이용하여 광주나 순천에 도착한 후 송광사행 시외버스를 타면 된다.

 

 

 

 

 

전남 보성군 송광사포교당  

일제시대 송명소학교(현재 천주교 성당이 위치)의 관사로 사용되었던 자리라고 한다. 전하는 바로는 고려 말 조선시대 초기에 징광사(澄光寺)의 희오(希悟)스님이 지금의 절 터에다 부용산 부용사를 창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희오스님이나 부용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데, 절은 그 뒤 광해군 대의 전국에 내린 폐사령(廢寺令)으로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0년에 송광사에서 포교당을 만들어 임석호 주지가 처음 주석하면서 지금의 절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1970년 이발룡 스님의 주석 이후 면모가 많이 갖추어졌는데, 1972년에 노전채 · 대청간을 수리하였고, 1975년에는 개금불사를 하였으며 1978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범종각에 봉안하였다. 1982년경에는 일우 스님이 절 주변의 민가를 매입해서 요사를 확장하였다.

 

현재 보리스님이 주석하면서 마당의 수령 300년의 향나무를 관리하여 우람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하였고, 삼성각과 공양간 등의 불사를 계획하고 있다.

 

본래 부용사는 징광사(澄光寺)의 스님이 처음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를 모셔올 때 벌교의 홍교에 도착하여 부용사에서 1박한 후 징광사로 갈 수 있었다 한다. 현재 징광사는 사찰 터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2002년부터 대웅전, 종무소 및 종각, 요사를 다시 건축하였다. 앞으로 요사채의 맞은편에는 삼성각을 짓고, 요사채의 뒤편에는 공양간을 새로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벌교읍내의 북쪽에 홍교가 있고, 그 서쪽의 약간 높은 곳에 포교당이 위치한다. 포교당은 좁은 골목길 안에 20m 들어간 곳에 있다.

 

 

 

 

 

 

전남 순천시 동화사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개운산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동화사는 고려시대 초기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중국에 유학을 다녀와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전기까지 동화사는 폐사되지 않고 경영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고 만다.

 

폐허가 된 절의 중창은 정유재란 직후인 선조 34년(1601년)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신총(信聰) 스님이 대웅전을 짓고 이어 영각(靈覺) 스님이 불상 10여 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호선루(護禪樓), 첨성각(瞻星閣) 등이 조영되었고, 그 외에 선승당(禪僧堂), 요사 및 정문이 갖추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걸친 불사(佛事)로 절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18세기와 19세기의 연혁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등 각종 문헌기록과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의 지도에 동화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동화사는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세(寺勢)는 전혀 알 수 없고 이후 19세기의 연혁도 알 수 없다. 다만 조선후기의 대웅전이 현존하고 있으며, 1921년 황명선 주지가 대웅전(大雄殿)과 승당(僧堂)을 중수한 사실 등으로 보아 사세(寺勢)와는 관계없이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반까지 동화사는 폐사되지 않고 계속 경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1984년에 대웅전을 보수하고 1989년 삼층석탑을 해체 보수 1990년에 [동화사삼층석탑 수리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위치 

동화사는 순천에서 벌교로 가는 도중 오른편에 있는 개운산(開雲山)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또 동화사를 지나 우렁재를 넘으면 낙안에 이르게 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282번지이다.(☏061-743-9922)

 

동화사가 위치한 개운산은 북쪽으로 낙안읍의 주산인 金錢山에 연결된다. 금전산(해발 667.9m)은 동남쪽으로 뻗어 오봉산(해발 591.5m) 및 호사산(해발 523.1m)으로 연결되고 다시 남쪽으로 뻗어 제석산(해발 563m) 및 개운산에 연결된다. 이곳에서 산은 끝나고 순천만에 연결된다.

 

절이 위치한 곳은 낙안과 벌교, 순천의 중심 부근이므로 이 세 곳을 통해 절에 이르게 된다. 낙안에서는 순천만에 이르는 길을 이용한다. 현재 낙안과 별량면 구룡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 우렁재를 넘으면 죽산천을 따라 난 길이 있고 좌측에 대룡제가 있다. 대룡제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산위로 오르면 동화사에 이르게 된다.

 

순천이나 벌교에서도 이 도로를 이용해 동화사에 접근할 수 있다. 순천과 벌교를 연결하는 2번 국도의 별량면 구룡리에서 낙안으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가 대룡제 직전에서 좌회전해서 산 위로 오르면 동화사이다.

 

동화사는 대룡제로 흘러드는 골자기 중 하나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산의 중턱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넓은 터전에 위치하고 있다. 대지는 남북이 좁고 동서가 길다. 북, 서, 남쪽에 산이 있고 동쪽으로만 열려있는 형국이다. 이곳에 북쪽의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절이 위치하고 있다. 주산이 되는 뒷산에는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찾아오는 길 

1)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직접 동화사까지 가는 버스는 없음

순천역 → 벌교행 88번(보성교통) 버스 → 구룡교 가기 전 사계절 주유소 하차 → 도보로 접근할 수밖에 없음(미리 연락하면 차량이 나감)

 

2)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가. 낙안에서

낙안읍성 → 857번 지방도 벌교 방향 → 낙안중학교 지나서 좌회전 → 우렁재 → 대룡제 → 대룡제 지나자 마자 우회전(표지판 있음) → 산길로 약 5분 : 동화사

 

나. 순천 또는 벌교에서

순천과 벌교를 잇는 2번 국도 → 구룡리 사계절 휴게소에서 좌회전(표지판 있음) → 낙안방향 지방도 → 대룡제 앞에서 좌회전(표지판 있음) → 산길로 약 5분 : 동화사

 

 

 

 

 

전남 순천시 흥륜사  

흥륜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화엄사 포교당이다. 순천 시내에 위치하고, 시민들의 유일한 휴식처인 죽도봉(竹島峰) 공원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다. 과거 1984년 이전까지 국궁(國弓)활터로 사용되었던 곳에 새로이 건물을 이전하여 법당을 만들고,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근래에 만들어진 포교당이라 특별한 성보문화재는 없으나 시내에 자리 잡고 있어 불신자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역사와 연혁

흥륜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의 말사이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조선시대 선조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활터와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 3대 사찰의 대중과 승군의 최초의 본거지였다고 한다. 창건 및 연혁에 관한 기록은 없다.

 

해방직후 대처승들이 이곳을 매도하여 약 20년 전까지 활터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활터가 북쪽으로 이전함에 따라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전부 1986년 종원 스님의 중창 이후에 봉안한 것이다. 종원(宗源), 종삼(宗三), 종서(宗西) 스님에 이어 현재 종곡(宗谷) 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며, 화엄사의 포교당 역할을 하고 있다 

 

 

 

 

 

 순천시내 중심에서 동쪽 편에 있는 죽도봉 공원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전남 순천시 정혜사  

정혜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대에 혜조(慧照)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 보조국사가 통일신라시대 말에 창건하였다는 설, 원감(圓鑑)국사 충지(?止)의 스승인 혜소(慧炤)국사가 742년 (신라 경덕왕 1)에 창건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보조국사 창건 설은 신라 경덕왕의 재위기간이 서기 742년부터 764년까지이고, 보조국사는 804년에 출생하여 880년에 열반하였기 때문에 서로 연대가 맞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

 

혜소국사 창건 설은 송광사 제 6세 원감국사의 문집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는 정혜입원축성하안거기시소(定慧入院祝聖夏安居起始疏)와 혜소국사제문(慧炤國師祭文)에 기록되어 있다. 제문에 의하면 혜소는 자신이 늙어서 머물려고 정혜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정혜사의 완성을 보지 못하자 그의 제자들이 뒤를 잇고 , 이어 큰 도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 나라에 매년 난리와 흉년이 들어 사찰이 황폐하게 되자 모두 애석하게 여겨오다 충지 자신이 다시 정혜사를 부흥시켜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고 한다.

 

충지(1226 ~ 1293)는 1272년 이 곳 정혜사로 옮겨 1275년 중국 원나라에 다녀오기까지 머물렀다. 이때에 많은 불사를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 승평지(昇平誌), 범우고 등의 문헌에 원감국사가 정혜사에 주석할 때 대찰(대찰)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여순항쟁과 6.25사변을 겪는 동안 국보급 괘불 등 귀중한 문화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혜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그의 문하에 지인(之印 1102 ~ 1158), 탄연(坦然 1070 ~ 1159), 영보(英甫)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의 활약상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중국 송나라에 들어가 정인(淨因)으로부터 법을 받고 귀국하여 예종(睿宗 1105 ~ 1125)의 신임을 얻어 종풍(宗風)을 드날리다가 승주의 계족산으로 들어가 12세기 전반 무렵에 정혜사를 창건하였다. 현재 시기의 동일성과 국사 책봉 등을 통해 혜소를 담진(曇眞)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담진의 생존연대 ( 1045 ~ 1121)와 연결하기 어려워 역시 정확하지 않다.

 

정혜사를 중창하였다고 볼 수 있는 충지스님은 송광사의 제6세 원감국사여서 여러 자료가 남아있다

 

 

 

 

 

정혜사가 위치한 곳은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청소리 716번지로 계족산의 중턱이다. 순천에서 구례로 향하는 17번 국도를 달리다가 834번 지방도로 우회전하여 8km정도 가면 청소1교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도로변에 우측에 자리한 “정혜사” 이정표를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2km정도 오르면 정혜사와 만날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기차 : 호남선 순천역하차 → 청소 53번 시내버스 → 청소골산장 하차 → 도보2km

 

버스 : 순천행 버스 → 순천시외버스터미널 하차 → 청소 53번 시내버스 → 청소골산장 하차 → 도보2km

 

(순천출발 53번 버스 시간표:

 06:10/07:20/08:20/09:35/10:35/12:15/13:15/14:30/15:50/17:10/18:30/19:25/20:30/21:20)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순천 인터체인지 → 17번국도 구례방향 → 834번 지방도로 우회전 → 청소골산장에서 우회전 → 정혜사

 

 

 

 

 

전남 광양시 백운사

 호남정맥에서 뻗어 나와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백운산에 자리 잡은 백운사는 흰구름 사이로솟아난 천혜의 기도처로 보조국사와 구산스님이 수행하셨던 상백운암을 비롯 백운암 하백운암을 일컬어 말한다. 이 세 암자는 보조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전소 되었다. 그뒤 하백운암과 백운암은 눌암스님에 의해 중건 되었고 상백운암은 구산스님에 의해 중건 되었다.

 

백운사 대웅전 특이하게도 건물에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고풍스러우면서도 절맛이 제대로 나는 사찰로 도선국사가 절터를 잡았다는 설이 전해 오고 있으며 말년에 은거하다가 입적한 곳으로 전해진다.

 

백운사가 자리한 백운산은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으며 지리산, 조계산, 무등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상백운암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광양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백운사에 오르는 동곡 계곡은 백운산 4대 계곡의 하나로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어 길이가 10㎞에 달한다. 계곡에는 호남의 3대 학자라는 최산두가 공부했다는 학사대를 비롯해 용소, 장수바위, 선유대 등이 아름답다. 이처럼 백운사는 계곡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계곡물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찻물이며 산이 험하면서도 넉넉하고 포근하다.

 

백운사를 비롯 상백운암 하백운암을 품고 있는 백운산은 산세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지리산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국에 백운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수십 개에 달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고만고만한 ‘보통산’으로 인식돼 왔을 것이다.

 

 

 

 

 

 전남 광양시 백운사 주차됩니다

 

 

 

 

 

 

 

전남 광양시 보광사

오랜만에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항상 우리를 비쳐주시는 비로자나 부처님처럼 태양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광양시내의 좁다란 골목길을 지나면 나무가 있고 목탁풍경소리가 들리는 보광사 대문이 불자들을 반가이 맞아 준다. 1

 

965년 취봉스님이 구산스님의 수행을 돕기 위해 민가를 개조하여 법당을 만든 곳이어서 전통고찰의 느낌은 적지만, 도심포교의 최일선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절 안으로 들어서면, 참선삼매에 몰입하고 계시는 스님과 신도님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참선에 몰두하고 있는 선방에는 고요한 적막감이 흐른다.

 

보광사는 창건은 30여 년 전 구산스님께서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 토굴에서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라고 한다. 큰스님께서 결제 중에 눈이 많이 와 공양거리를 구하기 힘들어하시고 계실 때의 일이다. 광양읍내 여러 보살님의 꿈에 백운산 산신령이 나타나, “백운산에 큰 도인이 계신데 왜 시봉을 하지 않느냐라”는 내용의 꿈을 꾸었다.

 

신기해한 동네사람들이 수소문한 결과 백운산에 큰스님께서 정진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십시일반으로 보시를 하여, 공양물을 지게로 운반하여 상백운암 구산큰스님의 토굴까지 공양을 운반하여 드렸다. 그러한 큰스님과의 인연으로 광양불교가 시작되었고 구산큰스님께서 방장으로 계실 때, 광양의 불자님들께 쉽게 기도수행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러 대중스님들의 원력으로 민가를 구입 조계총림 광양포교당 보광사를 태동시킨 것이다.

 

보광사는 도심포교당인 만큼 시민선방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보광선원에서는 무엇을 찾고 있는지 참선삼매에 빠져있는 스님과 불자들의 모습 속에서 보광사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구산큰스님과의 인연으로 세워진 이곳 보광사가 큰스님의 가피가 함께하는 것 같다.호남지역 운수납자들의 고향인 송광사, 그 힘과 구산큰스님의 가피를 광양포교당 보광사에서 느낄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크나큰 행복이지 않을까!

 

 

 

 

 

전남 광양시 보광사 주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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