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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金石文)이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
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한국금석문 정보시스템을 검색하면 강원도내 108개의 금석문 현황을 비롯해 우리고장에 있는 22개 금석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도내 18개 시 군의 평균 보유량 보다 많은 수의 금석문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이런 사실은 우리고장 역사인물에 대한 탐구의욕과 향토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문화자원이라 하겠다. 고려조에서~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제작, 건립된 금석문은 신도비, 묘비, 묘표, 불상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로 남았는데 이 가운데 향토인물과 당시의 문화정서 를 공부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금석문을 간추렸다.
다만, 조선시대 鐵原수령을 지낸 楊士彦(1517∼1584년)墓碣과 鐵原府使 지낸 金矱(1572~1633)墓表는 경기도 포천에 소재했지만 철원현감을 지낸 귀감 인물이라는 점에서 함께 소개한다.
1) 김응하 묘비(金應河廟碑)
시대 |
조선 |
연대 |
1683년(숙종9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시도지정문화재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05호 |
크기 |
높이 215cm, 너비 97cm, 두께 33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 1-90번지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 1-90번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송시열(宋時烈) / 박태유(朴泰維) / 미상 |
묘정비문은 전반부에『충열록(忠烈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인용하여 신종이 1618년 후금(後金)에게 침입을 당하여 조선에 응원을 요청하는 상황부터 그 전투에 참여하였던 김응하(金應河: 1580~1619년)의 활약상, 순국, 신종(神宗)이 조서(詔書)에 의해 증직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김응하의 어린 시절 및 입신(立身)하기까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장군의 업적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기술하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압록강 변에 있던 사당과 묘정비가 청나라에게 눈치가 보인다 하여 훼철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다시 김응하의 사당과 묘정비를 건립하게 된 것은 대명 의리론을 지지하게 되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1) 김응하 신도비(金應河神道碑)
시대 |
대한제국 |
연대 |
1899년(고종36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88cm, 너비 92cm, 두께 27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 |
소재지 |
(한국)국사편찬위원회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조경(趙絅) / 이유승(李裕承) / 미상 |
1608년(선조 41년) 박승종의 비장이 되었고, 이 후 경원판관, 삼수군수, 북우후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년)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의 휘하에 좌영장으로 있다가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은 그의 장렬한 죽음을 보답하고자 요동백에 봉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2) 양사언묘갈(楊士彦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630년(인조8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200cm, 너비 48cm, 두께 20cm |
출토지 |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 |
소재지 |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조경(趙絅) / 미상 / 미상 |
1630년 지금의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에 양사언(楊士彦, 1517∼1584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갈이다. 조경(趙絅)이 글을 지었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돈령주부(敦寧主簿)를 지낸 희수(希洙)이며, 어머니는 첨사(僉使)를 지낸 문화(文化) 유위(柳湋)의 딸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장과 경술(經術)에 능하여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 송대의 문장가 蘇軾의 집안을 가리킴)에 견주어졌다.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의 수령을 지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미리 예측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 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조선 전기 4대서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묘갈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양사언의 사적과 그 가문의 이력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3) 박전지 묘지명(朴全之墓誌銘)
시대 |
고려 |
연대 |
1325년(충숙왕12년) |
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미상 |
출토지 |
미상 |
소재지 |
현존하지 않음 |
서체 |
미상 |
찬자/서자/각자 |
박효수(朴孝修) / 미상 / 미상 |
이 묘지명은『죽산박씨파보(竹山朴氏派譜)』(宣川, 1938)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1788년(정조 12) 개성부(開城府) 승제문(承制門) 밖 20리 지점인 고산동(高山洞) 삼랑산(三朗山) 남쪽 기슭에서 부인인 최씨(崔氏)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묘지명은 1325년(충숙 12) 박효수(朴孝修)가 작성하였다.
묘지명 주인공인 박전지(朴全之 : 1250~1325)의 자는 반원(返圓)이다.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군 일대) 사람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박기오(朴奇悟)의 13세손이다. 아버지는 휘(輝), 어머니는 경원군대부인(慶源郡大夫人) 이씨(李氏)로 장용(藏用)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박전지는 삼분(三墳 : 중국의 3황제)과 백가서(百家書)와 음양비결(陰陽秘訣)을 꿰뚫었으며, 글을 잘 지었고 악장(樂章)이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1267년(원종 8) 국자감시, 1268년(원종 9)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충선왕 즉위때 사림원(詞林院)의 학사로 즉위개혁에 참여하였다. 원종·충렬왕·충선왕·충숙왕때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부인은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이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된 최씨(崔氏)로서, 염(恬)의 딸이다.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원(瑗)이다. 장녀는 정탁(鄭倬)에게, 차녀는 이직(李稷)에게 각각 시집갔다. 부인 최씨, 아들 원 및 부인 홍씨의 묘지명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참고
4) 김확 묘표(金矱墓表)
시대 |
조선 |
연대 |
1675년(숙종1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
출토지 |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
소재지 |
(일본)경도대학(京都大學)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이민구(李敏求) / 오시복(吳始復) / 미상 |
1675년(숙종 1)에 세워진 김확(金矱)의 묘표로, 이민구(李敏求)가 글을 짓고 오시복(吳始復)이 글씨를 썼다.
김확(1572~1633)은 자가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하곡(荷谷) 허봉(許篈)에게 수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
묘표는 주로 김확이 철원부사(鐵原府使)을 지낼 때 이룩한 업적들을 서술하여, 김확이 관리로서 상당한 능력이 있었던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5) 김응해신도비(金應海神道碑)
시대 |
조선 |
연대 |
1684년(숙종10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전체 높이 144㎝, 너비 58㎝, 두께 30㎝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 |
소재지 |
(일본)경도대학(京都大學)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조경(趙絅) / 박경후(朴慶後) / 미상 |
1684년(숙종 10)에 세워진 김응해(金應海)의 신도비이다. 찬자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고 숙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글씨에 능했던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이며, 서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황해도감찰사를 역임했고 통제사로 일본에 다녀왔던 취옹(醉翁) 박경후(朴慶後, 1644~?)이다.
묘역은 최근에 개수하였으며,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도 최근에 개수한 것이다. 묘비의 비신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비대좌와 대좌는 하나의 석재로 만들었으며, 복련과 화문의 안상을 부조하였다. 묘비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김응해(1588~1666)의 자는 군서(君瑞)이며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고 영의정으로 추증된 응하(應河)의 아우이다. 1616년(광해군 8)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지냈다. 1620년 강계부사(江界府使) 등 외직을 지내면서 청렴결백하게 민정을 보살폈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황해도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서울로 진격하자 300기병을 이끌고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어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살아났다. 형제가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비문은 그의 관직생활로 시작하여 병자년에 별장(別將)이 되어 장렬히 싸우다 형 응하가 죽었던 내용과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죽은 내용을 서술하였고 부인과 자식에 대한 내용으로 마무리 지었다.
6) 이창의 묘표(李昌誼墓表)
시대 |
조선 |
연대 |
1786년(정조10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55cm, 너비 66cm, 두께 37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
소재지 |
(한국)국사편찬위원회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이창현(李昌顯) / 윤동섬(尹東暹) / 미상 |
이 비는 1786년(정조 10년) 강원도 철원에 건립된 이창의묘표(李昌誼墓表)로 동생인 이창현(李昌顯)이 비문을 지었고, 윤동섬(尹東暹)이 글씨를 썼다.
이창의(李昌誼 : 1704~1772년)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성방(聖方)이다. 1735년(영조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로 처음 벼슬자리에 나아갔으며,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문학,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 후 승지, 충청도관찰사, 병조참판 등을 거쳐 1749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왔다. 후에는 호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의 자리까지 역임하였으며, 우의정의 자리에 있으며 병으로 생을 마쳤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90년대로 추정된다.
7) 이면긍 묘갈(李勉兢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824년(순조24년) |
유형/재질 |
비문 / 대리석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54cm, 너비 60cm, 두께 36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학사리 |
소재지 |
(한국)국사편찬위원회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이면백(李勉伯) / 이면승(李勉昇) / 미상 |
이면긍(李勉兢 : 1753~1812년)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대림(大臨)이다. 1783년(정조 7년)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홍문관에 들어가 응교,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정조 11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후 이조참의, 영천군수,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가. 일처리 소홀로 인해 파직되었다. 후에 복직하여 승지, 이조참판, 형조참판,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812년에는 의정부우참찬, 도감제조의 벼슬을 하다가 병으로 생을 마쳤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8)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조상기(到彼岸寺鐵造毘盧蔗那佛坐像造像記)
시대 |
통일신라 |
연대 |
865년(경문왕 5년, 당(唐) 의종(懿宗) 함통(咸通) 6년) |
유형/재질 |
불상 / 철 |
문화재지정 |
국보 - 63호 |
크기 |
불상 크기 91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도피안사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도피안사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이 조상기(造像記)는 경문왕(景文王) 5년(865)에 조성된 것이다. 철조 비로자나불을 만들고 불상의 등에 새긴 명문으로, 불상의 크기는 91cm이며 명문은 글자 크기 2cm의 해서체로 쓰여졌다. 현재 철원군(鐵原郡) 동송면(東松面) 관우리(觀雨里) 도피안사(到彼岸寺)에 현존한다. 자료의 찬자와 서자는 미상이다.
본 자료는 먼저 불상 조성의 발원문(發願文)을 쓰고 이어 불상 조성의 내역을 기록하였다. 본 조상기는 9세기 중반의 향도(香徒) 조직과 신앙(信仰) 사례를 확인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불상에는 판독이 가능한 150여자의 글은 아래와 같다.
香徒佛銘文幷序」
夫釋迦佛晦影歸眞遷儀越世紀世掩色不鏡三」
千光敀一千八百六載耳恠斯彫此金容⼊」
⼊來哲因立願之唯願卑姓室遂棨椎自擊⼊」
⼊覺長昏換庸鄙志契眞源恕以色莫朴⼊見」
唐天子咸通六年正月日新羅國漢州北界」
鐵員郡到彼岸寺成佛之⼊士⼊龍岳堅清于時⼊」
覓居士結緣一千五百餘人堅金石志勤不覺勞因」
(해석문)
향도불(香徒佛)의 서문(銘文)과 서(序)
석가불이 그림자를 흐려 진원(眞源)에 돌아가고 의례(儀禮)를 옮겨 세간을 넘으며 세상에 기록하여 형상을 가려 삼천대천세계에 빛을 비추지 않고 돌아가신 지 1806년이 되었다. 이를 슬퍼하여 이 금상을 만들고자…… 인하여 서원(誓願)을 세웠다. 오직 바라건대 비천한 사람들이 마침내 창과 방망이를 스스로 쳐 긴 어둠에서 깨쳐날 것이며 게으르고 추한 뜻을 바꾸어 진리의 근원에 부합하며 바라건대…….
당(唐)나라 함통(咸通) 6년(865) 을유년 정월 일에 신라국 한주(漢州) 북쪽 지방 철원군(鐵員郡)의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불상을 이룰 때에…… 이때에 거사(居士)를 찾아 1500여 명이 인연을 맺으니 금석(金石)과 같은 굳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 힘든 줄을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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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불상에 배명된 글자 중 일부 |
9) 황순경 신도비(黃舜卿神道碑)
시대 |
조선 |
연대 |
1580년(선조13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75cm, 너비 86cm, 두께 20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능동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능동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박계현(朴啓賢) / 송인(宋寅) / 미상 |
황순경(黃舜卿, 1494~1564년)은 본관이 창원(昌原)으로 정토장군(征討將軍) 신(信)의 후손이다. 1521년(중종 16년)에 처음 예빈참봉(禮賓參奉)으로 등용된 후 외직과 내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비문에는 황순경의 선조(先祖)내력과 역임한 관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순경은 무난한 관직생활을 하였고 또한 자손도 번성하여 다복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0) 임류 묘갈(任瀏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552년(명종7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94cm, 너비 74cm, 두께 21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경기도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정사룡(鄭士龍) / 송인(宋寅) / 미상 |
비석의 옆면이 파손되어 일부 판독이 불가능하나 그 외에는 양호하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문장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다.
임류(任瀏 : 1453~1528년)는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한성부판관 팽손(彭孫)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부모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으로 횡성·포천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후 내직(內職)으로 군자시첨정(軍資寺僉正)을 거쳐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에 승진하였다. 특히 윤대(輪對)할 때 고을에 향학장(鄕學長) 설치를 간하여 풍교(風敎)를 일으켰다. 임류는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60세의 나이에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비문에는 임류의 선조(先祖)내력과 어렵게 과거에 급제한 일, 임류가 은계역(銀溪驛)에서 야인(野人)들이 조공을 받치는 일을 문관으로서 주관한 일이 나타나 있다.
11) 김세언 묘갈(金世彦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704년(숙종30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47cm, 너비 58cm, 두께 26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 (어은동)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 (어은동) / 경기도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신완(申琓) / 김구(金構) / 미상 |
비석은 양호한 편이나 옆면의 마모가 심하다. 찬자는 경암(絅庵) 신완(申琓)이며 서자는 김구(金構), 전액(篆額)은 김집(金潗)이 썼다. 김세언(金世彦 : 1630~1658년)은 안동인(安東人)으로 김응하(金應河)의 막내동생 응해(應海)의 손자이다. 나이 29세로 단명하였는데, 항상 총융공(摠戎公) 응해(應海)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였다.
비문에는 무신 명문가문으로서 요동백(遼東伯) 김응하 가문의 내력과 김세언의 가족과 자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단명한 관계로 충효를 더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표현되어 있다. 옆면 추기(追記)에는 묘소가 1717년 송진리(宋眞里) 이장(移葬)되었음이 양자로 들어간 찬자 집(潗)에 의
12) 이시만 묘비(李時萬墓碑)
시대 |
조선 |
연대 |
1715년(숙종41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65cm, 너비 64cm, 두께 49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산 관음동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산 관음동/ 경기도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이언강(李彦綱) / 미상 / 미상 |
비문에는 이시만의 선조약력(先祖略歷)과 이시만의 관력(官歷), 자식의 소개가 되어 있다. 관직생활이 순탄치 못했음에도 비문의 내용은 간결하다. 또한 비문 중에는 이시만의 시문집 『묵전당집(黙全堂集)』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李時萬 墓碑
<1面>
朝鮮國 贈吏曹參判行全南道觀察使李公諱時萬墓(貞夫人安東權氏祔左)
<2面>
公諱時萬字錫汝 世宗大王苐十七男寧海君諡安悼諱瑭七代孫也曾祖諱德良 贈左通禮祖諱耆命掌隷院司評 贈左承旨考諱揚休翊衛司司禦 贈吏曹判書妣 贈貞夫人驪興閔氏別提諱成章之女公生於萬曆辛丑中甲子司馬庚午文科初隷槐院薦入史局兼侍講院說書轉承政院注書陞兵禮曹佐郞迭居玉堂諫院憲府諸職丁亥以政府舍人充書狀官赴燕戊子陞通政歷兵曹參知右副承旨出爲全南道觀察使此公歷官大略也公天資重厚外嚴內和持論方確遇事不撓在三司十餘載刺擧率多權要以此竟遭跋疐屛處鷺湖唯以耽玩書籍敎諫子孫爲適季秊强就鐵原府旋棄歸以壬子十二月二十五日卒享秊
<3面>
七十二葬于鐵原觀音洞負艮原所著詩文有默全堂集藏於家不肖冒玷卿列推 恩贈吏曹參判夫人安東權氏參判諱盡己之女孝敬和睦閏門之內穆如也先公十秊卒祔公墓左擧二男一女男長伯麟文科司憲府持平次仲麟生員女適承旨閔周晩持平男彦紀文科參判彦綱文科判書彦維通政牧使女縣令閔宗魯生員男彦績彦縝女許淰縣令洪禹圭羅斗秋進士趙聖弼閔承旨繼子致雍彦紀男敬躋誠躋道躋女府使沈齊賢判官趙命禎彦綱男泰躋女進士鄭光賓崔守哲彦維男敏躋
<4面>
女柳綏彦績男華躋恒躋嵩躋女趙鳳輝彦縝男台躋雲躋
崇禎紀元後再乙未 孫男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彦綱謹識
前面集蘇 軾字
陰記集顔眞卿字
【해석】
공의 휘는 시만(時萬)이요, 자는 석여(錫汝)이며, 세종대왕의 열일곱 번째아들이신 영해군 시호 안도 휘 당(瑭)의 7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덕양(德良)이며 좌통례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기명(耆命)이며 장예원사평을 역임하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양휴(揚休)이고 익위사사어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에 증직된 여홍민씨로 별제 휘 성장의 딸이다.
공은 만력 신축년(1601년)에 태어나 갑자년(1624년)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오년 (163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괴원에 예속되었다가 사국으로 추천되어 들어가 시강원설서를 겸하였다. 승정원주서로 전임되었다가 병 ∙ 예조좌랑으로 올랐고 번갈아가며 옥당 ∙ 간원 ∙ 헌부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정해년(1647년)에 정부사인으로써 서장관에 충원되어 연경을 다녀왔다. 무자년(1648년) 통정에 올라 병조참지 ∙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가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것이 공의 역임한 벼슬의 대략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중후하며 외면은 엄하고 내면은 온화하며 지론(持論)이 방정하고 굳어서 일을 장하여도 흔들리지 않았다. 십여 년 동안 삼사에 있으면서 자거한 것이 대부분 권세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끝내 좌절하여 노호로 물러나 살면서 다만 서적을 탐독하고 완미하며 자손들에게 일과를 가르치는 것으로 마땅함을 삼았다. 말년에 억지로 철원부로 나아갔으나 곧바로 버리고 돌아왔다.
임자년(1672년) 12월 25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2세이다. 철원의 관음동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저술한 시문에 묵전당집이 집에 보관되어있다. 불초가 결점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의 반열에 올라감으로써 추은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참판 휘 진기(盡己)의 딸이다. 시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하며 화목하여 규문의 안이 화평하였다. 공보다 10년 먼저 돌아가셨으며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하였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백린(伯麟)은 문과 사헌부 지평이고, 차남 중린(仲麟)은 생원이며, 딸은 승지 민주면에게 출가하였다. 지평의 아들 언기는 문과 참판이고, 언강은 문과 판서이고, 언유는 통정목사이며, 딸은 현령 민종노에게 출가하였다. 생원의 아들은 언적 ∙ 언진 이고, 딸은 허심 ∙ 헌령 홍우규 ∙ 나두추 ∙ 진사 조성필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민승지의 양자는 치옹이다. 언기의 아들은 경제 ∙ 성제 ∙ 도제이고, 딸은 부사 심제현 ∙ 판관 조명정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언강의 아들은 태제이고, 딸은 진사 정광빈 ∙ 최수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언유의 아들은 민제이고, 딸은 유수에게 출가하였다. 언적의 아들은 화제 ∙ 항제 ∙ 숭제이고, 딸은 조봉휘에게 출가하였다. 언진의 아들은 태제 ∙ 운제이다.
숭정 기원후 두 번째 을미년(숙종 41, 1715년)에 손자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언강(彦綱)이 삼가 기록하고, 전면은 소식(蘇軾)의 글자를 집자하고, 음기는 안진경(安眞卿)의
13) 유명악 묘갈(兪命岳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735년(영조11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86cm, 너비 75cm, 두께 30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
소재지 |
국사편찬위원회 |
서체 |
행서(行書) |
찬자/서자/각자 |
이재(李縡) / 김진상(金鎭商) / 미상 |
유명악(兪命岳 : 1667~1718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이며, 자는 군사(君四)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김창흡에게서 수학하여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1689년(숙종 15년)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화를 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로 송시열이 신원되자 벼슬에 뜻을 두고 1705년(숙종 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14) 유척기 묘표(兪拓基墓表)
시대 |
조선 |
연대 |
1769년(영조45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50cm, 너비 61cm, 두께 55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
소재지 |
(한국)국사편찬위원회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유척기(兪拓基) / 유언흠(兪彦,欽),유성환(兪星煥 / 미상 |
이 비는 1769년(영조 45년) 강원도 철원에 건립된 유척기묘표(兪拓基墓表)로 유척기(兪拓基) 본인이 스스로 명을 지었으며,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한호(韓濩)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유척기(兪拓基 : 1691~1767년)의 본관은 기계이고, 자는 전보(殿甫)이며,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다. 1714년(숙종 40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제수된 이후 정언·수찬·이조정랑·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년) 왕세제(후에 영조)를 책립하자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이거원의 탄핵을 받고 해도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승지, 강원도관찰사, 도승지, 우의정 등을 역임한 이후 사직하였다. 후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760년 영중추부사가 되고는 이어서 봉조하를 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지수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90년대로 추정된다.
9) 황순경 신도비(黃舜卿神道碑)
시대 |
조선 |
연대 |
1580년(선조13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75cm, 너비 86cm, 두께 20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능동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능동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박계현(朴啓賢) / 송인(宋寅) / 미상 |
황순경(黃舜卿, 1494~1564년)은 본관이 창원(昌原)으로 정토장군(征討將軍) 신(信)의 후손이다. 1521년(중종 16년)에 처음 예빈참봉(禮賓參奉)으로 등용된 후 외직과 내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비문에는 황순경의 선조(先祖)내력과 역임한 관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순경은 무난한 관직생활을 하였고 또한 자손도 번성하여 다복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0) 임류 묘갈(任瀏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552년(명종7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94cm, 너비 74cm, 두께 21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경기도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정사룡(鄭士龍) / 송인(宋寅) / 미상 |
비석의 옆면이 파손되어 일부 판독이 불가능하나 그 외에는 양호하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문장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다.
임류(任瀏 : 1453~1528년)는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한성부판관 팽손(彭孫)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부모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으로 횡성·포천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후 내직(內職)으로 군자시첨정(軍資寺僉正)을 거쳐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에 승진하였다. 특히 윤대(輪對)할 때 고을에 향학장(鄕學長) 설치를 간하여 풍교(風敎)를 일으켰다. 임류는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60세의 나이에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비문에는 임류의 선조(先祖)내력과 어렵게 과거에 급제한 일, 임류가 은계역(銀溪驛)에서 야인(野人)들이 조공을 받치는 일을 문관으로서 주관한 일이 나타나 있다.1) 김세언 묘갈(金世彦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704년(숙종30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47cm, 너비 58cm, 두께 26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 (어은동)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 (어은동) / 경기도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신완(申琓) / 김구(金構) / 미상 |
비석은 양호한 편이나 옆면의 마모가 심하다. 찬자는 경암(絅庵) 신완(申琓)이며 서자는 김구(金構), 전액(篆額)은 김집(金潗)이 썼다. 김세언(金世彦 : 1630~1658년)은 안동인(安東人)으로 김응하(金應河)의 막내동생 응해(應海)의 손자이다. 나이 29세로 단명하였는데, 항상 총융공(摠戎公) 응해(應海)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였다.
비문에는 무신 명문가문으로서 요동백(遼東伯) 김응하 가문의 내력과 김세언의 가족과 자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단명한 관계로 충효를 더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표현되어 있다. 옆면 추기(追記)에는 묘소가 1717년 송진리(宋眞里) 이장(移葬)되었음이 양자로 들어간 찬자 집(潗)에 의해 밝혀져
12) 이시만 묘비(李時萬墓碑)
시대 |
조선 |
연대 |
1715년(숙종41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65cm, 너비 64cm, 두께 49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산 관음동 |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산 관음동/ 경기도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이언강(李彦綱) / 미상 / 미상 |
비문에는 이시만의 선조약력(先祖略歷)과 이시만의 관력(官歷), 자식의 소개가 되어 있다. 관직생활이 순탄치 못했음에도 비문의 내용은 간결하다. 또한 비문 중에는 이시만의 시문집 『묵전당집(黙全堂集)』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李時萬 墓碑
<1面>
朝鮮國 贈吏曹參判行全南道觀察使李公諱時萬墓(貞夫人安東權氏祔左)
<2面>
公諱時萬字錫汝 世宗大王苐十七男寧海君諡安悼諱瑭七代孫也曾祖諱德良 贈左通禮祖諱耆命掌隷院司評 贈左承旨考諱揚休翊衛司司禦 贈吏曹判書妣 贈貞夫人驪興閔氏別提諱成章之女公生於萬曆辛丑中甲子司馬庚午文科初隷槐院薦入史局兼侍講院說書轉承政院注書陞兵禮曹佐郞迭居玉堂諫院憲府諸職丁亥以政府舍人充書狀官赴燕戊子陞通政歷兵曹參知右副承旨出爲全南道觀察使此公歷官大略也公天資重厚外嚴內和持論方確遇事不撓在三司十餘載刺擧率多權要以此竟遭跋疐屛處鷺湖唯以耽玩書籍敎諫子孫爲適季秊强就鐵原府旋棄歸以壬子十二月二十五日卒享秊
<3面>
七十二葬于鐵原觀音洞負艮原所著詩文有默全堂集藏於家不肖冒玷卿列推 恩贈吏曹參判夫人安東權氏參判諱盡己之女孝敬和睦閏門之內穆如也先公十秊卒祔公墓左擧二男一女男長伯麟文科司憲府持平次仲麟生員女適承旨閔周晩持平男彦紀文科參判彦綱文科判書彦維通政牧使女縣令閔宗魯生員男彦績彦縝女許淰縣令洪禹圭羅斗秋進士趙聖弼閔承旨繼子致雍彦紀男敬躋誠躋道躋女府使沈齊賢判官趙命禎彦綱男泰躋女進士鄭光賓崔守哲彦維男敏躋
<4面>
女柳綏彦績男華躋恒躋嵩躋女趙鳳輝彦縝男台躋雲躋
崇禎紀元後再乙未 孫男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彦綱謹識
前面集蘇 軾字
陰記集顔眞卿字
【해석】
공의 휘는 시만(時萬)이요, 자는 석여(錫汝)이며, 세종대왕의 열일곱 번째아들이신 영해군 시호 안도 휘 당(瑭)의 7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덕양(德良)이며 좌통례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기명(耆命)이며 장예원사평을 역임하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양휴(揚休)이고 익위사사어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에 증직된 여홍민씨로 별제 휘 성장의 딸이다.
공은 만력 신축년(1601년)에 태어나 갑자년(1624년)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오년 (163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괴원에 예속되었다가 사국으로 추천되어 들어가 시강원설서를 겸하였다. 승정원주서로 전임되었다가 병 ∙ 예조좌랑으로 올랐고 번갈아가며 옥당 ∙ 간원 ∙ 헌부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정해년(1647년)에 정부사인으로써 서장관에 충원되어 연경을 다녀왔다. 무자년(1648년) 통정에 올라 병조참지 ∙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가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것이 공의 역임한 벼슬의 대략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중후하며 외면은 엄하고 내면은 온화하며 지론(持論)이 방정하고 굳어서 일을 장하여도 흔들리지 않았다. 십여 년 동안 삼사에 있으면서 자거한 것이 대부분 권세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끝내 좌절하여 노호로 물러나 살면서 다만 서적을 탐독하고 완미하며 자손들에게 일과를 가르치는 것으로 마땅함을 삼았다. 말년에 억지로 철원부로 나아갔으나 곧바로 버리고 돌아왔다.
임자년(1672년) 12월 25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2세이다. 철원의 관음동 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저술한 시문에 묵전당집이 집에 보관되어있다. 불초가 결점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의 반열에 올라감으로써 추은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참판 휘 진기(盡己)의 딸이다. 시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하며 화목하여 규문의 안이 화평하였다. 공보다 10년 먼저 돌아가셨으며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하였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백린(伯麟)은 문과 사헌부 지평이고, 차남 중린(仲麟)은 생원이며, 딸은 승지 민주면에게 출가하였다. 지평의 아들 언기는 문과 참판이고, 언강은 문과 판서이고, 언유는 통정목사이며, 딸은 현령 민종노에게 출가하였다. 생원의 아들은 언적 ∙ 언진 이고, 딸은 허심 ∙ 헌령 홍우규 ∙ 나두추 ∙ 진사 조성필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민승지의 양자는 치옹이다. 언기의 아들은 경제 ∙ 성제 ∙ 도제이고, 딸은 부사 심제현 ∙ 판관 조명정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언강의 아들은 태제이고, 딸은 진사 정광빈 ∙ 최수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언유의 아들은 민제이고, 딸은 유수에게 출가하였다. 언적의 아들은 화제 ∙ 항제 ∙ 숭제이고, 딸은 조봉휘에게 출가하였다. 언진의 아들은 태제 ∙ 운제이다.
숭정 기원후 두 번째 을미년(숙종 41, 1715년)에 손자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언강(彦綱)이 삼가 기록하고, 전면은 소식(蘇軾)의 글자를 집자하고, 음기는 안진경(安眞卿)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13) 유명악 묘갈(兪命岳墓碣)
시대 |
조선 |
연대 |
1735년(영조11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86cm, 너비 75cm, 두께 30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
소재지 |
국사편찬위원회 |
서체 |
행서(行書) |
찬자/서자/각자 |
이재(李縡) / 김진상(金鎭商) / 미상 |
유명악(兪命岳 : 1667~1718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이며, 자는 군사(君四)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김창흡에게서 수학하여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1689년(숙종 15년)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화를 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로 송시열이 신원되자 벼슬에 뜻을 두고 1705년(숙종 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
14) 유척기 묘표(兪拓基墓表)
시대 |
조선 |
연대 |
1769년(영조45년) |
유형/재질 |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50cm, 너비 61cm, 두께 55cm |
출토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
소재지 |
(한국)국사편찬위원회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유척기(兪拓基) / 유언흠(兪彦,欽),유성환(兪星煥 / 미상 |
이 비는 1769년(영조 45년) 강원도 철원에 건립된 유척기묘표(兪拓基墓表)로 유척기(兪拓基) 본인이 스스로 명을 지었으며,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한호(韓濩)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유척기(兪拓基 : 1691~1767년)의 본관은 기계이고, 자는 전보(殿甫)이며,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다. 1714년(숙종 40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제수된 이후 정언·수찬·이조정랑·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년) 왕세제(후에 영조)를 책립하자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이거원의 탄핵을 받고 해도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승지, 강원도관찰사, 도승지, 우의정 등을 역임한 이후 사직하였다. 후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760년 영중추부사가 되고는 이어서 봉조하를 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지수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90년대로 추정된다.
첫댓글 1) 의 堯東伯 忠武公 金應河 將軍 님은 조선의 충무공 9분중 의 한분이시며(이순신,김시민, 남이,김응하,왕족인 구성군 이준,이수일,정충신,조영무,구인후) 철원의정신이시며 나의 12대조부 이십니다 !!
종민씨 계속 수고하십시요~
*고침니다 윗글의" 堯東伯 을 遼東伯 으로" 죄송하고~
올라온 김에 5) 金應海 將軍 님은 윗글의 遼東伯 將軍 님의 친동생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