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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교회와 양도보통학교 황원준
들어가는 글
1 이동휘 그는 누구인가.
2 흥천보창학교
3 흥천합일학교의 수난
4 흥천여학교
5 흥천사설강습소
6 아아 그날이여 조국광복의 그날이여,
1906년 봉건주의 사회에서 근대화를 외치며 일떠선 사람이 당대의 유학자 김용하(金容夏1849-1919)와 의생(醫生)으로써 민중계몽운동에 나섰던 전병규(田炳奎1857-1936)지사(志士)였다. 이 두 사람은 마을사람들을 모아 김용하의 내실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흥천 교회를 세웠다
전 교인이 뜻을 모아 샘고지 야산 기슭에 초가6칸 교회당을 건립하고 예배를 드렸다 당시에는 예배를 드릴 때 회당 가운데에 검은 휘장을 치고 남녀 석이 서로 보이지 않게 하여 남녀구별을 엄격히 하였다.
흥천 교회가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하기위해서는 민중계몽이 절대 우선되어야한다고 생각하여 선교전략으로 교육을 강조했는데 밤마다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운동에 힘썼다 이때에 교사로는 전효배 김종우 지선주등이었다
1907년에 흥천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야학의 현장에 이동휘가 방문했다
이동휘(李東輝1873-1935)그는 누구인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0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단천군의 통인(通人)으로 발탁되었다.
아버지 이승교는 나라가 일본에 의하여 강점되자 만주 노령등지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근대화와 민중개화운동에 앞장섰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이동휘는 의분심이 가슴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통인(말단관리) 이동휘는 단천군의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많이 보며 봉건체제의 말단에서 자행되는 부정부패를 눈으로 볼 때 타오르는 의분을 참지 못했다
한 날은 단천군수 홍종후(洪鐘厚)가 생일잔치를 벌여놓고 기생을 추행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숯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청동화로를 군수의 얼굴에 씌워놓고 달아났다 이동휘는 숨어서 살아야할 신세가 되었다 얼마 후 새로 부임한 군수는 개화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이동휘에게 자수하여 나갈 길을 찾으라는 권면에 따라 자기의 행동을 고백하고 새 군수의 주선으로 서울로 가서 무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봉건주의체제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뇌꼴스러움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였다. 부패한 군수에게 요강을 던지고 토막을 던지고 도망 처 결국은 무관학교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1897년 (25세)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참위(參尉)로 임관한 이동휘는 궁전진위대에 근위장교로 보임 되었다. 왕권 호위에 최강군인 궁전진위대에서 창덕궁과 경복궁의 수비에 정성을 다하는 나날을 보내다가 27세가 되던 해에 (1899년) 원수부 군무국원에 임명되었고 11월에는 부중위로 승진 되었다 그 시대에 원수부 군무원은 군대에서의
요직으로 민영환이 있었는데 이동휘는 민영환에게 사숙(私塾)하여 그 훈도를 받고 민족 국가를 논하며 애국심을 열성적으로 다져나갔다.
1901년 (29세)참령(지금의 소령)으로 승진한 이동휘는 조정에 명에 의하여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순찰, 검사하는 삼남검사관 (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지방 관리들의 부정과 악행이 계속되어 정부에서는 암행어사격인 검사관을 파견하여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는데 이동휘가 여기에 발탁된 것이다.
이동휘는 청렴하고 강직한 삼남 검사관으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동휘가 전북 이리에 갔을 때 그가 병졸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도중 소를 몰고 지나가는 농부에게 돌연 큰 소리로 “소를 놓고 가라”고 고함을 친 일이 있었다. 이에 질겁한 농부가 그만 소를 놓고 달아나자 병졸을 시켜 농부를 잡아오게 한 뒤 볼기를 치면서 “어찌 위세 있는 자가 소를 달라고 하기로서니 자기소를 그대로 빼앗기느냐” 고 훈계를 한면서 주권의식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동휘는 1903년(31세)5월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임명되어 강화도에 부임하였다. 강화도에 주둔 병력은 700명에 달하였다. 서울에 이르는 근접통로 로 방어 하는데 불가결한 전략적 요지로서 최고의 군대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동휘가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 미국인 선교사 벙커(A.D.BunKer) 와 박능일 목사가 겨우 두세 명의학생을 데리고 “잠무의숙”(岑茂義塾)(현 강화합일 초등학교)이라는 사숙(私塾)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벙커와 박능일과 이동휘가 합세하여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강화합일학교를 세웠다. 이동휘는 이때에 최초로 선교사와 접촉하는데 이때의 만남은 그가 본격적으로 개화사상을 대중적으로 펼쳐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활무대가 된 것이다.
1905년 11월17일 저 악몽의 을사 늑약에 의하여 대한 제국은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조야백관과 유생들이 복합 상소를 전개하였고 경향각지에서는 일본을 규탄하는 데모가 일어나는 한편 판서 민영환 의정 조병세 참판 홍만식 등이 순절의 피를 뿌렸다.
이동휘는 고종에게 보내는 유소(遺疏 )에서 “臣은 국방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공연히 봉록(俸祿)만 축내고 있었으므로 금년이후 본직의 해임을 간청하오며 강화로 내려가 교육에 종사하면서 이것으로 만분의 일이라도 국은에 보답하려고”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이 무능력함으로 을사오적을 척결하지 못하고 일본의 간계에 나라를 넘겨준데 대하여 분노를 느끼고
나아가서는 자신이 무능력하였음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1896년 청운의 뜻을 품고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한 이동휘는 그동안 십 년 에 걸친 세월, 정든 군복을 훨훨 벗었다 그리고 그는 강화로 갔다
1913년 그는 북간도로 망명하여 끈질긴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에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1920년11월에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오로지 조국 독립에 몸을 바친 민족혁명가였으며 민족운동전개의 매 단계에서 자신의 사상과 실천노선을 능동적으로 대응시켜간 항일 독립투쟁가였다.
흥천 보창학교(興天普昌學校)
1907년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연대였다. 이 준 이상설 두 열사가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 까지 가서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다가 순사했던 일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고종황제가 강제로 왕위에서 밀려나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군대가 해산당하여 나라의 꼴이 엉망이 된 비운의 해였다
이때에 흥천 교회에서는 국가장래와 민족의 얼을 잃게 되는 비통함을 절실히 느끼고 국권회복 운동에 선봉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국권회복은 오로지 민중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고 우선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야학으로 문맹퇴치사업을 시작했다.
이때에 이동휘가 흥천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배우려고 하는 열의를 칭찬하고 야학보다는 온 동네가 다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규모를 확대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리하여 흥천교회는 이동휘를 초대교장으로 영입하고 흥천 보창학교를 세웠다. 보창학교는 흥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성 보창학교와 김천 장단 풍덕 안악 충청북도에 호흥 함흥등지에 보창학교 를 세웠는데 이 학교들이 모두다 강화에 보창학교를 모델로 하여70여 개교나 세워진 것이다.
당시 이동휘는 안창호와 더불어 한국 제일의 교육가로 존경받았다.
1905년(광무9년)에 보창학교의 관계자와 학생20 여 명을 대동하고 덕수궁에 있는 고종황제를 알현하여 국권회복운동으로 학교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임금께 아뢰니 황제께서는 심히 기뻐하시며 ‘잘 하였도다’ 그대들의 학교이름을 주노니 보창(普昌)이라 하라 친히 교명을 지어주셨다 한편 영친왕전하(英親王殿下)의친필로 학교간판을 써 주시고 내탕금에서 위로금으로 6백 원을 하사하셨다. 뿐만 아니라 적석사소유인 임야와 토지에서 나오는 도저도 학교사업에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이동휘는 보창 이라는 교명을 황제로부터 하사받고 한없이 기뻐했다
페하께서 친히 지어주신 교명을 누가 감히 해석하랴마는 보(普)는 크다는 의미를 담았다 두루두루 여러 가지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햇빛침침할보라고도 부른다. 창(昌)은 나타낸다는 의미다 아름다운 말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한다. 햇빛 창이라고도 한다. 암울한 시대에 아름다움을 두루두루 크게 나타내는 학교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필자의 생각이다.
보창학교의 교육정신은 철두철미 기독교정신과 호국과 근대화정신을 토대로 하였다. 이종호가세운 보성학교,(1905년) 이준이 설립한 보광학교와 함께 교육의 삼보(三寶)로 불리어질 정도였다. 이 세 학교의 교육목표는 애국심을 함양하는 것이 제일의 의무였다. 그런 점들은 보창학교 교가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교가나 교육가(敎育歌)도 이동휘가 직접 지은 가사일 것으로 추정한다.
무쇠골격 돌 근육 소년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 하여라
때 달았네 때달았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때달았네
만인대적 연수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또 보창학교 교육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국민계몽운동정신을 담고 있다
1. 대한국 만세에 부강기업은 국민을 교육함에 전혀 있도다.
우리는 덕을 닦고 지혜 길러서 문명의 선도자가 되어봅시다.
2. 태평양과 대서양에 무한한 물은 산곡 간에 적은 물이 회합함이요
우리들의 모든 사업 성취하기는 천신만고 지난 후에 능히 하리라.
고종황제가 하사한 적석사소유의 토지와 임야에 대한 지세,(地稅) 영친왕의 하사금, 그리고 이동휘의 후원자이며 내장원경 이던 이용익의 후원금 등으로
운영하고 민족정신을 강조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간부를 육성하는데 주력하였다.
1907년 조선군대 해산 시 강화도 진위대가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기 때문에 이동휘가 체포되었다.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심 역할을 하던 강화읍의 교사는 일제 수비대에게 빼앗기고 양노당으로 이전하였다 그후 전전하다가 양노당은 금륭조합에 넘겨주고 적석사에서 나오는 도저를 강화보통학교로 넘겨주고 1915년에 폐교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강도지에는 보창학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前略)光武 九年에 鎭衛隊 參領 李東暉가 旣辭官하고 始設私立育英學校하니 舊東營 卽 本都敎育의 元祖라
1905년에 진위대장 참령 이동휘가 군대에서 사임하고 학교를 설립하니 강화에서 교육의 조상이라 는 뜻이다
그러나 흥천보창학교는 이보다 더 먼저 1909년에 폐교하였다
사실 흥천보창학교는 수명이 짧았다 이동휘교장이 체포되니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창학교가 페교 되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것은 흥천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국민 전부에게 닥친 비운이었다. 이동휘는 옥고를 치루고 1913년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흥천 교회는 매우 침울하였다 구름처럼 모여든 학생들은 배움의 열기가 불길처럼 타오르는데 폐교를 하면 젊은이들이 실의에 빠질 것임을 감안할 때 절대로 폐교 할 수는 없었다. 전병규와 김용하는 고심 끝에 교명을 흥천 합일학교로 개명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교명을 바꾸면서 전병규가 교장직을 수행하였다. 합일이라는 뜻은 물론 하나로 단결하여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지만, 그 속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강화 감리교 초기에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가 된 의미를 살려 이름 자에 끝 자를 한 일자로 통일하여 돌림자를 정했던 한 일자신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정천일 인데 아들도 ‘피일’ ‘기일’로 고쳐서 쓴 한일자 돌림 교인들이 70여 명이 있었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교명을 ‘합일’로 정하게 되었다
합일(合一)은 비통에 잠긴 민족의 단결을 표시했다 그리하여 항상 기독교 정신으로 결합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합일 운동에 대하여 일제가 시샘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하나가 되어 민족운동, 또는 독립정신으로 뭉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보창 정신을 이어받은 흥천 합일학교에는 양도면은 물론이고 길상 화도 내가 각처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흥천교회 연혁에 의하면 학생수가 158명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교사(敎師)는 전병규의 아들 전효배 김용하의 생질(甥姪)인 지선주, 성명미상인 윤 모 씨가 있었다.
합일학교에서는 일반학과를 종합적으로 가르쳤다 한편 체육정신을 고취 하여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깃 드리게 하였다
인산리에 있는 마장에서 육상경기대회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에 합일학교에서는 악대가 있었다. 북이 두 개에 나팔이 둘 이었다 당시는 “코코잽이“라고도 불렀다. 북소리에 나팔을 불며 보무도 당당한 행진을 하면 구경하는 사람들은 우뢰 와 같은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전교생은 짚신을 신고 검 두루마기에 모자를 썼다 모표에는 합일학교 라는 합(合)자를 한문으로 쓰고 가사리는 기독교정신을 의미하는 사랑의 뜻을 원형으로 감싸 둘렸다 교기는 하얀 판에 가운데에 합자를 박고 윗면에 사립흥천합일하교 (私立興天合一學校)라고 썼다 교기는 언제나 그 장엄한 모습으로 흥천을 상징하고 있었다.
흥천합일은 나름대로 잘 발전하고 있었다. 강화에서는 강화합일학교와 함께 우수한 학교로 알려졌다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러워하는 흥천합일학교는 당대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1910년 8월22일은 우리나라를 일본에 통치권전부를 넘겨주는 부끄러운 역사를 연출하였다 든 국민은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흥천 합일학교는 꿈에도 그리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졸업사진에는 救主降世一九百十一年四月二十日 私立興天合一學校第一回卒業式 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참으로 얼마나 감동적인 역사인가, 김용하와 전병규는 이날을 얼마나 고대하였던가? 사진을 설명하면 가운데에 하얀 두루마기 입은 이가 전병규 교장이다 오른쪽으로 검정 두루마기에 하얀 수염이 늘어진 분이 김용하 그 옆에 중절모자를 쓴 젊은이가 지선주교사이다. 앞줄 왼쪽에 중절모자를 쓴 이가 전효배 교사이고 그 옆에 하얀 두루마기 입은 이는 성명미상이다
뒷줄에는 학생들이 나란히 일곱 명이 저마다 졸업장을 들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보창학교 시절에 입학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흥천합일학교 제 일회 졸업생인가? 안타까운 것은 일곱 졸업생 중에 한 사람도 누구인줄을 모르고 있다 역사에 묻힌 이 일곱 학생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1912년에는 제2회졸업식이 있을 줄로 짐작되는데 그렇지 않다. 1912년3월22일에 보습과(補習科)졸업식이 있었다. 보습과는 일종에 속성과로 과년한 학생들로 구성한 학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1912년 4월30일자 그리스도회보에 강화합일학교 졸업식과 흥천합일학교 졸업식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원문 그대로 옮김으로 이해를 돕고자한다
1, 잠두졸업 ; 강화잠두교회내 합일남녀학교 졸업식은 본월 一七일 하오 二시에 해디 교당내에서 실행하였난대 회장 조내덕씨가 김봉일씨에 긔도로 개회한후 학생중 김우영 김활란 량씨의 연설과 래빈중 목사 최병헌 해디 경찰셔장 충본정뎡량씨의 권설과 졸업생 오춘식의 답사가 있셨고 졸업생은 송두선등 四인이오 남학생진급에 김광련등 十四인이오 녀학생진급에 김활란등十一일인대 당일상품과제반비용은 학부형과 찬성원제씨가 담당하였다더라.........
이상은 강화 합일학교졸업식 소식이다 이어서 흥천합일학교 보습과졸업식 소식을 다음과같이 전하고있다
또 동군 흥텬동교회 합일학교 보습과 졸업생은 졍순규 리상필 황도문등 十一인이오 고등과 二학년 진급생은 윤상현등 六인이오 동 일학년 진급생은 김정인등 十인이오 보통과 二 학년 진급생은 윤유용등 七인이오 동 일학년 진급생은 한락현등 오인 이라더라.....
참으로 당시의 실황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신문 보도내용이다
1912년 3월22일에는 두 번째 의 열매를 거두는 보습과 졸업식 날이었다. 이날 졸업생은 열한 명이었다. 재학생 중 일학년이 17명이고 딋 줄로 2학년학생이 19명 교직원을 비롯하여 내빈이 16 명이었다
흥천합일학교 보습과 졸업생 중 황도문은 배재학당을 거쳐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시 기미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강화로 와서 ‘달오지’에 유봉진과 합세하여 주위에 사람들을 이끌고 강화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독립운동가 이다. 그는 ‘달오지’에서 흥천 학교까지 20리가 넘는 거리인데 매일 도보로 학교에 다녔다 만세운동의 주범으로 몰려 강원도 산골로 도망하여 3년간 어리장사를 가장하여 살다가 부천군 북도면 신도리로 가서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사가 되어 3년간 아이들을 교육하고 다시 덕적면 진리라는 곳에 가서 합일학교 교사가 되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김호신 장로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학생들을 데리고 마리산에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 드리던 자리라고 가르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더라는 것이다 황도문 선생이 신흥학교에 있을 때는 가끔 어떤 낮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들은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되어 밀입국한 독립군들이었다. 그들은 황도문의 도움을 받아 군자금을 모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방법의 하나로 개성에서 사온 인삼을 쪄서 홍삼을 만들어 중국에 가서 팔면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천합일학교 출신중에서 당대의 강화유지 급 인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화도면 내리에서 출생한 윤재근(1911-1972)은 흥천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보에 입학하여 1929년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투옥하여 옥고를 치루고 화도면 초대 면장을 거쳐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대한민국국회 초대, 2대, 4대, 5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4선 의원으로 건국의 무대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948년 초대 국회의원선거는 5월10일에 행하였다 그 때에 국회의원 입후보자는 많았다 그 중에 흥천 합일학교출신인 윤재근은 후보자중 출중하였다 뛰어난 웅변술은 청중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양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정견발표를 할 때에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한다. “여러분 나는 어릴 적에 ‘소루지’에서 여기 흥천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에 ‘민투리’(삼베로만든짚신) 를 신고 다녔는데 어서 달아야 아버지가 새 것으로 사 주시기 때문에 길바닥에 대고 문질러서 빨리 해지라고 작란 치던 유년기시절이 기억에 떠오릅니다.” 하면서 자기가 흥천학교 출신임을 유권자들에게 말하였다
1913년 3월26일은 합일학교 제 2회졸업의날 이다, 졸업사진을 보면 졸업생이 여섯 명에 재학생은 2학년이 18명, 3학년이 18명이다
1914년3월24일은 제3회 졸업식이다 졸업생이 일곱 명에 재학생은 47명으로 학생 수가 전년보다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1915년3월26일은 사립흥천합일학교 제 4회졸업생 들의 영광스러운 날이다.
지금까지는 튼 입구자형 초가집 앞에서 졸업사진을 찍었는데 4회 졸업생들은 일자형 초가에서 만국기로 장식하고 교기를 후면에 걸고 특기할만한 것은 악대가 있는 점이다 왼쪽에 북을 멘 학생이 둘이 있고 나팔을 든 학생이 둘이 있다 북을 멘 두 학생이 짚신을 신은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학생들이 고무신도 신지 못했다는 생활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졸업장을 들고 찍었는데 졸업장 통에 보통(普通)이라고 쓴 학생이 앞줄에 열 명이고 고등(高等)이라고 쓴 학생, 다섯 명이 뒷줄에 섰다 그로보아 보통과 졸업생이 열 명이요 고등과졸업생이 다섯 명임을 알 수 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전병규 교장은 가운데에 앉았고 그 오른쪽에 김용하 그 왼쪽에는 성명미상의 고사가 있다 1915년에 들어서는 벌써 합일하교 년조가 보창시절을 포함하여 칠 년이 되었으니 질적으로 양적으로 많이 성숙한 점을 짐작하게 된다.
이 사진 자료는 합일학교교사였던 지선주교사의 직계손자인 지창원의 소장품으로 역사이해에 큰 도움을 받았다
흥천 합일학교의 수난
흥천합일학교는 우후죽순 격으로 성장하였다 강화일대의 모든 청소년들이 흥천합일학교에 입학하기를 소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주민들도 흥천합일학교를 인정하고 후원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학생 수는 해마다 증가하였다 교실도 부족하여 지금까지의 초가 교사에서는 도저히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학교로서는 교실문제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전병규의 동반자인 김용하가 1919년 2월19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김용하는 당대의 유학자로 특히 도학에 심층한 그 시대에 도인(道人)이었다 그의 아호는 계암(啓巖)이다 이 호는 흥천 뒷산이름을 딴것이다 많은 유생들이 계암 선생을 흠모하였다 김용하의 집 앞을 지나갈 때는 말에서 내려 보행으로 감으로 선생에 경의를 표했다고 전해온다.
전병규에게는 형님 같은 분이었고 울타리처럼 튼튼한 존재였다 전병규의 딸과 김용하의 손자 김종우 와혼인하여 사돈 간이 되었다, 그가 소천 하니 외롭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에 사립하교를 눈엣가시로 보았다 전술한 바도 있거니와 합일이라는 용어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일한다는 사람들이 애국하는 마음과 독립정신이니 민족정신이니 항일운동이니 하며 결속하여 조선말을 많이 쓰니까 점점 더 탄압의 강도를 높이게 된 것이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일제는 학교 이름에서 합일이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흥천학교 라고 또다시 교명을
개칭 하게 되었다. 그때에 합일 자가 붙은 모든 사립학교들이 일제에 의하여 합일 자를 포기했지만 현 강화 합일초등하교만은 유일하게 합일이라는 교명을 유지해온 학교이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점점 학생 수가증가 였다 전병규는 교사신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주민들에게 호소하여 기부금 4천원을 모금하였다 이 형편을 알게 된 기독교의 아펜젤러선교회에서 4천원을 보조 받았다 그때의 형편을 흥천교회 연혁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學校 建立시에는 亞扁薛羅宣敎會가 四千圓, 一般寄附金 四千圓 合計 八千圓으로 煉瓦洋鐵半洋製式으로 學校를 建立하고 158명 兒童에게 學科를 가르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 글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 교회와 주민들의 교육열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때에 주민들은 학교의 위치를 양도면에 중앙지인 하일 리 에 학교를 건축해야한다는 반발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거주지가 흥천인 전병규는 교장이 날마다 하일고개를 넘어 다닐 수 없다면서 극구 반대하므로 흥천에 세우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전병규는 자기의 사재를 드려서 학교를 운영하고 학교대지를 기증하는 등 각종 자선사업과 의생으로 많은 사람들이게 선심을 베푼 당대의 지사(志士)임으로 감히 누구인들 그의 견해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리하여 현 양도초등학교 자리에 연와양철반양제식 목조건물로 80평을 건축하기까지 이르렀다 참으로 눈부신 전병규의 업적이다 물론 주민들의 협력도 컸다 1925년대까지 흥천학교는 전성기를 이루다가 다가오는 일제의 박해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른바 사립학교령 이다 이 법령은 이미 광무10년 (1906)에 제정한 법이었지만 사립학교를 통제하는 법령이나 규칙을 지금까지는 강하게 시행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립학교의 교육내용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일본통감의 뜻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립학교는 법령에 따라 학부의 인가를 받아 학교경영을 하도록 압박을 가하였다
학교경영규칙이라는 것에 의하면 상당한 학교재산을 확보해야 했다 일본이 요구하는 각 과목을 설치해야했다 자격을 구비한 교사를 채용해야한다 교과서도 일본이인정하는 사람이 저술한 책만 사용하게 하였다
전병규의 입장으로는 이 규칙대로 이행하기에는 모든 부분이 역 부족이었다
사립학교의금지를 목적한 개정사립학교규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립학교 령은 1905년 12월 통감부설치이래 4회에 걸쳐 개정 공포했다 1906년 통감부 초기에 발표한 보통학교령은 소학교6년에서 4년제로 격하시킨 후 상급하교진학을 차단하는 한국인우민화정책(韓國人愚民化政策)을 담은 것이었고 1908년에 공포된 사립학교 령에는 학교허가제를 도입하여 820개 학교만을 허가하고 4천여학교를 폐교 조치한 법령이었다. 제3차로 개정한 사립학교규칙 (1911)에는 일본어교육 강화와 일본인 교사채용을 강요 하였다. 그러나 1915년에 공포한 개정사립학교 규칙은 학교경영에 두 길을 열어놓고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첫째는 학교를 유지할만한 재단을 만들어 법인을 설정하고 정규학교로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한다. 정규학교로 허가를 받을 경우에는 자격증을 소지한 교원을 채용하고 일본어로 교수해야하며 반드시 국정교과서를 사용해야 한다. 종교(성경, 기도회 등) 는 수의과목으로 넣을 수는 있어도 정규과목으로는 교수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일 정규학교로 인가를 받지 않을 경우에는 잡종학교로 격하되어 졸업생의 상급학교진학 불허 등 각종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윤춘병의중부연회70년사116쪽)
이런 교육법은 한국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의 식민지화를 뒷받침하는 악법 중에 악법이었다. 이러한 법령이나 규칙에 어느 조항도 지킬 수도 없고 능력도 되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흥천합일학교는 왜정의 압제 하에 눈물겨운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흥천학교는 1907년 보창학교로 개교하여 흥천학교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국권을 회복하려고 민중개화운동에 앞장서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1929년 일본의 공립보통학교로 그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 되었다
강도지(江都誌)에는 흥천학교가 일제에 빼앗기는 역사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전략) “男學校는 不得己한 難關으로 竟未維持하고 讓作公立學校 하니
是亦 幸乎아 否아 再思여다 江湖有志諸君子여“
남학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보고만 있을 뿐 유지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만들어진 양도공립보통학교로 넘겨 주었으니 잘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강화에 뜻있으신 양반님 네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강도지상권334쪽흥천학교)
한숨지어 말 맺음을 못하고 있다. 흥천학교가 자취를 감춘 날은 1929년 4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었다
흥천 여학교(興天女學校)
흥천교회에서는 여학교도 운영하였다 교회로서는 여학교까지 경영하기는 매우 힘겨운데다 시대적으로 여성에 대해서는 교육열이 희박하여 학부모의 관심이 적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22년부터 교인들의 딸들을 모아 20여 명에 불과한 학생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여학교에 대해서는 원래 인천에 있는 영화여학교 교장인 ‘오버만’(1872m?)
선교사가 흥천여학교 교장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흥천 교회가 여학교를 운영하게 된 것은 흥천 교회의 자의보다는 인천여학교장의 여성교육 권장시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 같다. 그것은 교장을 왜 흥천 교회가 임명하지 않고 선교사가 직접 교장 직을 맡고 있었느냐하는 점에서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명의만 오버만이 가지고 있었을 뿐 실제 집무는 흥천 교회 담임목사인 고태현이 교장 직을 대행하였다
인천내리교회에가서 수양회에 참석함으로 여성들의 활동을 넓히고저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사정이나 봉건적 사고가 여성교육에는 뒷 전으로 돌렸기 때문에 그렇개 화려한 운영은 하지 못하고 1927년경 자연스럽게 페교하였다.
흥천사설강습소(興天私設講習所)
1943년 6월18일 흥천교회는 사설강습소를 개설하였다.
당시 이른바 태평양전쟁은 치열하고 농촌에 대다수의 아동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문맹상태에 있었다. 이 아동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터 주기위하여 교화가 구상한 계획이었다..
그 시대에 흥천 교회로서는 참으로 교육공로가 클 뿐만 아니라 교회로서의 기독교복음을 전도하는 데도 큰 성과를 거두는 선교사업도 되었던 것이다 .
담임자는 윤성범전도사로 교육열이 타오르는 젊은 이었다. 한편 교회중직으로는 전성남 한상현 두 권사였는데 강습소 소장으로는 전성남 이였다.
교사는 임진국목사의 장남인 임?씨와 권성집 목사의 장녀인 권부순양이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1944년에는 담임자로 허숙일 목사가 오고 교사도 한중섭과 유정자로 바뀌었다.
교실은 전성남이 주선하여 목조로 세 교실 을 교회마당에 건축하였다
국민에게는 빈곤이 극에 달하던 그 시대에 농민들은 농사지은 것은 거의 다 공출이라는 수탈정책에 빼앗겼고 대두박을 대치하여주는 배급을 받아먹고 사는 형편인데 취학을 못하는 아동이 너무 많았다. 일차로 아동모집을 하니까 150 명이 모여 들었다 향토애가 남달랐던 전성남 소장은 1943년 6월8일 첫 개강을 하였다 아동들은 년령에 차이가 심했다 나이가 많은 학생은 열여섯 살 되는 아이도 있고 어린아이는 여덜살되는 학생도 있었다.
인산리 와 건평리 삼흥리 하일리 능내리 아동들이 모여들었다 그때의 학생들 중에 몇 분 여기에 이름을 소개하면 인산리에서 전기호 전규장 능내리에서는 계기성 산문동네에 윤용로 흥천에 김영순을 비롯하여 150 명이다(1943년 제일학년 기념사진참조)
아아 그 날이여 조국광복의 그날이여,
1945년 8월15일은 아침부터 무더운 여름이 폭염을 토했다
학생들은 방학임에도 집에서 놀지 못하고 학교 개간지에 가서 퇴비 풀 생산하는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호주 가장들은 징용으로 끌려 나가 탄광에서 죽고 고생하고 더러는 이른바 보국단 이라는 강제 노역에 끌려갔다 이날도 양도학교 어린이들은 학교개간지에서 풀을 깎고 있는데 열 시쯤 해서 작업 중지라는 호각을 불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운동장으로 왔다
학교앞에는 꽤높은 망대가 있었는데 공습경보와 경계경보를 알리는 ‘싸이렌’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한 일이다 오래된 듯한 천에 검고붉은 그림이 있는 기가 걸려있지 않는가? 일본말로 물었다 ‘아레가 난노하다까’ 우리말로해석하면 저것이 무슨 기냐? 라는 뜻이다
그 기는 태극기인 줄을 몰랐다 열너덧 살난 아이들은 우리의 태극기를 모르고 민족의 얼을 말살당해 가던 도중 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기는 후에 양도학교 교장을 지낸 윤명선이 숨겨두었다가 마침내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날 오후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양도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저마다 어깨동무를 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운동장을 돌면서 “아리랑”을 부르고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일제가 알면 곧 잡혀갈 노래인데 가슴이 터져라하고 해가 맞도록 불렀다 아아 이날이여, 이 감격스러운 노래들이여, 어둡고 괴로웠던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을 맞는 감격의 노래였다. 일제는 연합군의 원자탄 두 발에 모조건 손을 들고 무릎을 굽은 것이다
해가 질 무렵 강제 노동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몰려왔다 일본 교장 “이와오까”의 내외를 운동장으로 끌고나왔다 구둣발로 차고 뺨을 때리고 36년 한 매친 복수의 세례가 쏟아졌다 건평에 있는 순사주재소에 가서 부장이라는 칼 차고 다니던 왜놈도 끌어왔다
양도학교는 36년 만에 해방이 되었다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면 “하이”하고 일어로 대답을 했는데 이제는 당당히 우리말로 네 하고 큰소리로 대답을 하게 되었다 일본어만 쓰던 학교생활도 이제는 완전히 쇠신 하여, 왜색일소라는 구호아래 일어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우선 한글해득이 시급했다 아직은 방학기간이지만 학교강당을 개방하고 학년차별도 없이 한글을 배웠다 ‘가갸거겨 교교 구규 그기. 학생들은 낮선 글자를 쉽게 해득할 수 있었다 1945년 9월 흥천교회 전성남 소장은 학생 150 명 전원을 기꺼운 마음으로 양도 초등학교로 보내 주었다 1929년 흥천 합일학교는 일제에 의하여 눈물을 머금고 학생과 교실을 빼앗겼지만 흥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정신으로 육성한 강습소학생 150 명은 해방에 기쁨으로 감격스러운 송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1907년 에 개교한 흥천 보창학교는 1945년에 흥천 강습소학생, 150 명을 키워 주기까지 그 세월이 백년으로 양도학교의 모체가 되어 파란만장한 역사의 획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