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버> oder 탁구의 미학
어느 기술 합리주의자의 운명
스위스 쮜리히 공대에 발터 파버(Walter Faber)라는 머리 좋은 조교가 한 명 있다. 그는 세상에 우연이나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모든 것을 계산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철저한 기술 합리주의자다. 미술대 다니는 한나(Hanna)라는 여자 친구는 이런 Walter Faber를 Homo Faber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이 라틴어는 '기계인간' 혹은 '공작인간'이란 뜻이다.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이란 말이다. 스위스의 세계적인 작가 막스 프리쉬는 여기서,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을 던지며 스토리의 출발점을 잡는다.
1957년에 나온 <Homo faber>란 소설을 말하는 바, 이것은 1992년에는 <Voyager>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적잖은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이 작품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탁구담론이다.
스토리의 전개는 한나가 파버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시작된다. 파버는 결혼하자고 하는데 그게 진정성이 결여된 말로 들려 한나는 Nein을 선언한다. 아이는 파버의 친구이자 의사인 요하임(Joachim)에게 가서 낙태시키면 된다고 한다. 그녀를 남몰래 좋아하던 요하임도 부탁을 수용하겠단다. 마침 파버는 유네스코의 프로젝트 건으로 바그다드로 떠난다. 그 후 이십 수년의 세월이 흐른다.
이제 파버는 40대 말로 향하는 초로의 나이다. 뉴욕에서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데, 비행기의 모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승객들과 함께 사막에 내린다. 파버는 여기서 헤르버르트(Herbert)란 사람을 만난다.
알고 보니 옛 친구 요하임의 동생이다. 마침 헤르버르트는 형을 찾아가는데 형은 중앙아메리카 밀림에서 농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호모 파버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식을 못 들어 궁금하던 차라 동행을 자처한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임의 집에 도달해 보니 요하임은 목을 매고 죽어있다. 헤르버르트는 형의 농장을 넘겨받아 운영하기로 하고 호모 파버는 뉴욕으로 돌아간다. 여기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우연과 예측 불가한 일들이 발생하는 지 알 수 있다.
뉴욕에 돌아온 파버는 애인 (Ivy)에게 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결혼을 하자고 조른다. 파버는 오는 여자 막지는 않지만 결혼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남자다. 이비의 요구가 귀찮아진 파버는 도피의 일환으로 유럽행 유람선을 탄다. 여기서 <호모 파버>의 핵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선상의 탁구
파버는 배의 갑판에서 수선화처럼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한 사람 만난다. 첫 눈에 반한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바로 탁구다. 탁구, 책에서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그렇고 두 사람의 탁구 실력은 말 그대로 똑딱 탁구(ticktack)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실제로 왕초보의 수준이 여실히 들어난다.
여자의 이름은 자벳 (Sabeth), 어머니랑 아테네에 사는데 일종의 고적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전공이 미술사라는 게 우연은 아니다. 어머니도 같은 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 자벳의 역을 프랑스 여배우 Julie Delpy가 연기하는데 델피가 한 창 젊은 때니 요정처럼 청초하고 아름답다.
이제 흥미로운 것은 막스 프리쉬가 탁구에 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막스 프리쉬의 탁구론은 뭘까? 아니면 <호모 파버>에서 탁구는 어떤 의미장치가 되고 있을까? 파버와 자벳의 처음 만남을 프리쉬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혹 독일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향수를 달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싶어 원문도 첨부한다.)
배가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파버는 처음으로 자벳을 본다. 금방 눈에 띈다. 파버는 하루 종일 자벳이 갑판 위에서 탁구치는 것을 구경한다. 파버도 첫날 저녁부터 자벳과 탁구를 치게 된다. 다음 날에 가서야 비로소 옳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후 자벳에 대한 파버의 정이 커저만 간다. (Kurz nach der Ausfahrt sieht er Sabeth das erste Mal. Sie fällt ihm sofort auf. Während dem ganzen Tag sieht er sie auf Deck Pingpong spielen. Schon am ersten Abend ergibt es sich, dass Faber mit Sabeth Pingpong spielt. Erst am nächsten Tag kommt es zu einem ersten richtigen Gespräch. In der Folge entwickelt Faber für Sabeth eine immer grössere Zuneigung.)
생판 처음 보는 남녀가, 그것도 스물 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남녀가 아무런 전제 없이 긴 대화를 나눌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녹색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공을 교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바다 한 복판을 달리는 배 위로는 파란 하늘이 그림처럼 떠 있고 갑판에는 녹색의 탁구대가 놓여있다. 그 위로 하얀 공이 똑딱 똑딱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두 사람 사이를 왕래한다. 말은 필요 없다. 시합에 들어가면 기껏 1에서 21까지 숫자를 세는 것이 전부다.
탁구란 실력 차이가 크면 공의 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지만 최소한의 기본만 있으면 잘 치는 사람이 조절하면 별 문제 없이 진행된다. 탁구를 쳐보면 상대의 성격이나 기질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침착한지, 인내심이 있는지, 트릭에 능한지 정면 돌파형인지 등등. 파버와 자벳의 탁구만남이 잦아질 때 쯤 프리쉬는 탁구에 대한 중요한 발언 하나를 던진다.
탁구는 자신감의 문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Pingpong ist eine Frage des Selbstvertrauens, nichts weiter.)
탁구를 좀 알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탁구는 공이 작고 가벼워 어깨나 손목에 조금만 긴장이 들어가도 공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 맞아도 파워가 떨어진다. 모든 운동에 유연성이 생명이지만 탁구는 특히 그러하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감은 몸의 유연성을 담보하는 최고의 전제가 된다. 어디 탁구뿐이겠는가.
탁구 만남을 통해 파버는 점점 자벳에게 빠져든다. 남자 친구가 있는 자벳이지만 그녀 역시 파버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람선 여행을 마친 두 사람은 파리로 간다. 자벳은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파버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버는 자벳을 만나고 싶어 수시로 박물관을 찾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시 만난다. 누군가 말했다. 축구는 운의 스포츠고 육상은 노동이고 테니스는 수공이고 탁구는 예술이다.
탁구로 만난 파버와 자벳은 이제 미술여행을 떠난다. 아비뇽에서는 월식을 보다가 격정에 휩쓸려 그만 하루 밤 만리장성까지 쌓는다. 파버는 평생 처음으로 진정을 실어 청혼을 한다. 역시 Ja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아버지 같은 나이의 남자와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설 여자는 없을 것이다. 은근히 그녀의 고민이 깊어진다.
그리스로 돌아온 자벳은 풀숲에서 뱀에게 물린다. 파버는 자벳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온 자벳의 어머니를 보는 파버, 소스라치듯 놀란다. 다름 아닌 옛 애인 한나다. 그러니까 자벳은 한나가 낙태시키지 않고 낳은 파버의 딸이었던 것이다. 이십 수년 전 파버가 한나를 떠난 후 한나는 요하힘에게 가서 아이를 낙태시키는 대신 그와 결혼해서 파버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참담한 마음을 추스릴 수 없어 다시 여행을 떠나는 파버, 여행 중에 자벳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충격도 잠시, 얼마 뒤에는 자신도 병원 신세를 지는데, 위암 진단이 나온다. 파버가 수술을 받는 데서 <호모 파버>의 스토리는 끝난다. 그가 죽는지 사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도 아니다.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 소설이고 영화인가?
탁구의 미학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머리 좋은 한 엔지니어가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운명 속에 파멸해 간다는 이야기, 이게 <호모 파버>의 내용이다. 이 우연과 불확실성의 논리는 다시 탁구의 논리와 유사하다. 서브가 어디로 어떻게 들어올지, 자기가 공격한 공이 어디로 어떻게 떨어질지, 상대가 받을 지 못 받을 지 사전에 확신할 길은 없다. 물론 탁구의 수준이 많이 다르면 승부는 뻔하다. 그러나 뻔한 결과를 두고 시합을 하지는 않는다. 마주 서는 일도 없다. 가령 이경규가 유승민과 시합은 커녕 라켓 잡고 마주 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탁구가 그러하듯 인생도 뻔하기가 몹시 힘들다. 공의 정확한 향방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확률은 있지만 확신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과 탁구의 묘미는 유사하다. 삶과 세상을 은유하는데 탁구보다 더 그럴듯한 스포츠는 없을 것이다.
20세기 중반으로 넘어오면 인간의 머리와 이성이 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자신감은 크게 위축된다. 불확정성, 그게 하나의 원리가 될 만큼 (불확정성의 원리)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성이 만개한 곳에 이성의 부고장이 나부끼는 형국이다. 21 세기에 신비주의가 난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리쉬는 이미 50년대 초에 현대 최고의 기술 합리주의가 우연과 불합리 앞에 파멸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절망과 허무를 말하는가? 아니다. 최소한 겸손은 배울 수 있다. 탁구는 종내 겸손을 가르친다. 고수일수록 겸손해지게 되어 있다. 무게 2,7g, 직경 40mm의 샐룰로이드 공, 이 순백의 원 하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고수는 세상에 하나도 없다. 말하자면 탁구는 자신감과 겸손 사이를 칼날처럼 지나가는 고난도 예술이다. 배진태, 겸손해라. 3차 대전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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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감동적인 글입니다...근데....전(--;) 교만한적이 없는것 같아서리.....언제든 선배님의 도전을 겸허히 기다리겠습니다...
진태가 교만하다고 한 거 아니다. 훌륭한 탁구인이지. 괜히 태클을 걸어 본 거다. 3차는 8월 전후에 하지.
너무 잘 읽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화악 깸.... 결국 진태 후배에게 하고 싶은 본론을 말하기 위해 너무 긴 서론이었나 잠시 헷갈림... 김영석목사만 현장의 유일한 증인이었으니 답하시오~~~ 진태가 저런 말 들을 정도로 기세등등 오만방자하지 않았을 터, 우째된 일이여? ㅋㅋㅋ ^^
노파심이고 원론적인 이야기지. 주마가편이라고, 잘 달리고 있는 말의 등어리를 때리는 것은 말이 미워서가 아니라 계속 열심히 뛰라는 뜻.
역시..경미선배님이 사람을 알아보시네요....ㅋㅋ
진태 후배... 사랑의 채찍까지 저리도 날세워 후려쳐주는 경규선배의 격려 명심하고 담번엔 더 사정없이 몰아쳐주시게... 원래 나는 못하는 사람편인데 이번엔 무조건 후배에게 올인!
경미선배님이 어려운 요구를 하셨네요.....^&^.....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최선을 다해 친 진태선배가 잘못했습니다....ㅋㅋ..그 잘못이라 것은 실력차이가 나는 고수의 배려가 없어서 탁구공의 주고 받음이 원활하지 않았음이지요....ㅋㅋㅋ.....대구시 공식 동호인 3위입상이라지만, 그 실력은 내공있는 실력이었습니다. 물론 그 공을 받아 드라이브를 거는 경규선배도 보통 실력은 아니었지요~...... 그러니, 겸손하지 못하게 배려하지 않았음도 맞구요,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자세로 운동하며 겸허히 기다리는 모습도 옳은 말씀인 줄 사려됩니다.......^&^
알아서 이해했음(알 사람은 다 알아들었을 것임)... 목사님다운 현장검증에 감탄...
포인트가 마지막 문장에 있지 않다는 거 다 알잖아. 마지막 문장의 엉뚱함은 좀 어려운 말로 하면 (그래도 우리가 독문과를 졸업한 사람들이니) '낭만적 이로니'라고 할 수 있을터. 이것은 자신이 열심히 그리고 심각하게 이야기해 온 것을 한 순간에 뒤틀어 버리는 수법이지. 그게 너무 시대착오적이거나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거지. 그러니까 난 문학에 기대어 삶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말하려고 했는데, 말해놓고 보니까 희망차고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후배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다 실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거지. 내가 한 이야기가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이거지.
선배님의 글은 항상 재밌습니다. 반갑구요~
경규야, 우리가 시합에서 진들 어떻고 이긴들 어떠하리, 만나는 그 자체가 좋고, 만나면 즐겁고 그게 우리가 바라는 것 아니니. 너무 승부욕에 불 태우지 마라. 은근히 나도 갈래니 무섭다.즐기는 탁구 문화를 만들자.
당근이지요. 이기기 위해 운동 시합을 하는 건 아니지요. 다만 운동의 즐거움과 효과를 좀 더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승부에 대한 긴장이 조금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즐거운 탁구문화를 위해서 선배님이 한 번 왕림해 주시길 바랄뿐입니다.
너의 그 놀라운 스킬에 감탄한다. 관중들의 이목을 끌기위한 그 기술 좋다. 한번 가야지. 오늘부터 휴가다. 강원도로 3박 4일 간다. 휴가 갔다와서 한번 보자.
뭐, 스킬이랄꺼야? 요즘 온도가 여름 날씨같지 않는데 강원도는 춥지 않나 모르겠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