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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청산댁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여인이다. 그녀는 찍어지게 가난한 이모집에서 뼈가 굵어 열아홉 나던 해 허주사집에 거하고 있는 머슴과 결혼하게 된다. 일제 말엽 남편은 허주사의 논밭을 받기로 약속하고 그의 동생 대신 징용을 떠난다. 이때부터 청산댁은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비극적 운명에 처한다. 허주사에게 능욕을 당하고 홍역으로 아들은 병신이 되고 남편 없는 사이에 낳은 딸은 잃어버리게 된다. 그 충격으로 건강을 상해 쓸모 없이 된 그녀는 허주사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어린것을 업고 걸식행각을 하고 도둑으로 몰려 두들겨 맞고, 음식점 식모 노릇을 하는 등 모진 고난과 시련에 맞서게 된다. 광복이 되어 남편은 돌아오지만 곧장 발발한 6.25로 전사하고 만다. 그녀는 두 자식을 위해 농사일에 매진하는 땅두더지가 된다. 그동안 성장한 차남 만득이가 아들 하나만 남겨놓은 채 월남에 종군하여 전사하고 만다. 청산댁은 잠든 손자를 바라보며, '저 자식을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고 며느리에게 다짐을 한다.
작품읽기
비구름을 가득 안은 하늘이 낮게 드리웠다. 스산한 바람결이 흙먼지를 일구며 땅바닥을 핥고 지나가고 있었다.
"한줄금 퍼부슬랑갑다. 싸게 가자."
청산댁(靑山宅)은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고 몸을 으스스 떨었다.
"아이고, 내 새끼 꼬치 얼겄네웨."
삼베 치마 자락을 걷어올려 아래는 발가숭이인 손자를 감쌌다. 그리고 바짝 추슬러 업고는 잰 걸음을 쳤다.
윗마을 입구의 당산나무에 이르렀다. 청산댁은 빠르게 저고리 섶을 여미었다. 승천하기 전날 밤 몸을 정히 가누지 못한 용이 벼락을 맞아떨어진 자리에 솟아났다는 당산나무 이 앞을 지나칠 때면 청산댁은 으레 몸매무새를 바로잡곤 했다. 그리고 가듬어진 마음으로 간곡하게 기구를 빌어 올리는 것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당신님 전 비나이다. 우리 만득이 전장터에 나갔습네다. 당신님께서 굽이살피사 총알이 우리만득이 피해가게, 총알이 우리 만득이 피해가게 당신님 전 비나이다. 딴 집 자석 다 몰라도 우리 자석 만득이만 살아서 돌아오게 당신님 굽이 살펴 줍시사."
빌기를 마치고 눈을 뜬 청산댁은 그만 가무러치게 놀랐다.
당산나무 가지에 몸을 친친 감아 대가리를 늘어뜨린 구렁이가 빨간 혀를 낼름거리고 있지 않은가. 실히 팔뚝 굵기는 될 구렁이의 몸에서는 푸른빛이 돋아나고 있었다.
청산댁은 입을 딱 벌린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등에 업힌 손자가 머리칼을 잡아늘이는 바람에 흠칫 정신을 바로잡았다. 청사댁은 휙 돌아서며 퉤퉤 침을 세 번 뱉었다. 그러고는 쫓기듯 걸음을 빨리 했다.
"얄궂어라, 워쩐 놈에 구랭이가 금메……, 얄궂어라."
청산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쩌면 하필 당산나무에 그리 징상스런 구렁이가 몸을 사렸을까 싶어서였다. 그런 생각을 떼치기라도 하듯 손자를 업은 팔에 힘을 더 주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치마 말기 속에 접어 넣은 아들의 편지를 생각했다. 금세 눈앞에 만득이의 대장부다운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곧 흐려졌다. 눈물이 솟은 것이다.
"늙은 것이 요망하게……."
청산댁은 손등으로 얼른 언저리를 훔치며 콧물을 들이마셨다.
우물을 지나는데 후드득 빗발이 듣기 시작했다.
"기엉코 퍼붓는구만. 선상님이 기실지 모르겄네."
청산댁은 뛰다시피 했다.
아들의 편지를 읽어달라고 가는 길이었다. 월남이라든가 베트남이라든가 하는, 사시장철 복더위보다 더한 여름뿐이라는 나라에 베트공들과 싸우러 간 아들 만득이한테서는 한 달에 한 번쯤 편지가 왔다. 에미 애간장 썩어 내려앉는 줄도 모르고 자주 편지를 안 하는 것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거니 생각하며 기디리고, 그럴수록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올리고 비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읍내 중학교를 나온 며느리를 시켜 아들의 편지 내용을 들을 수 있었지만 고 방정맞고 버르장머리 없는 것이 편지만 들었다하면 홀짝거리고 짜는 꼴이란, 객지에 나가 돈을 잘 벌고 있는 낭군 소식이라도 그래서는 못쓰는디, 싸움터에서 시시각각 운수를 하늘에 맡긴 낭군의 소식을 상면하고 계집 눈물을 찔끔거리다니, 그런 싸가지 없고 보고배운 데 없는 요망한 것같으니라고. 그리고 며느리에게 대필을 시켜도 될 일이었다. 허나 계집이 배웠으면 뭘 얼마나 배웠고 네까짓 게 알면 오죽 어줍잖을라고. 도시 시답잖고 미덥지가 않아 편지만 오면 그 길로 윗마을 선생님을 찾아가야 마음이 든든한 것이다. 국민학교 때 만득이를 가르쳤던 박선생이 그 굵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야 아들 모습이 선히 떠오르고, 그분이 받아서 주어야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다.
"선상님 기신 기시라우?"
"누구다요?"
"만득이 에미요."
"비가 요리 퍼붓는디 워쩐 일이요?"
"만득이 핀지를 갖고 왔는디……, 선상님은 안 기시오?"
"여기 있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굵은 남자의 목소리. 비에 흠뻑 젖은 청산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손자를 내려놓고 안자마자 청산댁은 앞가슴을 더듬어 편지를 내밀었다.
"낯이나 좀 훔치시오."
선생 부인이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들어 무릎에 앉힌 손자의 머리와 얼굴을 아무렇게나 두어 번 문지르고는 자신의 얼굴은 한번 닦는 시늉만 하고 수건을 옆으로 밀쳐놓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청산댁의 눈길은 편지 봉투를 뜯는 선생의 손에 박혀 있었다.
봉투 속에서 편지가 나오자 청산댁은 앉은걸음으로 앞으로 다가들었다.
선생은 편지지의 끝과 끝을 양 손가락으로 잡고서는 호기 있게 쫙 펼쳤다. 그 순간 청산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방바닥에 톡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요게 뭐라여?"
그걸 선생보다 먼저 집어든 건 청산댁이었다.
"아이고메 이 일일 워째야 쓸꼬."
청산댁은 그만 울음 섞인 소리를 질렀다.
"뭔데요? 어디 봅시다."
선생이 손을 내밀자 청산댁은 얼른 피하면서.
"시상에 이랄 수도 있답디여? 이 늙은 것이 환장을 했잖음사 이랄 수가 있당가? 늙으면 죽어서 사. 요렇크름 귀헌 것을 금메……."
청산댁이 한참을 손바닥으로 쓸다가 내민 것은 반으로 꺾인 아들의 사진이었다. 편지를 접어 옷 속에 넣는 바람에 꺾여져버린 것이다.
열대의 무성한 숲을 배경으로 정글 전투의 완전무장을 갖추고 선 사내. 얼룩무늬가 덮인 철모를 쓰고 방탄조끼를 입었다. 한 팔에는 총구가 하늘로 치솟게 M16을 곤두세워 다른 팔은 허리에 꺾어 올렸다. 그런 맨살로 드러난 윤기 흐르는 팔은 질기고 굳센 힘이 묻어나고 있었다. 두 다리를 떡 버티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검게 탄 얼굴. 그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없다. 양쪽 입 꼬리가 아래로 처질 정도로 굳게 다물린 입, 치뜬 두 눈이 사뭇 위압적이고 엄숙했다.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몸집의 사내. 그가 만득이었다.
"실성헌 사람맹키로 왜 그리 웃어쌓소. 이리 좀 줏씨오, 나도 좀 보게."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찔러서야 선생은 사진을 건네며 그 생각에서 깨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가, 녀석은 여선생이 변소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고무신에 물을 담아다가 뒷창문으로 끼얹었다. 동시에 변소 안에서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지고, 신이 나서 깡충거리며 돌아서던 녀석은 지나가던 선생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또 한번은 계집아이들이 땅뺏기 놀이를 하는 뒤에다 대고 오줌을 깔겨대서 직원실에 끌려온 일이 있었다. 어느 선생이 면도칼을 들고 그걸 잘라버린다고 으르자 녀석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지고 뒷걸음질을 치면서
"워메 선생님 안 된다니께요. 오줌은 워디로 누라고 그러요."
직원실은 웃음바다가 되어버리고 녀석이 사모 관대를 입고 장가를 가던 날 선생의 머리에 떠올랐고, 그때도 지금처럼 선생은 빙그레 웃었던 것이다.
"와따메 영 몰라보겄소이? 서양물을 묵어붕께 그렁가 하이칼라 냄새를 풍기네웨."
"월남이 서양은 무슨 서양."
선생의 말에 부인은 아랑곳없이,
"근디 얼굴이 워째 요리 시커멀께라우? 영축없이 깜둥이구만이라."
"금메 사시장철 삼복 여름이라 안 그럽디여."
청산댁의 예사스런 응답이었다.
"그런 디서 워찌 사는고. 오랴, 그래서 요렇크름 팔뚝을 까내 놓고 사느만 그랴. 근디 이 총은 예비군이 쓰는 것이랑은 영 달븐디?"
"하먼이라. 베트꽁을 잡아야는디 같아서 될랍디여."
두말해서 뭘 필요하겠냐는 식의 청산댁의 대꾸였다.
"얼굴은 영축웂이 애빌 빼박아서 훤훤 게 미남이여."
"금메 말이요. 한번 죽어분 게 무슨 소양이 있소."
청산댁의 얼굴은 금세 서러워지고 눈에는 물기가 배었다.
"그려도 청산댁이사 고상헌 보람 있지라우. 자석이 요렇크름 장성 허겄다. 명난 효자겄다. 그라고 아들 손자 얻었겄다. 기룬 것이 멋이요. 아 갈산댁 좀 봇씨오. 말년에 영감이란 것이 느자구 웂이 술이다 지집이다, 속을 에지간히 썩이요? 고런 잡것은 영감이 아니라 철천지웬수요, 웬수."
선생은 대강 훑어본 편지를 방바닥에 놓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웨메 내 정신 잠 보소. 뭐라고 썼는지 싸게 잠 읽어 줏씨요."
청산댁은 무릎 위의 손자를 바로 않히고 몸을 사렸다.
"예 읽어봅시다. 에헴, 잘 들으십시오."
선생은 담배 연기를 푸우 내뿜고는 목청을 다듬었다. 청산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모친 전상서, 지독스런 더위에 고생이 얼매나 많습니까. 그 동안 옥체 만강하여 건강하시고 밥은 잘 잡수시고 기십니까. 지난번 편지는 받았습니다. 수복이가 배탈 설사가 났다니 큰일입니다. 이질배가 안 되게 의원 선생한테 얼렁 가십시오, 꼬치장도 받았는디 꼬약꼬약 넘어서 야단입니다. 그라고 어떻게나 매운지 똥눌 때 똥구멍이 매와서 며칠은 죽을 역을 봤습니다. (청산댁은 연이어 혀를 찼다.)아마도 비푸스텍끼니 함바그스텍끼 같은 싱거운, 서양 코쟁이 음식을 먹고, 싸울 때도 씨레이숑 깡통이나 까먹는 버릇이 들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선상님 무신 말인지 통 모르겄소. 꼬부랑말이 나오제라우?"
"예, 비푸스텍은 쇠고기로 음식이고 햄버그란 돼지고기로 만든 서양 사람들이 음식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모두 싱거워서 그것만 먹던 속에 갑자기 고추장을 먹었더니 대변 볼 때 맵더라는 겁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르는 애이헌테 핀지를 씀시롱 워째 꼬부랑 말을 쓰는지 몰라. 선상님 심이 곱으로 드는 질 모르고. 담은 뭐라고 썼지라우?"
청산댁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결코 기분이 나쁘질 않았다. 꼬부랑말을 거침없이 쓰는 아들. 그저 대견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중학교까지만이라도 가르친 게 십분 잘했다 싶었다.
"이번 여름에 우리 나라 전부에 폭우비가 쏟아져 피해가 많다는디 우리 농사는 워쩐단지 애가 탑니다. 이역 만리 우러남 땅에서 사우는 소자는 엄니 염려 덕분으로 건강하고 편하게 있습니다. 빳다 방맹이로 궁뎅이 볼기짝을 쌔가 빠지도록 맞던 시절은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인자 소자는 병장이 되었으니께 쌔가 빠지도록 쫄병들만 조지면 됩니다. 이번 편지에는 엄니가 놀라 기절초풍할 소식을 전합니다. 귀신잡기 작전에서 소자가 베트꽁 둘을 태권도 완 빤찌로 격파하여 생포했습니다. 그때 표창장과 훈장을 받았고 상품으로 일제 쏘니 트란지스타도 받았습니다. 그 트란지스타는 엄니 심심할 때 들으라고 선물로 푸렌센트할려 합니다."
"선상님, 기절초풍헐 소식 덤부턴 무신 소리다요?"
"예, 그러니까……."
선생의 설명을 듣고 난 청산댁은 감격해 마지않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라지요 말이지라우. 라지요? 참말로, 참말로……, 요망스럽게 눈물이 자꼬……."
"을매나 효자요, 금메, 에밀 그렇코롬 끔찌허니 위허는 자석이 요셋 시상에 쉽간디. 청산댁만 같음사 자석 수발도 헐 만허고말고."
선생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에헴, 그럼 다음부터 도 읽습니다. 타관 생활을 하다 보니까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엄니 사랑이 절절합니다. 제대하면 군대서 숙달한 달구지 모는 기술로 (웨메 군대에서 구루마 끄는 것도 가르친 답디여? 청산댁의 이 말에. 자동차 운전 기술이라고 선생은 설명을 붙였다.) 도시에 나가 떼돈을 벌어 엄니 호강시킬랍니다. 지금 고생을 쪼끔만 더 견디십시오. 무더위에 몸조리 잘하십시오. 소자 염려 걱정은 하지 않아 됩니다. 인자 소자도 외상없는 어른이고 애 아부지가 아닙니까. 수복이 아프지 않게 하십시오. 오늘은 이만 아듀. 남십자성 별빛아래서 불효자 만득 상서."
"끝막음은 항시 남십자성 별빛 아래구먼 그랴."
"그라믄, 월남이니께."
치마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던 청산댁이 콧불을 들이마시며 선생 부인의 말에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대꾸를 했다.
"펜촉하고 종이 내와요."
선생은 부인에게 일렀다.
청산댁은 매번 페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여느 때나 다름없이 서너번은 되풀이했고, 선생은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나서 방바닥에 엎드렸다.
"자, 어서 부르십시오."
선생은 청산댁이 부르는 대로 받아적기 시작했다. 사투리로 그대로 써야 했다. 처음 대필을 했을 때 멋도 모르고 청산댁의 말을 모두 표준어로 바꾸어 썼다. 그런데 대필을 마치고 다시 읽을 때 말썽이 생겼다. 내가 어디 그렇게 불렀느냐고 청산댁은 불만이었다. 표준말에 익숙하지 못한 청산댁은, 자기가 부른 것과는 엉뚱하게 달며, 그래서는 아들 만득이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우김질이었다. 선생은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투리로 고쳐 다시 편지를 써야 했다.
"내 자석 만득이 보거라. 사시사철 삼복 더우가 뻗대는 땅덩이리서 금메 을매나 신간이 편찮고 사지가 늘어지것냐. 만득이 니는 여름이먼 땀깨나 흘려쌓고 소싯적에넌 땀빼기어시가 나서 고상깨나 했니라. 은제나 짬을 타서 미역을 감아사 쓴다. 니 한몸 성해서 만사태평 만사형통이니께. 사루마다 갈아입을 적마둥 부적 갈아붙이는 거 잊어뿔지 말아라. 항시 허는 말이다만 그 부적은 천 사람 정성이 깃들인 것이랑께. 만득이 니는 워째든 칠성님 자석이여. 무식헌 에미 말이라고 섣뿔리 허먼 칠성님이 노허시이께 명심해야 써. 이 에미 걱정은 안혀도 되야. 그라고 수복이 배탈도 말끔허니 나샀응께 걱정은 그만 혀. 꼬치장이 매와서 똥구멍할랑 맴다니께 워째야 쓸지 모르겄다. 다 땀을 많이 빼서 양기가 허한 징조다. 여름보신은 닭허고 개장국이 젤인디 워째야 쓴다냐 와. 농새는 그닥잖으니께 상심허지 말어라. 만득이 니가 공을 세와 상장도 타고 라지오도 받았다니께 장허고 장헌 일이다. 허나 공을 서우는 것도 중허지만 위선 정장터에서는 몸을 사릴 줄 알아야 쓴다. 내 한목숨이 곧 천지니께. 그라고 도야지가 새끼를 쳤다. 일곱 마리다. 그걸 돈 사서 수복이 돌잔치 장만 해야 쓰겄다. 수복이 돌도 인자 한 달 남짓 남었다. 수복이 돌에 애비인 니가 있음사 오지기가 좋겄냐 와. 다 시국 탓이고 운수 소관이니께 너무 섭해 생각은 말거라이, 니가 이 못난 에미를 그렇크름 알뜰살뜰허게 위해쌓니께 이 에미는 헐말이 웂다. 얼렁얼렁 세월이 가 니 뜻대로 플림사 오지기가 좋겄냐. 우리도 얼렁 옛말이르고 살 때가 와얄 텐디. 이번 핀지에 넌 워쩐 일로 박 선상님 안부를 안 여쭸드라냐. 그래사 못쓴다. 박 선상님이 나 땜시 을매나 애를 쓰시는지 아냐, 애비 웂는 큰 자석이란 말을 넘한테 들어사 되겄냐. 집일 걱정말고 몸 편히 근강해라, 헐말은 태산 같지만 오늘은 이만 허겄다."
선생이 다시 읽는 동안 청산댁은 눈을 감고 있었다.
"선상님 욕보셨구만이라. 우리 만득이 오먼 은혜사 톡톡허니 갚을랑마요."
청사댁은 손자를 들쳐없고 일어섰다. 올벼 쌀이라도 한 됫박 갖다 드려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편지를 써줄 때마다 인사는 빠뜨리지 않은 청산댁이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사립문을 나섰다. 비가 멎는 사이에 읍내 우체국에 나갈 생각만이 머리에 차 있는 것이다.
남들이 아들 만득이를 칭찬하거나 자기를 복인이라고 부를 때처럼 청산댁에게 만족스럽고 뿌듯한 때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선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얼굴이 있었다. 남편이었다. 늙어갈수록 자주 꿈자리를 어지럽히고 마음에 허전한 구석을 만들어 놓는 남편이었다. '실헌 자석 만득이가 있으니께'하면서도 왠지 빈곳이 생기는 마음은 청산댁으로서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허 주사 댁 머슴살이를 하던 남편에게 시집을 온 것이 열아홉 살 나던 해 겨울이었다. 남편은 열 살이나 손위였다. 신방이라야 전에 남편이 거처하던 행랑채에 붙은 조그만 방이었다. 벽지만 새로 바르고 세간이란 허 주사 댁에서 지어준 이불 한 채와 시집올 때 가져온 고리짝 한 채뿐이었다. 그 고리짝에는 무명 옷가지 서너 벌 들어있었다. 다른 세간은 굳이 필요가 없었다. 남편이 허 주사 댁에 그대로 머물러 머슴살이했고 그래서 그네도 부엌일을 도맡아야 했다.
쇠여물을 끓이는 방은 언제나 따뜻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남편은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곤 했다.
"워째 인자서 와. 싸게싸게 혀뿔고 얼렁 올 것이제."
퉁명스레 한마디하고는 담뱃불을 끄고 그네의 손을 거머잡는 것이다.
"손이 얼음장이네, 일로 앉소. 일로."
이불을 걷고 아랫목에 앉히기가 무섭게 그 억센 팔로 허리를 감아 눕히고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해버렸다. 그러고는 치마 말기를 마구 쥐어뜯는 것이다. 요 대신 치마를 깔긴 했지만 남편의 거친 숨소리를 세찬 바람 소리처럼 들으며 그녀는 엉덩이가 뜨거워 못 견디겠다는 말을 끝내 못하고 몸을 비틀어대기만 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맷힌 남편은 배를 깔고 엎드려 담배를 피웠다.
"새경 모아논 것이 세 가마닌께 인자 고상도 다헌 심이여. 쪼끔만 참으면 되야. 초년 고상은 사서라도 헌다는 말 있잖은가벼. 우리도 아들딸 낳고 여렇타게 살아볼 날이 낼모레여. 자네도 몸 돌바감시롱 일혀. 쌔 빠지게 혀도 다 넘 존 일이니께."
그네는 쑥스러워 남편을 외면하고 누워, 가난한 이모 집에서 겨울에도 냉방에서 새우잠을 자던 일을 생각하고, 뼈가 휘도록 일을 해도 항상 배가 고팠던 일도 생각하고, 그러면서 백번 생각해도 시집은 잘 왔다는 생각을 하다가 남편의 이런 말에 취해 흥건히 잠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네는 첫닭이 울고 이내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닭이 홰를 치고 그네가 이불을 벗어나면 남편은 잠 덜 갠 소리로 역정을 냈다.
"저런 달구새끼 좀 보소, 모가지럴 쳐죽이든지 대갱이럴 잉끄레 뿌러야 내 속이 풀리겄네. 쪼끔 아따 나가소, 다 넘 존 일 시키는 것이니께."
한사코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방바닥에 눕히고 마는 것이었다.
나무도 지피기 좋은 삭정이만을 해왔고, 불을 쉽게 붙이라고 관솔을 잘게 쪼개다가 살강 밑에 쌓아두기도 했다. 어떤 때 밥을 하다 말고 나무가 모자라 뒤란에서 그네가 손수 가져오다 맞부딪치면 남편은 불호령을 내렸다. 왜 남자 하는 일까지 고생을 사서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네는 관솔은 고사하고 부엌에 나무를 들여다 준 일은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이런 말을 다른 여자들로부터 전해들으며 그네는 귀밑이 달아올랐다.
남편은 쇠여물 끓인 불 밑에 고구마를 넣었다가 그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꺼내주기도 했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군고구마를 먹으며 그네는 괜히 가슴이 설레고 그래서 시집을 잘 왔다는 생각을 또 하고 그러다가 남편 몰래 귓불이 붉어지기도 했다.
2월이 다 가는 무렵 입덧이 일기 시작했다. 남편은 밤마다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지치지도 않고 물었다. 사실 밥맛이 싹 가시고 헛구역질만 솟으며 엉뚱한 것이 먹고 싶은 때가 많았다. 참외가 먹고 싶은가 하면, 시디신 것이 못 견디게 먹고 싶고, 메뚜기 볶은 것이 생각나는가 하면. 떫은 감을 으석으석 씹었으면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애기를 뱄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고 어쩐 일로 먹고 싶은 것이 이 한겨울에는 구경조차 못할 것들뿐이었다. 괜히 말을 했다가 남편 애만 태울까봐 먹고 싶은 게 없다고만 했다. 그런데 남편은 어디서 구했는지 석류를 가져왔고 생전 처음 보는 오꼬시라는 과자도 손에 쥐어주었다. 그네는 그저 눈시울이 뜨거울 뿐이었다.
"많이 묵어라. 고라고 아들 하나만 쑥 빼라. 아들만 남사 오지기 좋겄냐."
남편은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이부자리 속에서도 그전처럼 우악스레 다루는 일이 없었다.
봄이 짙어지고 배가 불러지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정성은 더 지극했다. 시집오기 전에는 보리가 날 때까지 나물 죽이나 호박죽으로 근근이 살아온 그네였다. 그러나 시집오고 처음 맞는 봄음 보릿고개라는 걸 모르고 지냈다. 꿈만 같은 일이었다. 허 주사네가 잘살기도 해서였지만 남편이 어지나 걷어다 먹이는지 시장기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9월 초순에 몸을 풀었다. 아들이었다.
"워메 내 사람아 고상혔어. 요런 달뎅이 같은 아들을, 와 장허네, 장허고말고, 내 큰절 한번 받아보소."
벌렁벌렁 춤을 추던 남편은 넙죽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남정네가 무신 일이다요."
그네는 남편을 나무라면서도 연신 벙글거리고 있는 남편의 눈 꼬리에 잡힌 잔주름에 운길을 주고 있었다. 가시내를 낳았다면 얼마나 서운해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남편은 전보다 더 억척스레 일을 했다. 가난하고 못 배운 한을 자식한테 풀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허 주사네 집에서 나가겠다고 했다. 남의 집 살아봤자 평생 그 꼴이고 결국 남 좋은 일 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의 말을 전해들은 허 주사는 노발대발하다가 끝내는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경을 배로 받기로 하고 머물러 앉게 되었다. 그날밤 술이 얼근하게 취해 돌아온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도 인자 눈깜짝헐 새에 잘 살게 될 것잉께 두고 봐. 사내대장부가 요대로 죽을 수야 있간디."
그네의 그네는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남편인지 몰랐다.
봉구도 무병하게 자랐다. 봉황이 서린 상이라 해서 허 주사가 지어준 이들의 이름이었다.
2년이 지났다. 한 번도 다투어본 일이 없이 진간 세월이었다. 그 동안에 장리를 놓고 새경을 받아 모은 쌀이 일곱 가마니가 되었다. 그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남들은 왜놈들 등쌀에 더 못살겠다고 잔뼈 굵은 고향을 등지는 판이었다. 더구나 아랫마을 김서방네가 죽 끓일 것도 없이 사흘을 굶었다는 소문이 퍼지는가 하면, 어떤 여자는 애를 낳고 묽은 죽만 넘기다 보니 젖이 안 나와 애를 죽이고 말았다는 말이 저해지기 했다. 이런 판국에 쌀이 일곱 가마니라니, 그네는 이 소분이 퍼질까봐 쉬쉬했고 남편에게도 함구할 것을 몇 번씩이나 다짐했다. 그리고 주인집 일을 더 부지런히 했다. 뭐니뭐니 해도 다 허 주사 양반이 베풀어준 은덕이 아니고서야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왜놈 순사들까지도 굽실거릴 만큼 허 주사는 지체가 높고 세도가 큰 분이 아닌가.
봉구가 세 살 되던 해 봄이었다.
남편은 잠자리에서 며칠 후에 징용을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네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서럽고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이었다.
"울지 말랑께. 2~3년 훗딱 댕겨오기만 허먼 저수지 밑 웃때기 닷 마지기는 내것잉께. 쌀 일곱 가마니 그런 것은 시답잖은 것이여."
남편은 그내를 껴안고 이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저수지 수문 양옆에 있는 논은 허 주사네 많은 논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모를 심어도 수확이 걸게 된다는 논이었다. 그만큼 물길이 좋고 기름진 논이었다. 그런 논 다섯 마지기가 징용만 갔다 오면 우리 것이 된다고 하니 그네로서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이틀 후에 젊은 사람들과 읍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났다.
"일은 꾀지게 눈치껏 혀. 다 넘 존 일 시키는 것이니께, 그라고 봉구 뒷수발도 잘허고."
그네는 연신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그저 서럽고 기가 막힐 뿐이었다.
기적이 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이먼 문단속 잘허고 자야 혀. 알겄어?"
남편은 지난밤부터 열번도 더한 말을 또 하고 있었다. 그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 성히 댕겨오씨요이."
겨우 이 말을 해놓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기차가 산굽이를 돌아갈 때까지 그네는 아랫배에 손을 얹고 그대로 서 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기어이 태기가 있다는 말을 못했고 남편은 그걸 모르고 떠나버린 것이다.
몇 날을 계속해서 울었다. 밥을 하면서도 울고 빨래를 하면서도 울었다.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밥이 타는가 하면 그릇을 놓쳐 깨기가 일쑤였다. 눈자위가 헐어 진물이 나고 앞이 침침하여 안 보였다.
그네는 마음을 다져먹고 밤이 늦으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의 무사를 빌기 시작했다.
이장 어른의 말은 남편이 노무자로 나갔다고 했다. 이북 사람들이 쳐내려와 싸움이 한창이라는 것이었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낯 모를 객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피난민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싸움터에서 멀리 떨어져서 피난을 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들 했다.
어수선한 인심, 힘쓸 남자들이 없는 농촌. 궁색한 속에 해가 바뀌고, 그네가 남편을 한줌의 재로 맞은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남편은 집을 떠난 지 1년 반이 가까워 재로 변해 온 것이었다. 그네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전쟁은 다음해에 끝났고, 남편이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누구의 입에선지 모르게 동네 사람들은 그네를 청산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청산댁은 이를 앙다물었다. 울어서 돌아올 남편이 아니었고 전답을 두고 두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었다.
남편이 남겨놓고 간 전답을 더 늘리지는 못할망정 묵혀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편이 저승에서도 눈을 고이 감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산댁은 등짐부터 익혔다. 키에 맞게 지겟다리를 잘라내고 작은 물건부터 지기 시작했다. 등받이가 등에 겉돌고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한사코 뒤로만 넘어가려고 했다. 그래서 뒤뚱뒤뚱 오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짐이든 머리에 올려놓기만 하면 그걸 이고 진흙길이든 자갈길이든 활개를 칠 수 있었던 때와는 너무 달랐다. 그러나 더 많은 짐을 옮기려면 천상 지게를 당해낼 게 없었다. 가을걷이 때 나락을 옮기는 데도 그렇고, 더구나 똥장군을 머리에 이고 거름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걸음걸이가 어지간히 잡히자 많은 짐을 지고 일어서는 연습을 해야 했다. 우선 많은 짐을 올려 새끼로 틀어 맨 다음 지게를 버티고 있는 지겟작대기를 얼른 빼면서 오른쪽 어깨로 받친다. 그리고 등을 등받이에 붙이면서 오른쪽 팔과 왼쪽 팔을 번갈아 빨리 꿰야 한다. 이때 지겟작대기도 따라서 양손에 옮겨져야 하고 두 다리는 무릎이 반으로 꺾이면서 앞으로 밀리는 지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양쪽 어깨에 멜끈이 얹히기 무섭게 오른쪽 무릎은 땅에 닿아야 하고 지겟작대기 윗부분을, 오른손은 아랫부분을 잡고 버텨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앞으로 밀리는 힘을 두 팔로 지겟작대기 의지하여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몸에 익을 때까지 몇 번을 뒤로 벌렁 나가넘어졌는지 모르며, 얼마나 지게 밑에 깔려서 버둥댔는지 모른다. 어쩌면 일어서기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게 지게를 받칠 때인지도 모른다. 자칫하다가는 지겟다리가 땅에 닿기도 전에 벌렁 뒤로 넘어가거나 앞으로 쑤셔박히기 일쑤였다.
어느 날 청산댁은 똥을 가득 채운 장군에다 비료 포대까지 얹고 좁은 논길을 뒤뚱이고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풀포기가 연초록 윤기를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 풀색도 참 곱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걷잡을 새 없이 물이 괸 아랫논으로 곤두박이고 말았다. 정신을 가다듬은 청산댁은 일어서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똥장군을 남자들처럼 그냥 올렸다면 아무데로나 굴러가 버렸지만 청산댁은 짐이 무거울 때면 아직도 걸음이 서툴러 두뚱거리다 보면 장군 속의 똥이 따라서 출렁이고, 그러면 걸음은 더 뒤뚱거려 넘어지기가 십상이어서 아예 새끼로 친친 동여매 버렸던 것이다.
한참을 버둥대던 청산댁은 그만 몸을 부려버렸다. 4월 초순의 화창한 날씨, 시린 기운이 남아 있는 물 속에 온몸을 빠뜨린 채, 전신을 젖어드는 찬 기운 속으로 그네는 차라리 시원하고 느긋하고 푸근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대하는 하늘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남편이었다. 그리고 시집가던 해 겨울, 엉덩이가 뜨거워도 말을 못하고 하체만 뒤틀던 일과 그럴수록 거칠어지던 남편의 세찬 숨소리와 남편의 억센 품안과……. 그네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일어날 염은 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죽은 지도 2년이 넘었다.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엉뚱한 생각이었다.
"요게 뉘란가? 청산댁 아닌가벼."
때아닌 남자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이장 집 머슴 성칠이었다. 청산댁은 다시 몸을 버둥대기 시작했다.
"허어 참. 고래 갖고 일어나질 성싶으요? 워디 봅시다."
성칠은 텀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내빌라둣씨요. 나 혼자 헐랑께!"
청산댁은 연신 버둥대며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와따 참말로……, 이 팔 요리 허씨요, 요리 쪼끔만 꼬부리씨요."
성칠은 어느새 청산댁 어깨를 잡고, 한 손으로는 지게를 빼내고 있었다. 한쪽 팔이 지게를 마저 빠지자 성칠은 청산댁의 가슴께를 안아 번쩍 일으켜 세웠다. 청산댁은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성칠의 자라등 같은 두 손이 젖가슴을 억세게 누르고 있었다.
"웨메 잡것, 팅팅 불었네."
성칠의 이런 말을 들으며 청산댁은 그의 손등을 죽어라고 물어뜯었다. 성칠은 비명을 지르며 서너 걸음 물러났고 청산댁은 물 위에 떠 있는 지겟작대기를 재빨리 집어들었다.
"장개도 안 간 놈이 싸가지 웂이."
청산댁은 입술을 깨물며 블르 떨었다. 물에 흠뻑 젖은 그네의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아직도 젊은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장개만 가면 상수여? 참새가 작아도 알을 낳고 제비가 작아도 강남을 가는디. 남정네 나이 스물야닯이먼 모지랜 건 뭐여, 고 팅팅 불은 젖통을 내밸라뒀다가 큰 병 날 것잉께, 풀어야 써, 풀어야."
성칠은 지게를 들어 논둑에 올려놓으며 능청을 떨고 있었다.
"아 얼렁 가뿌러, 오살허고."
청산댁은 지게작대기를 휘둘렀다.
"피차 존 일인디. 워디 보드라고, 서른 과부가 혼자 살아지나, 청산댁, 오늘만 날이 아니니께 두고 보드라고."
무엇보다 어려운 게 쟁기질이었다. 종일 하고 나면 얼굴이 부어오르는 논갈이보다도, 삼베 속곳을 헤집고 드는 후끈후끈한 땅김과 줄기차게 퍼붓는 불볕 속에서 무명밭을 매는 것도 쟁기질에 비하면 시장스런 일이었다. 쟁기질도 물기가 약간 도는 논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쟁기질도 물기가 약간 도는 논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일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논을 갈거나 돌덩이 같은 밭을 갈 때는 농사 중에서 이보다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더욱이 소를 제대로 부릴 줄을 모르던 처음에는 그렇게도 애가 타고 힘이 들었다. 특히 기운이 센 수놈은 미처 힘을 주기도 전에 걷기를 시작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돌덩이 같은 밭에는 쟁기 지나간 자국만 날 뿐 파이지 않는 것이다.
"저 잡놈에 소새끼가 워째 요리 애간장을 태운당가!"
소는 여전히 풀만 뜯고 있었다. 청산댁은 약이 받쳐 고삐를 사정없이 낚아챘다.
"아 요 잡것아, 느그 쥔 아니라고 이러기여?"
소는 그 큰 눔만 껌벅이며 뜯은 풀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정녕 요것도 수놈이라고 날 시퍼 보는갑구만? 환장허겠네웨."
청산댁은 그만 밭둑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장딴지가 푹푹 빠지는 무논을 한 마지기 갈고 나면 다리는 솜뭉치였다. 더욱이 무논에서 한 골 갈고 줄을 바꾸는 일이 수월해 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려야 했다.
모내기에도 밭갈이에도 가을걷이에도 따로 놉을 사는 일이 없었다. 청산댁은 모내기에 사람이 왔다면 그네가 그들의 모내기를 해줬거나 앞으로 해주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청산댁이 처음 지게를 졌을 때 동네 사람들은 혹시 미친 게 아니냐고 소리를 했고, 쟁기를 무논에 넣었을 때 이 세상 남자 다 죽어야겠다고 입을 모았고, 옥수수목을 꺾던 아이를 잡아서 때려 큰 싸움이 벌어진 뒤로는 앉은자리에 풀도 안 날 땅벌 같은 여자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청산댁만은 보릿고개를 모르고 지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네가 어느 때 한번 귀기울인 적이 없는 말들은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남편의 3년상을 치르고 난 다음해 여름에는 그네의 생전에 당해본 기억이 없는 가뭄이 밀어닥쳤다. 구름 한 조각 없는 하늘에 해가 이글거리는 나날이었다. 밤마다 새벽마다 물싸움이 벌어졌다. 기우제를 지냈다. 애꿎은 돼지만 죽어갔다. 논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청산댁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옆논 주인과 합해 펌프 우물을 파기로 했다. 읍내에서 기술자가 들어왔다. 외상이면 소도 잡는 세상에 1년 농사를 눈뜨고 망칠 수는 없었다. 돈은 가을걷이하고 주기로 했다. 이틀만에 펌프가 완성되고 흙탕물이 솟구쳤다. 그네는 벌렁벌렁 춤을 췄다. 하룻밤에 하룻낮씩 번갈아 가며 물을 대기로 했다.
물 담은 대야 위에 판자쪽을 걸치고 그 위에 호롱불을 밝혔다.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모기를 쫓기 위함이었다. 갖가지 하루살이가 호롱불빛이 흐릴 지경으로 모여들어 뺑뺑이를 돌았다. 그리고 쉴새없이 대야물에 떨어졌다.
청산대은 벌써 몇 시간째 펌프질을 쉬지 않고 있었다.
'들어가네 들어가네 우리 논에 물 들어가네. 많이 묵고 많이 묵고 얼렁얼렁 커야 쓴다. 우리 봉구 우리 만득이 배곻으면 워쩔 거냐.' 그네는 언제부턴가 이런 말을 펌프질에 맞춰 흥얼거리고 있었다.
"워어메---."
그네는 질검을 하며 소릴 질렀다. 억센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던 것이다.
"놀라지 말어, 청산댁. 나요 나."
"누구다요, 누구?"
그네의 다급한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요 나, 성칠이랑께요."
"워매 잡것, 왜 이려?"
그네는 힘껏 몸을 내둘렀다. 그러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어 번 버둥대다가 그네는 땅바닥에 쓰러지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입이 틀어막혀 있었다. 사생결단 다리를 내뻗고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뿐이었다. 그네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성칠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두 손목잡고 숨가쁜 소리를 토했다.
"청산댁, 내 말 한 번만 들어줏씨요, 한 번만. 사는 것이 뭔디 이래 쌓소."
성칠은 그네 손목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네의 아래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네는 성칠의 더벅머리를 거머쥐었다. 그러고는 마구 잡아흔들며 울먹이고 있었다.
"혼자 산다고 시퍼 보고……, 니까정 것까지 날 시퍼 보고……."
성칠의 손이 치마를 헤집고 불두덩에 닿자 그네는 이를 악물고 하체를 내뻗었다. 성칠은 장사였다. 어쩌면 펌프질에 그네가 너무 지쳐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네는 남편을, 허 주사를 한 주먹에 해치우던 남편을 떠올리고, 그때 그 낫으로 성칠이 이놈 등줄기를 찍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다음 혼자라는 생각에 그네의 성칠의 머리칼을 다시 낚아채며 블르 떨었다.
"와따 자그만치 뻗대랑께."
성칠의 거친 이 말과 동시에 그네의 낡은 삼베 속곳이 북 찢겼다. 그네는 사제에 맥이 탁 풀렸다.
흐린 호롱불빛이 머무는 그 언저리의 어둠 속에서 두 몸이 뒤치락거렸다. 그리고 그네의 몸이 크게 꿈틀했다.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했고 성칠의 머리칼을 틀어잡았던 손은 풀어져 있었다.
"아들이고 딸이고 하나만 낳는 거여. 그라먼 청산댁은 내 것잉께."
성칠은 그네의 귓가에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연신 이런 말을 쏟아놓고 있었다. 가뭄 머금은 하늘에 빈틈없이 박힌 수천만 개의 별이 한꺼번에 그네에게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성칠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청산댁, 생각해 봇씨요. 한번 죽어뿐 사람이 살아온답디여. 요렇크롬 쌔 빠지게 고상허고 살아봤자 무신 소양이 있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디."
그네는 풀이 잡히는 대로 뜯으며 저편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흙 묵은 손으로 노무자로 떠난 남편의 모습이 있었다.
"청산댁도 항시 젊은 것이 아니고, 더 늙어불먼 그만이니께……."
성칠은 펌프질을 두어 번 해보고는 돌아섰다.
그후로도 성칠은 틈만 있으면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달려들 기세였다. 그럴 때마다 그네는 잽싸게 낫을 빼들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네는 들에 나오거나 밭에 갈 때는 항시 낫을 지니고 다녔다. 밤에도 머리밭에 낫을 놓고서야 잠이 들었다.
"호강시켜 준다니께로, 청산대액, 깊이 생각해 보드라고."
성칠은 뒷걸음질을 치며 능글맞게 웃었고, 그네는 아무 대꾸도 없이 낫자루에 힘만 주었다.
성칠의 말대로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면 남편이 물려준 전답 일구고 남편이 남겨놓고 간 두 자식을 뒷바라지하여 살리라 했다. 그것이 더,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을 살다 가는 보람이 있으리라 싶었다.
지붕에 새 옷을 입힐 때나 고구마를 캘 때나 기회만 있으면 성칠은 선심을 쓰려 들었다. 장터에서 만나면 순대국밥을 먹고 가라며 소매를 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네는 독 오른 뱀눈을 하며 몸을 사렸다. 그러던 성칠은 지쳤는지 이듬해 초겨울 장가를 들었다. 그날 뒷집 갈산댁이 서너 번 부르러 왔지만 그네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끝내 가지 않고 말았다. 동네 대소 잔치에 빠진 일이 없는 그네였다. 그런데 거기는 갈 수가 없었다. 마음이 허전한 것도 서운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원한 것은 더구나 아니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종일 서성이며 보냈다. 밤에는 베갯머리가 젖도록 남편 생각을 했다.
장가를 든 성칠은 점잔을 부렸고, 순돌이 아범이 도니 그후 언제부턴가 청산댁은 그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산댁은 우체국으로 들어섰다.
"월남 갈 핀지 우표 한 장 줏씨요."
청산댁은 기세 좋게 돈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또 편지가 왔던가요?"
"하먼이아. 근디 말이요. 라지요가 월남서 올라먼 을매나 갈린다요?"
"라디오 말이지요? 비행기로 오면 아마 대엿새 걸리고 배로 오면 한 보름 걸릴 겁니다."
"비향기로 띄웠으먼 하매 당도헐 때가 되얐는디, 그런 귀헌 물건을 중도에서 도둑맞어불먼 워쩔께라우?"
"그럴 리가 있나요. 라디오를 보낸다던가요?"
"금메 만득이가, 우리 만득이가 베트꽁을 둘이나 산 채로 잡아부러서 상을 탔드라요. 고 라지요를 이 에미 들으라고 보낸다잖컸소."
"그래요? 참 효자군요."
"금메 잘 키우지도 모선 에미헌테 그렇크롬 알뜰살뜰하게 해싼다요."
청산댁은 금세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을 감추기라도 하듯 혀를 있는 대로 빼 우표에 침을 발라 봉투에 몇 번이고 늘러붙였다.
"라지요 오먼 잘 간수혔다 보내줏씨요이?"
당부를 하고 우체국을 나섰다.
청산댁은 극장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큰아들 봉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봉구는 왼쪽 팔다리가 부자연스럽고 한쪽 눈마저 감겨버린 불구로 나이가 들자 한사코 밖으로 나가려고만 들었다. 나가서는 며칠씩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꾸 왼쪽으로 돌아가기만 하는 입에는 항시 침이 질질 흐르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병신이기에 청산댁의 가슴은 더 아프고 마음은 안쓰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안 될 줄 번연히 알면서도 행여 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넣었고 1주일이 못 되어 그만 보내라고 통고를 받고 얼마나 섧게 울었던가. 그리고 봉구를 놀려대는 아이들만 있으면 청산댁 눈에는 불이 켜졌고 잡히기만 하면 요절이 났다. 그러나 봉구를 데리고 사이 좋게 노는 아이들은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 등을 심심찮게 얻어먹었고, 때때로 그 달고 맛있는 왕눈깔사탕도 입에서 굴릴 수가 있었다.
봉구가 읍내 역전 극장 선전원이 된 지도 6년이 넘었다. 선전원래야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 입을 먹고 철따라 옷을 받아 입는 것이 고작이었다. 청산댁이 힘겨워 내보낸 게 아니었다. 봉구가 그렇게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극장 주인의 말로는 천연색 영화를 좋아하고 특히 엄앵란인가 누군가가 나오는 영화는 사족을 못쓴다고 했다. 한번은 제가 좋아하는 배우가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오자 소리를 지르며 무대로 올라가는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는 것이다.
홀몸으로도 제대로 걷지를 못하는 불구에 앞뒤로 광고판을 메고, 한쪽으로 비틀려 돌아가는 침흐르는 입과 눈마저 하나가 감겨진 그 얼굴로, 머리에 색색으로 된 고깔 모자를 쓰고 꽹과리를 치며 비척비척 걸어거는 아들의 모습을 청산댁은 기를 쓰며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들은 막무가내였다. 생각이 부족하기에 제가 좋아하는 일을 막으려면 목숨을 내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 영화가 들어올 때마다 봉구는 동네까지 왔다 갔고, 그때마다 집에 들러 청산댁에게 입장권 하나를 내밀곤 했다. 그때 봉구의 얼굴은 헤벌레 웃고 있었고 집을 나설 때는 더욱 기세 좋게 꽹과리를 두들겼다. 처음 얼마 동안은 멀어지는 꽹과리 소리를 들으며 청산댁의 가슴에는 비가 쏟아져내렸다. 동생 만득이가 장가를 들고부터는 입장권을 두 장씩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청산댁은 오늘도 버릇처럼 극장엘 들렀다. 봉구는 매표구 앞에 기대서서 담배를 빨고 있다가 청산댁을 보자 헤벌레 웃었다.
"별일웂냐?"
"어엄니넌 무딘 일로……."
봉구는 혀 굳은 소리로 어떻게 왔느냐고 묵고 있었다. 청산댁은 지치지도 않고 만득이 얘길, 라디오가 뭔지 아느냐고 반문까지 해가며 자세히 들려주었다. 봉구는 얘길 들으며 헤벌레 웃고 있다가 어떤 대목에서는 손뻑을 치기도 했다.
봉구가 생각난 듯이 서둘러 들어갔다가 나와서 내미는 입장권 두 장을 받아쥐고 청산댁은 돌아섰다.
"어엄니 공 보랑게. 대대미 조게로."
재미가 좋으니 꼭 보라는 귓가로 흘리며, 저것도 짝을 맞춰줘야 할 텐데……, 생각하는 청산댁의 마음엔 그만 먹구름이 끼고 마는 것이다.
만득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던 날 청산댁은 운동화를 사 신겼다. 운동화를 신은 건 동네에서 만득이뿐이었다. 큰아들 봉구에게서 못다 한 서러움을 만득이에게 풀리라 했다. 소풍 때도 계란이고 사탕이고 푸지게 싸서 보냈다. 그리고 선생에겐 담배 한 갑이라도 보내고서야 마음이 풀렸다. 운동회 날은 청산댁이 더없이 기쁜 날이기도 했다. 흰 줄을 넣은 검정 팬츠에 흰 셔츠를 입은 만득이가 운동 모자를 챙이 뒤로 가게 돌려쓰고 내달리는 것을 보노라면 청산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야무지게 달리던 만득이가 두 팔을 번쩍 들고 1등이 되면 청산댁은 벌렁벌렁 춤을 췄다. 3학년 땐가는 1등으로 달리던 만득이가 그만 넘어지면서 또르르 굴러버리는 게 아닌가. 외마디소리를 지른 청산댁은 운동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만득이가 어느새 일어나서 뛰고 있었다. 청사댁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손을 모아 잡고, 웨메 워메 내 새끼야, 워메 내 새기야, 조바심을 치다가 맨 앞에서 두 팔을 번쩍드는 게 만득인 것을 알자 땅에 털퍽 주저앉고 말았다. 청산댁이 밑이 촉촉이 젖은 것을 아기는 무릎이 깨진 만득이가 공책 세 권을 타가지고 온 다음이었다.
만득이가 공부는 중간 정도 였다. 등수가 어찌됐건 글씨를 쓰고 간판도 거침없이 읽어내는 것이 청산대으로서는 그저 흐뭇하고 뿌듯했다.
만득이가 학년이 높아감에 따라 돈 쓰임새도 많아졌다. 청산댁은 더 부지런히 논밭을 뒤졌고 무엇이든 악착스레 아겼다. 짚 한 올이라도, 조 한 톨이라도 소홀이 하지 않았다.
만득이가 5학년이던 겨울, 갈산댁네에 모여 길쌈을 하고 이었다. 청산댁은 오래 전부터 참고 있던 오줌이 못 견딜 지경이 되어 일어섰다.
"워디 가시오."
"칙간에."
청산댁은 문을 박차고 나섰다. 마루를 내려서는데 곧 쏟아질 것 같았다. 신발을 찾아 신을 여유가 없었다. 아무거나 발에 거리는 대로 신고 내달았다.
"존 일 헌다고 문이나 닫고 갈 것이제. 엔간히 급했구먼 그랴."
이런 말이 청산댁에겐 들리지 않았다. 한달음에 갈산댁 사림을 나섰다. 오줌이 찔끔하며 눈앞이 아찔했다. 청산댁은 멈칫 서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이빨을 쁘드득 갈았다. 그리고 내처 달렸다. 그러나 서너 걸음을 못 가 청산댁은 자기 담벼락을 붙든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줌이 걷잡을 수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줌은 속옷을 적시며 다리를 타고 내려 버선에 번져서는 고무신을 넘치고 있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청산댁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을 하고 있었다.
만득이에게 단단히 이르고 있었다. 오줌은 몰라도 똥만은 꼭 집에서 누도록 했다. 아까운 거름을 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밭이나 논 귀퉁이에 귀떨어져 나간 항아리를 주워다가 묻어둔 것도 이 때문이였다. 일을 하다가 우줌이 마려우면 집에까지 올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밭고랑에 눌 수도 없었다. 오줌이 삭지를 않아서 거름이안 될 뿐만 아니라 생오줌이 닿고 나면 오히려 곡식이 타들어갔다. 청산댁 집에 와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대소변을 보는 일뿐이었다.
만득이가 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하고, 그리고 멋지고 멋진 교복을 찾아 입던 날 청산댁은 생전 처음으로 사진이란 것을 찍었다. 사진을 찾던 날까지 청산댁은 마음을 졸였다. 필경 장님이 되었으리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 사진사가 하나, 두울, 셋 하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불이 번쩍했고, 청산댁은 깜짝 놀라 눈을 껌뻑했고 입까지 벌려버렸던 것이다. 사진사는 의사 사촌인지 말을 들어보지 않고 무작정 괜찮다고만 했다. 끝에 '사'자가 붙은 직업을 모두 제멋대로 하는 성싶었다. 그러고 보니 틀림없는 일이었다. 말도 함께 나오는 신식 영화가 있기 전에 꼭 한 번 본 일이 있는 활동 사진을 설명하던 변사인가 변호사인가도 제멋대로였다. 배가 멀리 떠가는 장면인데, 옥희야 원수를 갚아주마, 고이 잠들어라. 엉뚱한 말을 주워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산댁이 받아든 사진은 눈이 감겨 있지도 않았고 입이 벌어져 있지도 않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끝에 '사'자가 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예삿사람들은 아니로구나. 처음에 몇 마디 묻고 더는 말을 걸지도 못하게 원망스레 굴던 의사도 머리가 펄펄 끓던 아이를 밤새 낫게 했고, 실성한 것 같던 변사였지만 활동 사진은 오지게 재미가 있었고, 코방귀를 뀌며 시건방지게 나대던 사진사도 사진을 이렇게 말끔하게 빼놓지 않았느냐. 청산댁은 사진이 든 봉투를 가슴께에 받쳐들고 걸으면서 우리 만득이도 '사'자가 붙은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울렁거렸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온 편지에 우리 만득이가 운전사가 되어 이 에미를 서울로 모셔 호강시킨다 하지 않았던가. 우리 만득이가 예삿 인물이 아니지, 아니고말고. 칠성님이 점지한 자식인데 어련하려고. 우리만득이가 운전사가 되어 뻐스고 도라꾸고 달구지고 닥치는 대로 몰며 사방팔방 서울길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닐 텐데. 그때 만득이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 호사가 얼마나 좋을까. 청산댁은 신바람이 나서 손자를 덩기덩기 어르며 동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득이는 고등학교 진학을 그만두기로 했다. 형편의 탓도 있었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청산댁 혼자서 농사짓기가 힘에 부쳤고 더욱이 이만큼 가르쳤으면 못 배운 남편의 한도 풀렸겠지 싶었던 것이다.
만득이도 굳이 고등학교를 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느 집 자식보다 착하게 농사에 마음을 쏟았다. 배냇 송아지를 길러 3년 만에 소를 장만하기도 했다. 남편이 노무자로 나가며 간수를 잘하라던 소를 난리 통에 잃어버리고 여태껏 마련하지 못한 청산댁이었다. 그저 그런 아들이 믿음직스럽고 대견하기만 했다.
만득이가 스무살 차던 해 장가를 서둘렀다. 아들은 너무 이르다고 반대였지만 청산댁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어서 손자를 보고 싶었다. 그래야 고생하며 살아온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만득이가 장가가던 날 청산댁은 술을 마셨고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노래를 부르고 거기에 맞춰 춤이라는 것도 추었다. 그러다가 울었다. 남편 생각에 서러워 울었다. 혼자 살아온 게 기가 막혀 울었다. 자식을 장가보내는 행복에 울었다. 미리 작정하고 키웠던 돼지를 세 마리나 잡았다. 술도 음식도 모자람이 없이 마련했다.
만득이가 군대에 나가고 8개월이 지나 며느리는 몸을 풀었다. 아들 손자였다. 청산댁은 며느리를 한 달이나 누워 있게 했다. 만득이가 휴가를 나오기는 두 달 후였다.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들어가서 월남으로 떠난 것이다.
청산댁은 사립을 들어섰다.
"엄니, 워디 갔다 인자 오시오."
며느리가 부엌에서 나오며 맞았다.
"핀지 부치고 안 오야."
"핀지 왔습디요?"
며느리는 애기를 받아 안으며 반색을 했다.
"아까 왔드라, 여깄다."
며느리는 편지를 받으며 금세 눈자위가 붉어졌다.
"엄니, 시장헐실 틴디 진지 잡숫씨요."
시어머니 저녁밥상을 봐드리고 며느리는 아들에게 젖꼭지부터 물렸다. 그런 다음 시어머니 앞으로 온 남편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연신 저고리 끝을 눈으로 가져가는 며느리를 건너다보며 청산댁은 쯧쯧 혀를 찼다. 나이도 어린것이 시집이라고 와서 남편도 없이 고생을 한다 생각하면서.
닷새가 지나 라디오가 도착했다. 목침만한 그것을 얼싸안고 청산댁은 윗마을 박 선생에게로 달려갔다. 며느리가 틀 줄 안다고 했지만 청산댁은 도시 미덥지가 않았다.
"아서라 아서, 고장내킬라."
손자도 업지 않고 집을 나섰다. 며느리가 입을 삐죽이며 눌을 흘기는 것을 알리 없는 청산댁이었다.
박선생은 집에 없었다. 학교에선 아직 안 왔다고 했다.
"금방 올 것잉게 여기서 기둘리씨요."
"와따 태편시럽기도 허요. 아 핵교로 가볼라요."
청산댁은 학교로 줄달음질을 쳤다.
박 선생이 나사 (청산댁은 다이얼을 이렇게 불렀다)를 이리저리 틀자 삐삐 소리가 나더니 이어 노래가 흘러나왔다.
"참말로 요허요이. 요런 목침댕이만헌 디서 워찌 사람 소리가 날께라우."
"세상이 좋아서 그렇지요."
박 선생의 대꾸였다. 오른쪽 나사를 틀면 다른 소리가 나오고, 왼쪽 나사를 틀면 소리가 크고 작아지고, 왼쪽 나사 밑에 있는 구멍은 혼자 들을 때 쓰는 것이고, 왼쪽 나사를 앞으로 돌려서 딱 소리가 나면 라디오가 꺼지고, 청산댁은 박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조심스럽게 해보고 나서도 집으로 돌아오며 몇 번이고 외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라디오 구경을 시키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다. 보는 사람들마다 부러워했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만득이의 효성을 칭찬하며 청산댁을 복인이라 받아들었다. 그러면 청산댁은 왼쪽나사를 돌리며 소리를 크게 작게 만드는가 하면, 의사 청진기 꼭지(리시버)를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잠깐씩 꽂아주기도 했다.
물론 며느리는 그 트랜지스터를 맘대로 만질 수 없었다.
청산댁은 며느리를 데리고 올벼 논으로 나갔다. 얼마 남지 않은 손자 돌 떡 할 살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쌀이 있긴 했지만 손자 돌잔치를 묵은 쌀로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시너 군데의 볏모가지를 훑어 깨물어보고 잘 여문 데를 골라 먼저 며느리에게 낫을 건넸다. 그리고 청산댁도 며느리 맞은편으로 들어섰다. 떡은 적어도 두 말은 해야 할거다. 술은 소주보다 막걸리가 낫고, 술은 집에서 담그면 더당할 게 없는데 밀주 단속이 심해서 틀렸지. 콩나물이야 한 항아리 집에서 길러서 쓰고. 스므날 남았으니 자주 물을 주면 쓰기에 마침 좋을 테고. 아범이 있었으면 좀 좋으랴. 이런 생각을 하며 청산댁은 능숙한 솜씨로 벼 포기를 쳐나갔다.
청산댁은 며칠 남지 않은 손자 돌 채비에 일손이 바빴다. 콩나물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자라 있었다. 고사리며 취나물 등 산나물도 물에 담가두었고 삶아서 두 번 물을 갈았다. 돌떡 종류가 많을수록 좋다니까 인절미며 백설기 절편은 물론 수수떡도 하고 약과도 만들 작정이었다.
청산댁은 마루에서 수수를 고르고 있었다. 옆에 놓인 트랜지스터에서는 재방송 연속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산댁 기시오?"
"누구다요?"
청산댁은 연속극에 귀를 기울인 채 고개를 돌렸다. 반장이 낯모를 사내를 데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마침 기셨구만이라."
"워쩐 일이요. 일로 앉으씨요."
청산댁은 마루를 대충 치웠다.
"괜찮으요. 근디 읍사무소 나온 양반이요."
반장은 낯선 사내를 가리켰다.
"저 실례합니다. 읍사무소에서 나왔습니다."
"세금 다 냈는디 읍사무소는 무신……."
"그게 아니고요, 저 천만득이 모친 틀림없지요?"
"야, 그런디요?"
"저 다름이 아니라……."
사내는 서류를 넘기며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무신 일이다요? 아, 앉기나 허시오."
"저 달름이 아니라……, 이걸 전하려고……."
사내는 한 발짝 다가서며 종이를 내밀었고, 반장은 굳은 얼굴로 외면 하고 있었다.
"까막눙인디 뭔지 알겄소?"
"저 다름이 아니라……, 천만득 전사 통지섭니다."
"……."
남편의 얼굴이 확 다가들었다. 만득이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다. 남편이 한줌의 재로 맞던 날 싸우다 죽은 소식을 알리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정신을 잃었던 그 무시무시한 말, 전사 통지서.
"워쩌? 전사 통지서?"
청산댁은 벌떡 일어서는가 했더니 나무 둥치처럼 그대로 나가넘어졌다. 눈알이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반장과 읍사무소 직원이 찬물을 끼얹고 수족을 주무르고 해서 한참만에 정신이 들었다. 청산낵은 소스차리게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잠시 주춤하더니 곧 읍사무소 직언에게로 달려들었다.
"내 자석으을, 내 자석으을, 안된다니께 안되여. 워째 내 자석을……."
청산댁은 소리소리 지르며 읍사무소 직원에게 매달렸다. 그런 청산댁의 눈에는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청산댁은 이빨을 쁘드득 갈더니 직원의 양복 깃을 틀어잡은 채 또 까무러쳤다.
청산댁 손에서 풀려나온 지원은 뺑소니를 쳤다.
다시 정신을 차린 청산댁은 소리를 읍내로 뻗은 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맨발인 채 뛰고 있는 청산댁은 낭자 머리는 헤풀어져 손에는 낫이 들려 있었다.
청산댁은 그 길로 실성을 해버렸다는 말이 삽시간에 동네에 퍼졌다.
청산댁은 사흘 후에 차에 실려 돌아왔다. 그날 청산댁은 읍사무소에서 또 까무러쳤고, 그 길로 병원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청산댁은 사색이 깃들여 있었다. 눈은 멍하니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청산댁을 보자 며느리는 다시 울음을 터뜨려렸다. 청산댁은 표정 없는 얼굴로 며느리 품에서 손자를 안았다.
"울지 말아라. 무신 소양이 있냐. 자석 땀새 이빨 앙물고 살어사쓴다. 방앳간에 가서 쌀 찧어 오니라. 나는 솔잎 뜯으로 갈란다. 니 남편은 송편을 억씨게 좋아했니라."
청산댁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밤 늦도록 청산댁은 송편을 빚었다. 손자 돌잔치에 쓰려고 장만했던 쌀로 아들 장례에 쓸 송편을 온 정성을 다해 빚고 있었다. 모레 국군 묘지에서 장례식을 올리기 때문에 내일 떠나야 된다고 읍사무소에서 병원으로 알려왔던 것이다.
"전생 무신 악헌 죄를 짓고 나서 요리 복 쪼가리 웂는고. 한 평생 살기가 요리도 험허고 기구헐 수가 있당가. 이 쌔끼 땀새 죽어뿔지도 못허도……."
잠이 든 손자의 볼을 쓰다듬는 청산댁의 두 볼에 눈물이 골을 파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핵심정리
* 갈래 : 중편소설
* 배경 : 시간-일제시대부터 6.25 이후. 공간-한반도 어느 중소도시
* 시점 : 3인칭 관찰자 시점
* 제재 : 청산댁의 파란만장의 삶
* 주제 : 역사적 수난과 함께 하는 여성들(어머니들)의 고된 삶
* 출전 : 《현대문학》 (1972년 6월호)
조정래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주 서중학교,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70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단편집 <어떤 전설>,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황토>, <恨, 그 그늘의 자리>, 중편집 <유형의 땅>, 장편소설 <불놀이>, <대장경>,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을 출간하였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단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우리나라 분단 문학의 최고봉. 80년대에 써낸 『태백산맥』과 연달아 90년대에 써낸 『아리랑』이 모두 밀리언셀러에 오른 기록을 세웠다. `순수문학`에서 이만한 기록이 세워진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조정래에 의하면, 그의 문학을 일군 지렛대는 `가난`과 `분단`이다. 초등학교 시절, 눈비 오면 머슴이 업고 오던 도련님들과 한 반에서 공부를 할 때 저절로 `저래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문학 청년 시절 거주지인 서울 성북동 달동네의 남루한 이웃들을 보면서는, 문학이 이들을 외면하고서 과연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6.25 때 미군이 군홧발로 안방까지 치고 들어오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기억도 두고 두고 살아남아, 분단 문제가 조정래 문학의 화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 진학한 조정래는 문학이 갖고 있는 숭고한 정신에 무릎꿇다시피 경배하면서,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시공을 초월하는 위대한 작품을 쓰리라 기원했다. 6.3세대에 속하는 그는 동국대 총학생회 학예부장을 지내며 거의 모든 격문을 도맡아 쓰다시피 했으며, 두 차례의 신춘문예 낙방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한 문학 청년이었다.
제대와 등단 그리고 유신시절 3년 동안 중경고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나 그의 문학성향을 알아본 군 장성 출신의 교장은 그를 보고 당장 나가라고 했다. 그 뒤로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1983년 9월 「현대문학」에 『태백산맥』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의 문학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등장인물이 486명에 이르고, 쌓아 놓으면 자기 키보다 10cm가 높은 원고지 1만6천5백매 분량의 『태백산맥』을 집필하는 동안, 조정래가 양복 입고 외출한 것은 1년에 한두번에 불과했다. 전화도 안 받는다.
조정래는 집필기간 동안의 자기 처지를 `글감옥`에 갇힌 것에 비유하곤 한다.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고, `먹고 자고 쓰고, 먹고 자고 쓰고의 연속'이 그의 생활의 전부다. 그래서 ` 앉은 자리에 풀 한 포기 안 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침 7시 기상,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 아침밥, 오전 작업, 1시간 쯤 낮잠, 점심 식사, 체조, 오후 작업, 저녁 식사, 뒤로 달리기, 잠깐 눈 붙이기, 야간 작업. 이런 강행군으로 하루 원고지 30장을 어김없이 채워 넣고야 자리에 든다. 그 시각은 늘 다음날 새벽 1-2시.
이 고된 작업을 그는 컴퓨터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접 손으로 해낸다. 당연히 그의 어깨는 정상이 아니다. 이 `직업병`의 치료를 위해 그는 틈만 나면 손바닥에 가래를 쥐고 주물럭거린다.
민족사의 모순을 파헤치면서 동시에 민족의 저력과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담아내는 주제의식, 전라도 토속어의 질박한 구사, 탄탄한 서사구조 등 조정래 문학의 장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94년에는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여 경찰에 입건되고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 받는 수난도 겪었다. 그의 아내는 시인 김초혜다.
해설
작가 조정래의 소설적 특색이 조금씩 싹을 보이기 시작하는 작품은 지난 1972년에 발표한 초기 중편 「청산댁」부터다. 여기에서 그는 빈농출신의 한 여성이 겪는 고난에 찬 삶과 그 역사의 거친 질곡으로부터 형성되는 성격을 묘사해 냈다. 또한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징용,2차 대전,해방,한국전쟁,분단,베트남전 등 우리 근세사의 생생한 장면들 속에서 우리네 삶의 궤적을 관통해냈다. 순종적인 농촌 아낙네 청산댁은 훗날 태백산맥의 강인한 빨치산 전사로 변모하는 외서댁의 등장을 예고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70년대 이래의 그의 소설은 당대의 어느 작가들보다 한발 앞서서 사회적 모순과 분단 모순에 대한 깊은 작가적 관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꾸준한 문학적 주제가 됐다. 지난 1974년 발표한 「황토」, 「빙하기」, 「동맥」에 이어 1981년의 《현대문학》에 발표하여 제27회 현대문학상을 안겨준 「유형의 땅」 그리고 1982년의 『불놀이』 등이 이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