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과잉된 제스처에서 온다"
과연 슬라보예 지젝은 "난" 사람이었다. 7일 오후, 서울대학교 박물관 강당에서 있었던
첫 강연을 들으러 가면서 나는 적잖이 흥분되고 초조했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늦는 바람에 그 초조함과 흥분은 더해갔다. 서울대학교에 가기 위해 낙성대역에 내려 3번 마을버스를 탔을 때, 내 앞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외국어(불어)로 쓰여진 정신분석 책을 읽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거기에는 라깡의 잘 알려진 수학소 하나, 주체와 타자의 교집합으로 대상 a를 표시한 도식이 그려져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간 안에서도 그런 걸 훔쳐보다니, 어지간한 버릇이다. 지젝의 강연을 들으러 가던 길은, 조금은 진실/허위가 담긴 "슬로베니아의 거인",
"동구권의 기적", "유럽 인문학의 천재"라는 레떼르가 붙는 지젝을 만나기 위해, 오로지 그와의 만남을 위해 열린 길이었다.
강연이 시작되는 오후 3시 10분 전, 나는 kk고원의 오래된 동지들인 v*****o님과 *쟈님을 만나서 함께 박물관 강당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차, 강연집은 이미 떨어지고 난 뒤였다. 15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에는 한 자리도 없어 보였다. 그때,
저 멀리 앞자리에서 날 구원하는 손짓이 있었으니, 로*드님께서 그 특유의 점잖은 웃음과 침묵으로 손을 들어 날 불렀던 것이다(강연이 끝나고 gi***s님까지 뵈었으니, 나는 고원의 불멸 식구들 중 많은 분들을 지젝 강연장에서 모두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간 내 친구와 다른 고원분들도 곧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어수선하던 강연장은
내 앞자리 오른쪽에 앉아있던 지젝이 강연석에 올라가면서 곧 조용해졌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지젝은 매우 산만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그의 산만함에서 열정을 분리할 수는 없었다. 지젝 자신의 말을 빌면, 그는 "성급하며, 신경질적이고, 음탕하다." 영어와 한국어 통역으로 진행된 강연에서 무식삼위일체로 영어를 듣지도 말하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는, 내 앞자리에서 지젝의 농담에 즉각 웃음으로 응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영어 숙련자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부끄러웠다. 결국, 한글로 번역된 강연원고와 번역자의 통역에 의지해서 지젝의 강연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강연원고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또, 그의 강연을 영어로 듣는 척 하면서 끄덕이는
등의 허위의 외관을 유지하는 것도 얼마안가 곧 포기했다. 차라리 나는 무지 속에서
지젝의 화려한 제스처와 강한 악센트가 섞인 그의 발음, 순수한 외양을 즐기는 편을
선택했다. 그리고 세 시간에 걸친 강연과 질의응답 시간 내내 그를 응시했다.
지젝의 강연 제목은 "실재의 열망, 가상의 열망"이었다. 그는 번역이란 상징적 거세의
작업이라고 말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원고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어였다. 지젝은 미국 옆에 있는 쿠바를 방문했던 경험을 예로
들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혁명이라는 실재의 충격을 겪고 난 뒤, 그 혁명의 외관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쿠바 정부 및 민중들의 노력을 "상징적 거세에 대한 충실함(fidelity to castration)"이라고 불렀다. 이어지는 그의 농담 : "따라서 쿠바의 지도자가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인 것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마 여기서 우리는
지난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비에 젖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걸린 플랜카드를 떼 내면서 울부짖던 북한 여성 응원단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거기에서 본 것은 대타자의 응시를 위한 순수한 외관을 제공하는 과잉된 제스처 그 자체였으며, 그 제스처는 이면에 허위를 숨기고 있는 외관이 아니라, 외관 자체가 진실인 제스처다. 나는 그녀들의 눈물과 울부짖음이 정말로 눈물과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동에 대해 남한의 우익(수구세력)은 무조건적인 적의를, 자유주의 및 진보주의자들은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면서 관용과 이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들 중 그 누구도 진실에 근접한 것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지젝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유별난 타자에 대한 인정, 차이와 관용, 똘레랑스나 자선사업이라는 것 역시, 타자의 지나친 근접을 막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지젝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빈민을 돕기 위한 미국인들의 자선행위의 "실재적" 진실은 이렇다: 나는 오늘 3달러를 너희 아프리카의 빈민들을 위해 자선했다, 그것은 너희 아프리카 빈민이 우리 미국인에게 근접하는 것을 막고 그냥 그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는 그 장소에 남아있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체의 관용과 이해심이라는 것은, 타자가 너무 가까이 다가올 때
순간, 타자에 대한 적대로 바뀔 수 있는 한, 언제나 나르시시즘적 자기보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미국 해체론이 대상과의 충분한 아이러니적 거리를
즐기는 것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지젝의 강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강연을 바탕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올해 9월 초,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만난 북한 응원단 여성들은 이미 꾸며진 몸짓과
준비된 답변, 기계적인 미소와 동작 등으로 일관한 순수한 외양 그 자체였다. "분단된
우리 민족, 빨리 통일이 되어 하나로 만나야죠"라는 북한 선수단의 반복되는 응답에서
우리가 느낀 일체의 흥분과 동의의 열망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거리와 적대를 은폐한
가상 그 자체에 대한 흥분과 열망은 아니었을까. 바로, 여기서 경기장에서 남북 응원단이 함께 불렀던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가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증상(symptom)"이다. <쉬리>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장교인 박무영(최민식 분)이 그 음절 마디마디를 분절하며 음절 각각의 의미를 탐색하는 듯한 말투로
되새겨 보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만일, 그 꿈이 정말 실현될 순간에 가상(분단된 우리 '민족')의 우리는 그 꿈의 진실(통일이라는 '실재')를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혹시, 그 꿈속의 "실재(통일)"가 닥쳐오는 순간, 우리는 욕망의 실재가 드러나는 꿈을 회피하기 위해 상징적 현실로 후퇴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혹 아닌가. 우리는 통일이라는 과도한 잉여와 외상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도대체, 통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혹, 우리가 부르던 노래는 "실재의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실재의 열망"은 사실 실재의 충격적이고도 과도한(excessive) 경험 그 자체를 회피하기 위한 절망적 노력으로 오히려 "가상"의 외관을 띤다고 말한다. "실재의 열망"은 결국 "실재와 마주치기를
회피하려는 궁극적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재"의 유사물(semblance)인
것이다.
지젝은 혁명적 테러리즘 역시 지지부진한 상징적 현실을 과도하게 무너뜨리려는 데서
오는 "실재의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한다. 테러리스트들은 결국, 혁명의 주체들이 아닌 대리자들, 혁명(실재)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던가(라깡의 반(反)도스토예프스키적 표현에 따르면,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렇다면, 9.11 이후 그 테러리즘의 맞은 편에서 무한전쟁을 벌이는 미국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무너진 다음, 자신의 힘을 키우던 적이 없어지자 미국에 남은
것은 그 동안 소련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들었던 잉여 그 자체다. 미국의 대테러작전,
이른바 무한전쟁의 명칭은 자신에게 남은 과도한 잉여, 실재를 견딜 수 없어하는 몸짓은 아닌가. 그 잉여의 또 다른 이름들은, 과거 소련과 게릴라전을 벌이던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정권과 이란과의 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아니었던가. 미국의 군산복합체나 다국적 기업의 도플갱어는 친미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갑부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과 최고의 교육을 받은 알 카에다 조직이 아닐까. 따라서 순진하게 테러리즘을 옹호하며 미국을 비난하는 자들은, 미국을 옹호하며 테러리즘을 비난하는 구태의연한 사람들과 언표행위의 수준에서는 결국 하등
다를 바 없다. 한편에서는 과도한 잉여를 성취하려는 몸짓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과도한 잉여를 견딜 수 없어하는 몸짓이 있다... 이러한 헤겔적 악무한의 몸짓을 단절하는 근본적 "행위(라깡적 의미에서)", 실재의 윤리적 몸짓은 아직, 당장은 없지만, 가능하다. 이러한 실재의 윤리적 몸짓의 본보기로, 지젝은 죽음을 회피하고 이승에서의 쾌락원칙에 종속된 음란한 이교도들과 투쟁하고 로마 제국을 무력화시킨 초대 기독교의
급진적 공동체 그리고 예수의 언행을 형식화한 성 바울의 교리를 예로 든다. 또한, 키에르케고르적 "반복" 속에서 성 바울은 20세기 초,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레닌으로 다시 태어나며 볼세비키적 민중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행위"를 반복한다. 강연원고에는 없는 지젝의 재미있는 표현을 빌면, "성 바울은 최초의 레닌주의자였다." 오늘날 미제국과 근본적 테러리즘으로 양분된 세계를 무너뜨릴 기독교적 공동체나 볼세비키적
민중은, 바로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가『제국』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별칭인 '자유로운 새', "포겔프라이(Vogelfrei)", 혹은 "다중(多衆, multitudes)"이 아닐까.
강연 내내 그의 과장되고도 강렬한 제스처 속에서, 새삼스레 "진실은 과잉된 제스처에서 온다"는 지젝 자신의 말을 떠올려봤다. 그것은 "실재의 열망(가상의 열망)"이 아니라, "열망의 실재"였다. 그것은, 강연 내내 번역자들을 곤란하게 했던 그의 솔직하고도
성적인 농담 속에서도 잘 나타났다('상징적 거세'의 대리자들, 곧 통역자들이 오히려
지젝의 농담 속의 잉여, 실재에 매우 곤혹스러워 했다는 점에서 이 강연은 정말 '번역'의 실재를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청중들은 모두 잘 웃고 충분히 즐겼다!). 지젝의 그런 농담이야말로, 프로이트의『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 실재와 무의식, 리비도를 순간 드러내는 농담의 증상적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지젝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이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정신분석만이 줄
수 있는 유머적 쾌감, 순수한 기쁨은 아닐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