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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차학연구원(韓國茶學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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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담/다기/다식/다화 스크랩 안내 ──── *찬기파랑가
점인 추천 0 조회 34 09.04.02 20:4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국립경주박물관 조각실에는 복스러운 얼굴의 ‘애기부처’가 있다.

 쪼그려 앉은 듯한 본존불과 서 있는 좌우 협시보살은 천진한 미소를 띄우며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1925년 경주 남산 장창골에서 옮겨온 이 불상은 흔히 ‘삼화령 미륵삼존불’(사진)로 불리고 있다.

이 불상은 신라 경덕왕 때 분인 충담 스님이 차 공양을 올린 불상으로 유명하다.

 

충담 스님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다인(茶人)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다인으로서 스님의 면모는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조에 잘 나타나 있다.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매년 삼화령 미륵에 차공양

 

스님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이 되면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

경덕왕 24년(765) 3월 3일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고 오던 스님은

왕의 초청을 받아 귀정문(歸正門) 누각에 갔다.

경덕왕은 앵통(櫻筒, 앵두나무로 만든 통) 속에 든 차구를 보고

누구이며, 어디서 오는지를 묻고 스님에게 차 한 사발을 얻어 마셨다.

차는 훌륭한 맛과 향기가 났다.

 

우리나라에도 7세기 전반부터 차를 공양하거나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사복이 원효 스님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설화나

보천·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차가 널리 성행한 것은

흥덕왕 3년(828)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뒤부터다.

 차가 대중화되기 이전에

언제 어디서고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도록

행로다담(行爐茶擔, 차를 달여 마실 수 있도록 들고 다니게끔 갖추어진 일체의 도구)을 지니고 다녔다는 것은

스님이 그만큼 차 애호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민가·찬기파랑가 짓기도

 

스님은 다인으로만이 아니라 가인(歌人)으로도 유명하다.

경덕왕은 스님에게 차를 얻어 마신 뒤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달라”고 당부한다.

 

이때 스님이 지은 향가가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의 이상을 노래한 ‘안민가(安民歌)’이다.

스님은 이 향가에서 “왕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 아이”라며 “각기 자기 본분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이 편할 것”이라고 노래했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


일오천 냇가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 싶어라.


아아, 잣가지 높아
서리를 모를 화랑의 장이여”
-‘찬기파랑가’

 

충담 스님은 당대를 대표하는 향가작가였던 듯하다.

경덕왕이 스님이 지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의 뜻이 매우 높다는 소문을 듣고

 ‘안민가’를 지어줄 것을 요청한 사실에서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찬기파랑가’는 화랑 기파랑을 추모해 지은 10구체 향가다.

구름 속에 나타난 달과 하늘에서 기파랑의 순결한 모습을,

냇가와 잣나무에서 이상과 절조를 떠올리고 그를 찬미해 지은 노래다.

 

다인으로서, 또 가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님에 대해 알려진 것은

향가 두 수와 경덕왕을 위해 안민가를 짓게 된 내력을 담은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의 기록이 전부다.

 

그러나 왕사(王師)로 봉하겠다는 경덕왕의 청을 굳이 사양한 스님의 인품에서

참다운 다인이자 가인으로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찬기파랑가 지은 최초의 茶人 충담 스님!

▷찬기파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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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르~뫼!┗━━♡ ('두 뫼 두 짝 ')☆ 원문보기 글쓴이: 희디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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