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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차 정기 산행 안내 | ||||||
전남 완도군 (청산도) | ||||||
운영진 연락처 | ||||||
회장 | 김종오 | 010-3552-4336 | 남총무 | 조정래 | 010-5046-9937 | |
산행대장 | 이석교 | 010-6486-0565 | 여총무 | 김대숙 | 010-5327-5138 | |
◉ 산 행 안 내 ◉ | ||||||
♢ 산행일자 | 2017년 04월 02일 첫째주 (일요일) | |||||
♢ 차량시간 |
김해 차량등록사업소 05:00 일괄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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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거리 | 추후공지예정 | |||||
♢ 예약안내 | 예약은 명까지 선착순으로 받습니다. | |||||
♢ 산행회비 | 5만원 | |||||
♢ 산행코스 | 추후공지예정 | |||||
♢ 입금은행 | 농협=301-0073-3423-01<예금주=금벌산악회> | |||||
♢ 산행시간 | 추후공지예정 | |||||
♢ 준비물 | 배낭, 모자, 등산화,등산복, 보온자켓,식수 (1리터이상), 도시락, 행동식(초코바,과일 등), (손)수건, 휴지, 물티슈(선택),(면)장갑, 랜턴, 배낭카바,비옷(비닐우의) (바람막이 자켓) 스패츠 아이젠 | |||||
♢ 차량편 | 하나로 고속관광 | |||||
♢ 신청가능원 | 45명 | |||||
♢ 참가신청방법 | *산행신청시 신청인실명 인원수 탑승지 여락번호를 명확히 밝혀주세요, 참가신청 마감은 금요일 오후 4시까지입니다. 신입회원님들께서는 필히 연락처를 기재해주세요. | |||||
♢ 특이사항 | 개인적인 부주위로 인한사고는 산악회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
* 산행 신청시 배 승선을 위한 예약으로 정확한 주민등록 앞 번호 (6자리) 및 연락처 꼭!! 알려주세요.
위치 |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딸린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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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 북위 34°08′ |
경도 | 동경 126°59′ |
면적 | 33.28km2 |
해안선 길이 | 42km |
인구 | 1,177가구 2,271명(2010년) |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고 해서 ‘청산도’라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신선이 산다는 섬이라 해서 ‘선산도’로도 불렀고 ‘선원도’라고도 했다고 한다.
‘청산도(靑山島)’는 이름 그대로 푸른 섬이다. 맑고 푸른 다도해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예로부터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이라고도 불렸다.
면적 33.28km2, 해안선 길이 42km로 섬 한가운데에는 385m인 매봉산 이외에 대봉산(334m)·보적산(330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해 사방으로 흐르는 소하천 연안을 따라 좁은 평야가 발달했으며, 중앙부와 서부 일부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여 경승지를 이룬다. 청산도는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5배 정도. 1,50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대부분이 노인이다.
청산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서남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란에 휩싸여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가 효종 때 다시 입도(入島)했다. 이 지역은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상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을 받아 왔다. 이들 왜구들의 침해 사실을 살펴보면 고려 말, 조선 태종(1409년) 때부터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도주하는가 하면 약탈도 많이 하였다. 이러한 왜구들의 잦은 출몰과 임진왜란으로 청산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 주민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청산도 역시 공도(空島)에 이르다가 지리적 요충지로서 크게 부각되어 군대가 주둔했다.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가 촬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전라남도 끝머리에 위치한 완도에서도 남동쪽으로 약 20km 남짓 떨어진 청산도는 동쪽에 거문도, 서쪽에 소안도, 남쪽에는 여서도와 제주도, 북쪽으로는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경치는 두말할 나위 없이 빼어나다. 뱃길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먼 길이지만, 한번 다녀온 후에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두고두고 남는 환상의 섬이다.
완도항에서 비릿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철부선을 타고 50여 분을 달리면 나타나는 청산도길은 도청항을 기점으로 당리와 지리해수욕장으로 나뉜다. 어디서 출발해도 한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청산도의 나들목인 도청항. 도청이라는 지명이 특이하다. 맨 처음 마을 이름을 ‘경치(鯨峙)’라 하였으나 이후 ‘불목리(佛目里)’라 하였고 조세를 받던 기관 국세미도봉청(國稅米都奉廳)이 설치되면서 ‘도청리(都廳里)’로 불려 오다가 폐진됨에 따라 도봉청(都奉廳)이 폐지되고 ‘도청리(道淸里)’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 도청리는 완도항에서 출발하여 목포로 향하는 여객선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항구이다. 해 뜰 무렵 도청리 선착장에 여객선이 들어오면 깨끗한 햇살을 받으며 물결을 가르고 힘차게 들어오면서 울려 대는 뱃고동 소리와 여객선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유행가는 너무나 구성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해질 무렵 목포에서 완도로 가기 위해 여객선이 들어올 때면 황금빛 노을 속에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고, 유행가 〈처녀 뱃사공〉는 섬 전체를 뒤흔들다시피 하며 그 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시로서는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동네 아이들뿐만 아니라 길을 가던 동네 사람들 모두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내일은 무슨 노래가 흘러나올까 궁금해 하던 때가 있었다.
청산도 중심의 도청항은 주변 해역의 어장 조건이 비교적 양호하여 과거부터 수산업이 크게 발달되었다. 지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삼치와 고등어 파시로 인해 전국적으로 이름난 어항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1968년 청산도를 어업 전진 기지로 지정하고 연근해 조업에 대한 보급 지원 유통 기지가 되었다. 면 소재지인 도청리 항구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유명한 곳으로 여름 성어기에는 사방에서 건착선 수십 척이 몰려와 호황을 이루고 전국에서 고등어가 제일 많이 잡히는 섬이 되었다. 그러나 70~80년대 들어서면서 어업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외지에서까지 몰려든 어선들이 치어까지 싹쓸이하는 불법 저인망 어장이 성행하면서 점차 바다가 황폐해져 갔다. 지금 청산도 근해의 어선 어업은 이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과거보다 훨씬 못하지만 지금도 철에 따라 멸치·삼치·갈치 어장이 형성되고 소라·전복·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채취한다.
도청리에서 바로 옆에 있는 당리. 일반인에게 영화 〈서편제〉의 무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청산도의 중심지이자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다. 당리는 항구가 있는 면 소재지 도청리에서 약 1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도청리에서 청산로를 따라 달리다가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안으로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언덕에 장독대가 몇 개 놓여 있는 공간이 보인다. 이곳이 당리 언덕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숲 속에 청기와로 된 당집이 있다. 그 문 앞에는 불망비가 있고 그 옆에 초가집 4채가 있는 촬영장이 나타난다. 이곳이 〈서편제〉 촬영장이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돌로 만든 담장, 울퉁불퉁한 마을 길,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풍경들이 한번 찾아가면 오래도록 머물고 싶게 하는 고향 같은 섬이다.
여기서 바라보면 조망이 최고다. 도청항도 보이고 맞은편 도락리 포구도 발아래다. 해넘이 무렵에는 도락포 앞바다에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낙조(혹은 일몰)의 모습이 아름답다. 고향의 정취가 배어 나오는 현대인들의 안식처 도락포 마을 앞에는 또 그 유명한 ‘구들장 논’이 한눈에 보인다.
청산도 삶의 팍팍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다랑논보다 더 희귀한 구들장 논. ‘구들장 논’이란 산비탈이나 구릉에 마치 구들장을 놓듯 돌을 쌓아 먼저 바닥을 만든 뒤, 그 위에다 다시 흙을 부어 다져서 논을 일군 것으로, 청산도에는 돌이 많아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위한 방편으로 돌을 깔았다. 그러다 보니 흙이 기름지지 않아 매년 퇴비를 해야 했다. 지금도 그리 넉넉지 않지만 청산도에는 항상 쌀이 모자랐다. 돌이 너무 많아 농사를 부칠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청산도에서 나고 자란 처녀가 뭍으로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만 먹고 가면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을까.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기 위한 섬사람의 노고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대봉산 정상 바로 아래까지 천수답 구들장을 논 흔적이 있었다니······.
이곳을 중심으로 길은 다양하게 나 있다. 주변 밭들은 담벼락을 한 것이 특징이다. 직진 방향을 택하면 또 다른 촬영장이 나온다.
몇 년 전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장소로 일부러 심어 놓았다는 탐스러운 유채꽃 너머로 잘 지어 놓은 유럽식 전원주택 한 채가 있는데 전남에서 수억 원의 돈을 들여 지어 준 세트장이다. ‘청산로 136번지’에 들어선 이 세트장 돌담에는 이 드라마에 출연한 4명의 탤런트 사진이 촬영 배경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뒤로 화장실 겸 체험장이 들어서 있다.
세트장 앞에는 약간 넓은 공간이 있는데 여기가 사진찍기 좋은 위치라고 한다. 청산도에서 도청항 밑으로 펼쳐지는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다. 가르마를 여러 갈래로 타 놓은 듯한 구불구불한 청산도 길과 마을, 유채꽃, 바다, 고깃배, 산 등이 어우러진 이 모습이 바로 청산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세트장 앞에서 직진하면 화랑포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옛 조상들의 문화와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인정받아 2007년 12월 1일 담양 창평, 장흥 유치, 신안 증도 등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에 지정되었다. 재작년에는 슬로길로 수천 명이 청산도를 찾았고 때 묻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맑은 물과 푸른 바다를 보며 환호했다.
이 주위에도 묘가 한 기 보인다. 입구에 나무 막대기로 막아 놓고 출입하지 못하도록 해 두었다. 이곳 역시 제주도처럼 나무 막대기를 기둥에 걸쳐 놓은 곳을 수시로 본다. 그리고 이 당리 언덕을 보면 몇 기의 묘지가 보인다. 사실 이곳 청산도는 초분으로 유명한 곳이다. 청산도에는 모두 3기의 초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리에 있던 초분이 이장을 한 상태여서 지금은 도청리에 있는 초분을 합해 2기만이 남아 있다. ‘초분’이란 주검을 묘지에 묻기 전에 목관이나 대발쌈에 넣어 야산에 안치한 뒤, 짚으로 이엉을 덮어 비바람을 막아 주는 임시 무덤으로, 섬에서만 볼 수 있는 매장 풍습이다. 이렇게 임시 무덤을 쓰고 나면 1~2년 뒤에 주검이 썩는데 그때 뼈만 추려 다시 묘지에 이장하는 것이다.
당리 마을 입구, 마을 복지 회관 맞은편 밭 중간에 성벽이 조성되어 있다. 양쪽에 돌담을 쌓고 그 사이에 황토를 쌓아 두었다. 바로 청산도진성(당리진)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당리진 터는 청산도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좋은 위치이기도 하다.
청산도진(靑山島鎭)은 1866년(고종 3) 이곳에 당리진(堂里鎭, 일명 靑山鎭)이 설치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진이 설치된 이후 이곳은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때 청산도진은 강진, 해남, 완도 일원을 관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규모가 큰 진지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후 청산도진은 1895년(고종 32)에 가리포진과 함께 폐진되었다.
마을 가운데 위치한 경로 복지 회관은 건물 자체가 깨끗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마을은 골목길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골목길 역시 돌담길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들어가는 마을 길이다. 높이는 어른 키 높이 정도로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곳을 몇 발짝 지나면 여 경로당과 당리 사무소가 나타난다. 그 앞은 창문을 낸 성벽 같은 돌담이 있는데 이 돌담은 단순한 담이 아닌 건물이다. 높이가 2m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이 주위에는 대부분이 창문이 있는 돌담길이다. 물론 방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창고이고 집도 거의 슬레이트 지붕들이다.
당리 사무소 근처에 허름한 초가가 있다. 바로 〈서편제〉의 주인공들인 유봉이 송화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장면을 찍은 곳이다. 사람은 살지 않고 영화 주인공들의 복장을 한 밀랍 인형을 설치해 촬영 당시의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읍리를 지날 때 오른쪽으로 문화재 표지판과 함께 고인돌이 보인다. ‘독배기’라 부르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선사 시대 석기 유적이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남은 고인돌이 2개의 무리에 23기라고 하는데,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3기의 큰 고인돌이다. 이것이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에 사람이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고인돌 옆에는 하마비가 서 있다. 높이는 1m 정도, 폭은 약 80cm에 이른다. 자연 화강암인 이 돌은 현재 문화재 자료 제116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이 하마비는 과거 주위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으로 조선 시대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하마비의 뒷면에는 마애불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민속 신앙과 불교가 하나로 어우러진 형태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하마비를 선사 시대 때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선돌’로 보기도 한다.
읍리에서 신흥리로 가는 길목에 ‘범바위’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범바위를 보기 위해서는 ‘청산로’에서 벗어나 섬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맑은 날이면 제주도까지 보인다는 보적산 8부 능선 가파른 곳에 있는 ‘범바위’는 높이 155m의 작은 봉우리이다. 어미 범이 뒤따라오는 새끼 범을 돌아보는 모습으로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어흥’ 하고 포효했더니 바위의 울림이 호랑이 울음소리보다 크게 울려 호랑이가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로 범바위가 있는 권덕리는 처음에는 읍리에 속했으며 범바위가 있어서 ‘호암동’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읍리에서 분리되면서 ‘권덕리’라 이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쪽 바닷가 마을인 신흥리는 지리 마을의 정반대 쪽이다. 도로에서 왼쪽은 억새들이 가득한 매립지이자 물을 막아 놓은 저수지다. 이곳은 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단순한 포구로 보인다. 물양장에는 전복 양식장 도구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사리 때 간조가 되어야 바로 앞의 목섬까지 약 2km에 이르는 기다란 모래밭이 생겨난다. 밀물이 들면 백사장이 조금밖에 드러나지 않지만 썰물 때에는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밭을 걸으며 해초와 조개를 줍는 재미를 맛볼 수 있으며, 바다의 해돋이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바로 옆에 있는 항구는 별로 쓸모없을 것 같은 무인도인데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어 오고 갈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아마도 풍랑의 흐름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어 언덕길을 넘으면 전망대로 이곳에서 보면 덕우도, 황제도, 거문도까지 다가선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섬의 북동쪽에 해당하는 ‘해 뜨는 마을’ 진산리가 나타난다. 이곳이 지리와 신흥리 중간 지점이다. 진산리에는 갯돌이 깔린 몽돌해변이 600m 정도 펼쳐져 있다. 돌의 크기는 손톱만 한 것에서부터 어른 머리만 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그 색깔도 검은색, 흰색, 노란색 등 가지가지다. 이곳의 갯돌밭은 청산도 바닷가에 있는 일곱 군데의 갯돌밭 가운데 가장 곱고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지리해수욕장이 낙조가 아름답다면, 진산리 갯돌밭은 아름다운 해돋이로 이름나 있다. 지리의 낙조처럼 이곳의 해돋이도 다도해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푸름 사이를 뚫고 솟아오르는 붉은 해의 모습은 지리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풍경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포구는 해변 왼쪽에 조그맣게 조성되어 있다.
방파제 뒤로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이 섬이 바로 해돋이 광경이 아름답고 경관이 좋아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노적도이다. 날씨가 좋으면 거문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진산리에 가기 위해서는 정규 노선 버스 대신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봉고차인 청산도 마을버스는 청산도에서 낙후된 마을을 운행하는 보조 버스다. 이런 작은 마을에는 배 시간에 맞춰 이렇듯 마을버스가 운행된다.
청산도의 가장 북쪽인 국화리. 국화리라는 명칭이 참 좋다.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 ‘굴거리’로 되었다가 완도군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진산리와 합하여 국산리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 국화가 많이 자생해 가을이면 들국화가 만발하여 국화리로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 마을 뒤편으로는 까마귀 오산, 우측으로는 방마산, 어형 형태로 된 금산이 초변의 협곡으로 병풍 치듯 둘러싸여 호위하고 있다.
청산도에는 해수욕장이 세 군데 있다. 그중에서 모래밭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은데 해수욕장으로서 자연조건이 좋고 사람들도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청산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 중의 하나인 지리해수욕장이다.
‘지리해수욕장’은 1km가 넘는 은빛 모래밭을 따라 수령 200년이 넘는 800여 그루의 해송이 쥘부채처럼 펼쳐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포 해변에 인력으로 둑을 쌓아서 해수를 막고 소나무를 식목하여 현재와 같은 방풍림이 육성되었다. 또한 해수욕장 오른쪽으로 산을 슬쩍 돌아가면 작은 돌에서부터 호박만 한 돌까지 크고 작은 자갈이 깔려 있는 자갈밭이 있다. 청산도에서 낙조 하면 지리해수욕장을 꼽을 만큼 낙조가 아름다운 곳으로 해가 질 무렵이면 온통 붉게 물든 다도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해송밭에서 왼쪽으로 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길은 구불구불, 전형적인 농촌길이다. 좌우로 논밭이 있다. 남쪽으로 보이는 큰 산이 ‘대성산(385m)’이다. 그리고 시멘트 길바닥에는 방향 표시가 잘 되어 있고 곳곳에도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바로 ‘슬로길’ 표시다.
청산도 부속 도서인 장도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자 도청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池里) 마을’은 연혁에 의하면 처음 부락을 형성할 당시 마을 중앙에 큰 연못이 있어 ‘못김’이라고 칭하였으나 청산도가 강진현에 속할 당시인 1789년에는 ‘지구미리’라 불렀으며 이후 1876년에는 ‘지리’라 기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조선 인조 말엽인 1640년경 김해 김씨가 강진에서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숙종 시대에는 지리의 중앙에 사정(활터)을 설치하여 궁장으로 무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이 ‘쏠지개’라 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변에 나무를 식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리 마을 옆에 도로가에 큰 소나무를 중심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열녀각이 두 개 있다. 두 개 다 ‘김해 김씨 효열각’이다. 그런데 왼쪽 것은 비교적 큰 규모에 붉은 글씨로 도배하다시피 했고 오른쪽 것은 상대적으로 작고 검은 글씨로 도배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청산도를 네 번 방문하였지만 청산도는 과거의 시간 속에 정지해 있는 섬이었다. 청산도는 파시로 성시를 이루던 60년대 이후 ‘잊혀진 섬’이었다. 〈서편제〉 이후로 관광의 섬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주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그 이유는 청산도는 잔잔한 다도해의 다른 섬과는 달리, 홀로 떠 있는 섬이기 때문에 바람과 풍랑이 심해 예로부터 이곳은 기르는 양식과 거리가 멀다.
아직도 섬 곳곳에 초가집들이 많이 남아 있어 찾는 이들을 과거의 한때로 이끌고 간다. 아직도 초분이 있으며, 농사도 거의 손으로 짓는다. 그 흔한 경운기를 가진 집도 손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 섬들은 바다를 논밭으로 여기며 살면서 무궁무진한 바다에서 산업을 낳는데 청산도는 바다보다는 논과 밭에서 벌어먹고 살아왔다. 이웃 섬인 소안이나 노화, 보길, 신지, 고금, 평일, 생일, 금당 같은 완도권 큰 섬들과는 생활양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청산도에는 24개 자연 부락이 있는데 해변 산중의 마을이 많다. 마을에 따라 산업 구조가 매우 다른데 청산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해변 산중이라 할 수 있는 신풍리, 부흥리, 양지리는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바다를 끼고 있는 국화리와 도락리는 멸치잡이와 미역 양식을 한다. 이 두 마을은 낭장망 멸치잡이가 한창이던 15년 전만 해도 마을 주민들 수입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고 젊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먼 섬인 청산도는 멸치잡이 외지 어선들로 인해 해마다 멸치 어획량이 감소하면서 삶이 피폐해져 갔고 벌이가 줄어들자 집집마다 농·수협에서 빚을 내어 생활해야 했다. 특히 최근에 청산 앞바다에 외지 멸치잡이 어선들이 극성스러울 정도로 많이 몰리면서 생활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멸치잡이를 포기하고 전복 양식업이나 낚시업으로 전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 이제 청산도는 수자원의 고갈로 최고 10,000여 명이 넘던 주민들 중에 상당수는 육지로 떠나고, 현재 거주하는 2,271명의 주민들 대부분은 노령화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남해의 많은 섬이 그렇듯 청산도 또한 어족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은 천혜의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여 1996년부터 관광 유료 낚시터로 지정되었다. 청산도는 섬 전체가 낚시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데, 지금도 발길 닿는 곳마다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는 사계절 갯바위 낚시터로 유명하다. 도미, 우럭, 농어가 잘 잡히는데 특히 감성돔이 지나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전국에서 강태공들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룬다.
청산도는 아름다운 비경도 자랑거리이지만, 삭막한 도시 생활 속에서 그리워했던 고향의 아늑함과 편안함을 되찾아 준다. 정부의 문화재 보호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 모습이 그 자체로 남아 있어, 그야말로 섬 전체가 ‘살아 있는 민속 박물관’이다. 섬 곳곳에는 청산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초가집, 흙돌집, 돌담길, 구들장 논, 고인돌 등과 같은 옛 풍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가장 흔한 돌이 가장 귀한 생활 방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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