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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九夷]의 뿌리는 조선사[朝鮮史]의 영역[領域]
지금,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이어받은 마지막 보루이며, 그 근본[根本]의 뿌리를 이어받은 후손[後孫]들이 살고 있는 소중[所重]한 곳이다.
환웅[桓雄] 천왕[天王]이,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아래에 신시[神市]를 연이후로, 단군[檀君]왕검[王儉]의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오늘의 한국[韓國]에 이르기까지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은, 도도히 흐르는 역사[歷史]의 맥[脈]을이어 오늘의 한국[韓國]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근세[近世]에, 조선[朝鮮]이 외세[外勢]의 침략자[侵略者]들에게 나라를 잃으면서, 일만년[一萬年]의 웅혼[雄渾]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무너지고,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 남은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마수에 걸려 혼[魂]과 정신[精神]을 잃고, 선대[先代]의 역사[歷史]와 단절[斷絶]되채, 식민사사관[植民史觀]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를 이 지구[地球]상에서 말살[抹殺]시키기 위하여 외세[外勢]의 침략자[侵略者]들이 작당하여 만들어 놓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에 대하여 저지른 외세[外勢]의 만행[蠻行]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묵과하고 지나칠수 없는 엄중[嚴重]하고 중대[重大]한 사명[使命]을,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에게 안겨 주고 있다.
세계사[世界史]에 있어서, 일만년[一萬年]의 유구[悠久]하고 장구[長久]한 세월을 오르내리며, 천하[天下]의 인류[人類] 문명사[文明史]에, 위대[偉大]하고 찬란[燦爛]한 업적을 남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
그러나 우리가 광복[光復]을 맞으면서 배운 한국[韓國]의 역사[歷史]는 어떠 했는가 ?
반도[半島]의 조그만 한국[韓國]의 땅에서, 외세[外勢]의 침략[侵略]만을 당하고, 외세[外勢]의 속국[屬國]이 되어 나라의 주권[主權]도 없이, 소위 중국[中國]의 신하[臣下]로 대대로 사대[事大]만을 하며 살아온 아주 작은 소수민족[少數民族]의 힘없는 나라, ............. 고대[古代]의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의 근본[根本]과 뿌리는 싹둑 잘라버리고, 구석기[舊石器]시대니 신석기[新石器]시대니 하면서, 고조선[古朝鮮]은 신화[神話]라 하고,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역사[歷史]를 반도[半島]의 조그만 지역에 심어놓고, 엄정[嚴正]한 선대[先代]들의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깡그리 무시하며, 이것이 반만년[半萬年]의 유구[悠久]한 한국[韓國]의 역사라고 가르쳐 왔다.
고구려[高句麗]의 뒤를 이어 일어난 발해[渤海],.............. 유라시아의 대륙[大陸]을 평정[平定]하고, 5경[五京] 15부[十五府]를 두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稱頌]을 받은 발해[渤海]의 역사[歷史]를, 반도[半島]의 북방[北方] 조그만 지역에 있었다고 가르쳐온 우리의 역사교육[歷史敎育],.............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하고,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룬 고려[高麗]의 역사[歷史]를, 반도[半島]땅의 평양[平壤]에 그 선을 그어놓고, 고려[高麗]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반도[半島]의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에 동[東]과 서[西]로 그려 넣는 웃지못할 역사교육[歷史敎育],...........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창업[創業]하면서, 명[明]나라를 황제[皇帝]로 모시고, 조선시대[朝鮮時代] 대대로 명[明]나라의 신하[臣下]로 속국[屬國]이 되어, 반도[半島]의 한국[韓國]땅에서, 조선[朝鮮]이 망할때까지 명[明]과 청[淸]나라에 사대[事大]를 한 힘없는 조그만 나라,.........
이러한 것이 한국[韓國]의 유구[悠久]한 반만년[半萬年]의 역사[歷史]라고 가르쳤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가르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와 대륙사[大陸史]에 기록[記錄]된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모두 무시하고,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말살[抹殺]시키기 위하여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의 무리들이 만들어 놓은 사악[邪惡]하고 간교[奸巧]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을, 한국[韓國]의 국사[國史]라고 가르치는 그 저의[底意]는, 누구를 위하여 그 어디에 뜻[志]을 두고 있는 것인가 ?
이러한 역사[歷史]의 교육[敎育]을 받고 자라난 후세[後世]들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위하여 무엇을 할수 있을 것인가 ?
사대주의[事大主義]와 패배의식[敗北意識]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정신[精神]과 마음에 깊이 심어주고, 후세[後世]의 자손들에게 만년대계[萬年大計]의 무궁[無窮]한 번영[繁榮]과 영광[榮光]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실제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가 그러하다면 단 한마디라도 무엇을 논[論]하겠는가 ?
그러나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그렇지 아니하기 때문에,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엄정[嚴正]하고 중대[重大]하게 논[論]하는 것이며, 이는 국가[國家]의 근본[根本]과 국가[國家]의 미래[未來]와, 후세[後世]들의 만년대계[萬年大計]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또한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운명[運命]과 흥망성쇠[興亡盛衰]와도, 그 근본[根本]을 같이하는 일이기 때문에 좌시[坐視] 할수 없는 일이다.
산해경[山海經]
군자국[君子國]이 북쪽에 있으니, 관[冠]을 쓰고 검[劍]을 차며, 짐승을 먹는다. 두 마리의 문호[文虎]를 곁에 두고 있다. 사람들이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가 있어서 아침에 피어났다가 저녁에 죽는다. [중략]
산해경찬[山海經讃]
곽박[郭璞]
[東方氣仁] 동방의 기운은 어질어서 [國有君子] 나라에 군자가 많다 [薰華是食] 훈화초를 먹으며 [雕虎是使 ] 문호(文虎)를 부린다 [雅好禮讓] 본디 예양을 좋아하고 [禮委論理] 예는 사리에 따른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동이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군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이란 주나라 조선(朝鮮) 땅이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져서는 도를 미루어서 풍속을 교화시켰으며,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농사짓는 법과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지금까지도 그 백성들이 먹고 마심에 변두(籩豆)를 귀중하게 여기고,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이 중국과 같다. 이는 기자가 교화를 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군자가 산다는 한 구절은 아마도 기자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공자가 자신을 가리켜서 군자라고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중략]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에는 9종[種]이 있으니, 견이(畎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가 그것이다. [중략]
동래집[東萊集]
중국 동북쪽 변경에 있는 자를 구이라고 하는데, 상고 시대 때 견이(畎夷)ㆍ우이(嵎夷) 바로 우이(于夷)이다.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남이(藍夷) 바로 풍이(風夷)이다.ㆍ양이(暘夷)라는 바로 양이(陽夷)이다. 칭호가 있었다. [중략]
[尙書]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드디어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에 길을 통하였다. [중략]
상서전[尙書傳]
해동의 여러 오랑캐들이 무왕(武王)이 상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 성왕(成王)이 정사를 하자 반란을 일으켰는데, 정벌하니 복종하였다. [중략]
박물지[博物志]
제나라가 바다를 건너서 동쪽으로 구이(九夷)와 통하였다. [중략]
후한서[後漢書]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쪽의 오랑캐를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저(柢)이니,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하여 만물이 땅에 뿌리박고 자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해서 올바른 도리로 거느리기가 쉽다. 이에 심지어는 군자(君子)가 죽지 않는 나라까지 있다. 이(夷)에는 아홉 종족이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자 한 것이다.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살펴보건대, 기주의 동북쪽은 옛날에 동이의 지역이었으므로 우(禹)의 발자취가 갈석(碣石)을 오른쪽에 둔 곳까지 미쳤는데, ‘도이는 가죽 옷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도이는 바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요 임금과 순 임금 때 덕스러운 교화가 점차 퍼져 귀화하는 동이[東夷]가 점차 많아지자 기주 동북쪽에 있는 의무려(醫無閭) 지방을 나누어 유주(幽州)로 삼았는데, 지금의 요하(遼河) 이서의 지역이고, 청주(靑州) 동북쪽 바다 너머의 지역을 영주(營州)로 삼았는데, 지금의 요하 이동의 지역이다. 이는 대개 후세의 기미주(羈縻州)와 같이 이맥(夷貊)을 붙잡아 매어 두기 위한 것이었다. [중략]
관자[管子] 경중편[輕重篇]
발(發)ㆍ조선(朝鮮)의 문채나는 가죽 옷으로 내어 폐백을 삼는다. [중략]
상서[尙書]
도이는 가죽 옷을 입는 자이다. [중략], 바다와 대산(岱山) 사이에는 청주(靑州)가 있다. 우이(嵎夷)가 이미 평정하였다. [중략],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에는 양주(揚州)가 있다. 도이(島夷)는 초복(草服)을 입는다.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살펴보건대, 자허부[子虛賦]에서는 제(齊)의 오른쪽은 양곡[暘谷]으로 경계를 삼는다고 하였고, 호위생[胡渭生]은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한서[漢書]를 인용하여 우이[嵎夷]를 조선[朝鮮] 땅이라고 하였다. [중략]
풍속통[風俗通]
구이[九夷]를 또 현토(玄兎)ㆍ낙랑(樂浪)ㆍ고려(高驪)ㆍ만칙(滿飭)ㆍ부유(鳧臾)ㆍ색가(索家)ㆍ동도(東屠)ㆍ왜인(倭人)ㆍ천비(天鄙)라고도 한다. [중략]
논어[論語]
공자(孔子)가 구이(九夷) 지방에 살려고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누추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누추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중략]
설문[說文]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띄워 바다로 나가 구이(九夷)가 사는 곳으로 가고 싶다. 하였다. [중략]
고조선[古朝鮮]과 구이[九夷]에 뿌리를 둔 삼한[三韓]의 78개국[七十八個國],........... 이어 뒤를 이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등 이 조선사[朝鮮史]의 상고사[上古史]를 이은 선대[先代] 왕조[王朝]의 영역[領域]은, 대륙[大陸]을 포함하여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광대[廣大]한 지역이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고려[高麗]는, 철륵[鐵勒]제부를 포함하여 천하[天下]의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룩했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은, 대륙[大陸]의 북방[北方]에서 일어나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한 것은, 태조[太祖]가 왕업[王業]의 터전을 닦은 지역이, 본래의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이기 때문이지, 변질된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대로, 명[明]나라가 국호[國號]를 정해 주었겠는가 ?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가, 얼마나 극심하게 왜곡[歪曲] 조작[造作] 되었는가를 증명[證明]하는 한가지 역사[歷史]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동문선권지64[東文選卷之六十四]
보안남녹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
최치원[崔致遠]
交趾四封。圖經詳矣。然而管多生䝤。境邇諸蕃。略採俚譚。用標方誌。安南之爲府也。廵屬一十二郡。 峯驩演愛陸長郡諒武定武安蘇茂唐林。 羇縻五十八州 [중략]
교지(交趾)의 사방 경계는 지도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관내에 요족(䝤族)이 많고, 지역이 여러 번족(蕃族)과 가깝다. 대략 지방의 얘기를 모아서 그곳 지리를 기록한다. 안남(安南)의 부(府)는 돌아가면서 12군(郡)이 소속되었는데 봉관연애육장군(峯驩濱愛陸長郡)양무정무 안소무당림(諒武定武安蘇茂唐林) 58개의 주를 총괄한다. [중략]
府城東至南溟四百餘里。有山橫亘。千里而遙。邃穴深巖。爲䝤窟宅。蠻蜑之衆。六種星居。隣諸蕃二十一區。管生䝤二十一輩 [중략]
부의성 동쪽에 남쪽 바다까지 400여 리인데 산이 천리나 되게 가로질러 멀리 뻗어 있다. 깊숙한 굴과 으슥한 바위는 요족의 굴이다. 만연(蠻蜒)의 무리는 6종이 널려져 있으며 번족 21개 지역과 이웃이 되었고, 요족 무리는 21개 부족을 관할한다. [중략]
水之西南。則通闍婆,大食之國。陸之西北則接女國烏蠻之路。曾無亭候。莫審塗程。跂履者。計日指期。沉浮者。占風定信 [중략]
물의 서남쪽은 곧 도파(闍婆)와 대식국(大食國)으로 통하고 육지에서 서북쪽으로는 곧 여국(女國)과 오만(烏蠻)으로 통하는 길이다. 일찍이 도로를 관장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노정(路程)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날수를 헤어서 기한을 정하고, 배로 다니는 사람은 풍랑을 보고 약속을 정한다. [중략]
亦俗無桑蠶之業。唯織雜彩狹布。多披短襟交彩。或有不縫而衣。不粒而食。死喪無服。嫁娶不媒。戰有排刀。病無藥餌。固恃險阻。各稱酋豪 [중략]
또한 풍속은 누에를 기르는 일이 없고 다만 여러 가지 무늬를 놓은 좁은 베를 짜며, 기장이 짧은 얼룩무늬 옷을 많이 입는다. 더러는 꿰매지 않고 입기도 하며 더러는 낱알이 아닌 것도 먹고 죽어서 초상을 치러도 복을 입지 아니하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도 중매가 없다. 싸우는 데는 칼을 쓰고 병들어도 약을 쓸 줄 모른다. 지리적으로 험한 것만 굳게 믿고 모두들 추장이라고 자칭한다. [중략]
遠自漢朝。迄于隋季。荐興邊患。頗役遐征。馬將軍標柱㱕時。才分地界。史㹅管倒碑過後。略靜海隅。洎咸通初。驃信挻灾。元戎喪律。鴟嘯於跕鳶之地。豕豗於束馬之塗。摧兇欲快於摏喉。拯溺唯思於援手 [중략]
멀리 한(漢)시대로부터 수(隨)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자주 변경에서 난을 일으키어, 상당히 멀리까지 가서 토벌하는 전쟁이 벌어졌다. 마장군(馬將軍)이 기둥을 세우고 돌아올 때에는 다만 토지의 경계만 갈라 놓았고 사총관(史摠管)이 비(碑)를 넘어뜨려 지나간 뒤에는 대략 해변이 안정되었다. 함통(咸通) 초년에 이르러 표신(驃信)이 난을 일으키어 원수(元帥)가 군율(軍律)을 상실하였다. 저들은 솔개가 떨어지던 지역에 독수리처럼 모여들고, 말이라도 묶어서 들고 가야 될 험한 길에 돼지떼처럼 내달았다. 목을 눌러서 죽이는 것처럼 통쾌하게 적을 쳐부숴야 했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이 빨리 응원병을 보내야 했다. [중략]
先帝以今淮海太尉燕公。威宣大漠。政洽上都。時公防禦秦城。剗平醜虜。才歸輦下。出鎭安南。 乃請岀鎭龍編。立身豹略。剗雕題而卵碎。活黔首以肌豐。復壁壘於一麾。拔封疆於萬里。有蠹皆削。無寃不伸。朱道古。稔姦於外。杜存陵。恣虐於內。皆爲安南巨患 [중략]
선제(失帝)께서는 지금의 회해태위(淮海太尉)인 연공(燕公)의 위엄이 사막 지대에까지 떨쳤고 정치력은 서울에서도 널리 알려졌으며 이 때에 공은 진성(奏城)을 방어하여 오랑캐를 평정하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안남에 출정하였다. 곧 안남에 출정하여 전략을 써서 공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오랑캐를 무찔러 새알처럼 부숴버리고, 백성을 살려내어 윤택하게 하였다. 한번 휘둘러서 잃었던 성을 수복하고, 만리 밖의 영지(領地)를 빼앗았다. 나쁜 놈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억울함은 모두 풀어주었다. 주도고(朱道古)는 밖에서 간악한 짓을 하고, 두존릉(杜存陵)은 안에서 포학을 자행하여 모두 안남에 있어서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중략]
安南徑岝口。天威神功所開。播在遠近。 遂得絶蠻諜之北窺。紓漢軍之南戍。乃鳳傳徵詔。鷁汎㱕程。至於洞䝤海蠻。莫不醉恩飽義。遠投聖闕。請建生祠。則知善政所行。殊方可誘 [중략]
안남으로 통하는 길이 좁았는데 하늘의 위력과 신의 힘으로 트이게 되어 소문이 멀고 가까운 지역에 퍼졌다. 드디어 만족(蠻族)의 첩자(諜子)가 북쪽으로 엿보는 길을 끊었고, 중국의 군대가 남방에 주둔하는 힘을 덜어 놓았다. 곧 황제께서 부르시는 조서를 받들어 돌아가는 배를 띄웠다. 굴 속의 요족과 해변의 만족까지도 모두가 은혜에 감격하고 정의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멀리 황제의 대궐에 나와서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착한 정치를 실시하면 풍속이 다른 지방까지도 감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頃太尉燕公受三顧恩。用六奇計。使獷悍歸服。邊陲晏安。今聖上省方。蒙王獻欵。不敢弄吠堯之口。永能除猾夏之心。皆由燕公收交州鎭蜀郡。威振於奔魑走魅。功成於金壘湯池。所謂蘊先見之能。察未來之事[중략]
그 동안 태위 연공(太尉燕公)은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 기발한 전략을 사용하였으니, 사나운 오랑캐가 감복되었고 변경이 안정되었다. 지금 황제께서 지방을 순행하시는데 몽고의 왕도 충성을 다하여 감히 임금을 배반하는 태도를 갖지 못하고 영원히 중국을 침략할 생각을 버린 것은 모두 연공(燕公)이 교주(交州)를 수복하며 촉군(蜀郡)을 진압하여 달아나는 도깨비 같은 우리에게 위엄이 떨쳤고, 견고한 방어진에서 공을 이룬 것이니, 이른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지고 미래의 일을 내다본 것이다. [중략]
呼吸而陰陽不測。指縱而神鬼交馳。實爲天工。人其代之。斯實可爲異矣。聊補所闕。敢貽將來。時翠華幸蜀之三載也 [중략]
일거일동의 조화를 알 길이 없고 지시를 내리면 귀신도 서로 달려갔다. 사실상 하늘이 시키는 일인데 사람이 이를 대행한 것뿐이니,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 할 수 있다. 여기에 부족함을 보충하여 감히 오는 세대에 전하노라. 이 때는 임금께서 촉(蜀)에 행차하신 후 3년째 되는 해다. [중략]
위키백과
안남(安南)은 당나라가 하노이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 유래하여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서 중부를 가리키는 지리적 명칭이다.
베트남의 독립과 그 후의 역대 군주에 대한 중국 측의 안남 국왕(한나라 때는 안남도통사) 책봉 등에 베트남 여러 왕조가 사용하던 지리적 명칭이었다. 역대 베트남 왕조도 중국이나 일본 등에 대해서는 안남이라는 국호를 이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하에서는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하는 보호국, 즉 완조(阮朝)(이하 응우옌 왕조) 지배 하의 베트남 중부지역을 안남이라고 호칭하였다. 다만 이것은 프랑스 측의 호칭이며 완조 베트남의 행정구분에 있어서의 다낭에 해당하고 있다. 응우옌 왕조는 월남(越南), 후에 대남(大南)이라고 국호를 칭하였다. 또 프랑스 식민지 당국이 통킹과 코친차이나를 포함한 월남(베트남, Vietnam)이라는 용어를 꺼려한 것도 있고, 프랑스어의 학술서 등에서는 베트남 전역을 안남이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략]
다음 해 1884년에 맺어진 갑신조약(제2차 후에조약, 파트노톨 조약)에는 프랑스의 대표인 총독이 안남국의 외교권을 총괄하고, 후에 황궁에 프랑스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것 등을 추가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노골적인 침략은 베트남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의 개입을 불러 청불 전쟁(1884년 - 1885년)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텐진조약에 의해서 청나라는 결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 국내에서는 각지에 근왕운동이 발생해, 대 프랑스 저항운동이 전개되지만, 후에의 왕궁을 도피하여 산중에서 근왕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함의제가 1888년, 프랑스군에 체포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우리가 배운 현재의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와, 당시대에 살았던 우리의 선대[先代]인 조상[祖上]님들이 듣고 보며 기록[記錄]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이렇게 변질되고 왜곡[歪曲]되어, 그것이 진실[眞實]의 가면을 쓰고, 조선사[朝鮮史]와 우리의 선대[先代]와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을 우롱하고 있다.
안남[安南]과 교지[交趾]가, 어찌 지금의 베트남이 될수 있겠는가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님의 당시대의 기록[記錄]으로 보면, 안남[安南]의 교지[交趾] 지역은,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과 타지크스탄, 아프카니스탄, 이란 북부지역, 인도 북부지역, 파키스탄의 일부지역의 일대를 정확히 기록[記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고대[古代]의 성곽[城郭] 유적[遺跡]이 곳곳에 현존하고 있으며, 고대[古代]의 왕릉[王陵]급 무덤이 평원[平原]지대에 수 없이 산재하고 있다. 릉[陵]의 형태는 한국[韓國]의 고대[古代] 왕릉[王陵]과 비교해서 이보다 더 크거나 같으며, 이러한 릉[陵]의 무덤이 알타이 산맥에서부터 이란을 거쳐 시리아, 터어키,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독일 일부 지역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중요[重要]한 것은 성곽[城郭]의 모양과 형태인데, 성곽[城郭]의 형태와 모양, 방향[方向]이 한반도의 평양[平壤]. 동북[東北]삼성[三省], 내몽골[內蒙古], 몽골[蒙古], 중국[中國], 카자흐스탄, 알타이산맥의 인근[隣近] 전지역,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흑해연안의 러시아 지역, 이란, 시리아, 인도 북 중부 지역,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크스탄, 등 에 이르는 광활[廣闊]한 지역에 걸쳐서 지금도 그 형태를 간직하고, 모두 동일한 같은 형태[形態]로, 같은 방향[方向]으로 축조[築造]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왕릉[王陵]급의 고대[古代]무덤 형태도, 성곽[城郭]의 주변으로 이어지며 동일하고, 경주[慶州]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의 출토지 와도 같은 지역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한반도[韓半島]에서 출토되는 북방[北方]의 유물[遺物]들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같은 정신[精神]과 같은 혼[魂]과, 같은 전통[傳統]을 지닌 민족[民族], 그리고 그 정신[精神]과 혼[魂]을 이어 받은 왕조[王朝]들이 남긴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고조선[古朝鮮]과 구이[九夷]는, 조선사[朝鮮史]의 뿌리요, 근본[根本] 줄기이다.
이 조선사[朝鮮史]의 본류는 알타이산맥의 근간[根幹] 지역이며,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유적[遺跡] 유물[遺物]들이, 대륙사[大陸史]를 포함하여 조선사[朝鮮史]의 선대[先代]들의 기록[記錄]과 정확히 일치하며, 현재에도 이를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할수 있는 자료[資料]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리라.
소위 중국[中國]의 왕조[王朝]들은,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알타이산맥으로부터, 천산[天山]의 동[東]쪽 지역은, 대대로 조선사[朝鮮史]의 영역[領域]이며, 조선사[朝鮮史]의 본토 지역이다.
현재 낙양[洛陽]의 소림사[少林寺]를 고려[高麗]에서 재건하고 증축[增築]한 자료[資料]가 있으며, 고려[高麗]의 신경[神京]이 중국[中國]의 내지에 있으며, 이에 대한 상세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있는데,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정신[精神]과 혼[魂]을 잃은 자들과,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은, 이러함에도 조선사[朝鮮史]가 대륙사[大陸史]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인가 ?
고조선[古朝鮮]과 구이[九夷],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朝鮮]으로 이어지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대륙[大陸]과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광대[廣大]하고 웅혼[雄渾]한 역사[歷史]이며, 인류[人類]의 문명사[文明史]에 위대[偉大]하고, 찬란[燦爛]한 업적을 남긴 조선사[朝鮮史]는, 선대[先代] 조상[祖上]님들의 혼[魂]과 얼과 정신[精神]이 담긴 역사[歷史]임을 깊이 새겨야 할것이다.
숙신[肅愼]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이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과 일치하며,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조선사[朝鮮史]의 근간[根幹]지역인 알타이산맥,.................. 서남[西南]쪽으로는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수[數] 천리[千里] 대야[大野]가 천산[天山]을 내리 누르고, 북[北]쪽으로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솟아올라, 사계절 흰눈과 빙설을 머리에 이고, 은빛 세계로 빛나는 대황지중[大荒之中]의 불함산[不咸山],................
고대[古代]로부터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의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일치하며, 이를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할수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그리고 지형[地形] 지세[地勢]가 일치 하는 곳,...............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東]과 서[西]로 치달리며 천하[天下]를 호령한 선대[先代]들의 발자취가 바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이며, 조선사[朝鮮史]의 비사[祕史]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북[北]으로는 대황지중[大荒之中]의 불함산[不咸山]을 머리에 이고, 서남[西南]으로는 천산[天山]을 감싸 않고, 아득히 펼쳐진 대야[大野]의 유주[幽州]와 요동[遼東]을 차지하는 자[者]가, 천하[天下]의 왕자[王者]로 군림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도도히 흐르는 일만년[一萬年]의 장엄[莊嚴]한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실체[實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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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 우리참역사에 아낌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많은이들을 일깨워주시는데에 감사를 드립니다. 위와같은 패기와 투지로 앞으로도 진정한 역사를 갈구하는 후학들에게 많은가르침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한가지 알려주고 싶은 정보가 있습니다. 혹시 이미 알고계시는지는 장담할수는 없지만 매우 유용한정보일뿐만 아니라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어 알려드리는것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언급이 없었던 서적입니다. 최근 어느분께서 소장하고 있다가 우리역사를 연구하는 분한테 전해준 열 몇권짜리 고서적입니다. 화면을통해서 보았는데 우리의 귀중한 몇몇역사책은 대부분 필사한것이 많지요. 그런데 이책은
목판인쇄본이고 전혀 변조나 또는 위서라고 볼수없는 책입니다. "지씨홍사"라는 책인데 우리나라 상고사,고대사를 기록한 전무후무한 서적입니다. 그러면 누가 갖고있을까요? 본인도 빠른시기에 번역본을 읽어봤으면 내심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상원"박사님께서 갖고계시는데 언제 번역을 할지 알수없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분들이 서로 복사를해서 주해를 한다면 보다 빨리 중요한 진실에 근접할것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동이문화원" 가입하셔서 강상원박사님의 강의동영상을 보면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수있습니다. 행여 이미 알고있는 내용이라면 그저 우리역사를 사랑하는 대부여의 작은 열정으로 보아줬으면 감사하겠습니
또는 전화로 연결하시면 더더욱 감사할따름이지요.
답답하던 가슴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이야깁니다.
조선사는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강단계는 반도사학에 매달려 죽을 등 살등 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지요. 현실을 보면 말입니다.
뜻있는 분들과 함께 일을 도모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공식적인 모임이나 단체등의 무언가 소통이 될 수 있는 그런 것 말입니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기에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조선의 선대분들에게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조선사가 올바른 역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을 해야 되겠지요.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동이는 서구에 대해 상반된 개념으로 보이며 원래 조선은 중국,중화 자체입니다..물론 동이는 조선의 사이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바로 서방 양이놈들이 몰염치하기대문에 구이를 통칭한 동이를 동방예으지국으로 불렀던것이 아닐까요? 오죽했으면 이렇게까지 비유를해서 말했을까요?
제현 선생님 여러분의 말씀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대부여님께서 말씀하신 지씨홍사라는 책은 오래전에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사의 고대사를, 조선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부여님의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문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조선사를 의한 뜻있는 분들과의 소통을의한 공공 성격의 모임은, 조선사를 위하여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문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뜻의 조선사 역사재단이, 조만간 출현 할것입니다. 제현 선생님 여러분의 댁내에, 평안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이제야, 역사의 바른 길이 열리는 듯 합니다. 여러분의 열정에 탄복합니다. 그리고, 러브선 님은 그 동이타령 좀 그만하시길...동이를 왜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지...우리가 동이족의 후예라는 것이 부끄러운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