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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마산 회성동 소재 교도소 전경>
마산시와 주택토지공사(LH공사) 는 2010년 9월께 내서읍 평성리에 새 마산교도소 건물 공사에 착공해 2012년 6월 완공’하기로 합의하였고, 교도소가 이전하고 나면 현재의 부지에는 법조타운과 주거·상업지역으로 개발돼 새로운 발전축으로 부상할 전망이며 또 기존 교도소 자리인 회성동에는 이미 용역이 진행중인 자족형 행정복합타운과 도시형 첨단산업단지도 조성될 계획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산교도소 이전사업은 빠르면 2010년 9월 본격 착수될 전망이라는 소식이다.
마산교도소 이전사업은 내서읍 평성리 140번지 일원 21만여㎡에 건축 연면적 3만4525㎡ 규모로 시행될 예정이며, 당초 2010. 12월 착공이 예정돼왔다. 현재 법무부와 마산시는 현 교도소 건물 및 부지 평가액(약 600억원)과 새 교도소 신축비(700억원) 차액 100억원을 놓고 50억원씩 분담하는 방안에 합의를 본 상태다.
현재의 마산교도소는 1970년 오동동에서 이전해왔다. 당시 이름은 마산 형무소였다.
예전 한국은행 마산지점이 있던 곳이다.
마산에 감옥이 처음 설치된 것은 일제시대인 1910년이었다.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남에 따라 일제는 감옥을 설치했고 늘려나갔다. 서울을 비롯한 8개의 본감과 인천 등지에 13개의 분감이 설치되었다.
마산은 부산본감의 분감으로 출발했다. 마산분감의 처음 위치는 지금의 부림시장 입구에 있었던 경무청이었고 오동동으로 옮긴 것은 1913년이었다.
당시의 마산부 사람들은 오동동의 붉은 형무소 건물은 조선인 밀집지역에 일본인들이 고의로 음산한 건물을 지은 것이라 하여 감옥의 이전을 요구하는 부민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1923년에 부산형무소 마산지소로 개칭되고 1946년에 마산형무소로 승격되었다. 1961년에 수형자의 교정교화를 목표로 하여 교도소로 명칭을 변경했고, 지금의 위치(마산시 회성동)로 옮겨간 것은 1970년이었다.
옛 마산형무소는 한국 근현대사의 고통에서 비켜나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일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던 무수한 사람들이 투옥되었고,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속에는 농민, 노동자, 학생, 민족주의자, 조직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계층과 계급이 있었다. 그들의 각자 위치는 달랐지만 그들의 지향은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경남지역의 3·1운동은 늦은 시기에 불붙었지만 치열하고 완강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진동 고현시장과 삼진, 마산부, 구창원읍(지금의 소답동), 함안지역인 함안면·군북면 등지에서의 저항은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가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나를 적나라 하게 보여 주었다. 그들은 죽어갔고, 부상당하고, 마산감옥에 투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대 남재우 교수는 몇해전 어느 세미나 발표에서 일제강점 이후부터 3·15의거와 5·16쿠데타에 이르기까지 마산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시국관련 수감자들의 명단을 조사·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 명단에 따르면 △마산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 최용규·이정찬·박순천·팽삼진 등 42명 △진동면 고현시장 의거 관련, 권녕조·권오규·백승학 등 7명 △창원의거 관련 설권수·공도수·조윤호 등 15명이 각각 이곳에서 1년6개월~4개월간 수형생활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함안 3·1만세사건 관련자도 안지호·김성용·문덕중 등 45명에 이르렀으며 △함안 군북의거 12명 △칠북·칠서 의거 12명도 이곳에 수감됐다.
이밖에도 고성 구만·회화의거와 진해 운동 마천의거·가덕진 의거·창녕 영산의거 등 독립만세사건 주동자들이 마산형무소를 거쳐갔다.
1920년대 이후에도 △밀양경찰서 투탄사건과 △청산리승전보 배포사건 △반일문학그룹 독서회 사건 △대한독립단 사건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후에는 △마산과 창원지역 보도연맹원 1681명이 이곳에 수용된 후 학살당했으며 △5·16쿠데타 직후 교원노조사건으로 이봉규 마산중등위원장과 황낙구 초등위원장, 전국양민피학살자 유족회 노현섭 회장 등이 역시 마산형무소로 직행됐다. 그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인인 권오석씨도 한국전쟁 직후 좌익사건에 연루돼 마산형무소에서 수감중 옥사한 기록이 있다.
< 아래: 구 마산형무소 진, 마산오동동 구 한국은행터>
< 위 : 오동동 소재 옛 마산형무소 자리임을 나타내는 비석>
형무소 철거후 한국은행이 있었고, 2000년대 초반 창원으로 이전한뒤 주차장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중이다. 이 부지는 5~6년전 모 건설업체가 매입했다.
땅값이 많이 올라 마산시가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후문이다.
보도연맹 관련자 1681명이 마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학살되었다는 조사와 관련,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였던
“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할 당시 방첩대(CIC) 대원들은 숱한 재소자들을 데리고 나갔다”며 “이들은 모두 총살됐거나 수장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산형무소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는 성차용씨(80)는 “1950년 7월초 40∼50명의 재소자를 태운 트럭이 매일 4∼5대씩 형무소를 빠져나왔고 마산 인근 바닷가나 진동면으로 끌고 가 총살 했다”며 “지금도 진동면 사람들은 학살 현장을 ‘보도연맹 골짜기’라고 부른다”고 증언했다.
그때 진동 등지로 데려가 모두 사살했다는 후문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인권은 간데없고 이념 투쟁의 뒷길에서 자행된 엄청난 비민주행위가 아직도 파뭍혀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편, 옛 마산형무소 자리를 시민공원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시민들의 주도로 펼쳐지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으나 아직 가시적인 활동은 없다.
서울에서는 옛 서대문형무소 터에 역사관을 만들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옛날 민족의 해방,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인고의 시간을 보내었던 그 곳을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곳에서 고난 의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처절했던 삶도 남아있는 우리가 화해의 차원에서 보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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