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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찬송을 우선적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
피터 홀트뢰버 목사, 클라리온 2024. 5. 17. (번역 익산우리교회 이은중 목사)
이전 글에서 확실히 개혁교회는 오랜 역사동안 모든 다른 찬송보다 150편의 시편으로 찬송하는 것을 우선시 했습니다. 일부 장로교회가 오직 시편찬송만을 부르는 것을 지지함에도, 대륙의 개혁교회는 시작부터 정규적으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뿐만아니라 몇 개의 성경찬송시를 곡으로 붙여 노래했습니다. 칼빈으로 시작해서 도르트신조를 거쳐 1834년 분리, 1954년 캐나다 개혁교회의 첫 번째 총회에 이르기까지 몇 편의 성경찬송시와 자유찬송가를 시편찬송가와함께 노래해 왔습니다. 그러한 찬송가들은 역사적으로 시편찬송가 다음으로 보여지거나 사용되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결론에 이릅니다. 시편찬송가가 다른 성경찬송시와 자유 찬송가보다 교회가 우선적으로 부르도록 본래적으로 구별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다? 그러한 위치를 제공하는 성경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거스틴과 칼빈으로 시작하여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시편을 쓰셨다.
하나님이 많은 노래를 쓰시고 그 노래를 부르도록 사람에게 주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다른 모든 노래보다 하나님이 주신 노래를 매우 귀하게 여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상상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다윗과 아삽과 고라 자손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시편을 쓰게 하셨습니다. 결국 이 150편의 노래는 그들 범주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어거스틴을 따라 칼빈은 명쾌하게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깊게 여러 군데를 살핀 후에도, 성령으로 영감된 다윗의 시편보다 결론적으로 더 좋고 더 적합한 찬송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시편으로 노래 할 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노래함으로 자신의 영광을 높이도록 한 것처럼, 하나님이 그 말씀을 우리의 입에 놓으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경찬송시도 실제로 하나님께서 영감된 말씀을 노래 부를 수 있는 구절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성경찬송시도 시편과 동급입니다. 하지만 자유 찬송은 하나님을 저자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작품은 다른 범주에 속합니다. 자유 찬송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을 성경에 기초해서 귀중하게 표현한 사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 찬송은 성령의 영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한 찬송은 역사적으로 개혁교회에서는 단지 인색하게(sparingly) 불렸습니다.
2. 하나님이 시편을 노래하도록 명령하셨다.
성경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그리고 반박할 수 없게 교회가 시편으로 노래하도록 명령받았다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찬송을 부르라는 그런 명확한 명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선지자와 그가 시편을 작곡하도록 지정한 사람들에게 성전 예배에서 그것을 사용하도록 영감하셨습니다.(왕상 16:7; 25:1-6) 시편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시편으로 찬송을 부르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시 47:7)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68:4) 다윗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에 지은 영감받은 시편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똑같은 것을 명령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시편(KJV)을 노래할지니라”(약 5:13)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하고 서로 시편으로 화답함으로 우선 성령충만한 방법을 설명합니다.(엡 5:19) 다른 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시편을 부르”라고 명령합니다.(골 3:16) 이 두 구절이 다른 무엇을 말하든 간에, 우리가 시편을 노래하도록 명령받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과 그 시편을 부르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외적표현임이 분명합니다.
엡 5:19의 나머지 두 부분 즉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골 3:16절과 비교) 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자유찬송으로 부르는 시편이 아닌 다른 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찬송도 시편찬송과 동급으로 높여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각각 다른 종류의 찬송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본문은 진행되는 논쟁거리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사실은 확실합니다. 이 본문에서 시편을 위해서 사용된 그 단어는 신약에서 시편의 성경찬송시를 언급하는데 규칙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눅 20:42; 24:44.; 행 1:20; 13:33) 논란이 되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 14:26) 거기서 그것은 성경을 출처로 하는 시편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약 정경의 완성으로 중단된 그 시대를 위한 특별한 선물인 계시로서 성령에 의해 주어진 시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시편을 언급할 때, 그가 성경의 시편을 언급했다고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에베소서 5:19에서 사용한 세 가지 개념은 모두 그 당시 유대인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시편의 그리스 번역본(70인역)에서 모두 여러 번(multiple times)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개념들로서 시편책 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구별이 거의 없어서 이 세 개념은 동의어로서 간주 되었습니다. 시편책을 자신의 손바닥처럼 잘 아는 바리새인 전문가인 바울이(실제로 30번이상 시편을 인용한) 이 세 가지 개념을 사용한 것은 시편을 언급하는 동의어로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세 개념을 그의 논점을 전달하기 위해서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럴 가능이 더 큽니다. 고후 12:12; 살후 2:9) 대부분의 학자들이 믿듯이, 형용사 영적(spiritual)은 성령(the Holy Spirit)을 의미하는 것처럼,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이 세 개념에 적용한다면, 그것이 성령으로 영감된 150편의 시편을 언급하는 것으로 훨씬 더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나머지 두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계없이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여기서 하나님이 신약교회에 정경으로서 시편을 노래하도록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찬송시에 이를 때, 시편책 밖에 성경으로 지은 많은 양의 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출 15:1; 민 21:17; 삿 5:1; 계 5:9) 하지만 단지 하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노래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신 31:19) 이것은 그것을 시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합니다. 다른 성경적 노래나 구절은 확실히 그들을 노래하라는 명령은 없지만 노래 하는게 유익할 수 있습니다. 자유 찬송에 관해서는 신자가 그것을 창조하라는 성경적 명령도 없을 뿐아니라, 교회가 그러한 새로운 창작물을 노래하라고 힐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시편 150편 더하기 모세의 노래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노래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위의 내용이 오직 시편 찬송만 옹호하는 것입니까? 대륙의 개혁교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들은 시편 찬송을 우선시합니다. 다음으로 성경에서 발견되는 성경 찬송시를 그리고 다음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가까운 것에 기초한 자유찬송 순으로 부릅니다. 교회가 성경찬송시와 자유찬송을 부르는 것은 무엇을 기초로 합니까? 그런 노래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 회중을 권고, 믿음에 대한 공적 선언인데,이것은 많은 시편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기초에서 교회는 노래해 왔습니다. 성경은 규칙적으로 기도와 상호간의 권면, 신앙의 공적선언을 명령하고 권면합니다. 이런 것은 시편 150편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중찬송으로서 개혁교회들은 역사적으로 그들 자신의 자유 기도, 권면, 선언은 시편찬송 다음에 위치합니다. 결과적으로 성령으로 영감된 오류가 없는 찬송이 하나님께 대한 회중의 반응으로 형성하고 인도될 수 있습니다.
3. 시편은 계시를 노래합니다.
운율이 있는 시편과 성경찬송시는 하나님 말씀을 노래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성경을 노래할 때, 이 찬송들은 회중이 사려깊게 그들의 마음과 압술을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우리 자신과 우리의 구원에 채우도록 합니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원리인 하나님의 사람이 오직 성경으로 사는, 오직 성경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과 구원을 포함한 모든 것에 최상의 권위입니다. 개혁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포함해서 그들의 노래를 우선적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습니다. 더욱이 성령은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에서 일하십니다. 결과적으로 간절한 믿음으로 시편과 성경찬송시를 부를 때, 성령은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믿고 복종하도록 일하십니다. 시편과 찬송에 대한 개혁교회의 태도에 대한 조사에서 R. 파버는 “신자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을 때,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회중의 믿음을 증진시킨다” 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그 교회가 노래하는 것으로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도 노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시 했습니다. 자유 찬송은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를 반영합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자유 찬송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중요한 진리를 가르칠 수 있고 노래된 기도로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회중이 믿음으로 응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 찬송은 시편이나 성경찬송시처럼 계시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4. 시편은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시편 150편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으로 영감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시편은 특정한 예언으로 오실 메시야를 언급하는 소위 메시야 시편뿐 아니라 모든 시편 안에서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다윗은 잘 알려진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의 고난, 그의 영광스런 왕권으로 하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계시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절반을 썼습니다. 신약은 우리에게 많은 시편의 말씀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전할 때, 모든 시편의 그 “나”를 그리스도로 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는 노래하는 자입니다. 모든 애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에게 소리높여 웁니다. 모든 찬송과 감사의 시편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를 높이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모든 지혜의 시편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가르칩니다. 심지어 시인이 그의 죄를 고백할 때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대신해 죄가 되신(고후 5:10) 우리의 중보자요 대제사장으로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핵심적으로 예수님 스스로 시편이 그를 말씀하시는 방식을 언급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
실제로 우리는 복음서보다 시편에서 주 예수님의 생각과 감정을 더 많이 배웁니다. 모든 애가에서 그분의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그리고 모든 찬양과 감사의 시편에서 그분의 환희와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의 생각과 감정을 알 수 있습니까? 우선 시편 22편, 31편, 88편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주일에 생각과 감정을 알 수 있습니까? 맛보기로 시편 18편과 30편을 읽으십시오. 시편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성령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고난과 승리의 내적 마음(내면)을 보여주십니다. 시편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단편적 예언을 포함하는 것 이상으로 많습니다. 시편은 구주께서 자신 스스로 노래하는 것을 우리가 시편에서 듣는 심오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합니다. 성경찬송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할수 있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경에서 계시되기 때문에, 성경찬송시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하지만 성경찬송시는 시편이 하는 것처럼 메시야의 내적 생각과 감정을 계시하는데 근접하지 못합니다. 자유찬송은, 그것이 계시는 아니지만 계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이기 때문에, 다른 범주안에서 단순합니다. 확실히 자유 찬송은 성경에 일치하게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성부와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를 찬송합니다. 그것은 선하고 유익합니다. 하지만 자유찬송은 계시가 아니며 기껏해야 계시에 기초한 교훈입니다.
5. 시편은 언약적이다
시편이 다윗 또는 그가 지정한 사람인 아삽, 헤만, 심지어 모세(시 90편)이든지간에 모든 시편은 주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세운 언약적 관계 안에서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서 시편은 동시에 개인적 신자와 전제 회중 둘 다를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모든 시편은 언약적 약속과 의무라는 틀(framework) 안에서 작동합니다. 모든 애가, 저주의 기도(시 5, 35, 69, 109, 137편), 하나님의 은혜언약 관계와 일치하게 도움과 정의를 소리내어 외칩니다. 모든 찬송과 감사의 시편은 언약의 하나님이 그의 인격 안에서 어떤 분인지 또는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해, 심지어 세상을 위해 하신 것에 대한 헌신과 감사를 표현합니다.(시 103,145편) 모든 지혜의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에게 야웨의 언약적 약속을 믿을 것과 그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가르칩니다.(시 1. 15, 37, 49편)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 시대의 언약적 공동체입니다. 오순절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똑같은 은혜의 언약이 계속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로 계속 이어 왔습니다. 새언약은 옛언약을 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로 더 복되고 더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풍성함의 하나가 확장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때문에 만들어진 민족적 이스라엘(유대인)의 믿는 자에서 이방인으로부터 온 믿는 자들이 더하여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노래할 때,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노래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가장 적합한 노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주신 시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날 시편을 노래할 때, 구약 교회와 직접적 연합(unity)과 연속성(continuity)을 가지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성경찬송시는, 그것이 성경 구절에 음을 붙인 것이기 때문에, 전체 성경이 본성적으로 언약적이기 때문에 그것 또한 본성적으로 언약적입니다. 자유 찬송은 여러 장르의 혼합물(mixed bag)입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찬송작사자가 찬송을 쓸 때 언약적으로 생각했느냐에 달렸습니다. 한편으로 유일하게 아주 적은 성경 찬송시는 실질적으로 시편을 노래한 구약의 성도들과 함께 노래한다는 연속성(continuity)의 수준까지는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언약이 역사에 걸쳐 세대와 세대를 지나 이어져 오기 때문에, 오직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만이 완전하게 언약적이며 모든 시대와 장소의 교회와 함께 하는 가장 연속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교회들은 다른 찬송보다도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을 상급으로 여겨 왔습니다.
6. 시편은 오류나 불균형이 없습니다.
시편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떠한 오류도 없습니다. 사소한 교리적 불완전함이나 불균형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리시기 원하는 진리와 우리가 회중으로 하나님께 노래할 때 서로 가르치기를 원하는 진리가 시편 안에 모두 다 있습니다. 자신의 기호에 따라 시편일부만이 아니라 오직 전체 시편을 노래할 때, 이 가르침으로부터 충만한 유익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편에서의 문제이지 시편찬송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시편에는 죄악된 인간 본성이 꺼리는 주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죄악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예: 시편 32, 38, 51편), 인간의 타락(예: 시편 14, 35, 120편), 신의 징벌(예: 시편 109, 59, 137편),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사이의 대립(대부분의 애가, 예: 시편 1, 101편, 118편 참조),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예: 시편 1, 19, 119편) 등이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얼마나 많은 자유 찬송은 이러한 주제들을 노래하고 있을까요? 극히 아주 드뭅니다. 교회가 시편찬송보다 더 많은 자유찬송으로 노래하기 시작한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위에서 말한 가르침과 시편에서 발견되는 감사는 고사하고라도 얼마나 많은 관용(인내)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미 지금 우리 총회안에도 있는 일입니다. 우리 회중들이 시편 11, 69, 109, 129, 137편과 그들과 같은 다른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가 감히 저주 구절을 포함한 시편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가 비기독교인이나 반선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그런 시편을 부르는 것이 곤란하다면, 하나님 말씀이 문제인 것입니까? 우리가 문제인 것입니까? (어떤 시편을 부르는 것을 회피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자로 서 있을 것입니까? 반대로 우리가 기꺼히 겸손하게 (모든 시편을 노래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엎드러 배우겠습니까? 소위 주류 교회들 즉 캐나다 연합교회, 캐나다 장로교회, 미국 개혁교회가 오래전에 이미 그들의 찬송가에서 많은 시편을 제외시킨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 찬송이 교회예배에서 시편보다 우위를 차지할 때, 시편은 점차 역사에서 보여진 것처럼 사용빈도가 줄어들 것입니다. 성경찬송시는 시편과 마찬가지로 다른 성경 구절을 충실하게, 노래하기 쉽게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한(특정 주제나 유형의 노래만 선택하는 경우) 본질적으로 오류나 불균형의 위험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 찬송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 찬송은 성령의 영감이 부족하여 항상 오류와 불균형의 위험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어떤 가르침과 개념은 강조될 수 있는데 반해, 다른 것들은 축소, 약화되거나 심지어 회피됩니다.
이것이 교회가 기도나 찬양을 제공하기 위해서 자유 찬송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 가사가 온전히 성경에 충실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자유찬송을 선택함에 있어 상당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주로 대부분의 시편을 부르는 것은 회중의 교리적 신실성과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뿐아니라, 그 내용이 시편과 온전히 일치하거나 동질성이 있는지 자유찬송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도움이 됩니다. 찬송가의 가사가 시편 찬송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렇게 느낄 것인데, 그런 찬송가는 교회에서 부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위의 여섯 가지 이유들 때문에 시편은 개혁교회에서 항상 다른 모든 찬송가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성경찬송시는 영감받은 성경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하고 풍성하게 드러내는 자유찬송 또한 교회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오직 시편만이 하나님께서 직접 쓰시고, 그분의 백성이 그분께 돌아와 노래 부르도록 흠 없는 노래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 우리는 그분의 노래(시편)로 노래 부르는 것을 우선시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자신에게도 복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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