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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정리방。 스크랩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척자점(擲字占) [ ‘난중일기’로 만난 이순신과 조선]
학선 추천 1 조회 610 15.04.24 02:30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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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일기’로 만난 이순신과 조선]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간 쓴 ‘난중일기’는 병법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난중일기’에서 전쟁에 이기는 법만 보려 했다. 인간 이순신의 고민, 그 시대 조선의 문제는 외면했다.

필자는 수년간 난중일기를 통해 이순신과 이순신이 살던 시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두려움에 점을 치는 이순신, 그의 연인들, 이순신을 만든 부하들은 우리가 몰랐거나 외면한, 위인전에선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 가지 욕망이 있다. 식욕, 성욕, 미래욕이다. 식욕과 성욕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본능적 욕망이다. 미래욕은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만이 지닌 욕망이다. 미래욕이 없었다면 자연의 변화를 읽고 예측하거나 문명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점(占)은 미래욕을 채우는 하나의 행위이자 수단이다.

 

과학적 세계관으로 보면 점치는 행위는 원시적이고 비문명적 행위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느끼든 못 느끼든 매 순간 점을 치며 산다. 의사결정 순간마다 수반되는 예측은 점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판단하는 것도 점이고, 남에게 물어보는 것도 점이며, 신에게 물어보는 것 역시 점이다.

그래서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은 이렇게 적었다.

 

“임금이 궁금증이 있다면, 먼저 임금 자신에게 물어보고,

다음은 대신과 백성에게 물어보고,

그런 다음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거북점과 시초점에 물어보라.

세 사람이 점을 쳤는데 두 사람의 결과가 같다면 그 두 사람의 결과를 따르라.”

 

점친 기록 17회

 

‘태종실록’에는 점을 쳐 수도를 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태종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즉위하면서 한양에 조선의 수도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창덕궁을 건설할 즈음, 수재와 가뭄이 연이으며 도읍 건설 부정론이 일어났다.

 

그때 태종은 고려 태조 왕건이 개성에 도읍을 정할 때 척전점(擲錢占·돈을 던져 길흉을 파악하는 점)을 쳐 그 결과에 따랐다며 한양·무악·개성 세 곳을 대상으로 척전점을 쳐 결정하라고 명했다. 결과는 한양은 2길(吉) 1흉(凶), 개성과 무악은 2흉 1길로 나타났다. 그에 따라 태종은 한양을 도읍으로 확정짓고 창덕궁을 창건했다.

 

이순신의 후원자이자 영의정이었던 류성룡(1542~1607)도 점을 자주 쳤다. 그가 남긴 ‘서애집’에는 점을 친 사례가 나온다.

 

임진(1592년) 6월. 나는 선조를 따라 평양에 피난해 있었다. 어머님은 왜적을 피해 동쪽으로 가셨다고 하는데 길이 끊겨 소식을 듣지 못했다. 어머님이 걱정되어 점을 쳐 곤지건괘를 얻었다.

‘초씨역림’의 점사를 보니, “아이가 활을 쏘니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의심을 풀려고 점을 쳐도 아무도 피한 곳을 알 수 없다. 나라가 평안하니 머물러 있는 것이 이롭다. 군사와 도적이 이르지 아니하니 백성이 시끄러움이 없다(?或射御, 不知所定. 問于蓍龜, 孰可避之. 國安土樂. 宜利止居. 兵寇不作, 民無騷憂)”라고 했다.

후에 어머님의 소식을 들었는데, 형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가평현에 있는 절인 조종사로 피난했다고 한다. 왜적이 그 주변에서 사방으로 나왔지만 산이 깊어 그곳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가 괘를 얻은 날이고, 바로 어머님이 조종사에 있을 때였다.

 

이순신 시장(諡狀·임금에게 시호를 건의할 때 그가 살았을 때의 일을 적어 올리는 글)을 쓴 택당 이식(1584~1647)도 점을 아주 잘 쳤다. “공(이식)은 성질이 안정되어 마음에 망상이 없었으므로 어른들이 척전점을 시켜 임진왜란 시 피난할 곳을 물으면 그 길흉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순신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로 ‘선조실록’의 자료로 활용된 ‘미암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1513~1577)도 점을 자주 쳤다.

 

전쟁터에서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를 돌리며 살았던 인간 이순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스스로 점을 친 기록, 다른 사람이 점을 친 내용이 총 17번 등장한다.

이순신 자신이 직접 척자점(擲字占)을 친 것이 14회, 다른 사람이 친 것이 3회다. 점을 친 시기는 일기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은 1594년, 1596년, 1597년이다. 1594년은 3일간 척자점 10회, 1596년은 2일간 척자점 4회, 1597년은 3일간 추수(推數) 2회와 주역점 1회의 기록이 나온다. 1597년의 점들은 이순신이 아니라 맹인 임춘경과 신홍수가 각각 추수와 주역점을 친 경우다.

 

 

아들, 류성룡, 비 걱정

 

척사점(擲柶占·윷점)이 들어 있는 ‘경도잡지’ 표지(유득공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와 척자점 (필자 소장,‘소강척자점’).

 

 

이순신이 직접 친 척자점은 아내나 아들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혹은 전투에 대한 예측과 적의 동향 예측, 영의정 류성룡에 대한 걱정이 주요 주제였다. 전쟁을 비롯한 갖은 시름 속에서 불확실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선한 사람, 하늘을 감동시키고자 노력한 이순신이기 때문인지 그가 친 점의 결과는 언제나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그가 친 척자점을 ‘이충무공전서’ 편찬에도 참여했던 유득공(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 나오는 척사점, 즉 윷을 이용한 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윷놀이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고, 게다가 그 시기에 윷으로 ‘주역’을 활용한 작괘점을 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윷점이 아니다.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기록해놓은 종정도(從政圖) 놀이가 5회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종정도 놀이 도구인 윤목(輪木)을 활용한 점으로 보인다. 즉 척자점은 윤목을 던져(擲) 얻어낸 숫자를 척자점을 해설하는 텍스트, 예를 들면 ‘토정비결’과 같은 책에서 찾아 읽는 방식이다.

 

전장에 있는 군인이며 리더였던 이순신도 한 가족의 가장이다. 스스로가 선택한 업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이순신도 그 업으로 인해 가장의 역할을 다할 수 없는 고뇌로 시름에 잠겼다. 특히 자신이 돌볼 수 없는 상태, 함께 곁에 머물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내와 자식들의 질병 소식을 듣고, 점을 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94년 7월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떤지 척자점(擲字占)을 쳤다. 결과는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괘였다. 아주 좋았다. 다시 쳐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如夜得燈)”였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류 정승(영의정 류성룡)에 대해 점을 쳤다. 결과는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如海得船)”는 괘였다.

다시 점쳐보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였다. 아주 좋았다. 아주 좋았다.

저녁 내내 비가 내렸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 비가 올지 갤지 점쳤다. 결과는 “뱀이 독을 뿜어내는 것과 같다(如蛇吐毒)”는 괘가 나왔다. 앞으로 큰 비가 내릴 것이다. 농사가 아주 걱정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이 일기는 세 가지 이유로 점을 친 기록이다. 셋째 아들 면의 위독, 영의정 류성룡 걱정, 벼가 익는 시기에 연일 퍼붓는 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아들 면의 병 소식을 들은 뒤 이순신은 “애타고 답답하다”(6월 15일), “매우 걱정스럽다”(6월 17일), “병세가 다시 심해지고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7월 10일), “병이 어떠한지 궁금했다”(7월 11일)고 적었다. 점치기 전날인 7월 12일의 기록은 이러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신 것은 자세히 알았는데, 면(?)의 병이 중하다고 했다. 아주 애가 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미워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 비방하는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다. 이날 어두울 무렵(昏)에는 마음이 아주 어지러웠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온갖 걱정으로 밤이 깊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류 정승이 만약 일찍 죽었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들 면과 ‘후원자’ 류성룡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와 같은 걱정 속에서 이순신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점괘는 모두 긍정적이었다. 일기와 역사적 사실로 확인해보면, 실제로 아들 면은 그 후 병에서 회복했고, 류성룡도 소문과 달리 큰 문제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날씨는 그가 다음 날인 14일 일기에 “비가 계속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같이 내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보냈다. 점괘를 얻은 그대로였다. 아주 지극히 절묘했다”고 쓴 것처럼 정확히 맞았다.

 

 

 

 

아내 거의 못 만나

 

1594년 9월 1일. 맑았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들지 못했다. 촛불을 밝힌 채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쳤다.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다(如僧還俗)”는 점괘를 얻었다.

다시 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아주 좋았다. 또한 병세가 좋아질지 어떨지에 대한 소식이 올지를 점쳤다.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如謫見親)”는 괘가 나왔다. 이 또한 오늘 안에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였다.

 

한 여인의 남편 이순신이 점을 친 일기다. 8월 27일 일기에는 “아침에 아들 울(蔚)이 보낸 편지를 보았더니 아내의 병이 위독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고 한다.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아주 위독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니 다른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장차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밤 9시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들 수 없었다.”8월 30일의 일기다.

 

당시 이순신의 부인 상주 방씨는 아산에 있었다. 이순신과는 전쟁 중 거의 만나지 못했던 듯하다. 이순신은 남쪽 바닷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거나 대치하며 군사와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바빴다. 방씨는 남편 이순신을 나라와 백성에게 빼앗겼고, 이순신은 사랑하는 아내 대신 군사와 백성을 사랑하며 지냈다.

 

그런 중에 들려온 아내의 병 소식은 이순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안한 마음과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며 이순신은 하늘에 기댔다.

이순신의 지극 정성이 통했는지 점괘는 좋았다. 점을 친 다음 날인 9월 2일 일기에는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아내의 병이 조금 나아졌는데, 원기(元氣)가 아주 약하다고 했다. 매우 걱정되었다”며 점괘처럼 아내가 회복되고 있는 사실이 나온다.

 

불태(不殆)의 장수, 불패의 장수 이순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유비무환의 행동방식이다. 사소한 징후까지 세심하게 미리 살피고, 철저히 경계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순신은 장수로서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점을 치기도 했다.

 

1594년 9월 28일. 흐렸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토벌할 일에 대한 길흉을 점쳤다. 첫 번째 점에서는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였다. 다시 쳤더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였다. 바람이 순하지 않았다. 흉도(胸島) 안 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1596년 1월 10일. 맑았으나 서풍이 크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어떨지 점쳤다.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如車無輪)”가 나왔다. 다시 점을 쳤더니,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괘가 나왔다. 모두 길한 괘라고 기뻐했다.

 

전투 예측하는 점

 

이 두 사례는 전투를 앞두었거나 적의 동향을 파악하려 할 때 친 점이다. 1594년 9월 28일의 점은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윤두수가 주도해 육군과 수군이 합동으로 전개할 장문포 전투 전날 친 것이다. 이순신은 전투를 앞둔 상태에서 점을 통해 전투를 예측하고, 준비 상태나 예상할 수 없는 문제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점을 쳤다.

 

신기한 것은 이날 첫 번째 점사다.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는 전투가 연상된다. 이순신이 친 척자점 텍스트의 점사는 모두 ‘주역’의 64괘처럼 64개다. 그런데 이 점사처럼 전투를 직접 연상케 하는 점사는 ‘죄가 있는데 공을 세우는 것과 같다(如罪成功)’ ‘활은 있지만 화살이 없는 것과 같다(如弓無箭)’ ‘호랑이가 소와 싸우는 것과 같다(如虎鬪牛)’ ‘활에 활시위가 없는 것과 같다(如弓無弦)’ 정도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여궁득전(如弓得箭) 점사가 나온 것이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활에 화살까지 더해졌다는 것은 철저한 준비를 뜻한다. 22일 이후의 일기를 보아도 수륙합동작전은 철저하게 준비된 상태다. 임진란의 영웅인 권율·이순신·원균은 물론 의병 영웅 곽재우·김덕령까지 참전했기 때문이다.

 

점사는 전투 준비가 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은 전투 결과까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점을 쳤다.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는 점사가 나왔다. 직접적인 해석이 어렵기에 연상을 해보면 성과가 없을 듯한 의미로 해석된다. 전투 결과를 기록한 일기인 9월 29일부터 10월 8일까지 일기를 보면, 일본군은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산속에 숨어 전투를 회피했다.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점사가 적중한 것이다.

 

1596년 1월 10일의 척자점은 1월 7일 일본군 5명이 항복해 오고, 그들로부터 일본군의 동향을 확인한 결과에 따른 점이라고 추정된다. 점사는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如車無輪)’였다. 바퀴 없는 수레는 움직일 수 없다. 점사는 일본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을 연상케 해준다.

이순신이 다시 점을 친 결과는 1594년 7월 13일, 아들 면의 병을 걱정하면서 쳤을 때 얻은 점사인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와 같다. 좋은 점사였다. 그 후의 일기를 보아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새벽에 세수를 하고 단정히 앉아 점을 치는 모습은 부귀영화를 꿈꾼 그 시대의 다른 양반이나, 오늘날의 세속인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출세와 횡재를 꿈꾸지 않았다.

 

이순신의 점에는 가족을 부양하고 책임져야 할 가장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자 불가피하게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 담겼다. 또 그 어떤 상황에서나 도망치지 않으며 가장 먼저, 맨 앞에서 치열하게 싸운 리더의 모습이 투영됐다. 부하에게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자상했던 최고 지도자였지만,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홀로 있을 때는 고독에 시름에 잠기고, 눈물 흘리며 밤을 지새우는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그 무엇보다도 그는 점(占)까지도 적극 활용해 예측 불가능한 미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진정한 유비무환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 때문인지 이순신의 점은 100% 적중했다. 게다가 그의 점은 언제나 긍정적 결과에 이르렀다.

 

이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의 실증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카를 융이 ‘주역’을 갖고 정성을 다해 점을 친 뒤 얻어낸 답이 자신을 항상 놀라게 만들었고 통찰력을 주었다는 것과 같다. 나폴레옹도 점을 활용해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도 했고, 이순신처럼 전투를 앞두고 성패와 진퇴를 예측하기도 했다.

 

이순신, 융, 나폴레옹은 모두 점을 출세와 행운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비무환을 위해 스스로의 상상력을 키우고 최선을 택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점을 활용했다. 보기에 따라 무시해도 될 사소한 징후조차 날카롭게 관찰하고 이를 활용하려는 데서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지독한 노력가의 모습이 보인다.

 

점을 치는 이들의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 묻고, 다른 이에게 묻고, 겸손하게 하늘에 물으며 하늘의 뜻을 따라 살려는 행동이다. 이순신은 그 점에서 나폴레옹이나 카를 융과도 다르다. 조금도 사심 없이 전쟁터에서 가족과 나라 걱정에 점을 치고, 그런 자신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열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점은 수신(修身)과 겸손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인물, 저 높은 하늘에 한없이 겸손한 인물임을 그의 점이 증명한다.

 

이순신의 점은 사리사욕을 위한 저급한 점이 아니라, 아버지와 남편의 점, 하늘을 공경하며 마음을 닦던 선비의 점, 국가와 백성의 생존을 책임진 장수의 점이었다. 이순신처럼 그런 마음과 자세로 점을 친다면 그 어떤 점이라도 확실하게 긍정적인 응답을 받을 것이다.

 

 

(끝)

 

 

박종평

● 서강대 정외과 졸업, 고려대 석사(정치학)

● 저서: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이순신 이기는 원칙’ 등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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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명량' 이순신 장군이 본 운세 척자점(擲字占)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 ‘난중일기’에 직접 점 치고 점사와 판단한 기록 있다

- 일기예보 점까지 뱀이 독을 뿜는 것과 같다(如蛇吐毒) 정확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점을 치고, 그 점사와 판단을 기록한 일기들이 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이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후원자였던 영의정 유성룡의 사망설이 들려왔을 때, 일본군과 전투를 앞두고 점을 쳤다. 또 연일 퍼붓는 비 때문에 농사를 걱정하면서 점을 치기도 했다. 점의 적중 여부는 일기 기록으로 검증해 보면 100퍼센트 정확했다.

 

점은 고대 중국의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에 따르면, 경청하는 행위와도 같다. 자신에게 묻고, 다른 사람에 묻고, 그래도 답답하고 궁금하면 최후의 순간에 하늘에 묻는 행동이다. 때문에 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 하늘의 명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점의 현실적 효용성은 어떤 결정이나 판단을 할 때에 조짐을 보여주고, 그 조짐에 따른 유비무환의 자세를 점검하는 의미도 있다. 또한 이순신처럼 스스로 치는 점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해 주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 활용하기 나름이고, 긍정적일수록 긍정적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점을 치는 이순신은 지극한 정성과 사심 없는 순수한 마음이 드러난다. 수없이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절박한 마음으로 하늘에 간절히 호소하는 자세였다.

1594년 7월 13일의 일기를 보면, 아버지 이순신은 그 전부터 아들 면의 병을 걱정했었다. 그런 중에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과 아픈 심정이 가득한 상태에서 홀로 조용히 앉아 점을 쳤다.

9월 28일 일기에서는 다음날 치러야 할 일본군과의 전투를 걱정하면서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점을 쳤다. 그런 그의 자세와 마음이 하늘을 감동시켜 그가 원하는 결과들을 점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사례를 보면, 결국 점을 치거나 해석할 때는 잡념을 떨치고 텅 빈 맑은 마음으로 불안·이해득실·계산·욕망·집착·이기심에서 벗어나는 게 점을 바르게 치는 자세이다. 정성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할 때 신(神)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처럼 새벽이나 늦은 저녁 시간을 택해 몸을 이완하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에서, 자신이 묻고 싶은 질문을 명확히 정리한 뒤 점을 쳐야 한다.

 

점사가 결정되면 점사를 천천히 음미하고, 자신의 질문과 연결 지어 상상해야 한다. 이때 자신의 잠재된 직관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이성과 감성, 직관과 상상이 조화돼야 한다. 또한 점사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융통성 있게 해석해야지 문구에 매이면 안 된다. 나쁜 결과가 나왔을지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나쁜 운도 좋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고, 자신을 고요하게 만들어 환경과 관계와 사물을 냉철하게 판단하며, 항상 공부해 지혜를 넓히는 노력이라면 좋은 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으며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 그것이 점의 시작과 끝이다.

 

 

<이순신 척자점> 치는 법과 점사

 

<이순신 척자점>은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옛 사람들이 미래가 궁금하거나 어떤 결정을 할 때 사용했던 <척자점> 자료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랑과 애국애족의 열망을 느끼고, 전쟁과 같은 우리의 현재 삶에서 최소한 지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다잡는 기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1. 점을 치는 순서

 

① 점은 묻고 싶은 사람이 쳐야 한다. 의심하거나 장난삼아 점을 쳐서는 안 된다. 또한 나쁜 마음을 갖고 나쁜 일에 관한 점을 쳐도 안 된다.

②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 묻고 싶은 것에 응답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

③ 문제를 정확히 한다. 혼란스럽거나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점치려 해서는 안 된다.

④ 하늘에 묻는 질문은 “이렇게 하는 게 좋을까요? 나쁠까요?”라는 식의 길(吉)과 흉(凶), 가(可)와 불가(不可), 진퇴(進退), 예스(Yes)와 노(No) 등 두 가지로 정확히 구분해놓고 질문을 해야 한다.

⑤ 괘를 얻는 방법에 따라 순서를 지켜 괘를 얻는다(‘괘를 얻는 법’ 참조).

⑥ 괘에 나온 점사를 찾아 읽고 자신의 상황과 비교한다(‘이순신의 해석 방법’ 참조).

⑦ 나온 점사가 자신의 상황과 다르거나, 그 결과를 상상할 수 없거나,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경우는 다시 쳐도 된다. 단기적인 일이나 질문과 점사가 비슷한 경우는 정확성이 높다.

⑧ 결과가 나쁘면, 좋은 점사가 나올 때까지 쳐도 된다. 그 행동 자체가 나쁜 운을 좋은 운으로 바꾸는 행동이다.

 

2. 괘를 얻는 법

 

괘를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독자들 자신이 점치는 방법을 만들 수도 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어떤 방식이든 숫자를 만들어내야 하며, 만든 숫자를 4로 나눈 나머지 숫자만 있으면 된다. 그것을 세 번해서 나온 각각의 나머지 숫자를 순서에 따라 나열해 괘의 점사를 보면 된다.

다음은 괘를 얻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실생활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① 책을 활용한 방법

 

첫 번째 숫자는 왼손 혹은 오른손 중 아무 손으로 책을 펼친 후, 책을 펼친 손 쪽의 책면에 있는 쪽수를 4로 나눈다. 나머지 숫자가 1이면 1, 2는 2, 3은 3, 0은 4로 기록한다.

두 번째 숫자는 처음 펼친 손과 반대 손으로 책을 펼치고 1에서 4까지의 숫자를 얻는다(※ 첫 번째 책을 펼친 손이 오른 손이었다면, 이번에는 왼손으로. 첫 번째가 왼손이었다면 오른 손으로).

세 번째 숫자는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마음가는 대로 아무 손으로 책을 펼쳐 다시 숫자를 얻는다.

첫 번째 숫자, 두 번째 숫자, 세 번째 숫자를 순서대로 놓고, 점괘 숫자를 찾아 점사와 점사 해설을 읽고, 자신이 던진 질문이나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상상하면 된다.

 

예) 1번째 오른손 226쪽→나머지 2, 2번째 왼손 169쪽→나머지 1, 3번째 오른손 184쪽→0, 0은 4다. 연속된 나머지 숫자는 214. 214를 찾아 읽으면 된다.

 

② 시간을 활용한 방법

 

현재 시간을 본다. 시를 4로 나눈다. 분을 4로 나눈다. 연월일시와 분을 합해 4로 나눈다. 나머지 세 숫자를 괘에서 찾아 점사와 해설을 읽는다. 시는 24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예) 2015년 1월 1일 오후 5시(17시) 48분에 점을 친다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괘를 만든다.

5시(17시)를 4로 나누면 나머지는 1이고, 1을 기록한다. 48분은 나머지가 0이다. 0은 4로 기록한다.

연월일시와 분, 2015+1+1+17+48=2082을 4로 나눈다. 나머지는 2다. 2를 기록한다.

연속된 숫자 142의 괘사와 해설을 찾아 읽으면 된다.

 

③ 윷을 던져 얻는 법

 

윷의 도는 1, 개는 2, 걸은 3, 윷은 4입니다. 모가 나왔을 경우는 다시 한 번 더 던진다. 모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하시면 된다. 세 번 던져 나온 것을 각각 기록하고, 그 결과를 괘에서 찾으면 된다.

예) 처음 던져 개가 나오면 개(2), 다시 던져 윷이 나오면 윷(4), 세 번째 던져 걸이 나오면 걸(3)로 기록한다. 나온 숫자 243(개윷걸)을 찾아 읽으면 된다.

 

④ 동전을 던져 얻는 법

 

동전 4개를 준비한다. 그림이 있는 면이 앞면이다. 4개를 한 손에 쥐고 흔든 다음 한꺼번에 던지거나, 한 개씩 빼낸다. 그림이 있는 면이 한 개 나오면 1, 두 개 나오면 2, 3개 나오면 3, 4개 나오면 4가 된다. 모두 뒷면이면 다시 던진다. 나온 숫자를 찾아 읽으면 된다.

 

⑤ 주사위를 던져 얻는 법.

 

1은 1, 2는 2, 3은 3, 4는 4, 5와 6은 다시 던져 5와 6이 아닌 숫자가 나올 때까지 던진다. 이렇게 해서 3개의 숫자를 얻어 차례로 기록해 괘사를 찾는다.

예) 처음 던져 5가 나오면 다시 던진다. 5와 6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던지고, 1~4까지 중의 숫자가 나오면 그 숫자를 쓴다. 3이 나왔으면 3을 쓴다. 두 번째 1이 나오면 1, 세 번째 3이 나오면 3을 쓴다. 313을 찾아 읽으면 된다.

 

 

3. 이순신 장군의 해석 방법 :직관적 해석과 유추 해석 방법

 

◎ 직관적 해석

 

대개 점사 자체가 질문의 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에 가능하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이 비가 많이 올까 걱정하면서 친 점의 결과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 1594년 7월 13일. 비가 올지 갤지 점을 쳤더니, ‘뱀이 독을 뿜는 것과 같다(如蛇吐毒)’는 괘를 얻었다. 큰비가 내릴 것 같으니 농사일이 걱정된다.

 

이순신이 비가 올 것인지 알아보려고 점을 쳤는데, ‘뱀이 독을 뿜는 것과 같다(如蛇吐毒)’는 괘를 얻었다. 뱀이 독을 내뿜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비가 연상된다. ‘독=비’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비가 개지 않고 비가 내릴 것이며, 특히 뱀의 독이기 때문에 더 많은 비가 오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순신은 큰 비가 내릴 것으로 해석했. 다음 날 이순신은 “비가 계속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빗줄기가 삼대처럼 내렸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어 간신히 밤을 지냈다. 괘와 같으니 참으로 신묘하다. … 밤 삼경에 비가 또 내렸다(1594년 7월 14일)고 했다.

 

◎ 유추해석

 

유추해서 해석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순신은 같은 날인 7월 13일에 비에 관한 점뿐만 아니라 몇 가지 점을 더 쳤다.

 

△ 1594년 7월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혼자 앉아 아들 면의 병 상태가 어떠한지 걱정이되어 척자점을 쳤다.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다시 쳤더니 ‘밤중에 등불을 얻은 것 같다(如夜得燈)’는 괘가 나왔다.

 

아들 면이 아프고, 게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뒤 고심하던 이순신이 점을 쳤는데,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는 점괘가 나왔다. 스스로 좋다고는 했지만, 직관적으로는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순신은 다시 점을 쳤다. 그랬더니 ‘밤중에 등불을 얻은 것 같다’는 괘나 나왔다. 캄캄한 밤에 등불을 얻었으니 편하고 좋을 수밖에 없다. 아들 면의 병이 좋아질 조짐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 때 이순신이 다시 친 것은 조금 더 확실한 답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아버지로서 아들의 회복을 간절하게 염원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척자점 괘와 해설 ◆

 

111(도도도) 여아득모(如兒得母) 아이가 어미를 얻은 것과 같다. - 좋은 결과를 예상됨.

112(도도개) 여어실수(如魚失水) 물고기가 물을 잃은 것과 같다. - 나쁜 결과가 예측됨.

113(도도걸) 여암득정(如暗得) 어둠 속에서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 (《난중일기》) - 어려운 상황이 지나감.

114(도도윷) 여초봉춘(如草逢春) 풀이 봄을 만난 것과 같다. - 때를 만남.

121(도개도) 여옥무하(如玉無瑕) 옥에 티가 없는 것과 같다. - 좋은 결과 예상, 중간 조금 시련.

122(도개개) 여죄성공(如罪成功) 죄가 있는데 공을 세우는 것과 같다. - 어려운 상황 예상됨.

123(도개걸) 여형부정(如螢赴) 개똥벌레가 등불에 가까이 가는 것과 같다. - 좋은 일이 생김.

124(도개윷) 여송대설(如松帶雪) 소나무가 눈으로 띠를 두르다. - 좋은 상태가 더 좋아짐.

131(도걸도) 여홍실소(如鴻失巢) 기러기가 그 둥지를 잃은 것과 같다. - 상황이 어려워짐.

132(도걸개) 여기득식(如飢得食)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는 것과 같다. - 행운이 찾아옴

133(도걸걸) 여룡입수(如龍入水) 용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 어려움이 지나감. - 손해 혹은 어려움을 당함.

243(개윷걸) 여수상문(如水上紋) 물 위에 물결이 이는 것과 같다. - 작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음

244(개윷윷) 여해득선(如海得船)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 (《난중일기》) - 순조로움

311(걸개개) 여왕득신(如王得臣) 왕이 신하를 얻는 것과 같다. (《난중일기》‘如見君王’) -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됨

312(걸도개) 여하득선(如夏得扇) 여름에 부채를 얻는 것과 같다. - 어렵지만 일이 잘 풀릴 것.

313(걸도걸) 여응무과(如鷹無爪) 매가 발톱이 없는 것과 같다. - 열심히 노력해도 성과가 없음

314(걸도윷) 여주투강(如珠投江) 구슬을 강에 던지는 것과 같다. - 갑자기 일이 어렵게 됨.

321(걸개도) 여용득각(如龍得角) 용이 뿔을 얻은 것과 같다. - 오랜 기다림 속에서 좋은 성과

322(걸개개) 여착장어(如捉長魚) 큰 물고기가 잡힌 것과 같다. - 갑자기 힘든 일을 만나게 됨.

323(걸개걸) 여한득림(如旱得霖) 가뭄 속에서 풍족한 비를 만나는 것과 같다. - 일이 풀려 좋아짐.

324(걸개윷) 여묘규서(如猫窺鼠) 고양이가 쥐를 엿보는 것과 같다. - 끊임없이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음

331(걸걸도) 여호투우(如虎牛) 범이 소와 싸우는 것과 같다. - 생각지도 않은 어려운 일이 생김.

332(걸걸개) 여산부동(如山不動)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난중일기》) - 성과 없음

333(걸걸걸) 여화득과(如花得果) 꽃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이 이뤄짐.

334(걸걸윷) 여승환속(如僧還俗) 승려가 속세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난중일기》) - 제자리, 자신의 길에 있어야 함.

341(걸윷도) 여옥득개(如屋得盖) 집에 지붕을 덮는 것과 같다. - 결정적인 마무리가 필요한 때.

342(걸윷개) 여마탈늑(如馬脫勒) 말을 통제하는 재갈을 벗는 것과 같다. - 물거품이 될 수 있음

343(걸윷걸) 여행득로(如行得路) 험한 길을 가다가 편한 길을 얻는 것과 같다. - 좋은 일이 생김

344(걸윷윷) 여화봉춘(如花逢春) 꽃이 봄을 만난 것과 같다. - 좋은 일이 생김.

411(윷도도) 여부득자(如父得子) 아비가 아들을 얻은 것과 같다. - 뜻밖의 행운이 생김.

412(윷도개) 여공득재(如工得才) 장인이 재주를 얻는 것과 같다. - 오랜 고생 끝에 좋은 일 생김.

413(윷도걸) 여전득우(如電得雨) 우레가 비를 얻는 것과 같다. -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남.

414(윷도윷) 여맹득안(如盲得眼) 맹인이 눈을 얻는 것과 같다. - 막힌 것이 뚫림.

421(윷개도) 여야득명(如夜得明) 밤에 밝음을 얻는 것과 같다. - 긴 어둠이 물러감.

422(윷개개) 여인무수(如人無手) 사람이 손이 없는 것과 같다. 고생만 하고 성과가 없음.

423(윷개걸) 여우득지(如愚得智)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얻는 것과 같다. - 반성하고 깨달을 때

424(윷개윷) 여궁무현(如弓無弦) 활이 활시위가 없는 것과 같다. - 겸손해야 할 때.

431(윷걸개) 여농득명(如聾得明)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게 되는 것과 같다. - 경청하면 더 좋아짐

432(윷걸개) 여의득희(如意得喜) 뜻이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 (《난중일기》‘疑’) - 마음을 다시 다지면 좋은 성과를 이룸.

433(윷걸걸) 여득실노(如得失奴) 잃어버린 노비를 되찾은 것 같다. -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됨

434(윷걸윷) 여행대노(如行待奴) 길을 가다가 노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 기다려야 할 때

441(윷윷도) 여리박빙(如履薄氷) 살얼음을 밟는 것과 같다. -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

442(윷윷개) 여어함구(如魚含鉤)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머금은 것과 같다. - 지나친 욕심이 재앙

443(윷윷걸) 여조출농(如鳥出籠) 새가 새장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 오랜 시련이 끝날 때.

444(윷윷윷) 여창득의(如瘡得醫) 종기로 고생중에 의사를 얻은 것과 같다. - 고난 속 도움 얻음

 

/ 일요서울

 

 

 

 

“충무공이 쳤던 ‘척자점’은 우리 전통의 윷점”

 

임채우 윷문화연구소장 논문발표

 

◀ 임채우 한국윷문화연구소장이 지난 23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 사옥에서 자신이 발굴한 윷점서인 ‘육십사괘상례’를 공개하고있다

 

 

“1594년 7월13일,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떤지 척자점(擲字占)을 쳐 ‘군왕을 만나는 것과 같다는 괘(여현군왕괘·如見君王卦)’가 나와서 매우 길(吉)하였다. 다시 치니 ‘어둔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여야득등지괘·如夜得燈之卦)’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좀 놓였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나오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진중(陣中)에서 점을 친 기록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대치하던 진중에서 친 척자점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국윷문화연구소장인 임채우(51·국학)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쳤다는 척자점은 바로 우리 전통의 윷점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 민간에서 만들어져 전승돼온 한국식 역학의 결정체”라고 밝혔다.

 

지난 23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 사옥을 찾은 임 교수는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척자점사(擲字占辭)와 거의 일치하는 윷점의 점사를 기록한 조선후기 시기미상의 필사본인 ‘육십사괘상례(六十四卦象例)’ 원본(21×33㎝)도 이날 공개했다.임 교수는 연세대 대학원에서 주역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로 지난 10여 년간 윷놀이의 기원과 주역철학의 의미를 분석한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등 우리 전통 윷문화에 천착해왔다.

 

임 교수에 따르면 ‘난중일기’에는 충무공이 14차례에 걸쳐 척자점을 친 기록이 등장한다. 물론 이는 충무공의 친필 초고본에 등장하는 숫자이고 1795년(정조 19) 왕명으로 편찬·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는 대부분 누락돼 있다.

이와 관련, 임 교수는 “구국의 영웅 충무공이 점을 쳤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에게 누가 될 것으로 생각한 편찬자들의 기우 때문에 고의로 누락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윷놀이를 천시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윷이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라, 한 해의 풍흉을 점치던 우리 민족 고유의 점법이었음을 강조했다. 윷놀이가 고대 점술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지적은 일찍이 미국의 세계적인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1858~1929)이 1895년 발간한 저서 ‘한국의 놀이’에서 밝힌 바 있다. 임 교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점법이었던 윷점이 조선시대 유교문화 속에서 민중과 규방의 놀이로 축소된 상황에서 주역의 64괘를 우리 실정에 맞게 해석하고 이를 우리 고유점법인 윷에 적용해 개발해낸 것이 바로 윷점”이라고 설명했다.

 

윷가락 4개를 준비해 3번을 던지면 하나의 괘를 얻는 윷점은 중국의 주역점법이나 이를 간소화한 척전법(擲錢法) 등과 비교해 훨씬 간편한 것이 특징이다.사실 그동안 대다수 학자나 연구자들은 충무공이 쳤다는 척자점을 단순히 글자를 던져서 점을 치는 것으로 이해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충무공이 친 척자점이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의 ‘점찰업보선악경(占察業報善惡經)’ 또는 중국의 유명한 도사인 여순양(呂純陽)의 점법인 ‘여순양비결(呂純陽秘訣)’이란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 방방곡곡 고서점을 돌아다니며 윷자료를 수집해온 임 교수는 최근 발굴한 ‘육십사괘상례’의 점사가 ‘난중일기’에 나오는 척자점사와 가장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14개의 점사 가운데 2번 나온 점사 2개를 빼면 총 12개의 점사가 수록돼 있는 셈이다. 임 교수의 비교분석 결과 ‘육십사괘상례’와 ‘난중일기’ 점사는 정확히 10개가 일치하고 2개가 유사해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등 지금까지 비교대상으로 거론된 윷점의 점사가 실린 책 가운데 가장 이순신 장군이 본 원본에 가까운 점서로 추정됐다.

 

‘육십사괘상례’는 괘(卦)와 괘명(卦名), 괘의(卦義), 점사(占辭), 괘상(卦象)을 간략하게 적고, 그 아래에 ‘시(詩)’와 ‘논(論)’의 체제로 구성돼 있다. 오언절구·칠언절구로 점사를 풀이한 ‘시’에 이어 ‘논’에서는 임신·혼인·송사·여행 등 조선시대 절실했던 생활상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점사도 ‘승려가 환속하다’ ‘가난한 이가 보물을 얻었다’는 식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우리의 문화와 정서가 담겨있는 것이 특징이다.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임 교수의 연구는 현존 판본 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본 윷점서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책을 발굴한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며 “이순신 장군이 진중에서 척자점을 친 것은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 정보가 극히 제한됐던 당시 전선에서 수군 최고 지휘관으로서의 외로움과 고뇌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척자점을 분석한 논문을 오는 29일 경북 경산시 대학로 영남대에서 열리는 국제주역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최영창 기자

 

/ 문화일보 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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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올린 "논문"과 "경도잡지"는 아래 주소에 있습니다.

 

유득공『경도잡지』윷점의 易哲學的 해석 /  임채우

http://blog.daum.net/windada11/8765483

 

경도잡지 京都雜志 / 유득공(柳得恭)

http://blog.daum.net/windada11/8764000

 

 

 

위 기사 내용중 '곤지건괘를 얻었다' 는 내용과 '초씨역림'의 괘사 내용이 있다.

초씨역림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맞다. 그런데 곤지건이 아니라 수산건(水山蹇)이래야 맞다.

서애집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焦氏易林注) 47. 困之第四十七

39.  蹇 / ?子射御,不知所定,質疑蓍龜,孰知所避。國安土樂,宜利止居,兵寇不至,民無搔擾。

 : 蓍所以筮,龜所以卜

 

39.水山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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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4.26 04:28

    첫댓글 너무나 귀한 자료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15.04.27 22:07

    귀한 말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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