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2007의 의미는 남다르다. 독립영화전용관-인디스페이스(중앙시네마)에서 열리는 첫 영화제일 뿐 아니라, 다른 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는 가능하다.' 22일 개막하는 서울독립영화제2007의 슬로건이다. 무엇이 다른가? 그들에게 비주류의 딱지를 붙인 주류영화들과 다르다. 독립영화는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로운 영화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도권 영화와 비교돼 ‘재미없고 낯선 영화’로 낙인찍혔다. 열악한 제작환경과 취약한 배급구조는 이러한 편견을 더욱 공고히 했다.
서울독립영화제2007은 이런 편견을 불식하고 '다른 영화'라는 선언을 증명하려 한다. 600편에 가까운 출품작 중 옥석을 가려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개막작 <오월상생>(전승일)을 포함, 51편의 본선 진출작과 25편의 국내 초청작, 8편의 해외 초청작이 상영된다. 예선심사위원들과 사무국은 “예년에 비해 편수도 증가했지만, 작품의 경향과 질적 완성도 역시 상당한 수준”이라고 귀띔했다. 2007년 독립영화의 공과를 결산하는 영화들, 그들이 선택한 ‘다른 영화’의 정체를 탐문한다.
구겨진 일상을 담는 카메라
서울독립영화제2007 출품작들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증가 등 노동조건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의 모습을 다각도로 비추는 독립영화의 역할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사회적 이슈를 그린 영화라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버리는 게 좋다.
새끼 여우 Ordinary People 이유림|2007|HD|컬러|28분| 단편경쟁3
<새끼 여우>는 정리해고를 경험한 한 노동자의 이야기다. 종모는 정리해고 2년 만에 복직 통보를 받지만 3천 명의 노동자가 해고된 가운데 단 3백 명만 복직된다는 사실은 그에게 죄책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2년 동안 무기력한 삶을 살며, 부인과 자식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종모는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한 채 회사로 들어간다. <새끼 여우>는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노동자의 내적 고민을 그린다. 회사에 돌아가는 길, ‘세상은 쓰레기’라고 외치는 종모의 모습은 명분조차 사치가 돼버린 노동자의 현실을 직시한다.
00씨의 하루 A Day with Mr.00 박정훈|2007|HD|컬러|34분|단편경쟁3
<00씨의 하루>는 노동자의 일상을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영등포 금속가공업체에서 근무하는 문씨는 고된 일이지만 동료들과 작업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낀다. 그 와중에 전날 철야작업을 한 허씨가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문씨는 태연한 척 웃고 있는 허씨를 쓸쓸히 바라본다. <00씨의 하루>는 수많은 무명 노동자가 겪는 고단한 하루를 그리지만,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절망에서 구원한다. <소림축구>를 연상케 하는 족구 장면은 에너지가 넘치며, 서로 술잔을 건네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따뜻하다.
회색도시 The Gray City 구자환|2007|다큐멘터리|DV|컬러|95분 55초|장편경쟁1
<회색도시>는 경북 포항지역 전문건설노조원들이 포스코 본사를 점거한 사건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정부와 언론은 노동자들의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강경 대응했다. <회색도시>는 포스코 본사 점거를 전후로 노동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준다. 다단계 하도급으로 열악해지는 노동조건과 비정규직으로 언제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들의 목을 옥죈다. 투쟁의 현장에서 유명을 달리한 하중근 열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오열하는 가족, 동료들,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전장에서 나는 Battlefield Calling 공미연|2007|다큐멘터리|DV|컬러|87분 50초ㅣ장편경쟁5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지만 전쟁은 늘 있었다. 한반도에 미사일과 대포가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한국은 지금 전쟁을 겪고 있다. 영화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이라크를 다녀온 파병군인들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전쟁을 경험한 이들이 밝히는 이야기는 서로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중첩되는 가운데 한국사회가 바로 ‘전장’임을 밝힌다.
성적으로 치명적인
다양한 취양이 존중되는 분위기라고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는 여전히 침묵을 강요받는 존재다. 다양한 관점으로 성적 소수자를 바라본 작품들을 올해도 만날 수 있다.
올드랭 사인 Auld Lang Syne 소준문|2007|HD|컬러|24분 40초|단편경쟁3
두 노인의 사랑을 그린 <올드랭 사인>은 한 편의 아름다운 멜로영화다. 창식은 종묘공원에서 젊은 시절 동성 커플이었던 성태를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성태에게 말을 걸지만, 성태는 경직된 반응을 보인다. 잠시 후 모텔에 들어간 창식과 성태는 과거의 기억을 하나둘 꺼내며,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 <올드랭 사인>의 최대 매력은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감독의 연출력이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에게 망가진 몸매를 보이지 않으려는 성태, 성태의 더러운 옷을 말없이 빨아주는 창식 등 서로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 김길호(창식), 이태훈(성태)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목욕 The bath 이미랑|2007|35mm|컬러|19분 50초|단편경쟁1
성전환 수술로 여성이 된 동생과 언니가 함께 목욕탕을 찾는 이야기. 대중목욕탕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하지만, 백 마디 말보다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동생을 배려하는 언니의 행동은 사회적 시선에서 동생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지만, 오누이가 아닌 자매로서 관계를 시작하는 첫 걸음이다. 목욕탕을 다녀 온 자매에게 눈을 흘기며 부러운 시선을 전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귀엽다.
언/고잉 홈 Un/gong home 김영란|2007|다큐멘터리|DV|컬러|34분 23초|단편경쟁7
<언/고잉 홈>은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다. 어렸을 때 벨기에로 입양된 혜진은 트랜스젠더가 돼 한국을 찾는다.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성적 소수자들 안에서도 차별은 존재하며, 성노동자인 자신도 차별받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유머가 필요해’라고 말하며 잘 웃던 혜진이 심각한 모습으로 ‘이젠 지쳤어’라고 토로하는 장면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절감하게 한다.
영화, 영화를 찍다
‘영화 속 영화’를 다룬 영화들은 올해 서울독립영화제2007의 큰 특징 중 하나다. 그 어느 해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른 영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년 감독 BOY DIRECTOR 이우열 | 2007 | 35mm |컬러 | 87분 | 장편초청7
<소년 감독>은 강원도 산골마을에 사는 소년 상구가 아버지의 유품인 8mm 카메라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카메라에 비친 세상이 신기한 상구는 아버지가 마을 공동집하장에 그린 벽화를 찍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필름 살 돈도 없고, 어떻게 찍는지도 모른다. 집하장이 곧 허물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상구는 민희에게 러시아인 어머니를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진돗개 병태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소년 감독>은 ‘노을골’의 수려한 전경, 김상호, 윤제문, 최여진 등 화려한 출연진, 아역배우들과 진돗개 병태의 호연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특히 상구와 병태의 이별 장면은 영화제 최고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애잔하면서도 아름답다.
열정 가득한 이들 Passionate People 유승조|2007|HD|컬러|16분|단편경쟁9
영화와 미디어에 대해 직설적인 비판을 가하는 작품. 장애인 종수가 영화 주인공을 연기하고 있는 촬영현장, 한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자신이 촬영할 순서라고 끼어든다. 영화감독과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서로 먼저 촬영하겠다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종수는 짐짝 취급을 받는다. 촬영에 들어가고 종수가 곤경에 처한 장면에서 감독과 프로듀서는 ‘좋은 그림’이 나왔다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유승조 감독은 “미디어는 아직도 장애인을 상품으로 여긴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과 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영화”라고 말한다. ‘영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아스라이 Dimmer 김삼력|2007|HD|컬러|85분|장편경쟁2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아스라이>는 ‘왜 영화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상석은 후배의 제안으로 영화제작자가 된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상영해달라고 찾아간 극장에서 본 정윤철 감독의 단편영화 <기념촬영>은 그를 영화로 인도한다. 하지만 상석의 길은 순탄치 않다. 열악한 제작환경으로 생활고를 겪고, 연인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민스러운 것은 재능에 대한 회의다. 영화가 끝나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감독의 고민은 계속된다.
나의 노래는 My Song Is... 안슬기|2007|35mm|컬러|80분|장편경쟁3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던 희철이 동갑내기 대학생 연주와 상우가 준비하는 단편영화에 출연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을 그린 <나의 노래는>은 스무 살을 지내왔던, 혹은 스무 살을 앞둔 모두가 겪는 성장통을 보여준다. 교편을 잡고 있는 안슬기 감독은 “이 영화는 내가 가르친 아이들에 대한 애정 표현”이라며 젊은 세대는 물론 영화제를 찾을 모든 관객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독립영화가 음악을 만났을 때
영화에서 음악의 의미, 그리고 음악을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즐거움 이상이다. 독립영화가 음악을 다룰 때 그 의미는 더욱 특별하다. 음악을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는 독립영화는 음악이 갖는 기운을 다양한 방식으로 북돋운다.
소리아이 Lineage of the Voice 백연아|2007|다큐멘터리|HD|컬러|102분|장편경쟁8
영화의 두 주인공 소년은 판소리를 하면서 절대적 존재인 아버지에게 기댄다. 소년들에게 ‘소리’란 아버지와의 유일한 연대감인 동시에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의 방패막이다. 아버지들에게 소리란, 꿈이 아닐지도 모른 것을 끝끝내 부여잡기 위해 아들에게 투사시켜야만 하는 무언가다. <소리아이>는 ‘소리’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소년의 삶의 가감 없는 기록이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건 아버지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판소리. 두 소년이 갈등하는 동안 카메라는 이들 곁에서 소중한 변화의 순간들을 담는다.
필승必勝 Ver 2.0 연영석 To the bitter end Ver 2.0 Yeon, Youngseok 태준식 | 2007 | 다큐멘터리 | HD | 컬러 | 88분 | 장편초청3
노동자이자 가수인 연영석에게 음악이란 노동자들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정의하는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간극은 크다. 음악은 그들의 고단함을 단숨에 위로할 수도 없고, 또 언젠가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던 노동자도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낼 뿐이다. 모순에 찬 현실 속에서 다시 승리를 갈구하고 성찰하는 연영석이 합주실과 옥탑방을 오가며 토해내는 음악은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승리는 무엇인지를 짚어간다.
직장인 밴드 Worker's band 이장섭 | 2006 | 다큐멘터리 | DV |컬러 | 75분 | 장편초청9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이 밴드를 만들고 그 음악을 통해 자신들의 부당한 대우를 웅변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궐기와 투쟁을 위해 나아갈 것만 같았던 그들의 음악은 홍대클럽 무대와 마주하게 되면서 잠시나마 ‘즐거운 음악’으로 치환된다. 부조리한 현실조차 흥겨운 음악이 자리하면서 건강한 웃음을 얻게 된 것이다. 결국 강제추방이라는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에서 꿈꾸던 모든 것들은 저버리고 말지만, 그러하기에 그 빈자리를 채우는 음악은 더욱 반짝인다.
오월상생 Memory of May 전승일 | 2007 |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DV | 흑백, 컬러| 26분| 개막작
서울독립영화제2007 개막작으로 선정된 <오월상생>은 80년대 민중가요 5곡을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로 구성했다. 각각의 뮤직비디오는 5.18이 간직한 슬픔과 희생, 저항정신과 공동체 의식 등의 메시지를 묵직하게 품고 있다. 투쟁의 의미로 각인된 5.18의 기억을 애잔하게 상기시키는 영화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무거운 사명감을 민중가요의 벅찬 음률로 뒷받침한다. 개막작으로서 뜨거운 포부와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는 작품.
해외에서 온 독립영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특별전
2004년 중국의 지아장커, 2005년 일본의 아오야마 신지, 2006년 싱가포르 에릭 쿠의 작품을 초청했던 서울독립영화제가 선택한 올해의 초청작은 태국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작품이다.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인 <정오의 낯선 물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열대병> 등 장편 4편과 단편 4편을 포함한 총 8편의 영화가 공개된다.
아핏차퐁이 추구하는 작품세계는 한 마디로 극단적인 실험이다. 그가 태국영화의 무서운 아이로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반적인 내러티브보다 몇 발짝은 앞서가는 독창적인 형식과 낯선 이미지 때문이다. 아핏차퐁의 색깔을 확연히 읽어낼 수 있는 장편 데뷔작 <정오의 낯선 물체>는 준비된 시나리오 없이 태국에 살고 있는 여러 인간 군상들의 삶을 픽션과 다큐멘터리, 또 일부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자유로이 담고 있다. <열대병>은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병치시키고 여기에 현실과 신화를 뒤섞으면서 새로운 시선을 마련하려 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영화형식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면 한국의 독립영화인들과 관객 모두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서 온 독립영화 수상작 회고전
독립영화의 기반이 두터워졌다지만 고작 몇 년 전 작품도 보기 힘든 실상을 돌이켜보면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아 보인다. 역대 수상작 회고전은 과거 작품과 단절되다시피 한 지금의 관객들에게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려 한다.
총 21편(장편 5편, 중단편 16편)으로 구성된 이번 회고전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독립영화 중 주류영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감독과 꾸준히 독립영화계에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는 감독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다. 1999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새로운 도전 부문 최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류승완 감독(<아라한 장풍대작전> <짝패>)의 <현대인>, 2003년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공동수상한 원신연 감독(<구타유발자들> <세븐데이즈>)의 <빵과 우유>, 2001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이송희일 감독(<후회하지 않아>)의 <굿 로맨스> 등 최근에는 좀처럼 접할 수 없었던 과거 독립영화 걸작들이 대거 포진됐다. 형식도 단편영화에서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실험영화에 이르는 너른 영역을 아우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