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 제4대 광종실록 [光宗實錄]
◯ 고려 제4대왕 광종실록(光宗實錄)
광종(925~975년)의 과감한 개혁 작업과 호족들의 수난 (재위기간: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고려는 광종(光宗)의 즉위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광종은 정종과 달리 집권 초기에는 무리한 정책을 삼가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한동안의 모색기를 거친 다음에는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일관한다.
개혁의 초점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광종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당연히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광종 집권기는 왕과 호족들간의 힘 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광종은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며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이다.
925년 태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949년 3월 동복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경·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이복형 혜종 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서경 세력과 혜종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였다.
이는 혜종이 서경 세력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광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보낸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이처럼 광종은 정종 과는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최승로의 평에서도 나타나듯 정종이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품인데 반해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담한 성격이었다.
최승로는 그가 특이한 풍채와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 태조로부터 남 다른 사랑을 받았다고 쓰고 있는데,
이 같은 평가는 곧 광종의 자질과 풍모가 비범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독특한 기질은 치세에서도 잘 드러난다.
광종의 치세는 정확하게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그 첫 번째 시기는 모색기로 즉위 이후 7년간이 이에 해당하고,
두 번째 시기는 왕권강화기로 7년에서 11년까지이고,
세 번째 시기는 호족 숙청기로 그 이후부터 집권 말기까지이다.
최승로는 이 세 시기 중에서 첫 번째 7년 동안의 정국을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하·은·주 삼대와 견줄 만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최승로의 평에서 알수 있듯이 광종 즉위 후 7년 동안은 별다른 정치적 혼란은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광종은 특별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지도 않았고, 호족들과의 마찰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 기간에는 태조 왕건이 일궈놓은 호족연합체적 성격을 띤 지방자치제가 원활하게 운영되었던 것이다.
가장 유력간 호족인 충주 유씨와 평산 박씨 세력은 광종의 후견 세력이었고,
청주 김씨 역시 정종시대 이후 중앙정부에 호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은 호족들에 비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왕은 오히려 상징적인 존재로 머물렀을 뿐이고 국정 전반을 운영하는 주체는 이들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은 무려 7년 동안이나 이런 정국을 무던히 지켜보며 왕권을 강화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국내의 정국 주도권을 호족에게 내주고 조용히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갔다.
그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정치적 능력을 기르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당나라 태종이 자신의 신하들과 정치 토론을 벌인 내용을 기록한『정관정요(貞觀政要)』를 숙독하였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왕들의 치세 교과서 구실을 했는데,
광종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왕이 나아가야 할 행동 방향을 세우고
정책 입안 및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광종의 또 하나의 관심거리는 고려의 대외 위상을 높이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그는 950년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하였다.
이 때 고려가 독자작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중국 대륙에 확실한 맹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혼란기를 거듭하며 ‘5대 시대’를 일고 있었는데,
고려 건국 후부터 후량, 후당, 후진, 후한 등의 나라가 적게는
3년에서 길게는 20년 동안의 짧은 왕조를 세웠다가 사라졌다.
중국 대륙의 정세가 이처럼 급박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고려는 시기마다 외교에 유리한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태조 대에는 후량, 후당, 후진 등의 연호를 차례로 사용했고,
혜종 대에는 후진의 연호를, 정종 대에는 후한의 연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광종이 즉위 할 무렵에는 후한이 건국한 지 3년 만에 몰락하고 후주가 새로이 일어서고 있었다.
이런 형국에서 마땅히 사용할 연호가 없었던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할 수 있었다.
하지만 951년 후주가 중원의 맹주로 부상하자 고려는 그 해 12월부터 다시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려가 후주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외교적 경로를 이용해 여진과 거란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거란은 호시탐탐 고려 침략을 노리고 있었는데,
고려는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원의 한족들과 돈독한 외교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채택하지 않고 중원 국가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국가의 안정을 위한 실리적인
조치였다는 뜻이다.
광종은 정치적 역량과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는 것 이외에도 민심 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심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종의 서경 천도 추진과정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그는 민심을 얻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광종의 민심 안정책은 불교진흥을 통해 추진되었다.
951년에 대봉은사를 개성 남쪽에 세워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불일사를 동쪽에 세워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원당으로 하였다.
또한 954년에는 신명순성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하였으며,
화엄종 승려 균여와 교분을 갖고 그의 ‘성상융회 (性相融會)’ 사상을 받아들인다.
성상융회 사상이란 일종이 불교종의 융합정책이다.
당시 불교는 교종이 융성했는데, 교종 내에서도 성종(性宗)과 상종(相宗)이 있었다.
성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화엄종이었고, 상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법상종이었다.
이 두 종단의 특징은 이질 집단을 통합할 수 있는 융회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균여는 바로 이 원리를 통하여 민심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고 보았고, 광종이 이에 동조했다.
근본적으로 보면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은 화엄종과 법상종을 하나의 사상으로 이끌어내자는 논리였다.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을 신봉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개 중소호족이나 평민들이었는데,
대호족을 경계하던 광종은 중소호족의 힘을 키울 요량으로 이 두 종파의 융회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 결과 광종 4년(953년)에는 화엄종 승려 겸신이 국사로 봉해지기도 한다.
광종의 이 같은 화엄종, 법상종 융회정책은 곧 중소호족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반대로 대부호들의 불교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광종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토대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대 구축이 완성되자 그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급진적인 개혁 작업에 돌입한다.
비로소 모색기를 끝내고 왕권강화기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개혁 작업은 953년 후주의 본격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된 이후부터 암암리에 시도된다.
이 때 후주로부터 고려 국왕으로 공인된 광종은
955년에 후주의 태조 곽위에 이어 제2대 왕에 오른 세종에게 귀화인 왕융을 보내 토산물을 선물하고
후주의 정국에 대해 소상하게 전해 듣는다.
그리고 후주의 상황이 고려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대리평사를 지낸 ‘쌍기’를 고려로 끌어들인다.
‘쌍기’는 후주의 왕명을 받고 사신으로 내왕한 설문우의 일행으로 고려에 왔다.
이 때 광종은 ‘쌍기’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의 사상과 지식에 감흥 하여 후주의 세종에게 ‘쌍기’를 자신의 신하로 줄 것을 요청해 응낙 받는다.
‘쌍기’는 후주 태조의 왕권강화 작업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후주에서 이뤄졌던 일련의 사회개혁을 고려에서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쌍기’의 이러한 고려 개혁론은 광종을 흥분시켰다.
광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왕권강화책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정책을 수행해줄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한 터였다.
‘쌍기’를 고려 조정으로 끌어들인 광종은 곧바로 과감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개혁 작업은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됐는데,
첫째는 호족의 경제력을 원칙적으로 약화시킬 목적으로 노비안건법(奴婢安檢法)을 마련했고,
두 번째는 조정 내에서 호족의 전횡을 막을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했다.
이 두 제도의 실시는 고려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노비안검법이 실시됨으로써 대호족들은 경제 기반인 노비의 상당수를 잃었고,
과거제 실시로 신진 관료들에게 관직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956년에 실시된 노비안검법은
노비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종의 노비 해방 법이다.
당시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의 상당수는 고려 통일전쟁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힌 양인이거나
대호족의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로서 대호족들의 경제적·무력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노비안검법으로 많은 노비들이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대호족들의 경제적·무력적 기반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호족들은 노비안검법 실시에 거세게 반발했다.
심지어는 광종의 비 대목왕후까지 이 일에 나섰다.
하지만 광종은 대목왕후의 간언까지 뿌리치며 이 법을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노비안검법 실시로 호족의 힘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자
광종은 또 다시 958년 ‘과거제 도입’이라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과거제 도입은 호족들이 중심이 된 공신 세력에게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고려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전공을 세웠거나 무력을 제공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무인들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학문을 기반으로 하는 과거제 실시는 그들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제도적으로 막는 장치였던 셈이다.
또한 과거제 실시와 함께 960년에는 관료들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여 품계별로 옷을 달리 입게 함으로써
왕과 신하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관리의 상하를 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종의 이 같은 과감한 왕권강화 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호족 세력은
서로 힘을 합쳐 조직적으로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이에 광종은 근위병의 수를 늘리면서 호족들의 동향을 사리게 한다.
그러던 중 역모와 관련한 고변이 들어오자 광종은 호족에 대하여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감행한다.
이것이 광종 치세 제3기로 접어드는 계기이다.
호족 숙청의 시발점은 960년에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흥과 좌승 왕동을 역모혐의로 고변을 하면서 부터였다.
이 사건으로 대상 준흥, 좌승 왕동 등이 쫓겨나고 광종의 주변에 대한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광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마저도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처형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세자인 주(경종)를 의심할 정도로 역모에 민감해진다.
이때의 상황을 최승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경신년(960년, 광종 11년)에서 을해년(975년, 광종 26년)까지의 16년간은
간악한 자들이 다투어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몸 둘 곳이 없고 소인만이 제 뜻대로 한다.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옛 신하들과 이름난 장수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골육이나 인척도 모두 멸하였다.
하물며 혜종이 능히 형제를 보존한 일과 정종이 능히 나라와 가문을 보존한 일은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중하다고 이를수있는데,
두 왕 모두 하나뿐인 아들마저도 그 생명마저 보전치 못하게 하였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꺼렸다.
그런 까닭에 경종은 태자로 있을 때 항상 불안에 떨다가 다행스럽게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 어찌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 뒤에 잘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최승로의 글에서처럼 집권 후반기의 광종은 그야말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면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고 숙청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호족들은 역도로 몰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고, 한편으론 광종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켰다.
광종의 후반기에는 중국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후주가 몰락하고 송이 일어나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고,
광종은 이 같은 중국의 혼란이 계속되자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
960년(광종 11년)부터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
또한 개경을 황도(皇都)로, 서경을 서도(石)로 개칭하여 황제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다가 송이 후주를 무너뜨린 후 안정을 찾고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자
963년 12월부터 송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고려가 이처럼 몇 번에 걸쳐 연호를 변경한 것은 대외관계에 밝고 외교적 대응이 기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주가 몰락해가는 상황에서 굳이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여
새로운 세력을 형성한 송을 적으로 둘 이유가 없다는 판단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택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경을 황도로 칭하면서 고려가 중국의 주변국이 아니라
황제가 거하는 중심 국가임을 만방에 알리려고 하였다.
광종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과거제를 통하여 신진 세력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문화적으로도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이외에 국방 분야에서도 광종의 치적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진족이 머물고 있던 동북면과 서북면 방면으로 군사력을 집중시켜 영토를 넓혔으며,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제를 정비하고 병력을 증강시켰다.
하지만 그는 개혁 과정에서 중국에서 귀화해온 세력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실어주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으며,
역모에 대한 경계가 너무 심해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 광종의 가족들
광종의 후비는 대목왕후 황보씨와 경화궁부인 임씨 두 사람뿐이다.
두 사람 중 경화궁부인 임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대목왕후 황보씨는 경종을 비롯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이들 중 대목왕후 황보씨와 경화궁부인 임씨만을 별도로 언급하고 경종은「경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경종의 동생 효화태자는 후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인다.
세 공주중에서 첫째는 천추전군에게 시집간 것으로 되어 있어 천추전부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둘째는 보화궁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왕족 중 한 명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이며,
셋째는 성종의 왕비 문덕왕후 유씨이기 때문에「성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 대목왕후 황보씨(생몰년 미상)
대목왕후 황보씨는 태조의 딸로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이다.
그녀의 성씨 황보는 어머니 쪽을 따른 것이다.
이는 당시 여성들이 외가의 성을 따르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대목왕후의 딸이자 성종의 부인인 문덕왕후는 유(劉)씨 성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광종의 외가 성을 따른 것이다.
즉 당시 여자들은 친정의 성을 따르기도 했고, 아버지의 외가쪽 성을 따르기도 했다는 뜻이 된다.
혜종이 열 살에 혼인한 것을 볼 때 당시 왕실에서 조혼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광종이 황보씨와 결혼할 수 있는 시기는 열 살이 되는 934년 이후면 된다.
하지만 광종의 형 정종이 936년에 박영규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후에 대목왕후와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이 족내혼임을 감안할 때 분명한 것은 태조 집건 당시에 혼사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광종과 대목왕후의 결혼은 937년 이후부터 943년 이전에 이뤄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광종의 결혼이 특이한 것은 왕들 중에 첫 번째 족내혼이란 사실이다.
혜종이나 정종은 족외혼을 했는데, 어떻게 광종은 족내혼을 했을까?
이것은 고려 왕실 계보를 추적하다가 제일 먼저 부닥치는 의문이다.
그런데 광종의 형제들 중에 유독 광종만이 족내혼을 했다면 이는 아주 이상 할 것이다.
하지만 대목왕후의 동복 남동생인 대종 왕욱도 족내혼을 했다. 또한 광종의 동복 동생 문원대왕 정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볼 때 광종의 족내혼은 특이한 사실은 아니다. 오히려 혜종이나 정종이 족외혼을 해야만 했던 것이 특이한 일이다.
태조가 자식들을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신라 왕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왕실의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만약 왕이 족외혼을 했을 경우 왕권이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종과 정종의 배필을 자신의 딸들 중에서 택하지 못한 것은 바로 태조의 왕권이
그만큼 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혜종과 정종은 모두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호족들이 그들의 족내혼을 반대했던 것이다.
태조 자신이 호족들과의 제휴를 위하여 정략결혼을 한 것처럼
혜종과 정종의 결혼도 그런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실 호족들은 광종이 왕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광종 이하 자식들을 대부분 족내혼 시켰다.
어쩌면 태조는 족내혼을 한 그들 중에 왕이 나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족내혼은 곧 왕실의 안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족내혼을 했지만 대목왕후의 배후에는 황주 황보씨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친가 쪽보다는 외가쪽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목왕후는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노비안검법은 곧 그녀의 외가와도 무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광종은 그녀의 말을 무시해버린다.
그녀의 외가 역시 광종의 눈에는 제거해야 할 호족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 소생으로는 경종을 비롯하여 효화태자,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문덕왕후 등 2남 3녀가 있다.
사망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며, 광종과 함께 헌릉에 합장된 것으로 보인다.
● 경화궁부인 임씨(생몰년 미상)
경화궁부인 임씨는 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장녀이다.
그녀 역시 어머니 성씨인 임씨를 따랐으며, 944년(혜종 2년)에 광종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결혼은 일종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졌다.
당시 혜종은 왕규로부터 왕요(정종), 왕소(광종) 형제가 모반을 계획하고 있다는 고변을 듣고
화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되레 자신의 딸을 이복 동생 왕소에게 시집보낸다.
따라서 임씨는 삼촌에게 시집을 간 셈인데,
당시 고려 사회에서는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녀의 생몰연대와 무덤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
광종은 집권 후 7년 동안을 정치적 기반 조성을 위한 모색기로 보낸다.
이 기간 동안 그는『정관정요』등의 책을 통해 정치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한편,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에 있어 안정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설정한다.
또한 불교의 융성을 통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을 기반으로
대호족들의 불교적 기반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정국 안정책은 개혁을 위한 일종의 ‘터다지기’차원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터다지기’가 일정 궤도에 오르자 그는 새로운 정치적 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대대적인 사회·제도적 개혁을 통하여 호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켜
고려를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광종의 정치개혁에 대한 욕망을 뒷받침하고 현실화시킨 사람은 쌍기였다.
후주의 관료 출신인 그는 광종에게
고려 사회 전체가 일시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해주었다.
쌍기의 등용 이후 광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개혁 작업을 추진하였다.
첫째는 대호족들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실시된 정책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였다.
그리고 노비안 검법과 과거제가 성공적으로 실시된 후
광종은 백관의 관복을 제정하여 왕의 위엄을 되살리고, 신하들 간의 서열 관계를 분명히 한다.
● 노비안검법과 개혁바람
노비안검법이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원래 양인이었던 사람을 노비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종의 노비해방법이다.
광종 7년(956년)에 실시된 이 법은 당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지만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호족들은
이의 시행을 막기 위해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노비안검법에 대한 호족들의 저항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족들에게 노비는 곧 경제력의 상징이자 힘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족들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광종을 압박하였고,
심지어는 선대왕들의 처족들은 물론이고 광종의 왕후인 대목왕후까지 이 일에 가세하였다.
하지만 광종은 결코 의지를 꺾지 않았다.
32세의 혈기 왕성한 그는 왕권 확립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비안검법의 실시는 미룰 수 없는 대과제였다.
노비의 역사와 그들의 이용 현황을 살펴보면 광종이 이처럼 노비의 수를 대폭 줄이려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노비제도의 역사는 매우 길다. 노비가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부터였는지 분명치 않지만
적어도 고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의 ‘팔조금법’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20년경에는 중국인 1천 5백 명이 벌목하러 왔다가 잡혀서 노비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전쟁포로나 범법자, 채무자, 극빈자 등이 노비가 되었다.
삼국 간의 항쟁이 치열했던 이 기간에는 특히 전쟁포로가 주된 노비 공급원이었다.
이들 노비는 주로 국가기관에 배속되거나 참전하여 공을 세운 장수에게 분배되었다.
이에 따라 노비는 국가기관에 예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로 분류되었다.
고려시대의 노비도 삼국시대와 다름없이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으며,
통일신라 말기의 어수선함 때문에 고려 초에는 공노비는 대폭 줄고 사노비가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고려 건국의 핵심 세력인 지방 호족들은 전쟁에서 세운 공이나 건국에 힘을 보탠 공로로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이들 노비들은 대개 전쟁에서 포로로 자빈 사람들이거나, 채무자나 극빈자들이었다.
호족들은 이들을 농가 및 가사에 동원하였으며, 때론 사병(私兵)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던 대호족들은 천 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노비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던 까닭에 노비의 증가는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호족들은 사노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장정 노비와 양인 여자의 결혼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는 양천교혼(양인과 천민이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그 자녀들은 노비로 전락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성 노비와 양인 여자를 결혼시키면 노비의 숫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노린 고려 초의 호족들은 고의적으로 양천교혼을 강요하여 노비의 수를 늘렸고,
이는 곧 양인의 숫자를 현격하게 줄임으로써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노비는 호족들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사노비의 증가는 반란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 집권적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광종에게는
사노비의 수를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노비안검법은 노비의 증가에 의해 발생하는 이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이와 비슷한 정책이 태조 대에도 마련된 적이 있었지만 호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중도에 정책을 변경해야만 했다.
이는 태조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광종은 달랐다.
광종은 이미 7년 동안의 민심 안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호족들과 싸울만한 정치적 기반도 마련했기 때문이다.
956년 왕명으로 노비안검법이 공포되자 고려의 통일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이 모두 양인으로 회복되었다.
노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노비 스스로가 자신이 과거에 양인 신분이었다는 것을 관아에 신고하기만 하면
바로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양인으로 회복하는 길이 간단하였던 만큼
삼국시대부터 노비로 살아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노비에서 해방되어 양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대호족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공신전(功臣田)을 경작하는 대가로 노비로부터 받던 세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고,
사병의 수도 격감하였다.
호족의 입지가 약해진 반면, 국가는 세금이 늘어나고 병졸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결과적으로 왕권이 신장되어 중앙 집권적 체제 확립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일종의 노비 해방법인 노비안검법의 공포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노비뿐만 아니라 노비와 같은 처지에 있던 극빈한 양인들 역시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고,
신진관료나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대호족들만이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시대적 대세와 광종의 강력한 의지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물론 노비안건법의 시행이 가져온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노비로 있던 자가 자신의 옛 주인을 헐뜯고 욕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도 잇따라 터졌고,
노비와 양인 계층의 이반으로 신분질서가 문란해져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일부 발생했다.
또한 광종 근위 세력과 호족 세력 간의 충돌로 인해 정계의 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노비 안검법이 가져다 준 국가적 이익에 비하면
개혁의 과도기에 흔히 따르는 ‘옥에 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옥에 티’를 빌미로 호족들은 노비안검법 철폐를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경종 대에 다시 비대해진 그들의 힘에 밀려
제6대 왕 성종은 노비 안검법에 따라 양인으로 회복된 대부분의 사람들을 노비로 환천시키고 만다.
● 쌍기의 등용과 과거제
노비안검법이 시행된 지 2년 만에 또 하나의 개혁정책을 공포한다.
두 번째 개혁정책은 ‘과거제’ 실시였다.
노비안검법이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과거제는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정치구조 개혁안이었다.
즉, 고려 건국 이후 호족 중심의 공신들에 의해 주도된 조정에 과거를 거친 신진 관료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중앙 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려는 혁명적 시도였던 것이다.
과거제는 쌍기의 건의로 이뤄진다.
쌍기는 후주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후주의 태조 치하에서
절도순관, 장사랑, 시(試)대리평사 등을 지냈다.
시대리평사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이기 때문에 쌍기는 과거제도에 관한 지식이 많은 인물이었다.
특히 당시 후주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고려가 처해 있는 입장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후주의 태조는 제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과거제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했고, 그 결과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쌍기는 그 개혁과정에서 과거에 관한 실무를 맡았던 인물이다.
광종은 후주의 개혁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도 후주를 모범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개혁을 추진할 인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후주의 2대 왕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고려가 951년부터 후주 연호를 사용하자 후주측은 1차로 광종을 고려 국왕에 봉하는 책봉사를 보내왔고,
다시 2차로 검교태사로 봉하여 고려 백관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책봉사를 보내왔다.
당시 책봉사는 장작감 설문우였고, 쌍기는 그를 따라 함께 왔다.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온 경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광종 쪽에서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955년에 대상 왕륭이 주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아마 광종은 이 때 주나라의 인재를 초빙하라는 밀명을 내린 듯하다.
왕륭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종의 이러한 요구에 쉽게 순응했을 것이다.
고려에 당도한 쌍기는 얼마 후 병에 걸려 사신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기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은 미리 계획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와병을 핑계하여 환국하지 않고 있다가 사신 일행이 돌아간 다음에
광종과 대면 한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책봉사 일행이 돌아간 뒤에 쌍기는 병상에서 일어났고, 드디어 광종과 대면하게 된다.
쌍기를 만난 광종은 그의 개혁적인 성향과 뛰어난 식견에 감탄하여
후주의 세종에게 국서를 보내 쌍기를 고려의 신하로 삼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후주 사람 쌍기는 고려 조정에 전격 등용됐다.
묘하게도 쌍기가 등용된 956년(광종 7년)에 첫 번째 개혁안인 노비안검법이 공포된다.
노비안검법 마련에 쌍기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고려는 본격적으로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따라서 고려의 개혁 작업은 쌍기의 등용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쌍기는 등용 당시 전격적으로 원보의 관직에 오른다.
이 때문에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광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종은 오히려 그를 다시 한림학사로 승격시켜 학문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게 한다.
그리고 958년(광종 9년) 마침내 쌍기를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주관하는 관직)로 임명하고
시, 부(賦), 송(頌), 책(策)으로써 진사 갑과에 2명, 명경과에 3명, 복업(卜業) 과에 2명을 선발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역사상 가장 최초로 실시한 과거 시험이었으며,
최초로 진사 갑과에 합격한 사람은 최섬 외 1인 이었다.
이 때 실시한 과거는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한 것이다.
과거에는 문과에 제술(製述, 글 짓는 것)과 명경(明經, 유학경전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것)이 있었고,
그 외에 잡과로 의보(醫卜, 의학과 역학), 지리(음양풍수설), 율학, 서학, 산학,
삼례(三禮, 주례·의례·예기를 시험과목으로 하는 것),
삼전(三傳, 춘추의 주해서인 좌전·공양전·곡량전을 시험과목으로 하는 과거),
하론(何論, 제목으로 글을 짓는 일종은 논술)등이 있었다.
과거 응시자 중 이 과목들에서 등위에 든 자들에게 출신(出身,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주게 된다.
처음으로 과거가 실시된지 2년 뒤인 960년에 시, 부, 송만 가지고 다시 시험을 쳤고,
964년에 또 시, 부, 송 및 시무책을 가지고 시험을 쳤다.
이 때 특이한 것은 시무책을 삽입한 점인데,
이는 하론의 한 형태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론에 대해 기술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시무책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사실을 통해 개혁에 걸맞은 인사에 대한
광종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966년, 972년, 973년에도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았다.
광종은 과거제를 통하여 전국에 학교가 세워지고 학풍이 일어나 문치적 관료체제가 갖춰지길 원했는데,
계속된 과거 시험으로 고려 전국에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그의 뜻이 이뤄진다.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늘어나고,
충과 효를 최고의 행동 윤리로 생각하는 유교적 관료들이 조정을 주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학문적 바탕은 단순히 광종의 과거제 도입에 의해서 형성된 것만은 아니다.
신분적 제약이 많던 신라 시대에도 최치원 등의 6두품 관료들이 학문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신문왕이 국학을 설립하고(682년)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788년) 유학을 진작시켜놓았기에 가능하였던 일이다.
하지만 광종에 의해 과거제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시험에 의해서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는 쉽게 마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제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쌍기는 광종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더욱더 많은 중국인들을 귀화시켜 고려 조정으로 끌어들인다.
과거제가 실시된 이듬해인 059년에는 자신의 아버지 쌍철을 고려로 불러들였고,
광종은 쌍철을 좌승으로 임명하여 개혁 작업에 동참시킨다.
또한 쌍씨 부자가 고려의 실세로 떠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였고
광종은 그들 대부분을 관리로 임용하였다.
최승로는 이 일에 대하여 강력하게 광종을 비판하고 있다.
광종은 지나친 귀화인 임용으로 내국인이 설 자리를 잃었을 뿐 아니라,
귀화인과 내국인의 정권 대립이 가속화되는 바람에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광종이 귀화인들을 중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내국의 호족들과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런데 조정은 거의 그들에 의해 장악 당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호족들을 견제할 새로운 신하들이 필요했고,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중용한 나머지 광종은 내국 신하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내국 신하들은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지나친 대우에 반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서필’이었다.
후에 거란과 다만을 벌여 강동 6주를 찾아오는 서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광종의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광종이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자손들 대에서 집을 뺏길 바에야 미리 집을 바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이에 광종은 분노하지만 나중에는 ‘서필’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특별한 대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광종은 집건 내내 귀화인들을 위주로 정치를 펼쳤으며,
이에 호족들이 반발하자 가혹한 숙청작업을 벌여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광종의 공포정치는 그의 빛나는 업적인 과거제 실시마저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말았다.
“재주 없는 자가 부당하게 등용되고,
차례도 없이 벼슬에 뛰어 올라 1년이 못 되어 재상이 되곤 하였다.”는
최승로의 악평이 당시 호족들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공복(公服)의 제정과 절대왕권
과거제 실시 2년 후인 960년, 광종은 백관의 관복제도를 제정한다.
956년에 설문우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이미 후주의 세종이 공복을 중국식으로 정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관복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광종이 960년에 관복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의 일련의 개혁 정책으로 호족들의 힘이 많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시기엔 중국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조광윤이 송을 일으켜 맹위를 떨치는 반면 후주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959년에 후주의 시어로 있던 쌍철이 갑자기 고려로 내왕하여 고려 신하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맹주가 사라지고 혼란이 가속화되자 광종은 스스로 황제로 군림하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중원에만 황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에도 황제가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후 과거제를 도입하여 호족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궁극적인 목적도 거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959년에 광종은 후주의 쌍철과 일단의 귀화인들을 조정에 끌어들인 다음
이듬해 3월 지체 없이 관복제도를 확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호족들의 반발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족들은 광종에 대항할 만큼 힘이 강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의 관복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통일전쟁과 호족들의 영향력 증대로 서열에 따른 관복은 확정되지 못했다.
서열이 낮아도 부유하면 좋은 옷을 입었고, 서열이 높아도 가난하면 보잘것없는 옷을 걸쳐야 했다.
이는 서열에 관계없이 재정적으로 풍부한 자가 항상 우위에 있는 듯 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광종은 이처럼 무질서한 복장이 조정의 기강을 흩트리고 왕의 권위를 악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위에 따라 모든 공복의 색깔을 달리하게 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삼(자색 웃옷),
중단경 이상은 단삼(붉은색 웃옷),
도항경 이상은 비삼(진홍색 웃옷),
소주부 이상은 녹상(녹색 웃옷)을 착용토록 하였다.
관복을 네 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은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과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의 확립을 의미한다.
관복을 제정한 광종은 곧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개칭한다. 또한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한다.
이는 곧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중국의 황제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절대 권력자임을
모든 신하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호족들은 광종의 절대 권력에 도전하게 되고,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작업을 통한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권력과 대결해 나간다.
광종 집권 후반기의 많은 호족들의 죽음은 절대왕권을 유지하려는 광종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준다.
● 광종의 무자비한 공포정치와 숙청되는 호족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광종은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숙청하며 공포정치를 실시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960년(광종 11년) 권신의 역모에 대한 고변으로부터 광종의 공포정치는 시작됐다.
평농서사 권신은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참소했던 것이다.
당시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고 하고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하면서 스스로 황제의 위상을 갖추고자 하였다.
이는 곧 절대왕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대신들 중에는 광종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은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으로 중앙의 고급 관리였다.
준홍은 혜종 원년에 세워진 정토사의 법경대사 비문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충주의 호족이었다.
또한 왕동은 왕씨 성을 가진 것으로 보아 태조와의 가족관계를 맺은 공신의 후손일 것이다.
따라서 왕동과 준홍은 당시 조정의 핵심 인물로 볼 수 있다.
광종은 쌍기의 등용 이래 중국 남북조 출신의 귀화인이나 후주의 관료 출신들을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끌어들였다.
노비안검법 실히 이후 호족들은 광종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 때문에 광종은 귀화인들을 이용하여 호족들을 경계하며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과 개혁에 불만이 많았는데,
특히 대호족 출신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광종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선대왕의 처족이거나 광종의 외가였기 때문에 왕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광종의 개혁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라 호족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평농서사 권신의 고변은 바로 이 때 일어났다.
고변의 내용은 준홍과 왕동이 중심이 된 일단의 무리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조정은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에 대한 세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고려사』는 왕동과 준홍이 내쫓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모죄를 저지른 그들이 죽지 않고 쫓겨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편으론 이 사실이 왕동과 준호의 배후 세력이 막강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들은 쫓아낼 수는 있어도 죽일 수는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선대왕들의 처족 세력이자 호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모에 가담한 많은 관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관직에서 내쫓겼을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고려사』에도 왕동과 준홍을 비롯한 역모자들을 내쫓았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동, 준홍과 함께 쫓겨난 관료들은 광종의 개혁에 반기를 든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역모죄로 고변한 평농서사 권신은 과거제 도입 후 등용된 신진 세력일 것으로 보인다.
평농서사(評農書史)가 어떤 일을 하는 관료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명칭으로 봐서는 농업과 관련된 소임을 맡고 있는 관리일 것이다.
따라서 중앙의 고급관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조정의 권신들을 역모죄로 고변한 것으로 봐서는
광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일 공산이 크다.
따라서 왕동과 준홍의 역모에 대한 고변은 광종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일 가능성이 높다.
광종은 이 일로 대부분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집과 노비, 재산을 몰수하는 등 정적에 대한 가혹한 행위와 귀화인들에 대한 우대책으로 인해
호족들의 불만을 더욱 높아진다.
서필 등의 강직한 신하들과 조정에 남아 있던 일부 호족들은 광종의 지나친 처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종은 남아 있는 호족 세력을 완전히 조정에서 몰아낼 마음을 먹게 되고,
946년 여름 고려 조정은 또 다시 피 비린네에 휩싸인다.
태조 이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박수경 일가를 몰락시킨 사건이 그것이다.
박수경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태조의 충직한 부하였을 뿐 아니라 건국 이후에는 서경 세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의 가문은 황해도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평산 박씨를 대표하며 세 명의 후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왕식렴과 더불어 정종이 집권을 후원했고,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원한 공로도 있었다.
그런데 졸지에 철퇴를 맞은 것이다.
박수경의 아들이 한꺼번에 역모죄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모두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로, 큰아들 승위는 좌승,
셋째 승례는 대상의 위치에 올라 조정 내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세세한 내막은 알수 없지만
참소를 당해 죽은 것으로 봐서 역모죄로 몰린 것이 분명하다.
준홍, 왕동 등과 마찬가지로 박수경의 아들들 또한 광종의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고
광종에겐 그들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적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공신 박수경은 화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박수경 일가의 몰락 이후에도 죽음의 행진은 계속된다.
이제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어진 광종은 눈에 거슬리거나 반항의 조짐이 있는 신하들을 대부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왕족들까지도 눈 밖에 나면 가차 없이 목이 달아났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도 이 때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는 태자 주(경종)까지도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이 때 태자를 대신할 왕자가 있었다면 그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공포정치 시대였다.
감옥마다 사람이 넘쳐나서 임시 감옥을 설치해야 했고,
역모에 대한 고변이 줄을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었다.
광종은 그들의 반란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그러나 광종은 자신의 총신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대접을 했다.
귀화인들이 중심이 된 개혁 세력을 이해 자주 연회를 베풀고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개혁을 통해 광종이 절대 권력을 움켜쥔 이면에는 귀화인들의 견인차 역할과 함께
호족들의 처참한 죽음과 몰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65년 강직하고 신임이 두터웠던 서필의 죽음 이후 광종은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 자신의 칼날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우고,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여러 가지 민심 안정책을 실시한다.
이에 대해『고려사』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승려 혜거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았다.
왕이 아첨하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을 죽였으므로 내심으로 가책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 죄악을 덜기 위하여 법회를 광범위하게 가지게 되니,
많은 무뢰배들이 가짜로 중이 되어 배부르게 먹을 것을 생각하고 모여 들었다.
떡, 쌀, 시탄 등을 가지고 왕성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일반에게 나주어 주는 것도 수없이 많았다.
또 방생소를 많이 설치하여 부근 사원에서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왕궁에서 쓰는 고기도 시장에서 사들였다.”
이외에도 972년(광종 23년) 가을에는 대사령을 내렸고,
조정에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기 위해 972년, 973년, 974년에 지속적으로 과거를 실시한다.
이것은 광종이 애초부터 귀화인으로 조정을 이끌어갈 생각이 없었음을 대변한다.
귀화인들을 통해 개혁을 완성한 다음 과거를 거친 새로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정을 메워
다시 귀화인들을 몰아 내려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광종 11년 이후 약 10년 동안 실시된 공포정치는
짧은 기간 내에 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희생된 호족들은 원래 광종의 지지기반 이었지만,
왕권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 광종시대의 세계 약사
8광종시대의 중국은 5대 10국 시대를 종결하고 송이 일어나 중원을 안정시킴으로써
동북아시아는 송을 맹주로 하는 새로운 외교관계를 정립한다.
한편 유럽에서는 오토대제가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의 대립이 증폭되고, 오토대제는 교회를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분리 독립케 한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여세를 몰아, 사병 혁파까지 밀어붙였으나, 호족들의 반대로 무산 되었다.
당시 고려 사정에서, 사병을 완전히 없애고, 정부의 힘만으로 전국의 치안, 방어 등을 담당하기에는 무리였으므로,
왕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것이고 크게 미련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나,
귀족들이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귀족들은 이러한 승리에 고무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왕에게는 오래전 부터 준비해 온 진정한 노림수가 따로 있었다.
큰 비용 안 들면서, 명분 확실하고, 효과는 뛰어난, 과거제가 왕이 준비한 비수였던 것이다.
과거제는 동양에만 존재했던 인재 선발 시험으로서,
개인은 자아실현, 국가는 우수 인력 확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이다.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국가를 환골탈태시킬 수도 있는 군주에게 아주 편리한 제도인데,
이렇게 좋은 제도가 서양에서는 끝내 출현하지 않았고, 동양에서도 고대에는 정착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를 비롯한 모든 공개 채용 시험은 기본적으로 평등이라는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으므로,
기득권 세력에게는 불편한 제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려면 과거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응시자는 많고 합격자는 적으니
우선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야 했다.
좋은 선생 구해서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게 해준다 해도 애가 머리가 나쁘면 또 안되고...
또한 군주가 원치 않는 세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시험에 통과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군주에게 충성하는 집단이 되었고,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 쉬웠으므로
기득권세력에게는 족쇄나 다름없는 제도였다.
족쇄를 반기는 바보는 세상에 없으므로 시행을 위해서는 군주의 정치력이 가장 중요하였다.
광종은 과거제 시행을 계기로 고려 방방곡곡에서 학풍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랐다 하는데,
이는 조폭 연합체와 같은 나라 꼴을 환골탈태시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고려 초의 호족 공신들은 대부분 무장 출신이었으므로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하늘의 아들 보다는 대두목이 훨씬 만만하고 편하였므로,
왕권을 신성시하고 군신간의 질서를 강조하는 유학의 이념과도 잘 맞지 않았다.
결국 과거제의 도입은 당시 호족들에게 정체성을 바꾸라는 요구였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정종기의 천도 계획을 능가하는 파괴력 있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958년, 역사적인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쌍기를 지공거로 진사, 명경, 복업과를 실시하여 7명을 선발하였는데,
비록 선발 인원은 조촐하였으나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호족들의 반발을 우려한 왕은 친위대로 궁궐을 둘러싸 신변을 보호하였고,
중원의 혼란을 피해 몰려든 귀화인들로 조정을 채워 친위세력을 구축하였다.
960년, 관료들의 복식을 제정하여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을 내외에 알렸고,
군부를 개편하여, 군부 내 호족세력을 대폭 해임, 파면하였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개경을 황도로 칭함으로써,
자신이 황제와 같은 절대권자임을 신하들에게 주입시켰다.
이렇게 강화되어가는 왕권에 귀족들은 당연히 저항하였으나 이미 달리기 시작한 기차였다.
광종기를 특징짓는 공포정치는 역모의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첫 사건은 왕이 친국을 하여 귀양 보내는 것으로 끝을 내었으나 이후 참소가 줄을 이었고,
감옥이 가득차서 임시옥사를 설치할 지경까지 되었다 한다.
이러한 상황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 지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광종은 공신들을 관직에서 내쫓아 버렸고,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은 숙청, 처형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숙청은 정세를를 더욱 불온하게 하였고 왕의 의심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는데...
친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차기 왕위를 노릴수 있는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을 처형하였고,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았던 이복동생 효은도 처형하였으며,
친아들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칼밥이 되어야 했던 귀족들이나, 휘두르는 왕이나, 서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광종은 961년 궁궐을 증축하기 위해, 당숙인 왕육의 사저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속사정이야 정확히 알수 없으나,
기왕에 개경을 황도라고 선언하였으니 그에 걸맞는 규모의 궁궐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시절이 하수상하니 방비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왕육의 사저에 이어하고 있는 동안은, 공격적인 숙청을 자제하고,
새로이 중원의 패자가 된 송과의 외교에 주력하였으며,
귀법사를 창건하고, 제위보를 설치하는 등 불교세력과 민심을 다독였다.
964년 증축이 끝나 궁궐로 환궁한 왕은 호족들의 불만 사항을 청취하고자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박 수경의 아들들이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때 불만을 과격하게 표현하였는지, 아니면 왕이 꼬투리를 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은 분노하여 박수경의 아들들을 처형해 버렸다.
이 꼴을 본 박수경은 상심하여 병사하였고... 가문이 결딴 나고 말았다.
평주의 호족 박씨 가문은 광종의 주요 정치기반 중 하나였으나
호족으로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거되어 권력의 무상함과 비정함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왕은 내친김에 혜종비와 정종비의 친정아버지인 청주의 호족 김긍률도 숙청하여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이후로도 광종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은 누구를 막론하고 숙청하였는데,
술자리의 말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한다.
최승로에 의하면, 숙청이 얼마나 철저하였는지 경종 즉위시까지 살아 남은 공신가의 사람은
태조의 삼한공신 3200 중 40여명에 불과 하였다 한다.
975년 여름 재위 26년만에 향년 51세로 서거하였다.
박술희(朴述希, 述熙) 박술희는 능산과 함께 왕건의 의형제이며
별로 가진 것 없는 소탈한 사나이로 나오고, 견훤의 여동생과 연인으로 나온다.
박술희는 현재 면천 박씨의 조상으로 되어 있는데, 향리나 호족가문 출신으로 상당한 배경을 지닌 인물이었던 듯 하다.
성격은 드라마와 비슷해서 용감하고, 벌레도 잡아먹을 만큼 과감, 소탈했다고 한다.
왕건의 의형제는 아니고 18살 때 궁예의 경호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왕건의 부하가 되었다.
태조는 일찌감찌 오씨(염정아 분)의 아들(혜종)을 후계자로 점찍고 박술희를 그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고 혜종을 태자로 세우도록 건의했다.
태조가 죽을 때는 박술희에게 훈요십조를 주었을 정도로 신뢰하는 측근이었다.
그러나 혜종은 오씨 집안이 미천해서(드라마에는 상당한 호족으로 나오는데, 사료를 보면 세력가는 아니었다)
권력기반이 미약했다.
특히 왕건에게 두 딸(15비, 16비)을 바쳤던 왕규가
혜종과 박술희를 제거 하려고 하여 박술희는 늘 100여명의 경호원을 두고 살았다.
혜종이 사망하자 정종(유씨의 아들)은 혜종의 후원자 박술희를 바로 갑곶으로 귀양보냈으며,
왕규가 왕명을 위조하여 살해했다.
왕식렴(王式廉) 왕평달의 아들로 왕건의 사촌동생. 충실하고 용감하고 근면했다.
왕건을 그를 신뢰하여 새로 개척한 평양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고려의 북방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군대와 경제력을 보유한 인물이 되었다.
왕규는 정종이 즉위하자 박술희를 살해하고, 모반을 꾸민다.
정종은 왕식렴을 불러들여 왕규 일당 300여명을 살해하는 대숙청을 벌인다.
박수경(朴守卿) 왕건의 휘하장수. 그도 역시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집안은 평산의 토호로 그 지역에서는 힘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다.
왕건은 평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장수 중에 평산 출신이 많다.
유금필도 평산사람이고, 유금필, 박수경의 딸을 다 비로 맞았다.
용맹하면서도 실전에서 임기응변하는 지략이 뛰어났다.
견훤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 고려군을 이끌고 싸웠는데, 여러번 기발한 계략으로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조물성 전투에서는 고려의 삼군 중 2군이 패했으나 박수경만이 승리했다.
공산성 전투에서는 왕건을 모시고, 필사적으로 싸워 포위망을 뚫었다.
그는 태조의 다른 장수들에 비해 오래 살고 자손들도 다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광종이 즉위하자 건국 공신세력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때 그의 아들들도 다 투옥되었다.
수경은 이를 근심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광종(光宗, 925년 ~ 975년 7월 4일 (음력 5월 23일[1]))은
고려 제4대 국왕 (재위: 949년 ~ 975년)이다.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묘호는 광종,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이다.
태조의 넷째 아들,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서 요절한 왕태, 정종의 동생이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皇甫氏)로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로 이복누이이며,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는 배다른 형혜종의 딸이다.
949년 3월 동복 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949년 광덕(光德), 960년 준풍(峻豊[2])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중국 후주로부터 과거제도를 받아들여 처음 과거를 실시하였다.
노비안검법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석방하였고, 민생안정과 백성구휼에 힘을 썼다.
그러나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3] 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등의 역모를 고변한 이후
이를 빌미로 호족들을 대량으로 숙청하였고,
이복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동복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태조의 서자인 이복동생 효은태자 등을
처형하였고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胄) 역시 의심하였다.
과거 시험으로 선발된 관료들과 후주에서 귀화한 관료들을 통해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관복 제도를 새로 제정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불교 장려에도 관심을 갖고 사찰의 중건과 중수를 지원하였다.
즉위 이전[편집]
출생과 생애 초반[편집]
광종 왕소는 925년에 태조의 넷째 아들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형제로는 형 태자 태와 형 정종이 있었고,
동생인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신라 경순왕의 후처가 된 누이 낙랑공주, 여동생 흥방공주 등이 있었다.
위로는 형 태자 무와 태자 태, 태자 요가 있었으므로 그는 왕위계승권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혜종이 병약하고, 동복 형인 태자 태가 일찍 요절하면서 그는 형 요와 함께 유력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왕소는 친형인 정종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고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중하였다.
최승로의 평에 의하면 '정종이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품인데 반해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이었다.[4]'한다.
그는 뛰어난 용모와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어 태조로부터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4] 한다.
태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던
박수경·박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5]
그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위를 두고 벌어진 암투극 사이에서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그는 각자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왕위로 끌어 올리려는 호족들을 보고
제거해야 될 대상 또는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있었다.
태조는 호족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복남매들 사이의 족내혼을 시켰는데,
그는 이복 여동생이자 신정왕후 소생인 대목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였다.
이복 여동생이었지만 그녀는 외가의 성을 따랐고 외할아버지 황보제공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칭하게 되었다.
대목왕후에게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효화태자는 요절하고
첫째 아들 태자 주가 뒷날의 경종이 된다.
딸은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흥덕원군부인이 있는데
셋째딸인 흥덕원군부인은 흥덕원군 왕규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다시성종에게 재가한다.
태조가 자식들을 이복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신라 왕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6]
이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왕이 족외혼을 했을 경우 왕권이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6] 이라는 왕건의 계산이 작용했다.
그는 이복형 혜종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서경세력과 혜종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였다.[5]
이는 혜종이 서경세력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을 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 보낸 것으로도 확인된다.[4]
잠재적 왕위 계승자[편집]
943년 태조의 사후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주목되었고, 왕규로부터 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왕규에 의해 왕위를 노린다는 고변을 듣게 된 혜종은 그를 시험하였고,
이어 944년 의화왕후 소생인 자신의 적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 林氏)를 후궁으로 주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본심을 숨겼고, 뚜렷한 혐의가 없었으므로 혜종은 그를 제거할 수 없었다.
945년 동복 친형인 정종이 즉위하였다. 즉위 후반 병에 시달리던 정종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자
자신의 유일한 아들 경춘원군이 아닌 동생 소에게 선위 하기로 일찍부터 마음 먹었다.
음력 3월 13일 병석에 누운 정종이 죽자 광종은 25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 유력한 호족들, 자신의 외가인 충주 유씨와 처가인 황주 황보씨
박수경·박수문 형제의 평산 박씨 세력은 광종의 후견세력이었고,
청주 김씨 역시 정종 시대 이후고려 조정에 비교적 호의적인 입장이었다.[4]
많은 호족 세력을 등에 업은 덕분에 혜종 사후때처럼
즉위 초반 개경과 서경의 문무관리들이 살상 되는 혼란이 있었지만 빨리 수습할 수 있었다.
즉위 직후 그는 백성과 호족들의 불만을 샀던 형 정종의 필생의 과업인 서경으로의 천도 계획을 즉시 취소시켰다.
즉위 초반[편집]
949년 8월 대광 박수경 등에게 명하여 각 공신에게 쌀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고
이때 지급된 급료를 표준 녹봉으로 정하였다.
또한 원보 식회, 원윤 신강 등에게 명하여
각 주, 군, 현에서 세금으로 바치는 세공의 액수를 정하게 하였다.
평주의 호족 박수문, 박수경 형제는 정종 사후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지했는데,
이들의 세력이 막강 하였으므로
광종은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왕위로 앉히려는 다른 호족들을 견제한다.
950년(광종 1년) 1월 사천대의 승려가 광종에게 덕을 쌓으라고 아뢰자
이때로부터 광종은 항상 정관정요를 읽었다 한다.
이어 그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표하였다.
장청진에 성을 수축하고, 동년 가을에는 위화진에 성을 쌓았다.
광종은 즉위 초반 7년간 정국을 무던히 지켜보며 왕권을 강화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4]
그는 일단 국내의 정국 주도권을 호족들에게 내주고 조용히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갔다.[4]
그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정치적 능력을 기르는 일이었다.[4]
이를 위해 그는 당나라 태종이 자신의 신하들과 정치 토론을 벌인 내용을 기록한 정관정요를 숙독하였다.[4]
정관정요는 당나라 황제들의 치세 교과서 구실을 했는데,
광종 역시 이 책을 통하여 군주가 나아가야 할 행동방향을 세우고
정책 입안 및 신하를 다스리를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7]
즉위 초반에는 후한과 후주에도 형식적으로 조공을 바치며 충돌을 자제하였다.
951년 후주가 중원의 맹주로 부상하자 광종은 그해 12월부터 다시 후주의 연호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7]
광종이 후주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외교적 경로를 이용해 여진과 거란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거란은 호시탐탐 고려 침략을 노리고 있었는데,
고려는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원의 한족들과 돈독한 외교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7]
951년부터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자 후주 측은 1차로 광종을 고려국왕에 책봉하는 정식 책봉사를 보내왔고,
다시 2차로 광종을 검교태사로 봉하여 고려 백관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책봉사를 다시 보내왔다.[8]
당시 책봉사는 설문우였고 그를 따라온 책사 중 쌍기 등이 있었는데, 광종은 쌍기 등이
후주 태조를 도와 개혁작업을 한 인물들임을 알고 이들과 면담, 고려로 유치하려 노력하였다.
호족을 견제할 친위세력이 부족했던 그는 후주에서 귀화한 인사들과 훗날 그 중 한사람인
쌍기의 건의로 선발한 과거 급제자 출신 인재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한다.
권력 분산과 집중화[편집]
광종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야심이 강한 인물이었다.[9]
그리하여 그는 중앙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진 호족의 제거를 계획.[9] 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호족들의 지지가 필요하였기에 호족들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태자 시절 호족들이 자기 가문의 연고가 있는 태자를 위에 올리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것을 지켜본 그는 호족들의 숙청을 결심한다.
광종은 고려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들과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 국가의 재정 기반 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위한 후, 광종은 국초에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공역자를 정해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광종은 기존의 중국의 연호를 받아다 쓰던 관례를 폐지하고
949년에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951년에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후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연호를 다시 정하여 “준풍”(峻豊)이라 하였다가(960년~963년),
963년송나라와 국교를 연 후에는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하였다(963년~968년).
민심안정책[편집]
광종은 정치적 역량과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는 것 이외에도 민심 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7]
민심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패할수 밖에 없다는 것을
형 정종의 서경 천도 추진과정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그는
민심을 얻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7]
광종은 민심 안정책을 불교를 통해 추진하였다.
그는 951년 대봉은사를 개성 남쪽에 세워 태조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하고,
불일사를 동쪽에 세워 신명순성왕후[7] 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았다.
954년에는 신명순성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하였으며,
화엄종 승려 균여와 교분을 갖고 그의 '성상융회(性相融會)' 사상을 받아들였다.[10]
성상융화사상이란 일종의 불교 종파융합책으로, 당시 불교는 교종이 융성했는데,
교종 내에서도 성종과 상종이 있었다. 성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화엄종이었고,
상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법상종이었다.
이 두 종단의 특징은 이질 집단을 통합할 수 있는 융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10]
균여는 바로 이 원리를 통하여 민심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고 보았고,
광종이 이에 적극 동조했다.[10] 광종은 이들 종단이 융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
화엄종과 법상종계 승려들과도 자주 면담하며 민심을 불심으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했다.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은 화엄종과 법상종을 하나의 사상으로 이끌어내자는 논리였다.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을 신봉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개 중소 호족이나 평민들이었는데,
대호족을 경계하던 광종은 중소호족들과 평민들의 힘을 키울 요량으로 두 종파의 융회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953년(광종 4년) 화엄종 승려 겸신이 국사로 봉해지기도 했다.
이같은 화엄종, 법상종 장려와 융화정책은 곧 중소 호족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반대로 대부호들의 불교적 기반을 무너트리는 역할을 했다.[10]
또한 그는 백성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기관인 제위보를 설치하여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광종에 비판적인 최승로조차 광종이 천한 사람이라고 버리지 않고
불쌍한 이들에게 혜택을 베푼 덕분에 그의 초기 치세를 두말할 나위 없는 태평성대였다고 칭송하였다.
개혁 정책[편집]
외국 인재 영입[편집]
956년 후주에서 보내온 책봉사 설문우를 따라 온 쌍기 등에게 매료된 광종은 이들을 고려로 영입할 계획을 세운다. 중국 출신 귀화인이던 왕륭을 통해 중국의 정세를 어느 정도 접했던 그는 후주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 중 일부가 설문우를 따라 고려로 오자 이들과 대화하고 이들을 영입하려 하였다.
2차 책봉사의 수행원으로 고려에 당도한 쌍기는 얼마 후 병에 걸려서 사신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를 두고 미리 계획된 일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미리 계획된 일인것인지도 모른다[8] 는 것이다. 즉 '와병을 핑계하여 환국하지 않고 있다가 사신 일행이 돌아간 다음에 광종과 대면한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8]' 책봉사 일행이 돌아간 뒤 쌍기는 병상에서 일어났고, 바로 광종과 대면하게 된다. 쌍기를 만난 광종은 그의 개혁적인 성향과 뛰어난 식견에 감탄하여 후주의 세종에게 국서를 보내 쌍기를 고려의 신하로 삼을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8] 요청한다. 후주의 쌍기는 고려 조정에 전격 등용된다.[11] 그 뒤로도 광종은 사람을 보내 후주의 개혁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만나보도록 공식, 비공식 사절과 유학생들을 파견한다.
쌍기는 후주에서 귀화하게 되는 인물로, 후주 태조의 치하에서 절도순관, 장사랑, 시(試) 대리평사 등을 지냈다. 시대리평사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였기 때문에 과거 제도에 대한 지식이 많은 인물이었다[8] 광종은 유학에 정통하 신진 유학자들도 함께 등용하여 과거 시험을 출제할 이론, 주제 등을 준비하게 한다.
쌍기는 그에게 호족들의 사병을 혁파시킬 것을 건의한다. 쌍기가 들고 나온 전략이 바로 경쟁자의 강점에서 약점을 찾는 전략이었다.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은 호족들에게는 가장 큰 강점이지만 가장 큰 약점이었다.[9] '호족들이 거느린 사병은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혀온 노비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호족들에게 목숨을 걸고[9] 충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2]' 이 점을 파악한 광종은 노비들의 해방을 꾀한다.
955년 대상 왕륭이 주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때 광종은 주나라의 인재를 초빙해오라는 밀명을 내린 듯 하다. 왕륭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종의 이러한 요구에 쉽게 순응했던 것이다.[8] 광종은 쌍기 이외에도 함께 왔던 후주의 학사들을 고려에 줄 것을 후주 세종에게 청하여 승낙받는다. 친위세력이 없었던 그는 중국인 출신 귀화인들을 통해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성하였다. 여기에 귀화인 중 한사람인 쌍기의 건의로 실시된 과거로 뽑아들인 인재들을 통해 친위세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개혁 정치 시작[편집]
쌍기는 등용 당시 전격적으로 원보의 관직에 오른다. 이 때문에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광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종은 오히려 그를 다시 한림학사로 승격시켜 학문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11]
그는 당 태종의 치세와 후주 태조의 치세에 관심을 두었다. 후주 태조는 제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과거제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했고, 그 결과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8] 쌍기는 그 개혁과정에서 과거에 관한 실무를 맡았던 인물이다[8] 쌍기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주창하였다. 쌍기는 고려 조정이 소수의 특정 문벌가문에 의해 모든 것이 장악된 것을 지적하고, 문벌가문의 세력형성 혁파가 필요하다고 건의하였다.
광종도 당대의 후주의 개혁 소식을 진작에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도 후주를 모범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8] 일부 호족들이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지를 추대하려는 택군 시도를 한 것을 경험하면서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호족들이 외척과 개국공신 등 공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온갖 권력을 독점한 것 역시 염증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광종은 중국 대륙이 5대 10국으로 혼란을 거듭한 점과 일본이 여러 지방국으로 분열된 점, 북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대치하고 후발해국이 거란과 고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등의 국제정세는 외세의 내정간섭이 없이 개혁을 수행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고려에는 개혁을 추진할 인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후주의 2대 왕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광종은 형식적으로 칭신하여 제후의 예로서 그를 대하였다. 고려가 951년부터 후주의 연호를 사용했고, 세종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후주 측은 1차로 광종을 고려국왕에 책봉하는 책봉사를 보내왔고, 다시 2차로 광종을 검교태사로 임명하여 고려 백관들에게 관복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책봉사와 자문관을 송도로 파견하였다.
노비안검법[편집]
956년에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였다. 이는 원래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노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일일이 노비문서와 호구 수를 대조하여 양민으로서 부당하게 노비가 되었거나, 빚 등으로 노비가 된 이들을 석방하였다. 광종은 이 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노비안검법은 노비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종의 노예 해방법이다. 당시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의 상당수는 고려의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힌 양인이거나 대호족의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로서 호족들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이었다.[13] 또한 호족들이 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인력동원의 원천이기도 했다. 노비안검법으로 많은 노비들이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호족들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13] 호족들은 진정서와 상소를 올리고 광종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나 광종은 쌍기를 비롯한 후주 귀화인 출신들을 등용하고, 호족들과 호족 세력 인사들을 파면, 해임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956년 노비안검법이 공포되자 고려의 통일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은 모두 양인으로 신분 회복되었다.[14] 노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하여, 노비 스스로가 자신이 과거에 양인 신분이었다는 것을 관아에 신고하기만 하면 바로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14] 광종은 호족들의 반발을 예상하여 노비들의 관청 출입을 막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호족 중 자신의 노비가 거짓을 고하는 것이라고 무고하는 호족들에게 불이익을 주었고, 원래 양인 출신이던 노비들의 신분회복이 계속되었다.
많은 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대호족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공신전을 경작하는 대가로 노비로부터 받던 세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고, 사병의 수도 격감되었다.[15] 호족들은 가난한 평민들을 대상으로 소작농으로 부리게 된다. 그러나 광종은 소작농을 노비처럼 부리는가의 여부를 어사대의 관리와 측근 세력을 파견하여 감시하였다.
호족세력 약화와 상대적 왕권 강화[편집]
호족들은 노비안검법 실시에 거세게 반발했다. 광종의 비 대목왕후까지 이 일에 나섰다.[13] 호족들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광종을 압박하였고, 선대 제왕들의 처족들은 물론이고 광종의 왕후인 대목왕후까지 이 일에 가세하였다.[14] 하지만 광종은 결코 의지를 꺾지 않았다.[14] 광종은 대목왕후의 간언까지 뿌리치고 이 법을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였다.[13] 노비안검법이 실시됨으로써 호족들은 경제 기반인 노비의 상당수를 잃었고, 과거제 실시로 신진관료들에게 관직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13] 이와 비슷한 정책은 아버지 태조도 마련한 적이 있었지만 호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중도에 정책을 변경해야만 했다.[14] 그러나 광종은 달랐다. 광종은 이미 7년 동안의 민심안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호족들과 싸울 만한 정치적 기반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14]
노비뿐만 아니라 노비와 같은 처지에 있던 극빈한 양인들 역시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고, 신진관료나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대호족들만이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시대적 대세와 광종의 강력한 의지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15] 그러나 호족들은 자신의 가문이나 지역과 연고가 있던 왕자들의 추대를 기도했고 광종은 호족의 숙청을 계획하게 된다.
노비신분에서 해방된 호족의 사병들 역시 이제 더이상 호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어졌고 곳곳에서 호족들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12] 사병이 없어진 호족은 추풍낙엽과 같은 미약한 존재가 되었고 이때 광종은 군사력을 앞세워 모든 호족들을 제압하고 고려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12] 호족의 입지가 약해진 반면, 국가는 세금이 늘어나고 병졸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결과적으로 왕권이 신장되어 중앙집권적 체제 확립의 기반이 마련되었다.[15]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은 크게 약화되고, 노비들이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하여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안정되어갔다.
그러나 호족들은 계속 반발했다. 노비로 있던 자가 자신의 옛 주인을 헐뜯고 욕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도 잇따라 터졌고, 노비와 양인 계층의 이반으로 신분질서가 문란해저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일부 발생했다.[15] 또한 광종 근위세력과 호족세력간의 충돌로 인해 정계의 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15] 결국 이 옥의 티를 빌미로 호족들은 노비안검법 철폐를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경종대에 다시 비대해진 그들의 힘에 밀려 제6대 성종은 노비안검법으로 양인으로 회복된 대부분의 사람들을 노비로 도로 환천시키고 만다.[15]
과거 제도 도입[편집]
광종은 문벌귀족, 대대손손 가문에 의해 관직을 세습하거나 금전으로 관직을 매매하는 문벌귀족의 세습을 방지하고자 중국에서 실시되는 과거시험에 관심을 가졌다. 이어 광종은 사신을 후주에 파견하여 과거 제도의 시행을 알아보게 하기도 했다. 중국의 과거제도를 접한 그는 과거제도에 대해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됐고, 953년후주와 본격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때 후주에 사신을 보내 고려국왕으로 책봉을 받기도 했다. 후주로부터 고려국왕으로 공인된 광종은 955년 태조 곽위에 이어 제2대 왕으로 오른 세종에게 귀화인 왕륭을 보내 토산물을 선물하고 후주의 정국에 대해 소상히 전해 듣는다.[10] 그리고 후주의 상황이 고려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닭은 그는 대리평사를 지낸 쌍기를 고려로 끌어들인다.[10] 쌍기는 후주의 사신으로 왕래한 설문우의 일행으로 고려에 왔다.[10] 이때 광종은 쌍기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의 사상과 지식에 공감하게 된다.[10]이어 세종에게 쌍기를 자신의 신하로 줄 것을 요청해 승낙받는다.
쌍기는 후주 태조의 왕권강화작업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후주에서 이뤄졌던 일련의 사회개혁을 고려에서 재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쌍기의 이러한 고려개혁론은 광종을 흥분시켰다. 광종은 이미 오래전부터 왕권강화책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정책을 수행, 지지해줄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한 터였다.[13]
956년 후주에 사신을 보냈고, 후주는 답례로 장작감 설문우를 보내 광종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開府義同三司檢校太師)에 봉하였다. 세종의 교서를 받은 뒤 광종은 명하여 백관의 의관을 중국 제도에 따라 하게 하였다. 그런데 설문우를 따라온 후주의 전 절도순관 대리평사 쌍기(雙冀)가 병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머무르게 되었다. 쌍기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 제도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의 학식에 감탄한 광종은 후주에 표문을 올려 쌍기를 자신의 참모로 삼게 해줄 것을 요청하여 성사시켰다. 쌍기는 귀화하여 고려인이 되었고 그는 쌍기 등을 최측근으로 등용하였다. 또한 후주의 멸망과 5대 10국의 멸망 후 옛 5대 10국 나라의 관료들을 적극 고려로 유치, 영입하였다.
958년 쌍기의 건의로 과거를 시행하였다. 그해 5월에 후주(後周)에서 고려로 귀화한 한림학사 쌍기(雙冀)를 공거로 임명하여 처음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호족 이외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과거제도 실시와 제도 정비[편집]
노비안검법 실시로 호족의 힘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자 광종은 958년 '과거제 도입'이라는 폭탄선언을 하였다.[13] 958년(광종 9년) 5월 광종은 마침내 쌍기를 지공거(知貢擧)로 임명하고 시, 부(賦), 송(頌), 책(策)으로써 진사 갑과에 2명, 명경과에 3명, 복업(卜業)과에 2명을 선발했다.[11] 신라시대에 일부 시행되었다가 폐지된 과거 제도를 다시 실시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를 주관하여 정착하게 한다. 이때 최초로 진사 갑과에 합격한 인물은 최섬 외 1인(진긍)이었다.[11] 788년 신라 원성왕 때에 과거 제도인 독서삼품과를 도입했다가 얼마못가 호족들의 반발과 압력행사, 왕권약화로 폐지된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호족들의 반발과 출신 성분을 알수 없는 인물들을 함부로 등용한다는 반대에고 그는 계속 과거를 주관하였고, 서서히 과거 합격자의 수를 늘려 과거 제도로 진출한 관료들의 수를 늘려나갔다.
과거제도 도입은 호족들이 중심이 된 공신세력에게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고려의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전공을 세웠거나 무력을 제공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무인들이 대다수였다.[13] 때문에 학문을 기반으로 하는 과거제도 실시[13] 는 그들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는 장치가 되었다. 958년 5월 광종은 과거 제도를 통해 실력있는 인사를 인재로 선발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며 문벌이나 재력으로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공표했다. 이는 조정 내에서 호족의 전횡을 막을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었다.
처음 과거가 실시된 지 2년 후인 960년에는 시, 부, 송만 가지고 다시 시험을 쳤고, 이후 4년 뒤에는 다시 시험과목을 조정하여 964년 시, 부, 송, 시무책을 가지고 시험을 쳤다.[11] 그는 쌍기에게 명하여 시무책이라는 것을 시험 과목으로 추가하여 당시 사회의 상황과 개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했다.
이처럼 시무책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사실들을 통해 개혁에 걸맞은 인사에 대한 광종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11] 광종은 과거 제도를 통하여 전국에 학교가 세워지고 학풍이 일어나길 바랐다.[11] 또한 문치적 관료체제가 갖춰지길 원했는데, 계속된 과거 시험으로 고려 전국에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그의 뜻이 이뤄진다.[16] 과거 제도의 도입으로 우수한 인재들의 중국 유출을 막는 한편 과거로 선발된 신진 관료들을 대폭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발탁한다. 문벌과 배경이 없었던 이들 신진관료들은 광종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다.
문과와 무과 외에도 승려들이 응시하는 승과(僧科) 역시 채택했다. 승려의 국가 고시 제도인 승과로는 종선(宗選)과 대선(大選)을 지정, 종선은 총림선(叢林選)이라고도 하며 각 종파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종선의 합격자들은 국가에서 응시하는 승려고시 대선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본고사 대선은 크게 선종선(禪宗選)과 교종선(敎宗選)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종선은 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교종선은 주로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되었다. 이 승과는 고려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과거 시험으로 선발한 인재들은 인맥과 배경이 없었으므로 쉽게 그의 측근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백관의 품계에 따른 관복의 복제(服制)를 제정하여 관료의 서열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또한 승려들의 품계를 지정하여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 등의 선종법계(禪宗法階)와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首座)·승통(僧統)의 교종 법계 등 승려들의 계급도 친히 지정하였다.
그러나 개혁 과정에서 중국에서 귀화해온 세력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실어주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다.[17] 또한 관리의 복제를 제정하여 관등에 따라 자색, 단색, 비색, 녹색으로 서열을 구분케 하였다.
관복 제정[편집]
960년 광종은 직접 백관의 관복제도를 제정한다.[18] 이미 956년 설문우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이미 후주의 세종이 고려의 공복을 중국식으로 정비하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관복제도를 확립한 것이다.[18]
959년 광종은 후주의 쌍철과 일단의 귀화인들을 조정에 끌어들인다.[18]
960년 3월 지체없이 관복 제도를 확정했다.[19] 당시의 관복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통일전쟁과 호족들의 영향력 증대로 서열에 따른 관복은 확정되지 못했다. 서열이 낮아도 부유하면 좋은 옷을 입었고, 서열이 높아도 가난하면 보잘것 없는 옷을 걸쳐야 했다. 이는 서열에 관계 없이 재정적으로 풍부한 자가 항상 우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광종은 이처럼 무질서한 복장이 조정의 기강을 흐트리고 왕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위에 따라 모든 공복의 색깔을 달리하게 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삼(자색 웃옷), 중단경 이상은 단삼(붉은 색 웃옷), 도항경 이상은 비삼(진홍색 웃옷), 소주부 이상은 녹상(녹색 웃옷)을 착용토록 하였다.[19] 관복을 4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은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과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의 확립을 의미한다.[19]
대중국 외교 정책[편집]
변방을 수축하여 동북면과 서북면의 성곽을 보수, 중건하는 한편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951년 후주에 사신을 파견, 귀환한 뒤 그해 12월 후주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후주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952년 봄에는 광평시랑 서봉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953년 후주에서 사신으로 위위경 왕연과 장작소감 여계빈을 보내, 후주 세종으로부터 광종을 특진 검교태보사 지절 현도주 도독 충 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使大夫高麗國王)으로 책봉하는 교서를 받았다.
955년 대상 왕융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광평시랑 순질을 후주에 보내어 공제의 즉위를 경하하였고, 956년 후주는 장작감 설문우를 보내 광종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開府義同三司檢校太師)로 봉하였고, 이때부터 후주의 복식과 제도를 도입, 백관의 의관을 중국 제도에 따라 하게 하였다. 959년 봄 좌승 왕긍과 좌윤 황보위광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그해 가을 다시 사신을 후주에 보냈다. 후주에서도 959년 좌효위대장군 대교를 보냈고, 그해 겨울 다시 사신을 후주에 보냈다.960년 후주의 시어 청주수 쌍철, 고려에 왔고 쌍기를 좌승으로 임명하였다.
칭제 건원[편집]
960년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불경을 구해오게 했는데, 그해 오월의 제5대 황제 전숙(錢瞞, 錢弘俶)이 사신을 보내어 《천태론소》(天台論疏)의 교전과 그 밖의 불전을 보내왔다.
후주가 몰락하고 송나라가 일어나 패권을 다투기 시작, 광종은 이 같은 중국의 혼란이 계속되자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다시 960년(광종 11년)부터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17] 또한 개경을 황제의 수도인 황도(皇都)로 개칭하여 황제(皇帝)의 면모를 갖췄다.[17] 그는 자신을 황제의 지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절대 권력자임을 신하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다.[19] 이에 따라 호족들은 광종의 절대 권력에 도전하게 되었고,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작업을 통해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권력과 대결해 나간다.[19]
그러다가 송나라가 후주를 무너트린 후 안정을 찾고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자 963년 12월부터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왕권 강화와 정적 숙청[편집]
친위세력의 강화[편집]
과거 제도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쌍기는 광종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더욱더 많은 중국인들을 귀화시켜 고려 조정으로 끌어들인다.[16] 세력 기반이 약했고 신진관료들만으로 친위 세력의 구성이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계속적으로 중국의 인재들을 영입하려 한다. 5대 10국이 송나라에 멸망, 통합되면서 각 나라들의 관료, 학자, 망명객들 역시 고려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과거제가 처음 부활된 이듬해인 957년 쌍기는 자신의 아버지 쌍철을 고려로 불러들였고, 광종은 쌍철을 좌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작업에 동참시킨다.[16] 또한 쌍씨 부자가 고려의 실세로 떠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였고, 광종은 그들 대부분을 관리로 임용하였다.[16] 광종은 이들을 통해 친위세력을 구성하고 호족들을 견제하게 했다.
광종이 귀화인들을 적극 영입, 유치하는데는 친위세력 강화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노비안검법을 실시, 강행함으로써 내국의 호족들과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16] 그런데 조정은 그들에 의해 거의 장악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호족을 견제할 새로운 신하들이 필요했고, 광종은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16]귀화인들을 적극 중용한 광종은 호족들의 집과 별장을 빼앗거나 몰수한 뒤 이들 귀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중용한 나머지 광종은 내국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내국의 신하들은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지나친 대우에 반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서필이었다.[16] 자택과 별장을 강제로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은 호족들은 이들 신하들과 힘을 합치거나 뒤에서 조종하면서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을 비판하고,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기를 포기하고 세력을 형성하려 한다며 광종을 비판하게 된다.
서필은 광종의 행동을 못마땅히 여겼다.[16] 그래서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말한다.[18] 광종이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자손들 대에서 집을 빼앗길 바에야 미리 그 집을 바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이에 광종은 분노하지만 나중에는 서필의 말이 옳음을 깨닭고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18] 그러나 호족들의 집과 별장은 계속해서 빼앗는다.
광종은 집권 내내 귀화인들을 위주로 정치를 펼쳤으며, 이에 호족들이 반발하자 가혹한 숙청작업을 벌여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된다.[18] 후일 최승로는 이 일에 대하여 광종을 비판하고 있다. 광종의 지나친 귀화인 임용으로 내국인이 설 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귀화인과 내국인의 정권 대립이 가속화되는 바람에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16]
왕족 숙청[편집]
광종은 왕권의 강화에 걸림돌이거나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의심이 드는 인물에게는 냉혹하였다. 광종은 호족과 대신들 뿐만 아니라 골육과 종실에 대해서도 왕권 강화에 장애요소가 된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제거하였던 것 같다.[20] 광종은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동복 형인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을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처형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주(경종)를 의심할 정도로 역모에 민감해졌다.[21]
945년 혜종의 아들 흥화군[22] 은 혜종이 죽자 출궁하여 어머니와 함께 절에서 살다가 후에 광종 즉위 후 경화궁부인을 따라 궁으로 들어가 함께 살았다. 그러나 960년이후 벌어진 왕족 숙청때에 이복 조카이자 처남인 흥화군을 처형했고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도 처형했다. 그 밖에 태조의 15서자인 효은태자 역시 군소배와 사귀면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호족들에게서 노비들을 석방, 해방시킴으로써 사병들의 수를 축소시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호족들의 사병을 완전히 몰수할 생각을 했지만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반발이 계속되었으므로 사병 몰수 계획은 백지화시킨다.
친국을 단행한 후 광종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참소하는 사람이 많아 죄없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준홍과 왕동이 쫓겨나고 광종의 주변에 대한 경계는 더욱 강화됐다.[21] 준홍 등이 제거된 후 희생된 사람은 너무도 많아 따로 임시 옥사를 설치할 정도였다.[26]
고려사 등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忠良)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시기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광종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공신들에게 관직에서 내쫓거나 새로운 관직을 주지 않았고, 광종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다른 왕자군의 배경세력인 외척 세력 호족들을 전면 숙청, 처형한다. 그리고 즉위 초 자신을 도왔던 평주의 박씨까지 제거하게 된다.
광종이 이처럼 커다란 미륵불을 조성하게 한 이유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왕권확립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에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는 상징물로 거대한 부처를 조성하게 한 것이다. 미륵불을 건설할 마땅한 장소로는 옛 백제를 그리워하는 유민들에게 이젠 새 왕조가 열렸음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후백제의 고토 논산이 그 장소로 적합했던 것이다.
961년 4월 홍수가 나자 광종은 궁궐 수호와 복원의 목적으로 수영도감(修營都監)을 설치하고 당숙인 정광(正匡) 왕육(王育)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35]
한편,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광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세상이 어지럽고 형장이 잇달아서 역세(歷世) 훈신숙장이 죽음을 며치 못했던 바 경종대에 살아남은 구신은 겨우 4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29] 965년 7월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내의령 서필이 병사하였다. 이후 그의 불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968년 악몽을 꾼 후 재회를 열었으며 방생소를 두고도살 금지령을 내렸다.
광종 개혁정치는 새 왕조의 국왕으로서의 자신감과 위엄을 과시하고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나 개혁의 범위가 주로 정치에 한정되어 중앙의 정계개편에 치중한 결과, 지방제도 개편이나 광범한 경제·사회적 제도의 개편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그는 개혁 과정에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으며, 호족은 물론 혈육과 친인척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한 적대 행위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역모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신하들은 물론 가족과 친척마저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남겼다. [17] 수 많은 호족들과 이복아우인 효은태자, 조카인 혜종의 아들 흥화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등 왕족들이 숙청을 당하였고 그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과 혼란이 가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