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와이키키 브라더스>
1.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연 배우 이얼이 최근 암으로 사망했다. 신문 부고기사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면서 몇 개의 대표작을 적시했다. 기이하게도 거기에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없었다. 이 영화는 내가 본 한국 영화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영화를 제작한 <명필림>에서도 아쉬었나보다. 갑작스럽게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상영을 6.6(일) 19:10에 편성했다. 언젠가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감동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더해졌을 때 배가된다. 작품 내용이 필요조건이라면, 극장은 충분조건이다.
2. 영화는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지나며 우리의 찌질한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노래방이 등장하고, 가라오케가 성행하면서, 성인업소에서 일하던 음악밴드들의 일자리는 점차 줄어든다. 어쩔 수 없이 지역축제에도 참가하고, 흥이 필요한 잔치에도 서야했다. 생계의 압박은 불러주는 곳이 어디든 가야하는 것이다. 그래도 가고 싶지 않았던 곳 중 하나는 충주 ‘수안보’였다. 그곳은 바로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자유도 빼앗아 간다. 수안보 ‘와이키키’ 관광호텔과 계약을 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는 밤마다 관광객을 위해 연주한다. 그 곳에서 두 개의 이야기가 병행한다. 하나는 과거 고등학교 밴드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과 현재의 갈등이 한 축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밴드 멤버 사이의 갈등이다. 분명 두 개의 갈등이 별개로 진행되지만, 공통점은 하나이다. 그것은 서서히 몰락하는 징후이며, 현재의 위치를 파괴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밴드는 점차 사람들로부터 무시되고, 멤버들은 그것을 못견뎌하며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그 속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애정문제는 멤버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결국 밴드를 해체시킨다. 음악은 어떤 것보다도 철저하게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음악은 커다란 트라우마적 아픔으로 남는다.
4. 고향의 친구들 사이에도 갈등은 연속적이고 고조되어 있다. 각자의 일이 그들을 대립하게 만들며 과거의 좋은 기억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공무원에서 해직된 한 친구는 말한다. “음악을 계속하니 행복하냐?” 그것은 쓸쓸한 질문이다. 음악을 포기하고 현재 위치에 왔지만, 현재의 선택도 파멸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는 자살하고, 친구들의 갈등은 폭발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낭떨어지로 떨어지고 있다. 희망도, 가능성도, 사라진 채, 세상은 쾌락으로 점차 빠져가고, 혼자 남은 연주자는 반주기 옆에서 옷을 벗은 채 ‘홀딱파티’의 흥을 돋구어야 하는 것이다.
5. 영화 내내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배우 ‘이얼’이 맡은 역할이다. 밴드의 리드 키타이자 보컬인 그는 결코 흥분하거나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밴드 멤버들이 떠나갈 때에도, 온갖 문제를 일으켜 고통스러울 때도, 그는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는 다만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한다. 자신에게 오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고, 자신을 떠나는 사람들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의 열정은 이제 사라졌다. ‘일상의 생계’로서의 음악만 남아있다. 처연하면서도 쓸쓸한 그의 표정과 담담하게 읍조리는 노래는 플로어에서 쾌락에 들떠 춤추는 수많은 군상들과 대비되면서 깊은 아픔으로 다가온다.
6. 영화는 진한 애조의 그림자와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들의 아픔이 진하게 담겨있다. 실향민이었던 그들의 음악스승은 술로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그들 곁에서 사라진다. 개인의 삶이 시대적 상황에, 경제적 분위기 속에서 철저하게 영향받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선택도 자발적으로, 행복하게 내린 결정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만 떠밀리고, 강요받고,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의 애환이 보는 내내 슬픔을 자아낸다. 그것은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인 2001년에 더했다. 그때, 나또한 무언가 ‘생존’을 위해서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강했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나 조금 자유스러워진 지금, 느낌의 강도는 약해졌지만 그것에 대한 ‘이해’는 커졌다. 누구든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러한 상황도 개인의 가치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점을.
7. 영화 내내 늪 속으로 파묻혀가던 절망 속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숨어있던 ‘희망’은 넌지시 고개를 내민다. 고향에서 과거 사랑했던 여학생을 다시 만났고,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그녀와의 낭만적 감정을 회복한다. 그녀는 그와의 새로운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에 지친 그는 일자리을 찾기 위해 남쪽 여수로 내려가려 한다. 영화 마지막, 무대에는 키타를 연주하는 그와 <사랑밖에 난 몰라>를 열창하는 그녀가 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연결될지 알 순 없어도, 서로가 좋아했던 일을 같이 하고 있는 그 순간이 아름답다. 삶은 여전히 신산하고 고통스런 연속이지만, 그 터널을 거쳐 나와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삶에서 이제야 서로의 든든한 동반자를 만난 것같은 기분, 하나둘 떠나가는 멤버와는 다르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옆에 서있을 동료를 만난 확신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들이 겪었던 슬픔의 강도가 작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펼쳐질 가능성의 세계를 응원하고 싶게 만든다. ‘삶’은 혼자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관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삶은 끊임없이 가능성을 찾는 세계이다.
* 쓸쓸함이 표현하는 내면적인 깊이를 담담하게 보여주었던 배우 ‘이얼’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우연의 일치? 술마시는 자리에서 옛 가라오케 이야기하며 와이키키 브라더스 슬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