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건축헌금을 하게 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몰이해 속에서 되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더욱이 이미 25억의 큰 돈을 들여서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여 잘 사용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서
더욱더 크고 넓게 교회 부지를 넓혀가려는 욕망을 계속해서 가지고서
성도들에게 건축헌금과 봉사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가장 종교적인 것을 들어서
실은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다른 영을 좇게 하는 것이기에
그 배후에는 악한 사단의 활동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교회에 대한 무지를 사단은 미혹의 도구로 삼습니다.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니며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건물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행 7:48-49)
구약에서의 성전 개념을 왜곡되게 가져
그릇되게 가지고 있는 이해를 교회당에 끌어들여서
이것을 건축하게 하는 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양 호도하고 있습니다.
님은 교회 예배당 건축과 관련하여 건축헌금을 하게 하는 설교로 또한 성도들에게 봉사를 하게 하는 설교로 삼은 성경으로 마가복음 14장 3-9절인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내용이 갖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글을 올리오니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사건에 대한 여인의 기록이 2번 나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 7장 36-50절인데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그곳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 뒤쪽에 무릎을 끓고 앉아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전혀 나와 있지 않아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사건은 마태복음 26장 6-16절과 마가복음 14장 3-9절, 요한복음 12장 1-8절에 나오는 것인데 이 세 곳의 기록은 동일한 것으로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함께 있었으며 마리아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님이 제시한 마가복음 14장 3-9절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기록은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월절을 엿새 앞두고 있는 가운데서 있게 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셔서 자신을 헌신제물로 드려 죽음을 당하시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데 이제 엿새 후면 있게 될 예수님의 이 죽음을 앞두고 이와의 연관에 의해서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서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과 이것에서 알게 해 주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할 때 그 자리에는 세 남매가 함께 있었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이 세 남매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은 감사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에 이 세 남매 중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주시고 다시 살리시면서 부활의 믿음 속에 그들을 두신 은혜를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이 남매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하며 남달리 크고 깊은 사랑을 품고 있었고 섬기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남매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의 해를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시는 유월절을 이틀 앞에 두고서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그 자리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매 중에서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마 26:7, 막 14:3). 그리고 발에도 부었습니다(요 12:3).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몰약으로 불리우는 기름이었고, 마가에 따르면 매우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였습니다(막 14:5). 그리고 옥합은 아주 값비싼 기름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음으로써 예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크고 깊은 사랑을 보였으며 또한 말로 할 수 없는 큰 존귀를 표하였습니다.
그러자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몇 사람들은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화를 내면서 서로 말하기를, "이 여인이 무슨 생각과 의도로 이렇게 향유를 낭비하는가?"라고 말하며 "이 값비싼 향유를 팔면 족히 300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니, 차라리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러면 그들을 도울 수나 있을 것이다.!"라고 비난하여 나무랐습니다. 이렇게 여인의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제자들 중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을 밝히고 있는데 그는 장차 예수를 팔아 배반한 자인 가룟 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진정 가난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는 제자들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그 돈을 훔쳐내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실은 악한 욕심에 이끌린 탐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요 12:6)
그러자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며 수군거리는지를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한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된 것인지 그 성격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나무라는 제자들에게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막 14:6, 마 26:1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막 14:6, 마 26:10)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주변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같이 있지 않을 것이다."(마 26:11, 요 12:8)라고 말씀하신 후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막 14:8, 마 26:12, 요 12:7)라고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9, 마 2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지금 마리아가 자신에게 한 행위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豫備)하는 의미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을 이제 곧 예루살렘에 입성하여서 유월절 희생양으로 있게 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연계하여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엿새 후이면 십자가에 달려서 못 박히고 죽음을 당하실 것이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예수님의 고난의 상황적 분위기를 제자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향유를 부은 것에서 말씀하여 알게 해 주신 것에서만 아니라 예수님께 죽음의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당시 예수님이 처한 여러 정황에서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기 전인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회를 열고 이 일로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정부가 유대 정부의 자치권을 빼앗을 것을 우려하면서 이에 대한 방책으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으며(요 11:45-53),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거든 즉시 보고하라는 공고를 내린 상태였습니다(요 11:57).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멀지 않아 자신이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여 알게 해 주신 바가 있었습니다(마 16:21-23, 17:22-23, 20:17-19). 그리고 본 향유를 부은 사건 이후인 유월절 이틀 전에도 알려주심으로써(마 26:1-2)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예고해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위험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긴장에 직면해 있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이 되는 날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실 전날 밤에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닥칠 죽음을 앞두고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죽음을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알게 하여 주시는 가르침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는 일을 하는 것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에 대한 표였습니다. 이런 마리아에게서는 향유가 아무리 비싼 값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사실 자신이 가진 것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할 수 있는 것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 앞에 닥치고 있는 죽음의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선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표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마음을 이해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책망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갖고 있는 옥합의 향유라면 그것을 팔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고,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데 허비하고 있다면서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더라도 죽음을 당하지 않고 참으로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가룟 유다의 말은 마리아를 부끄럽게 했을 것입니다. 과연 가룟 유다의 말대로 한 것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가룟 유다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말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제자들이 언제든지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여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죽음을 이기신 후 하늘의 영광을 입으셔야 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향유를 파는 일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신 이 후에라도 제자들이 언제든지 또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일은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두라고 말씀하셨으며,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라고 의미를 두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 큰 사랑과 존귀를 표한 것은 그 자리에 같이 하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속 사역에 대한 아무 인식 없이 사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항시 예수님에게 닥칠 죽음에서 이것이 가져다 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인식하고 있으면서 준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제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리아가 행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두고 두고 남고 또한 높이 평가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님이여,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말입니다. 이렇게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이해와 인식 속에서 예수님과 관계하고 있어야 할지를 알게 하여 주시는 것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인 마리아가 한 행동에만 초점을 두고서 이를 빌미로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마리아가 한 것처럼 따라서 하라고 요구하며 값비싼 헌금을 아낌없이 내도록 가르치다니요!. 그것도 필요 이상의 예배당 건물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 위하여 사랑의 헌신을 내세우고 봉사를 내세우면서 건축헌금을 내라고 하는 것으로 향유를 부은 여인을 들어 설교하는 것은 바른 설교가 아닌 그릇된 설교입니다. 이런 건축헌금은 말입니다. 저 옛날 로마 카톨릭 교회가 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들어가 엄청난 많은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수많은 세월을 '면죄부'(속죄부)를 내세워 이를 매매(賣買)한 악한 죄에 비교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마틴 루터가 95개조항의 항의문을 내걸며 종교개혁의 기치로 삼은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의 복음 진리에서 위배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구속의 은혜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가진 신앙은 오직 여기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전하는 것에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있지 않고 이런 저런 사건을 들어서 헌금을 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전혀 성경적이 아니요 따라서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비성경적이요 비신앙적이란 말입니다.
하오니, 이런 그릇된 설교에는 전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응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결코 순종의 믿음이 아닙니다. 설사 아무리 예수님을 향한 자신들의 마음을 담아서 사랑과 존경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헌금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헌금과는 무관합니다. 단지 담임 목회자가 탐욕으로 원하는 그런 교회당 건물을 짓고자 하는 것에 신자들은 손과 발로 동원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혹 여기에는 하나님께 바쳐 헌금한 것에 대한 값절의 대가와 많은 보상을 기대하는 신자들의 탐욕도 한몫 할 수가 있을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기에 이런 헌금을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 예배당이란 그리스도인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모임을 갖기 위하여 그 필요로 가질 뿐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이 예배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면 됩니다. 혹, 예배 모임을 갖는 신자들이 공간적 협소함을 느껴서 좀 더 필요한 넓은 공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할 수 있거나 또는 건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교회 예배당을 사람을 끌어모으는 방법과 수단으로 삼고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예배당을 크게 짓고 확대하면 보다 많은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은 얄팍한 상술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예배당 개념을 성전 개념으로 가져나가게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예배당은 구약에서의 성전 개념을 전혀 갖지 않으며 마치 교회 예배당 건축이 일생 일대의 성전 건축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그릇되게 설명하며 그러한 이해를 갖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을 말씀하셨으며, 또한 실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려 돌 위에 돌 하나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집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와 하나된 몸을 이룬 신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섬기는 신자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공적 모임을 가지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는 공적 예배 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곧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롬 12:1-2). 교회는 어디에도 건물과 장소의 개념이 없습니다. 단지 예배 모임의 필요로 가질 뿐이죠. 이것은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될 수 있는 대로는 필요 이상으로의 땅과 건물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 의한 헌신을 내세워 참으로 가난한 신자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도록 요구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는 이것이 실은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성경은 약자보호법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출 22:21-27)
나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필요를 가지고서 온 교우들이 그에 대한 인식 속에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자 하는데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 예배당을 성전 건축의 개념을 갖는 것에 대해서 그 비성경적인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또한 온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로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자의적이며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여서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로 이용함으로서 신자들에게 건축헌금을 내도록 하게 하는 비성경적이요 비신앙적인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첫댓글 목사님 마가복음 14장 3-9절이 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부탁합니다. 목사님을 찾아 뵙고 싶습니다. 그날을 기대해봅니다. 목사님 주 안에서 평안하세요. 대구에서
저도 님과 복음의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을 주께 구합니다. 그러한 기회와 여건이 님에게 먼저 주어지면 언제라도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말하면 저희 교회에선 은헤없는자로 나아가 이단으로 낙인찍힙니다. 현 교회의 현실이고요.....기도해야겠죠. 주신말씀 가슴에 세기겠습니다. 목사님 꼭 연락드릴께요.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