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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
그 날 누룽지의 기쁨과 슬픔 뜯어먹던 내 마음 세상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약력
2005년 '열린시학' 신인상.
시집 '길 위에 네가 있었다'.
[맛있는 시] 둥근 길
나무는 자신의 몸속에 둥근 나이를 숨기고 산다
나이테가 둥근 것은 시간이 둥글기 때문이다
시간이 둥근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 둥글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직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둥근 길이다
둥글게 걷다보면 어디선가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엄지손가락에 나무의 나이테 같은
우리가 걸어갈 그 길을 숨겨 놓은 것이다.
-정일근,'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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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내부 속에 고스란히 깃든 '나무''나이테''시간''세상''인연''길' 같은 말들의 풍경은 차분한 진술에 기대면서 조금씩 의미 공간을 구비해 나아간다. 그 가운데 먼저 시인의 투명한 시선에 불려나온 나무는 '우리가 걸어온 그 길'을 재는 지상의 척도로서 깊은 정서적 파장을 일으킨다. 좁은 행간 속에서 비쳐 나오는 '둥근 길'은 은밀히 화자의 심미적 감각에 맞닿아 있다. 이 서정적인 내면의 길은 빨라도 느린 길이고,추워도 따뜻한 길이며,굽으면서도 바른 길로 끝없이 이어진다. 임종성·시인
[시가있는아침] '쌀'
'쌀'- 정일근(1958~ )
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쌀이 열리는 쌀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
농사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
쌀 한 톨 제 살점 같이 귀중히 여겨 온 줄 알지 못하고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이라는 비밀 까마득히 모른 채
서울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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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나가기 전 아버지가 한 공기의 뜨거운 흰밥을 드시던 모습을 간혹 떠올린다. 그 '밥심'의 생생한 모습을 괴춤에서 꺼낸다. 그러면 삶이 뜨거워진다. '쌀'과 '소'가 그다지 귀한 것이 못 되는 세상이다. 빛의 속도로 바뀌는 시대라지만, 고을고을에서 평생 '쌀'과 '소'를 기둥으로 여겨 살아온 우리네 농심은 어쩔 것인가. 우리의 정신에도 사투리가 필요하다.
ㅡ문태준 시인
[중앙일보] ‘이 시대의 변죽’
- 배한봉(1962∼ )
변죽을 아시는지요
그릇 따위의 가장자리, 사람으로 치면
저 변방의 농군이나 서생들
변죽 울리지 말라고 걸핏하면 무시하던
그 변죽을 이제 울려야겠군요
변죽 있으므로 복판도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려줘야겠군요
그 중심도 실은 그릇의 일부
변죽 없는 그릇은 이미 그릇이 아니지요
당신, 아시는지요
당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변죽,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하는
변죽,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변죽, 삼거웃 없는 마음을
중심에 두고 싶은,
변죽을 쳐도 울지 않는 복판을 가진
이 시대의 슬프고 아픈 변죽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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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를, 언저리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생겨났을까. 고약하다. 위와 아래가, 속과 겉이, 처음과 나중이, 다수와 소수가, 저택과 쪽방촌이, 어쩌다 이처럼 아니 볼 듯 갈라서게 되었을까. 양극(兩極)에 달하게 되었을까. 변죽이 없었으면 복판이 되지도 못했을 사람아, 이 시인의 뼈아픈 충고를 귀담아 들으시라.ㅡ 문태준 시인
"[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진명 ‘풀은 별이에요’"
하늘에만 별이 있을까요
새파랗게 풀 돋아오릅니다
처음에 어린 풀
총총 검은 땅에 박힙니다
마른 땅에 쏟아집니다
떨립니다 열립니다 일어섭니다
하늘에만 별이 흔들릴까요
새파랗게 풀 흔들립니다
큰 별 작은 별 물결칩니다
빛 부서집니다 흘러갑니다
하늘에만 별이 영원할까요
풀은 발 아래 영원한 별
죽어도 다시 사는 초록의 별입니다
초록의 반지, 약속의 노래입니다
풀 하나 나 하나
풀 둘 나 둘
- 시집 ‘단 한 사람’(열림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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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별이라 호명하시니 좋아라. 풀밭에 놓인 저 염소들도 별을 밟으며, 별을 먹으며, 별을 싸며 매에매에―. 아장아장 맨발로 걸어 나간 아가도 별을 디디며 별을 뜯으며 별밭에 넘어지며 까르르―. 풀을 별이라시니 닝닝닝 풀꽃을 수분시키는 꿀벌도 별, 나비도 별, 찌르레기도 별인 걸 알겠어요. 검은 땅 열고 일어서는 모든 희망은 다 별이고말고요. 손도 닿지 않는 한 점 별빛만으로도 저 별이 별이라면, 손등이 부딪는 우리들은 얼마나 별인가요.
ㅡ시인 반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