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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놓치면 아니되옵니다.
3월 29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원균(元均)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전략...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舟師)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長藪浦) 등처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날마다 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부산포(釜山浦)에서 병위를 드날려 보인다면 회복의 계책이 거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버티며 날짜만 보낸다면 한 해를 넘어서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년에 더욱 심하고, 그 다음해는 더더욱 심할 것인데 군사가 쇠잔하고 군량이 고갈된 뒤에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병력을 움직이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신(愚臣)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陸戰)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
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그리고 행장(行長)·요시라(要時羅) 등이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朝廷)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선조실록 권87 선조30년4월 을묘조
한남지맥에서 쌍령산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안성 천덕산으로 달려와 양성 고성산, 원곡 덕암산 월곡동 백운산등의 산줄기들로 늘어진다. 이 산줄기가 쌍령지맥이다. 덕암산은 다시 부락산으로 이어지고 길게 늘어진 구릉은 숫고개를 만들고 이윽고 황구지천에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산세의 높이는 채 200m가 되지 못하는데 이곳저곳에 좋은 혈자리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중 한곳이 덕암산 자락의 원균묘소이다. 이곳은 원주원씨 600년 집성마을로 상리와 안골 그리고 하리인데 원균묘소와 모선재가 있는 마을은 안골이다. 안골을 중심으로 하리, 상리에 원균의 생가터는 물론이고 전통적 무신(武臣)집안의 내력답게 관련지명들이 남아있다. 대마(待馬)거리, 투구봉, 숫돌고개, 갓골과 같은 자연지명이 그러하고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말과 관련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커다란 저수지가 묘지아래 자리를 틀고 있어 마치 묘지를 위한 연지(蓮池) 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농업용수를 가두는 곳이다. 바로 위로 큰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원균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시신이 들지 않은 허묘이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한 이후 고성 쪽 육지로 나갔다가 전사했는데 그의 애마가 갑옷을 물고와 그것을 묻었다고 한다. 묘지 아래 작은 애마총은 그 말을 기리기 위해 만든 말무덤이다.
위에 실록은 칠천량해전이 있기 전 4개월 전 원균이 올린 상소문이다. 원균은 장마가 오기 전에 육지와 바다에서 합동작전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정은 간첩 요시라의 말을 믿고 해전만을 고집하며 원균을 몰아 부친다. 이로 인해서 원균은 권율에게 태형을 받는 등 고초를 치룬다. 결국 7월 부산포로 진격했다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칠천량으로 후퇴해 해전을 치루게 된다. 해전 최초의 참패. 배설이 이끄는 12척의 전함이 무사히 후퇴했을 뿐이다.
원균은 현재 들어 평가가 많은 인물이다. 그동안 이순신장군의 성웅화에 대한 피해자라는 입장은 그를 최소한 용장 내지는 맹장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존의 사가들은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당한 졸장이며 자신의 출세에 매몰된 남루한 인간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순신장군의 성웅화의 피해자라는 입장은 위에 열거한 선조실록을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많다.
묘지 옆 재실쪽으로 내려서 민가 벽에 그려진 벽화에서 보듯이 그의 병법적 고려가 옳은 것이라는 전란 후 평가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마 그가 선무1등공신이 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정치에서 균형잡기가 주요 원인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뒤 바침 한 것이 을묘년의 상소일 것이다.
덕암산 자락이 품고 있는 사자의 유택들은 이곳 원주원씨 문중묘들 뿐만아니라 수성최씨 평택 입향조인 최경의 묘가 있다. 최경은 한갓 염부의 자식으로 그림을 잘 그려 출세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후손인 최유림이 산너머 부락산 자락에 묻혀있고 그의 사우가 오좌동에 있다.
이곳 도일리 일원은 석씨가 천년을 살고 소씨가 천년을 살고 원씨가 천년을 살고 있다는 땅이다. 석씨의 흔적은 알 수 없으나 진주소씨는 덕암산 자락을 식읍으로 받아 이곳에 정착 했다고 한다. 원씨는 이곳 입향조인 원몽이 처가인 진주소씨 세거지로 옮겨오면서 누대로 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릉군의 묘소는 덕암산이 주맥을 부락산으로 넘겨주고 작은 맥을 남쪽으로 구부려 떨어뜨린 곳의 끝부분에 있다. 옛 사람들은 이런 자리를 혈穴자리라고 했다. 묘소를 한 바퀴 돌아보면 명당 자리란게 무엇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평택에 많은 명당이 자리하지만 실제로 원릉군의 묘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가 있다. 물론 그것이 현대에 와서 무의미한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후손들로서는 가문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인물의 묘소가 그런 기가 발산된다고 하면 그만한 영광이 없으리라.
초라하지만 무덤 발치께에 봉긋이 솟은 묘가 애마총이다. 주인 잃은 말이 주인의 갑옷을 물고 왔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전란동안 피폐해진 사회를 복구해야만 한다. 이때는 반드시 그만한 정당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요즘 같으면 애국심이라고 하는걸 끄집어 내겠지만 봉건시대 일반 백성에겐 그보다 설득력 있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효과적일 수 있다. 이때 나타나는 이야기가 이런 부류의 이야기다.
묘를 내려와 재실 쪽으로 능말 이라는 민가가 몇 호 있는데 그 담벼락에 원균의 모습과 “때를 놓지만 아니 되옵니다”란 글이 새겨져 있다. 아직도 우물이 남아있는데 묘지조성시기보다 먼저 있었던 마을인 듯싶다. 뒤로 오르면 최경의 묘소와 몇 기의 수성최씨집안 묘지들이 있다. 맞은편으로 안골마을 회관 앞의 원주원씨 입향조인 원몽과 후손들이 잠들어 있는 문중묘지 또한 도란도란 모여 있다.
세상사란 것이 하나를 살리면 반드시 하나가 죽어야하는 인심이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원균은 충신 이순신에 대한 역적 원균으로 묘사된 인심이었다. 객관적으로 당시를 설정하고 거기에 두 사람의 생각과 실천을 가감 없이 평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은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서 어떻게 기록하고 해석하고 전달하느냐에 달려있다.
능말 끝에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원균장군이 태어난 집터가 있으나 지금은 밭으로 쓰이고 있다. 차분하고 오래된 집들을 보며 걷다보면 안말 끝부분에 콩나물 샘이 있다. 이 샘은 덕암산 너머 산하리에서 콩나물을 씻다 흘리면 이 샘에서 흘린 콩나물이 떠오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석하긴 애매하지만 아마도 산하리에서 도일리로 삶터를 옮겼던 기억의 조각이 아닐까싶다.
바로 앞으로 내려서면 울음밭인데 울음밭 유래비석이 서있다. 원균장군의 애마가 사흘동안 울다가 죽었다는 곳이다. 만들어낸 이야이기 일 것이다. 원균의 죽음을 조정에 보고한 것은 같이 탈출하다가 살아남은 선전관 김식에 의해서였다. 일설에 의하면 지금 거제도에 “웡규니묘”라고하는게 전해진다고 한다.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진 “웡규니묘”를 확인해 봐야 한다. 하지만 “웡규니묘”가 육지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도망치다가 잡혀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중에서 달가와 하지 않을 만한 일이다.
참나무가 우거진 덕암산 줄기에 옹기종기 붙어 앉은 마을이 정겹고 새로 터를 닥아 전원마을이 들어섰다. 옛 마을과 전원마을이 그답지 않게 어울려 안골이라는 마을을 여유롭게 하는 듯하다.
죽은 자들의 공간이 되어버린 참나무 산길을 따라가다가 상리 오르는 길을 만나면 바로 원연의 ‘양대충효정문’이 외롭게 길손을 맞는다. 혹자는 원균보다 원연이 더 부각되어야 할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원연은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아들인 원사립보다 한 단계 낮은 등급이다. 공식적으로 선무일등공신 책록을 받은 원균의 후손들이 은덕을 크게 입었을 것이며 더 번창했을 것이다. 당연히 입지가 강한 쪽은 원균장군 후손들일 것이다.
원연은 원균의 4촌 동생이다. 원연은 아들 원사립과 더불어 원씨집안 장수들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곳에 원문에서 임란이후 공신에 오른 자가 원균의 아들 원사웅을 포함해 무려 13인이나 된다. 국난을 맞아 분연히 일어나 싸운 기억들은 후손에게 자랑이며 새로운 힘이 될 수도 있다.
원균 길을 돌아보며 원균은 늘 부정적으로 이순신은 긍정적으로 그려진 이유를 생각해봤다. 문제는 기록이었다. 자신을 변호하는 기록을 원균은 남기질 않았다. 행장록은 후세에 의해 만들어 진 기록이다. 반면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겼다. 일기를 남긴 이순신이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순신이 지장의 모습이라면 원균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혹자들이 말하는 맹장일까. 용장일까.
하여튼
리더는 조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토대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시대가 다르다고 하지만 원균장군은 리더로서의 자격을 지녔는가 하면 박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리더의 역할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의 이동에 따라 변해야하고 시세에 따라 적응해야 하는 것이 리더 처럼 보인다. 충분한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 보다는 곡학아세가 판을 친다. 리더는 조직의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리더가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칠천량해전과 같은 비극의 결과물이 어디서든 나올 수 있다. 원균과 칠천량해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시대가 또 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귀여재님의 글을 읽다보니 문득
김인호교수님이 쓴 「원균평전 타는 바다 」한권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60년 가까이 무인의 길을 걸었던 그의 생애가 몇몇 장면들의 이미지로 요약되고
읽히게 된다는 것 또한 새삼스레
느끼게 됩니다.
원균길을 걸으며 그의 생애를 되짚어 내 답사이야기를 엮어내신
귀여재님께 감사드립니다.